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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 제 2 강 메시지_아산UBF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말씀 / 베드로전서 4:1~19
요절 / 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 사람들은 서기 64년부터 305년까지 기독교를 박해하였던 로마 황제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더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짐승의 먹이로 던졌습니다. 네로는 사자에게 던지기도 하였고 산 채로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시므온, 유스티누스, 폴리카푸스, 파비아누스, 오리게네스, 치프리안, 로렌스, 알바노 이름없는 많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오늘날 20대의 주류는 기독교를 거부합니다. 한국 10대들은 미전도종족 수준으로 기독교인이 적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좋아합니다. 청년들은 재미를 추구하며 수고하는 것 고난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베드로전서 말씀으로 고난의 시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해 좋은 방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우리의 관점과 자세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섬기시느라 고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같은 마음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갑옷은 영적 무장으로써 고난에 대한 준비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겠다는 마음, 고난을 잘 참아야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시니까 고난 받으신 것이지 우리까지 그런 고난을 받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 받으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 집니다. 고난 받는 유익의 가장 큰 점은 죄를 단절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 지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지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집니다. 죄가 있으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을 때, 성령의 함께 하심, 성령의 강력한 위로, 성령의 권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 짓는 자는 오신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으면 이런 죄를 청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 스스로 청산하지 못하는 죄를 청산하게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예수님 알기 전에는 마음의 원하는 바와 세상풍조대로 삽니다. 마음의 원하는 바는 자기 중심이며 정욕중심이며 개인의 욕망 중심입니다. 고난은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합니다. 고난은 예수 믿은 자의 남은 인생을 거룩하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의 분명한 목적을 부여해 줍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음란과 정욕은 성적 타락입니다. 술취함과 방탕은 절제 없는 생활입니다. 향락은 쾌락 중심의 삶이며 무법한 우상 숭배는 영적 타락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 판단에 좋은 것, 우리 생각에 옳다는 것이면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삽니다. 이렇게 사니까 세상이 미워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로마 사람들이 로마에서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이익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도미티아누스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법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주로 믿고나서 사람인 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익중심, 자기유익중심의 삶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세상은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미워합니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 이름 중심, 예수님 말씀 중심, 예수님 사명 중심으로 살면 비방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세상의 비방을 겪으며 예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위축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을 비방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날, 그 앞에 자기들이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을 비방하고 핍박한 것을 사실대로 다 고해야 하는 날을 맞습니다. 비방하던 자들은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 져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헌신하기 싫어하고 주님 위하여 희생하기 싫어하였던 숨은 동기까지 다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을 말로 이길 수 있어도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판단에서는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전에 삶을 마친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며 지금 고난 당하는 성도들은 당연히 이런 정죄와 판단의 날을 피하기 위하여 고난을 참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 제자들이 고난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고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은 영적 성숙과 정화의 과정입니다. 가치관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갈등을 초래합니다. 현재의 고난받지만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의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7절부터 11절까지는 말세를 사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세의 마지막이라 합니다.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끝이 가까이 왔습니다. 세상에 주어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는 시작으로부터 아주 많이 지나 와 있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긴박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7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말세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이것입니다. ‘정신 차리는 것’은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근신하는 것’은 절제된 생활을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지속적 교제입니다.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영적 태도로써 말세를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죄를 거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환영합니다. 절제없는 욕망과 방탕이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싫어하고 세상의 거짓 사상과 소리, 거짓선지자들의 목소리 듣기를 좋아합니다. 깨어 있는 것은 죄의 잠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생활은 이기심, 공명심, 명예욕, 정욕, 물질욕에 대하여 마음을 내주지 않고자 경계하고 긴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기도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관심합니다. 말세에 예수님의 교회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어두운 세상을 비출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하는 최우선 순위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내 스타일에 맞는 사람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적당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과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해야하는 중대사명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것은 사랑이 용서와 포용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 사랑한다 하면서 연약해진 사람을 보면 ‘실망이다’ ‘다시 보인다’ 정죄합니다.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한다 해놓고는 이웃이 실패하였을 때, 실수하였을 때, 실례를 범하였을 때 무시하고 화 낸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의 가까운 곳에서 우선 이루어져야 하며, 나의 가까운 곳은 서로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잘 아는 사람부터 용서하고 덮어주고 참아주고 아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까운 사람놔두고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을 선망하고 선대하는 사람은 사랑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는 것”은 친절과 환대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원망 없이 하는 것은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영하고 영접하고 섬겨주고 대접하기를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여야 합니다. 말세에 사랑이 없고 각박하고 인색한 때에 환대와 친절과 섬김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냅니다. 대접하는 마음에 기쁨이 샘솟게 합니다. 이런 대접하는 마음과 섬김의 실천이 개인과 공동체로 하여금 딱딱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세를 안심하고 따뜻하게 지날 수 있게 합니다.
10, 11절을 보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각자 은사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은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섬기고 봉사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 말세에는 영적인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 주의 말씀, 주의 영광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발휘하고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봉사가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데 쓰임받아야 합니다. 은사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분부하셨는지 공부하고 익히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치리의 은사가 있으면 치리하는 일을 잘하여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돌보고 들어주는 은사가 있으면 잠재워두지 말고 열심히 잘 들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이런 섬김과 봉사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일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희미한 말세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이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말세를 살아가는 자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공동체 생활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마다 받은 은사는 책임감 있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모든 봉사와 섬김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 고난의 시대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힘든 고난, 연속적인 고난을 겪다보면 회의감에 빠져듭니다. 고난을 강하게 거부하고 싶어지며 고난으로 인한 우울감이 커집니다. 고난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고난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정화되는 것을 알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고난없는 구원의 확신은 타인의 인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 쉽고 구원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오만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럴 때 그리스도 교회는 호감을 잃고 확장성을 상실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때에 믿음이 정화되었고 정화된 믿음으로 인하여 질적 성장과 양적 확장이 일어납니다.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가장 큰 의미는 고난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여러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 고난의 큰 가치입니다. 영적인 성숙, 인격의 성숙, 신앙인의 실제 생활에서의 성숙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250여 년의 핍박의 내용이 어떠한지 들어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어떻게 감당하였는지 부분적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오늘은 초대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정리하여 소개해 봅니다.
첫째, 신학과 교리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박해상황에서 신앙을 정립하고 당국자들 앞과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변증하였습니다. 기독교 리더이며 순교자들은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고난받으며 남긴 변증과 신앙고백이 신학과 교리가 되었습니다.
둘째, 선교와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성도들이 각지로 퍼져나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전세계적인 선교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담대한 신앙이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임팩트 강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말대로 고난과 핍박 받는 동안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양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셋째, 교회 조직이 체계화되고 결속력이 강화되었습니다. 박해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회 조직을 체계화하였습니다. 지하교회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회간 연대를 강화하였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의 리더십이 세워지고 역할이 분명해졌습니다. 장로, 집사, 감독 제도가 이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넷째, 예배가 정립되고 기독교 문화가 발전하였습니다. 지하 카타콤에서 성도들의 영성을 세우고자 예배가 정립되었고 독특한 기독교 예술과 문화와 전통이 세워지고 발전하였습니다.
다섯째,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이 확증되었습니다. 박해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고난 중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여섯째, 신앙의 순수성과 헌신이 강화되었습니다. 박해를 통하여 명목상의 신자들이 떠났습니다. 진정한 신앙인들만 남게 되어 교회의 영적 순수성이 높아졌습니다. 순교를 각오하는 신앙고백이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 헌신도를 강화시켰습니다. 고난 중에 더욱 기도와 말씀 묵상이 깊어져 영적인 성숙이 더 높아졌습니다.
극진한 사랑과 교제, 예배, 교회행정, 신학, 교리, 선교 기독교의 대표적인 내용과 모든 좋은 것들이 고난 시기에 세워지고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초, 기독교의 모든 좋은 것들은 핍박과 고난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이 교회에 이런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유익을 주었는데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고난을 견딘 각 개인들에게 세상 종말에 이루어지는 가장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 고난을 견딘 가장 큰 보상을 받는 날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 번 언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좋은 점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20대 때, 결단을 합니다. 30대 때 연단을 받습니다. 주님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할 때, 비웃는 사람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도 있었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 중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의 비위 맞추고 하나님께 영광 얻기를 바라기 보다 모임 안에서 위로와 도움 얻고자 실속 챙겨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위로받을 때 옆에서 바보 되는 느낌, 억울한 느낌이 컸지요. 30대에 연단받을 때 마음 놓고 비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마음껏 비웃고 깔보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하더군요. 40대가 되니 하나님께서 반전을 주셨습니다. 50대가 되니 비웃던 사람들 깔보던 사람들 비판하고 비방하던 사람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겁니다. 직장 문제 실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때가 왔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없어요. 부끄럽고 괴로운 것이지요. 20대인 여러분, 지금 고난이 있습니까? 즐거워 하십시오. 20대 청년인 여러분에게 지금 괴로움이 있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영광있고 열매 있는 40대와 50대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0대인 목자님들 중에 지금 고난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30대인 목자님들에게 지금 아픔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십시오. 조금만 더 참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님을 주로 믿고 시인하는 것 때문에 고난 당한다면 그것은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런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영광의 영, 거룩한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며 위로와 능력을 주십니다.
15,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도덕성을 상실하거나 나라와 사회의 규칙이나 법을 지키지 않아 자업자득으로 고생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눈치 없어서 욕먹고 배려심 없어서 비호감 되는 것은 생활이 자기중심적이며 부끄러운 어릴적 습관을 청산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라 그런 고난은 영적으로 큰 가치가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오는 고난과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차별성이 있습니다. 죄 짓지 않고 자기중심을 극복하며 사는데 단지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가치가 큰 고난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고난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하나님의 집은 교회와 성도들을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심판은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정화적 심판이라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화의 과정으로 주어지는 연단을 말합니다. 이런 정화를 위한 고난은 꼭 필요한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주의 제자들은 고난이 필연이라는 것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이런 정화적 고난을 겪고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지도 못한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고난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두신 목적이 있음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낙심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는 일, 믿음으로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일을 지속하여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신뢰하는 일이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더불어서 고난의 성격을 올바로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은 영적 성숙과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선행과 신뢰를 지속하여야 합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박해 상황에서 준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장래 방향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가 실속 차리고 있는데,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고자 결단하고 그로 인하여 친구들로부터 비난 받는 형제들이 있는 줄 압니다. 목자로 살고 양들 위하여 희생하였는데 속 상한 일이 많고 괴로운 일이 많은 목자님들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런 고난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위대한 요셉과 같이 위대한 다윗과 같이 귀하게 쓰시고자 작정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잘 참되 감사하며 찬양하며 참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40대, 50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과 열매가 있습니다. 그보다 가장 큰 보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십니다. 무서운 최후의 심판날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서지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주 예수님과 함께 하며 우리에게 준비해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 영광과 상급이 가장 큰 보상입니다. 그 영광과 보상을 바라보며 지금과 앞으로 주시는 고난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잘 감당해 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아산UBF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