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성공한 정책인가?실패한 정책인가?“
조선 초기의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사림세력 집권 이후로는 정치에서 신하들이 목소리를 크게 할 수가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과의 정치회동이 자유로웠던 나라가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붕당정치가 공론을 중시하고 자유로운 언론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다수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는 것은 분명 조선 정치역사의 진보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당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붕당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발전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정치사에 붕당정치라는 말보다 당쟁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당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 편을 나누어 싸움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틀로 인하여 우리의 정치역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를 진행하는 동안에 서로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한 대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른 당색을 지닌 사람끼리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립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마치 이러한 대립 양상이 조선의 정치 역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규정지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하지만 조금만 우리네의 정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붕당정치라는 것이 편을 가리어 싸움만을 지속시키는 정치형태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신하들의 의견 조율이 이루어진 붕당정치가 존재했던 것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정치가 당시에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조선 초기가 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기틀이 형성되는 시기였다면 사림 세력이 등장하는 조선 중기는 붕당 정치가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럼에 조선의 붕당정치라는 것은 상당히 개방된 정치형태였고, 오히려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된 세도정치 시기야말로 폐쇄적 상태로 인하여 정치발전의 지체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붕당정치를 알아 가면서 느낀 것이 인간이 사는 모습은 과거나 현재나 그 모습이 무척 닮아 있다는 것이다.
<탕평>은 서경의“홍범주구”편의 황극에 ‘편이 없고 당이 없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어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어느 한 곳에 치우지지 않는 공정한 정치를 표현한 말이다. 탕평론의 본질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함에 있었다. 정치적 균형 관계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각 붕당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권에 의해 타율적으로 중재되어야 했다. 따라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탕평론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숙종에 의해서였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숙종은 그 해결책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군왕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절의와 덕행을 숭상하면서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한다면,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영조는 노론이 자신을 추대한 것을 잊지 않고, 신임옥사 관련자들, 노론 4대신의 사면 복권과 그 후손, 관련자들을 등용하고, 1748년 이인좌의 난에 연좌되었던 소론 강경파, 남인 강경파는 다시 영조를 자극하는 괘서를 붙이고.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가짜 군주라고 조롱하는 답안지가 발견되어 1748년, 1755년 소론 강경파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과 유배형을 내리는 사건인 을해옥사가 일어난다. 선의왕후가 죽고 그의 거처에서 성장한 차남 사도세자가 소론에게 호의를 보이자, 노론은 이를 경계했고 노론 강경파는 이를 영조에게 고해 바치는 등의 사건이 연속된다. 노론을 중용했지만 탕평책을 써서 소론 대신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다. 한편으로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하려 했고, 노론내에서도 벽파 나시파에 속하지 않고 성리학의 원칙과 현실 적용, 외척이나 즉위 공로자들과 거리를 둔 청명당파를 중용했다. 노론 청명당파는 노론 강경파나 노론 탕평파, 외척 세력과는 다른 이유, 다른 목적으로 노론이 진정한 군자의 정당이라는 확신 아래 소론과 남인을 추방, 배척할 것을 적극 수용했다. 동시에 외척 세력을 공격하고, 노론 강경파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는 노론 탕평파 역시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격을 가해도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거부하는 청명당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원칙론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을 중용했다. 즉 소론 온건파가 주도하는 가운데 노론 온건파가 참여하는 형태를 유지하였고, 쌍거호대의 인사정책 원칙을 천명하였으며, 산림을 조정에 등용하지 않은 것과, 이조전랑의 통정권 즉 문관 당하관 이하 관직에 대한 추천권을 폐지한 사실과, 붕당 간 대립의 요인이 되는 서원을 170여곳 정리한 것은 백성을 위하고 왕권을 수립하는 등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재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다.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로 자처하였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였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 탕평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 탕평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과 의리를 앞세운 준론 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 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영조에 의하여 처음 표방되고 정조에 의하여 계승된 탕평책은 노론과 소론을 비롯하여 남인과 북인의 네 붕당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결과로 붕당 간의 대립 항쟁은 비교적 잠잠하여지고 양반들 사이의이 균형이 이루어져서 왕권도 크게 신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동시에 성리학 지상주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기여하였다고 본다. 영조, 정조 시대의 정치적 안정은 그 결과였던 것이다.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과, 기존 정치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지만.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쉽지는 않았으라라 믿는다. 그러기에 성공한 정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반면에 양반 사이에는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런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보다는 개인의 이익만을 도모하려는 공리적인 경향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에는 옥에 티로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