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913 민영휘묘 민성기가옥 답사
* 2021년 09월13일(월)
13:30~15:30
* 오전 해설사 심화교육(일제강점기 춘천지역 사회상과 민영휘일가 - 김헌 학예연구사) 후 각자 중식.
* 춘문관 민영휘묘 민성기가옥 답사
□ 민영휘(閔泳徽)
출생-사망 1852 ~ 1935
본관 여흥. 초명은 영준(泳駿).
자 군팔(君八). 호 하정(河汀). 1877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이후 정계에 등장, 1884년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을 진압하였다.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使) ·주차일본판리공사(駐箚日本辨理公使) ·선혜아문당상(宣惠衙門堂上) ·친군경리사(親軍經理使)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군(淸軍)에게 지원을 요청, 그 진압에 힘썼다. 임오군란 때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헌병대사령관을 역임하였으며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의 자작(子爵)이 되고, 천일은행(天一銀行: 商業銀行前身)과 휘문학교(徽文學校)를 설립하였다.
(두산백과)
□ 춘천 민성기 가옥
춘천 민성기(閔聖基) 가옥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이 가옥은 명당자리에 있는 묘를 관리하기 위해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묘막패이다. 평면이 'ㄱ'자인 안채와 'ㄴ'자인 사랑채가 마주보게 배치되어 트인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축조하였으며 남향을 하고 있
는 대문간의 좌측에는 1칸의 방과 2칸의 광이 있고, 우측에는 수직되게 1칸의 부엌과 4칸의 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의 3칸에 걸쳐서는 툇간[건물에 덧달아 낸 칸(물림칸)]마루를 설치하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과 우측에서 이어진 담은 가옥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기단이 높으며 대청, 방, 부엌으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대청 전면에는 네짝 미서기문이 달려 있고 좌우에 접한 방 사이에는 접을 수 있는 세짝 붙박이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공간을 넓게 확장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는 가옥으로 묘소를 관리할 목적으로 건축되었다.
□ 휘문고(徽文高)와 풍문여고(豊文女高)]
휘문고(徽文高)는 설립女자 민영휘(閔泳徽)의 ‘徽'자를 따서, 풍문여고(豊文女高)는 민영휘의 두 번째 첩실인 순흥안씨 안유풍(安遺豊)의 ‘豊'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36년 안유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유훈'이라며 설립자금을 내서 초등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풍문여학교를 설립하면서 안유풍의 ‘풍자'를 따 풍문학원이라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의 갑부였던 민영휘는 정실부인인 ‘대방(大房)마마' 평산신씨 외에 해주마마 안유풍, 평양마마, 연당마마 등 여 러 명의 첩실을 두었다. 민영휘와 평산신씨 사이엔 자식이 없고, 안유풍과의 사이엔 대식 . 천식 . 규식의 세 아들이 있었다. 셋째 아들 민규식은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까지 오른 거물 친일파가 되었다.
(네이버 블로그)
□ 춘천-하정 민영휘 荷汀 閔泳徽, 초명 민영준閔泳駿, 춘천민성기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6호
□ 황고 사호 하정부군 신도비
(皇考 賜號 荷汀府君 神道碑)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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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장(壽藏)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 [유사어]생광(生壙). 생분(生墳). 수당(壽堂). 수실(壽室). 수역(壽域). 수총(壽冢). 수혈(壽穴).
□ 망주석(望柱石)
망주석(望柱石)은 석망주(石望柱) · 전죽석(錢竹石) · 망두석(望頭石) · 망주석표(望柱石表)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망주석은 중국의 화표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에서 처음 나타나 고려왕릉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능원(陵園) 뿐 아니라 사대부묘까지 세워졌다. 중국의 화표석이 묘역이나 신도의 입구에 세워져 묘역의 시작점을 알리는 기능을 하는 것과 달리, 조선왕릉의 망주석은 봉분 앞 석상 좌우에 2기가 세워져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망주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멀리서 묘역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한 표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조선왕릉의 망주석은 원수-주신, 대석-지대석의 2매의 석재로 구성되며, 대석에 주신부를 끼워 결구하는 형태이다. 지대석의 평면은 대개 사각형이며, 대석과 주신의 평면은 팔각형을 이룬다. 망주석에서 조각장식은 하단의 대석과 상단부에 치중되어 있으며, 조선왕릉 전 시기에 걸쳐 기본 형태의 변화 없이 대석과 주신의 비례나 대석에 새겨지는 문양을 중심으로 변화를 보인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면 왕릉 망주석은 1698년 추봉된 사릉(思陵)이나 1751년 홍릉(弘陵) 망주석에서 볼 수 있듯이 주신의 높이에 비해 대석의 높이가 낮은 불균형한 비례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대좌의 문양은 조선 초기부터 전반기 왕릉의 망주석에서 안상을 마련한 뒤 그 안에 문양을 배치하거나 문양을 생략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18세기 이후의 망주석은 대좌가 간략화되고 간소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영조 원릉(元陵) 망주석에서부터 인조 장릉(長陵)의 병풍석에 최초로 등장한 모란문이 대좌에 새겨지기 시작한다.
한편 왕릉 망주석의 주신 상단부에는 세호(細虎)라 불리는 작은 동물 형상이 고부조로 조각된다. 세호는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 형상은 호랑이와 닮지 않았다. 조선 초기 망주석의 세호는 마모가 심하고 다리사이에 공간이 있어 귀[耳]의 형태처럼 보이지만, 후기로 내려오면서 긴 꼬리와 갈기가 표현되는 등 장식성이 강한 형태로 조각된다. 세호가 상징하는 의미는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봉분을 기준으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이 지켜져 동측 망주석의 세호는 위쪽 방향으로, 서측망주석의 세호는 아래쪽 방향으로 새겨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디지털백과)
첫댓글 다양한 사진과
세세한 답사 기록
고맙습니다~^~
답사때마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주시는 김시억 선생님 고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