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는 여전히 여성이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였지만 과거의 인습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로
여류화가도 손꼽을 정도입니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적 여성이미지를 거부하고 화가로서,
문학가로서,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당당한 삶을 살아갔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의 주인공이기도 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란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그림에는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첫 그림은 마리 로랑생의 La Baiser(The Kiss)
1927 Oil on canvas 79 x 63 cm Anciennes
collections Somerset Maugham,
Villefranche-sur-Mer Sam Spiegel, New York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가보진 않았더라도
영화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센 강과 그 위에 놓인
미라보 다리의 이름은 알고 있으며 그 중에도
다음 시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가슴을 울리는 이 시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본명은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
초현실주의 시인, 1880∼1918)의 시집
〈알코올 Alcools〉(1913)에 실려 있습니다.
이 시를 쓴 아폴리네르도 그의 시가 유명한 만큼이나
험난한 인생 역정을 살았습니다.
그는 1880년 폴란드 귀족출신인
어머니 안젤리카 쿠스트로비츠카(Angelica Kustrowicka)와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로마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남프랑스로 이주하였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다가
19세 때에 파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출생의 비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기욤 아폴리네르였지만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무명의 피카소 등의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당시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시인들의 가난한 공동체이자
공동 작업실이었던 몽마르트의
‘세탁선’(Bateau Lavoir)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세탁선-비토 라브와르’는 원래 1860년대 피아노 공장이었는데
1900년경에는 건물이 이미 몰골이 되어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이용하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하다고 세탁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30여개의 아틀리에가 있었지만
수도꼭지와 화장실은 2층에 하나뿐이었습니다.
20세기 초 가장 유명한 창작 공간으로
반 동겐, 피카소, 후안 그리스,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피에르 르베르디
그리고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작업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기욤 아폴리네르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의 출생과
환경도 기욤 아폴리네르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 로랑생의 아버지는 파리의 세무감사관,
의원을 지낸 ‘알르레드 투레’라는 사람인데 이미 결혼을 하였으나
‘멜라니-폴린 로랑생’이라는 중산층 여성과
이중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유력한 사람의 ‘숨겨진 여자’로 살아가는 마리 로랑생의 어머니는
그 자신의 삶조차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버리고 비밀스럽게 살았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아버지에게 딸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그런 어머니의 절대적 영향을 받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마리의 어머니는 부인복을 짓는 양장과 자수를 하면서
투레의 지원을 받아 마리를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딸이 교사가 되어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마리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자하였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무참하게 그런 재능조차 없다고
반대하며 마음을 상처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 로랑생은 유명한
예술계 고등학교인 리세 라마르탱(Lycee Lamartine)에 들어갔지만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 국영 도자기 회사인 세브르(Sèvres)에서
포슬린 페인팅(porcelain painting,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공예)을
배우며 그곳에서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자신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욍베르 아카데미(Académie Humbert)’로 옮겨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에는 ‘세탁선’에 소개되어 '피카소', '막스 자코브' 등
당시 전위적 화가와 시인들과 만나게 되었고 1907년에 비록
작은 화랑이긴 하지만 첫 개인전도 열게 되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은 1907년 로랑생의
개인전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27살의 젊은 시인과 24살의 재기발랄한
여류 화가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11년까지 이 둘은 열렬히 사랑하였으며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며 특히 기욤 아폴리네르의 이 시기 많은 작품들은
마리 로랑생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와 같은 시들입니다.
선물 - 아폴리네르가 마리 로랑생에게 바친 시.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아침, 그토록 상쾌한 아침과
당신이 좋아하는
빛나는 내 머리칼과
푸르고 금빛 나는 내 눈을.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나 그대에게 드리렵니다.
따스한 햇살 비추는 곳에서
눈뜰 때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분수에서 들리는
흐르는 물줄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마침내 찾아들 석양 노을과
쓸쓸한 내 마음으로 얼룩진 저녁,
조그만 내 손과
당신 가까이에
놓아두고 싶은
나의 마음을.
Marie Laurencin, Groupe d'artistes, 1908((G
roup of Artists, 마리 로랑생의 예술가들)
Oil on canvas, Baltimore Museum of art /
A portrait of Guillaume Apollinaire, Pablo Picasso,
Fernande Olivier, Marie Laurencin, and Picasso's
dog Fricka(한가운데가 아폴리네르,
붉은 꽃을 들고 있는 여성이 로랑생, 왼쪽은 피카소,
오른쪽 구석의 여성은 피카소의 애인 페르단도 올리비에)으로
그녀의 그림 중에 남성이 등장하는 그림입니다.
Henri Rousseau(Aka Douanier Rousseau),
La muse insipirant le poète, 1909
(portrait de Marie Laurencin et Guillaume Apollinaire)
Oil on canvas 146 x 97cm Kunstmuseum Basel, Switzerland
앙리 루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1909"라는 작품으로
그림의 주인공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인 마리 로랑생과 시인 아폴리네르입니다.
아폴리네르가 가난한 화가 앙리 루소를 돕기 위해,
또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루소에게 그림을 주문하고
5만 프랑을 지급했다고도 하기도 하고 3백 프랑을 주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미술사적 입장에서 보면 루소의 원숙기 작품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이들의 사랑은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둘 다 어려운 처지에서 자란데다가 서로 개성이 강하였다고 합니다.
아폴리네르가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을 감추려고
한 반면에 마리 로랑생은 오히려 당당 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1911년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모나리자'가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루브르 미술관은
일주일 동안 문을 닫고 수사를 했습니다.
평소에 루브르 미술관이 불타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던
아폴리네르와 그와 어울리던 화가 피카소가 의심을 받고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풀려나긴 했지만 사건은
그 후로도 2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1913년에야 범인은 루브르 미술관 직원이었던
이탈리아인 ‘빈센조 페루지아’로 밝혀졌고
‘모나리자’는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범인이 '모나리자'를 우피치 미술관에 팔려고
교섭하다가 붙잡혀 누명이 풀린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2년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은 헤어졌습니다.
제일 먼저 소개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라는 시는
아폴리네르가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 후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썼다고 합니다.
이 시와 이 시에 가락을 붙인 샹송으로 센 강과 미라보 다리는
지금도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세계 연인들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두 예술가의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들은 이 시기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폴리네르의 작품의 대부분인 소설
《썩어가는 요술사(妖術師)》(1909),
《이교(異敎)의 교조(敎祖)와 그의 일파》(1910),
《학살당한 시인》(1916), 시집 《동물시집 Le Bestiaire》(1911),
《알콜 Alcools》(1913) 등이 이 시기에 나왔고,
마리 로랑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작품들도 이 그만큼
그들의 만남이 그들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시기 마리 로랑생의 대표작들입니다.
Artemis 1908 Oil on canvas pasted on cardboard,
35.5x27 cm State Museum of New Western Art, Moscow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토의 딸로,
올림포스 12신의 하나이며 사냥·다산(多産)·순결·달의 여신입니다.
로마 신화의 디아나(Diana)에 해당합니다.
Bacchante 1911 Oil on canvas pasted on cardboard,
32.7x41 cm State Museum of New Western Art, Moscow
역시 신화속의 인물로 바커스 신의 여사제(女司祭)입니다.
Women in the woods, 1913
로랑생과 이별한 후에 아폴리네르는
또 다른 여인들을 만났고 또 그녀들을 위한 시를 썼습니다.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그 해에 다른 아픔을 당했습니다.
화가가 되는 것은 반대했지만 유일한 가족이자 후원자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로랑생은 1914년에 만난 지 1년도 안된 독일 남작
‘오토 폰 바트겐’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그녀에게 엄청난 아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모국인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을 하게 되어
그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기간 동안 유랑자가 되어 유럽을 떠돌다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조국 프랑스와 남편 나라인 독일에서
떨어져 지냈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조국 프랑스가
적대국의 귀족과 결혼한 그녀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로랑생은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병 소위로 입대하여 평생 원하던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였으나
1916년에 머리에 파편을 맞아 후송되어 제대를 하였지만
두 번이나 수술을 해야 했고,
1918년 허약한 상태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폴리네르의 부고를 들은 마리 로랑생은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외로운 여자/마리 로랑생
오! 당신은 알기를 원하십니까?
권태보다
그리고 슬픔보다도
왜 불행이 더 나쁜 지를…
하지만 불행보다
더 나쁜 것은 아픔입니다.
오! 당신은 알기를 원하십니까?
왜 아픔보다 버려짐이 더 나쁜 지를…
하지만 버려짐보다도 더 나쁜 것은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 당신은 알기를 원하십니까?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을…
그것은 바로 유랑생활입니다.
하지만 유랑생활보다도 불행한 것은
죽음이랍니다.
그렇지만 죽음보다도 더 불행한 것은
바로 잊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시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래야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조국 프랑스로부터 귀국허가를 받은 것은
1920년 서른일곱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이듬 해 독일인 남편과 헤어졌습니다.
1920년대 파리에서 마리 로랑생은 명사로 다른 남자들도 사귀고
동성애자로도 알려졌으나 아폴리네르와의
사랑만큼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녀가 말긴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는
말처럼 1920년 이후 만난 남성과 여성들은 어쩌면 열정이라기보다는
모두 지나치는 인연이나 그림을 위한 과정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로랑생은 1920년 로마의 개인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1920년대 파리의 유명인사로 활약하였고 화풍에도 많은 변화를 보입니다.
그녀의 1920년 이전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
야수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유사한 화풍이 많습니다.
이런 그녀를 화가 장 꼭또(Jean Conteau)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의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이라고 했고
조각가 오귀스뜨 로댕은 '야수파의 소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 그녀의 그림들은 화사하고
관능미를 지닌 여성들, 그중에서도 ‘행복한 소녀들’,
‘꿈꾸는 듯한 소녀상’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피카소 등의 입체파(큐비즘, Cubism)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대상을 감각적이며
유연하게 표현하고 연분홍의 파스텔 톤과 담홍 ·담청 ·회백색의
유려하고 투명한 색채배합을 한
그녀만의 그림을 완성한 화가로 평가합니다.
시인 앙드레 살몽은 그런 그녀를 "새로움을 창조한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이런 경향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로랑생은 또한 양탄자와 벽지의 무늬를 고안하고 석판화,
책의 삽화,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도전하고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1942년에는 『밤의 수첩』(Carnet des nuits, 1942)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문학에 대한 열정도 과시합니다.
이 시기 주요 작품들입니다
Bouquet, 1922
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
Oil on canvas 92.0 x 73.0cm Musée de l'Orangerie, Paris
화가인 마리 로랑생과 주인공인 코코 샤넬은 1883년에
둘 다 태어났고 비슷한 환경을 지녔으며 미술과 패션에서
대단한 활약상을 보였습니다.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여류화가와 패션 혁명가의 만남이
이 한 점의 그림 속에 보입니다.
Valentine, 1924
Mother and child, 1928
Blue Ribbon, 1938
Jeune fille au chapeau Colored pencil 34 x 24.5 cm
Two young girls in a landscape
Feme a la Mantille
Fish
Jeune femme au chapeau
Jeune fille au chapeau Colored pencil 34 x 24.5 cm
L'implorante Colored pencil 18 x 14.5 cm
Woman with a dog
Young girl with a dove 17.8 x 26 cm
Juene fille aux trios 1955
마리 로랑생은 죽기 2년 전 그녀의 하녀가 낳은
사생아 ‘스잔 모로’를 입양하여 마지막으로
가족을 이루기도 합니다.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던 외로움의 문제를
그렇게나마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Marie Laurencin photographed by Carl Van Vechten,
1949-1956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노력하고
스스로에게 재능이 있기를 바랐던 마리 로랑생은 평소
그녀가 바라던 것처럼 ‘하얀 옷을 입고 한손에는 빨간
장미를 들고 가슴에는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안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에 있는
아폴리네르의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혔습니다.
마리 로랑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Flora Groult가
쓴 전기 "마리 로랑생, 사랑에 운명을
걸고"(강만원 옮김, 까치, 1994) 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도 이 책에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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