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 1. 고현성(古縣城) 축성(築城)과 개요. 2. 고현성 역사 기록들. 3. 고현성 황취루(黃翠樓) 한시 편. 4.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 5. 고현성 거제현헌(題巨濟縣軒) 6. 고현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
1. 고현성(古縣城) 축성(築城)과 개요.
1) 現 거제시 중심지인 고현동은 1432년부터 1664년까지 거제현의 읍치였다.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432년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가 시작된 1451년 사이에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명칭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舊신현읍 現일운면 舊장승포읍>이 조선중기에는 "고현면"이었다가 고현면이 "일운면과 "이운면"으로 분화된다. 다시 일운면은 신현읍(장평 수양 고현 상문 삼거)과 일운면으로, 이운면은 장승포읍(장승포시 ⇨옥포 아주 아양 장승포 능포 마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하연(河演, 1376~1453년)의 글, "[賀寄李僉樞 (好誠○幷小序。 時李公疑行巨濟縣令)이 첨추(僉樞,첨지중추부사,정3품 무관. 이호성 거제현령)을 격려하며 보낸다.]"의 내용 中, 대마도 정벌이 끝난 다음, 1419년(세종1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 시켰다.
1422년 사등성은 거제도로 돌아온 유민이 모두 모이니 성이 좁고, 또한 물도 부족하여, 수월평(水月平,수월리)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임시 관사를 세워 치소를 옮기고자 했지만, 1426년 봄에 다시 사등리(沙等里)로 선정되어 1426~1448년까지 사등성을 구축했다[조선왕조실록]. 임자년 1432년(세종 14)에 고현으로 치소를 옮겼고[거제부읍지 1759년, 신증동국여지승람], 1449년 현령 이호성이 부임하여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건설했다[조선왕조실록]. 이후 1664년 명진폐현으로 옮길 때까지 거제현의 치소로써 그 역할을 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
3) 고현성은 거제의 읍성으로 소재지는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 951번지로 현재 성내의 중심부에 거제시청이 자리 잡고 있다. 축성 당시에 경상남도 6읍의 백성 2만 여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곽의 형태와 구조를 보면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상대지위에 평면선형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문옹성과 치(雉), 해자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전기의 읍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성축 둘레는 3038척(933m) 높이 13척내(약4m) 샘물1개 연못 1(2)개[각종 거제읍지 내용], 성 둘레 3600여척(약1100m), 집 40여 채[이보흠 축성기 기록]였다. 6.25때 포로수용소 설치 時, 헐어서 지금은 500여m만 남아 있다. 이 성(城)은 또 조선 선조25년(1592년) 5월 12일 임진왜란 時, 왜군에 거제관민이 항전하다 함락당해 최후를 맞이한 곳이며, 그 후 1664년 甲辰(갑진)년에 명진(溟珍)을 폐하고, 관청(官廳)을 복건(復建)하면서 이동구(李東耉) 현령(縣令)이 현재 거제면의 자리로 옮기었다.
4) 고현성의 구조로는 동, 남, 북에 세워진 성문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성가퀴)을 설치하였으며 입구에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옹성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접근을 막기 위해 방어용 도랑을 설치하는 등, 성의 형태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읍성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성곽의 형태는 병 모양으로 동으로 갈수록 성곽이 줄어드는 구조이며 고현성 안내판에는 배 모양이라고 적혀있다. 고현성은 목이 긴 구조이고, 짧고 굵은 구조로 된 성곽이다. 성문은 3개로 동문, 남문, 북문이 위치하며 현재 거제시청 뒤로 북문과 북측성곽 일부와 서측성곽과 남측성곽 일부만 복원됐다. 참고로 고현성에서 해자는 복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고현성의 해자는 북측과 남측은 자연적인 해자 즉, 하천을 기준으로 사용했으며 동 측만 인공적인 해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현성의 축조수법은 외벽의 경우 구릉사면을 생토층에서 ‘ㄴ’자형 절개하고 그 생토층에 자갈을 깔아 다진 다음 장대석을 일 배열하여 기단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성돌이 올려놓았고 내벽의 경우에는 당시의 지표면을 5~60cm 깊이로 파고 그 위에 사람머리만 한 할석으로 쌓아 올렸다고 했다 하면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 내축한 방식의 성곽은 맞다 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협축 방식은 아무래도 동문지 해자만 그러한 방식을 사용한 것 같다.(거제시 자료)
5) "[동국여지승람,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 의하면, "세종 즉위 5년(세종4년 1422년) 거제 백성의 소원이 본토(거제도)로 돌아가도록 성곽 축성을 명하였다. 우찬성 진양 좌상 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다가 옮기도록 허락했다. 하도민 2만여 장정들로 하여금, 영천 군사 정차공, 진양 판관 양연, 곤양 군사 최성로, 청도 군사 이의, 사천 현감 장우, 진해 현감 김한진, 등이 그 역을 위해 분감(조선 전기에, 군자감 관할 아래에 따로 설치한 관아)을 관리했다. 또한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이 관사와 창고 곳간을 세웠고 여기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모여 성을 쌓는 일에 마음을 다하며, 각기 맡은 바를 다하였다. 성둘레 3600여척(약1100m), 집 40여 채를 한 달이 걸리지 않은 사이에 일이 끝남을 알렸다" 조선초기 모든 읍성(縣, 府,)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건물이 있었다. 관청 객관 동헌 향교 등이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 축조에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고현성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한다. 이로써 거제도에도 유학을 배우는 공교육이 시작되었다(1453년). 토지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 드리는 곳인 사직단(社稷壇)은 고현성 서쪽에 있었고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는 향교에,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당우(堂宇) 성황사(城隍祠)는 고현성 남쪽 1리 지점에, 역질이 돌아서 여귀(厲鬼)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를 올리는 여단(厲壇)은 현(縣) 북쪽에 있었다.
6) 성곽의 형태와 구조는 계룡산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설장대지(舌狀臺址) 위에 평면의 선형(船形)으로 축조된 석축성으로 삼문옹성[三門甕城, 성문이 3개(서문 북문 남문)이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의 성벽을 만드는 성곽 구조물을 옹성이라 한다.]과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기 위해 돌출시켜 쌓은 치(雉), 적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성 아래 깊은 웅덩이인 해자(垓子)를 구비한 전형적인 조선전기 읍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1592년 5월12일 임진왜란때에는 왜군에 의해 함락당한 뒤 현종4년에(1663년) 거제면으로 치소를 옮긴 다음 곧 폐허가 되었고 6.25사변때 UN군 포로수용소가 이곳에 설치됨으로서 그 파괴는 극에 달하였다. 현재 상태 파악이 가능한 성벽은 길이가 818m인데 평균높이가 2m이며, 폭이 5.5m가량으로 성내는 거제시청이 자리 잡고 있다. 축조수법은 외벽의 경우 구릉사면을 생토층(生土層)에서 "ㄴ"자형 절개하고 그 생토층에 자갈을 깔아 다진 다음, 섬돌 층계나 축대에 쓰이는 길게 다듬은 돌인 장대석(長臺石)을 일 배열하여 기단석(基壇石, 기초로 쌓는 돌)으로 삼고 그 위에 성돌을 올려놓았다. 내벽의 경우는 당시의 지표면을 50~60㎝깊이로 파고 그 위에 사람머리만한 할석(깬 돌)으로 쌓아 올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38尺이고 높이가 13尺이라고 하였고 그 크기는 남해안의 읍성가운데 중간 정도이며 높이는 높은 편에 속한다.
199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고 1991년에 그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92년부터 고현성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연차 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1979년 5월 9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4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거제시 자료)
2. 고현성(古縣城) 역사 기록들.
① 거제읍지(巨濟邑志) 1864년, 대동지지(大東地志) 古縣城東北二十里沙等城移于此南北相距十里卽古丁部曲自此移于今治 端宗朝贊成鄭萃築周三千八十八尺泉三池二 고현성 : 동북 20리, 사등성에서 여기로 옮겨왔다. 남북간 거리 10리이며, 고정부곡이었다. 이로부터 현 치소로 이동했고, 단종조 찬성 정분이 축조했으며, 둘레가 3080척, 샘물 1개 연못 2개 이다. 황취루(黃翠樓) 거제현 치소 고현성 內 객관 북쪽에 나란히 위치했다 한다.
②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 1899년(광무 3년) 이호성(李好誠 1449년 거제현령 부임) 이호성 거제현령이 부임하여 사등에 있던 치소를 고현(古縣)으로 옮겨와 새로 성을 쌓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주:築古縣城]
③ 거제부읍지(巨濟府邑誌, 1759년) 여지도서(輿地圖書),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부읍지 여지도서는 1759년 조사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으며, 18세기 중엽의 거제도 사회와 지역사정을 파악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세종(世宗) 14년에 옛 섬으로 환원하여 지현사(知縣事)로 만들었는데 그 뒤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다시 돌아온 사등성에서 고현성으로, 선덕7년 임자년 1432년(세종 14)에 옮겼고, 강희 갑진년 1664년 고현에서 명진폐현 서쪽 3리로 옮겼다. 강희 신묘년 1711년 숙종37년 부사로 승격했다. 고현성(古縣城) : 在府東北二十里石築周三千三十八尺高十三尺內有一泉一池. 거제부읍치 동북쪽 20리 성축 둘레 3038척 높이 13척내 샘물1개 연못 1개. 세종 4년(1422년) 사등성 치소로 돌아왔으며, 또 고현성으로 옮겨가고 후에 강희 갑진년(1664년)에 또 명진 폐현으로 옮겨 갔다가 서쪽 3리 지금 치소로 왔다. ④ [주:右古縣城記李甫欽. '고현성 축조기' 이보흠(?~1457년) 기록] 가장 오래된 고현성 기록. ["전조 고려 말기에 규율과 질서(기강)가 차차 쇠하였다. 섬 오랑캐의 잦은 침략에 거제의 백성은 그 구토(고향땅)을 버리고 거창의 경계인 곳에서 우거한지 오래되었다. 태조의 명을 받아 여러 대를 걸쳐 서로 계승하여, 문으로써 안을 다스리고 무위로써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하라. 먼 훗일을 위해 덕으로 백성을 널리 감화시키니, 저 主1)산융과 류구(오키나와)도 등지지 않으려고 예외없이 모두, 다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생각건대 나중에 도착함이 두려웠구나. 섬나라 오랑캐도 이런 상황에 여유가 없어 서로 바라만 보았다. 부엉이도 국민을 위해 다투어 듣기 좋은 소리로 기원한다. 동방에 나라가 하나 있는데, 이래로 번성하고 태평한 때가 없었다. 세종 즉위 5년(세종4년 1422년) 거제 백성의 소원이 본토(거제도)로 돌아가도록 성곽 축성을 명하였다. 그 백성이 살기에 알맞은 곳을 정하고 지키고 보호하며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았는데, 유민이 모두 모이니 성이 좁았다. 또한 물도 부족하고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어, 이제 나는 주상전하의 명으로 의정부 우찬성 진양 좌상 主2)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다가 옮기도록 허락했다. 북쪽은 큰 바다에 임해있고, 삼면이 산에 막히며, 높고 마른땅과 젖은 진펄에다 찬물의 샘이 솟아난다. 가히 영원한 집을 세울 만 하도다. 이제야 모두 불러들였다. 하도민 2만여 장정들로 하여금, 영천 군사 정차공, 진양 판관 양연, 곤양 군사 최성로, 청도 군사 이의, 사천 현감 장우, 진해 현감 김한진, 등이 그 역을 위해 분감(조선 전기에, 군자감 관할 아래에 따로 설치한 관아)을 관리했다. 또한 거제현령 이호성이 관사와 창고 곳간을 세웠고 여기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모여 성을 쌓는 일에 마음을 다하며, 각기 맡은 바를 다하였다. 성둘레 3600여척, 집 40여 채를 한 달이 걸리지 않은 사이에 일이 끝남을 알렸다. 아아~ 부역민이 큰일을 했도다. 백성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의를 원칙으로 하지 않으면, ‘황보(皇父)가 도읍을 만드니 땅이 오래(汚萊 낮은 땅에 물이 괴고, 높은 땅에 풀이 무성하여 땅이 황무해짐)하였다’는 백성의 원망이 있게 된다. 사역하는 것이 비록 의롭다 하더라도 적절한 때가 아니거나 비록 때가 적절하더라도 그 힘을 절약해서 이용하지 않으면 主3)‘화원(華元)이 성을 쌓을 때에 배가 희구나.’ 하는 기쁨의 노래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현 백성은 성이 작고 물이 없음을 고통스럽게 여겨서 모두들 옮기기를 원했으니, 백성의 이익을 보아서 의로써 움직였다 할 수 있다. 농사를 마친 다음 사방에서 모두 모였으니, 알맞은 때에 부렸다 할 수 있다. 새벽과 저녁을 알리는 북을 설치하고, 바삐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니, 그 힘을 모조리 쓰게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의로써 움직였고 알맞은 때에 부리며 힘을 아껴 썼으니,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큰 북[鼛]으로 이기지 못하였음과, 주공(周公)이 은(殷) 나라를 시켜서 크게 지은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나으리오. 참으로 이른바, 즐겁게 하는 것으로 백성을 부리면 백성은 그 수고로움을 모른다는 것인가.” 하였다."]
[주1] 산융(山戎) : 중국(中國)의 춘추(春秋) 시대(時代)에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살면서 연(燕)ㆍ제(齊) 등(等) 여러 나라에게 화(禍)를 끼친 종족(種族) [주2] 정분(鄭苯) : 미상∼1454년(단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이오(以吾 1347년 ~ 1434년)의 아들이다.[정이오 선생은 거제도 곳곳을 다니시며 보고 느낀 점을 한시로 남겨, 전해오고 있다]. [주3] 화원(華元)이 성을 쌓을 때에 배가 희구나.’ 하는 기쁨의 노래가 있게 된다. : 화원(華元)은 춘추시대 송 나라의 정승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많으므로 서울의 성을 다시 쌓는데, 백성의 힘을 잘 이용했으므로 도리어 백성들이 배를 두드리며 기뻐서 노래 불렀다 한다.
<조선왕조실록 기록물 >
① 세종 7년(1425년) 2월 27일, 병조에서 계하기를, “삼가 경상도 감사와 경차관(敬差官) 이자직(李自直)이 장계한바, 도내 거제현(巨濟縣)의 이전과 본현의 수호군(守護軍) 증원에 대한 편의 여부를 가지고 본조에서 의정부 및 여러 조(曹)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이를 조열(條列)하여 아뢰나이다. (1). 현재의 거제현 관청 소재지는 진실로 불가한 곳입니다. 농장이 협소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없고, 지대가 낮고 습하며, 3면에 산이 압림(壓臨)하고 있어 수호하기에 곤란합니다. 또 적의 배가 쉽게 들어올 수 있어 불측의 변란이 예측됩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고, 조석 사이에도 보장되기 어렵고 보니, 자못 이곳은 장구한 땅이 못됩니다. 오직 고읍(古邑)의 지형은 읍(邑)을 설치할 만하옵니다. 오로지 농장이 넓고 기름질 뿐 아니라, 왜적도 역시 돌입할 수 없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실로 이익이 있을 것이오니, 청컨대, 금년 가을철에 성을 쌓고 고을 청사를 옮기도록 하소서. (2). 만일에 해구(海寇)가 침입하면, 각 포(浦)의 병선이 모두 거제의 수호만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닌지라, 모든 곳에 쫓아다니며 사변에 대응하다 보면, 거제의 한 고을이 고립되어 단약(單弱)할 것이니, 실로 우려할 일입니다. 청컨대, 본현의 사람과 물화가 부성(富盛)할 때까지를 한하여, 종전 수호군 1백 명에다 2백 명을 증가하고, 그 2백 명은 부근 각 고을의 신백정(新白丁)을 육군(陸軍)과 서로 교환하여 정속시키고 4번으로 나누어서 부방(赴防)하도록 하소서.”하니, “논의하여 얻은 계책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② 세종7년(1425년) 8월 17일,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③ 세종9년(1427년), 1. 임인년(壬寅年,1422년 세종4년)에 다시 건립(建立)하던 초기에, 심포(深浦)의 수월평(水月平)에다가 각 포(浦)의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잠정적으로 관사(官舍)를 세우도록 했는데, 병오년(丙午年,1426 세종 8년) 봄에 다시 상사등리(相沙等里)를 〈선정(選定)하여〉 읍(邑)을 옮겨 비로소 성곽(城郭)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객사(客舍)·공아(公衙)·국고(國庫)·관청(官廳)을 새로 옮겨온 많지 못한 백성들의 힘으로서는 수년 안에 축성(築城)하기가 어렵겠사오니, 청컨대 가까운 곳의 각 포(浦) 선군(船軍)과 각 고을 군인들을 동원하면 많은 일수를 역사(役事)하지 않더라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④ 문종 1년(1451년) 5월 6일, 거제현의 읍성을 가을에 고정리에 옮겨 쌓도록 하다. 이보다 앞서, 거제현(巨濟縣) 사람이 상언(上言)하기를, “본읍(本邑)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水月里)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1426 세종 8년)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겨서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1448 세종 30년)에 이르러 끝났는데, 이제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苯)의 심정(審定)으로 말미암아 또 고정리(古丁里)로 옮기려 합니다. 본읍의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가 이미 모두 토착(土著)하여 번성한데 이제 고을을 옮기게 한다면 영선(營繕)에 끝이 없으니, 바라건대 옮겨 설치하지 말아서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고, 만약 부득이하다면 뭍으로 나가 옮겨 살게 하여 장구(長久)한 일을 도모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병조(兵曹)에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도체찰사의 계본(啓本) 안에, ‘고정 부곡(古丁部曲)은 평평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샘이 넉넉하여 농사짓고 살 만한 곳이 많으며, 또 각포(各浦)의 중앙으로 요충(要衝)인 땅이니, 여기에 고을을 두어야 마땅합니다.’ 한 것을, 이미 일찍이 계하(啓下)하여 명(命)을 내려 10월부터 고을을 옮기기 시작하여 성을 쌓고 있는데, 지금 고을 사람이 올린 상언은, 청컨대 청리(聽理)하지 마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읍성(邑城)이 북쪽 한 구석에 있거니와, 당초에 심정할 때에 따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관사(館舍)·성지(城池)도 모두 완고(完固)하니, 아직 예전대로 두는 것이 어떠한가?”하고, 정부(政府)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니, 우참찬(右參贊) 안숭선(安崇善)은 생각하기를,
“신(臣)이 을축년(乙丑年,1445 세종 27년)에 순찰사(巡察使)로서 순행하다가 거제에 이르러 읍성의 지세(地勢)가 낮고 바다 어귀에 가까이 있음을 보고서 환란(患難)을 당할 것이 두려웠으므로 옮겨 설치하자는 의논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영등(永登)의 옥포(玉浦)·지세포(知世浦)와 우도 수영(右道水營)의 둘러 있는 섬과 벌려 있는 진(鎭)과 함께 기각(掎角,앞뒤에서 서로 공격하는 자세)이 되고, 고성(固城)의 당포(唐浦)도 서로 바라보이는 데에 있으므로, 큰 변이 갑자기 일어나지 못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신 몇 해 동안은 안정(安靜)에 힘쓰셔야 하나, 성곽(城廓)은 완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만 그 긴완(緊緩)을 헤아려 먼저 긴급한 곳을 쌓은 뒤에, 읍성을 여기에 옮겨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 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는 생각하기를, “성안에 샘이 매우 적어서 성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고여 둡니다. 청컨대 추수를 기다려, 지금 정한 성터 안의 샘의 근원과 산의 형세를 다시 살펴서, 만약 옮겨 설치하는 편리가 옛 성보다 갑절이면 옮겨 쌓게 하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 지구(持久)하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모름지기 올 가을에 서둘러 옮겨 설치해야 하는가? 아직 2, 3년 멈추었다가 점차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거제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곳에 해당하여 아주 긴요하니, 올 가을에 옮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왜 호군(倭護軍) 등구랑(藤九郞)이 몰래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박가대(博加大)·일기주(一岐州)의 왜인이 함께 의논하기를, ‘조선이 우리 죄 없는 족친(族親)을 잡아서 질곡(桎梏,차꼬와 수갑)하여 중국으로 보낸다.’ 하여, 거제를 쳐서 보복(報復)하고자 한다.”하였으므로, 이 의논이 있었다.
문종1년(1451년) 11월 30일, 이달에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의 성(城)을 쌓았다. <<문종실록>> 원년 11월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달에 경상도 거제현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겸지병조사(兼知兵曹事) 김형우를 경상도에 보내어 거제성 쌓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단종실록>>원년 8월조)는 것이다. ⑤ 단종즉위년(1452년) 11월, 전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笨)이 아뢰기를, “경상도 거제현(巨濟縣) 사람들이 장고(狀告)하기를, ‘살고 있는 땅이 모두 큰 산과 바위로 되어 있고 경작할 만한 평지가 없는데도 목장(牧場) 9개소를 설치하였고, 또 4개의 포구(浦口)에 영전(營田)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바닷가의 경작할 만한 땅은 왜구(倭寇)가 다시 침입할까 두려워 경작을 금하였으므로 생계(生計)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섬 안의 요해지에는 모두 목책(木柵)을 세우고 병선(兵船)을 줄지어 두었으므로 방비가 이미 튼튼합니다. 청컨대 3 목장의 옛터의 묵은 땅[陳地]과 옥면포(玉面浦)·지세포(知世浦)·조라포(助羅浦)·여이량(餘伊梁)의 산당동(山堂洞) 등지의 묵은 땅을 경작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호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번 추등(秋等)의 점마 별감(點馬別監)과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경작할 만한 땅을 조사하여 떼어 주도록 하소서.” 하였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점마 별감 권효량(權孝良)이 아뢰기를, “옥면포는 바다 가운데 있는 고도(孤島)로서 왜선(倭船)이 항상 정박하는 곳이라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서 경작하게 할 수 없고, 3 목장의 옛터는 산 위에는 수풀이 무성하여 풀이 살 수 없으나, 오직 산 중턱에는 풀이 무성하여 말을 기를 수 있으므로 경작하게 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지세포·조라포·여이량의 산당동은 모두 말을 먹일 풀이 없기 때문에 이미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현민(縣民)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주1] 영전(營田) : 각영(各營)에 딸려 있던 전지. 즉 영문 둔전(營門屯田)으로서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수확량은 군량(軍糧)에 충당하였음. [주2] 점마 별감(點馬別監) : 각 목장(牧場)의 말을 봄·여름·가을에 점고(點考)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사복시(司僕寺)의 관원. ⑥ 세조실록 (세조 3년) 1457년 1월(음)
(1) 경상도 거제현(巨濟縣)에는 영등포(永登浦)·옥포(玉浦)·지세포(知世浦)·조라포(助羅浦)·오아포(吾兒浦)가 있는데, 한 고을에 다섯 곳이 있어 방수(防戍)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지세포와 조라포는 포구(浦口)가 허활(虛闊)하고 또한 모두 사석(沙石)이어서 닻을 내리기가 튼튼하지 못하고, 지세포로부터 서남(西南)으로 이르는 사이는 돌산이 높고 험준하며, 민가(民家)는 동떨어져 먼데도 영등포·오아포·옥포 등 삼포(三浦)가 분열(分列)되어 있으므로 거제(巨濟)의 수호(守護)는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지세포·조라포의 두 포(浦)를 혁파하고 그 선군(船軍)을 옥포에 이속(移屬)시켜 방어(防禦)하게 하소서.
(2) 거제현(巨濟縣)은 바다 가운데의 절도(絶島)이므로, 비록 수군(水軍)이 있더라도 만일에 수전(水戰)에서 해를 본다면 수성군(守城軍) 1백 명을 써서 방수(防戍)하게 되니, 지극히 외롭고 약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지세포(知世浦)·조라포(助羅浦) 등의 포(浦)를 혁파한다면, 두 곳에 전혀 군졸(軍卒)이 없게 될 것이므로 더욱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두 포(浦)의 중앙에 석보(石堡)를 축조(築造)하여 새로 구자 만호(口子萬戶)를 두고, 두 포(浦)의 군졸 6백 명으로써 옮겨 지키게 하소서
[주]구자 만호(口子萬戶) : 변방(邊方) 지역의 강 연안에 설치된 작은 관방(關防)을 지키던 종4품의 무관직(武官職)을 말함.
3. 고현성 황취루(黃翠樓) 한시(漢詩)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집을 '누정(樓亭)'이라 부르는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거제도는 대부분 바닷가 8진영과 읍치, 교통요지에 누정이 위치했다. 특히 관아시설 중 객사에도 누각을 만들어 접대·향연 및 풍속에 따른 의식을 가졌다. 황취루(黃翠樓)는 1453년에 끝난 당시 거제치소 고현성 축조에 황취루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고현성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정황(丁熿) 선생은 거제향교(서문골)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계룡사(초가)에서 제를 올리고 서울서 면회 오는 지인들을 만나면서 많은 기록을 남기셨다. 1560년 거제에서 사망 때까지 선생이 불모지 거제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거제민초에게 유교와 학문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황취루 누각에서 귀양살이 서러움과 기약 없는 세월에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각종 시(詩)에다 담아내고 있다.
'황취(黃翠)'란 황금빛과 푸른(비취)색을 형용화한 말인데 푸른 비취색 바다에 황금빛 구름과 더불어, 누렇게 익은 유자에다 짙푸른 잎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橘林翠黃疎 귤 숲에는 푸르고 누런빛이 성글다."는 옛 글이 전하는 바, 거제의 늦가을 풍경을 함축한 말로써, '황취루'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편액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취루(黃翠樓)는 고현성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거제부읍지1756년에는 "황취루는 예전 읍치 고현성의 객관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임진난 소실)"고 전한다.
1) 등 황취루(登 黃翠樓) / 정황(丁熿). 烟中見峀畵圖如 안개 속에 보이는 산굴 그림 같고 日隱天低大寐餘 해는 하늘아래 숨어 잠만 길고나. 月正元夕倚黃翠 정월 대보름날 황취루에 의지하는데 七載城西是眼初 7년 동안에 성의 서쪽은 처음 보구나.
2) 황취루 운(韻)을 어떤 사람이 옮겨 써 보여줘 우연히 읊으니 이 시가 살아나다.黃翠樓韻 偶吟以 有人謄示存 / 정황(丁熿) 1556년 作.
百年容易一回頭 백 년 만에 간신히 머리 한번 돌이키니 萬卷工夫試遠遊 많은 책으로 공부하곤 시험을 위해 멀리 떠났네. 七尺身餘三禪代 일곱 자 나의 몸이 남아서 욕망이 사라진 인생, 千尋海了九春秋 깊은 바다 끝에서 아홉 번의 봄과 가을이 지나갔다. 書空只費殷生字 허공에 쓴 글, 쓸데없는 은나라 뜻글자 뿐, 後樂無聞范老樓 노래에도 소식 없고 오래된 누각만 고상하네. 吏部懸詩誇靡監 관리들은 관아에 시(詩)를 내걸고 쉴 새 없이 자랑하지만 豈知遺恨楚江留 어찌 생전의 원한을 알겠는가? 초강에 머무는데..
다음은 홍성민(洪聖民) 선생이 1581년 봄 음력 2월에 웅천 안골포에서 배를 타고 가덕도 영등포(구영등) 수영지를 거쳐 율포(구율포) 옥포 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오아포 진영, 거제의 각종 누정과 각종 관아 건물(고현성), 거제면 명진리을 순행하고 가는 곳마다 느낀 점을 시로 남겼다. 선생은 옛 사적을 해박하게 인용하여 자신이 느낀 바를 논리적으로 표현했다.
3)제 거제황취루(題 巨濟黃翠樓) / 홍성민. 無窮滄海碧玻瓈 무궁한 넓은 바다 수정 같이 푸르고 拍盡天端限地倪 손뼉 치듯, 하늘 끝이 다하여 땅의 경계 지운다. 高下兩間爲物大 위아래 둘 사이, 만물이 훌륭하다 생각되어도 孤城自是一丸泥 외딴 성은 본래부터 한 덩이 진흙이었네.
4) 차 거제황취루(次 巨濟黃翠樓) / 홍성민. 天南尾卽海東頭 하늘 남쪽 꼬리 즉, 바다 동쪽 머리에서 甘苦平生說此遊 즐거움과 괴로움, 평생 이 놀음으로 달랜다. 作惡瘴雲渾似墨 습한 구름에 지은 악업은 흡사 먹물을 흐린 것과 같은데 亂陰春日半如秋 해 그림자 어지러워 봄날이 가을처럼 쓸쓸하네. 三更風雨聲傳幌 삼경에 비바람 휘장을 휘날려 노래 하니 萬里滄溟影入樓 만 리 푸른 바다 그림자가 누각으로 들어온다. 物色猶堪寬逆旅 자연의 경치는 너그러움을 견딘 나그네를 맞이하니 橘橙林下且遲留 귤나무 수풀아래서 오랫동안 머뭇거린다.
5) 거제도 황취루를 보며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바를 지었다. 보운 서술한다. 見黃翠樓諸人作有感 步韻以敍 / 정황(丁熿).
自憐樓故每人新 오래된 누각이 절로 가련해도 늘 사람들이 새로워 滿壁要留藹藹春 머물며 바라보니 무성한 봄이 벽에 가득하구나. 一日好懷隨己盡 하루 동안의 좋은 생각이 곧바로 사라져도 千年嘉樹獨能眞 천년된 아름다운 나무, 어찌 그리 진실한가? 當朝儘擬先憂士 이 조정은 모두가 근심부터 먼저 하는 관리만 만들 뿐, 去國那聞後樂臣 서울을 떠난 후에야 어찌 좋은 신하였다고 하는가? 東海亦云連楚澤 동해에도 역시 유배지가 연이어 있다고 하는데 蒼波竟夕爲傷神 하룻밤 동안 푸른 파도에 정신을 상하게 될 뿐.
其二 顆得秋香葉更新 낱알을 손에 쥐니 가을 향기에 잎사귀 새롭고 恩偏造物特常春 치우친 조물주의 은혜에 언제나 봄은 특별하다. 樓中鄭衛隨他僞 (춘추전국시대)정나라 위나라 누각에서 남의 거짓에 속았지만 月下風霜自我眞 달빛아래 찬바람과 서리에는 자아(自我)가 참되도다. 楚澤前盟芊孼子 유배지에 앞서한 맹세는 얼자만 가득했는데 長沙後約漢孤臣 긴 백사장 뒷날의 언약은 한나라 외로운 신하였구나. 無人解此千年恨 인적 없을 때 이를 풀어보니, 천년의 한이 되어 可折層枝貢聖神 쉽게 꺾기는 높은 가지를 거룩한 신께 바치노라. [주1] 보운(步韻) : 시(詩)를 지을 때 남의 시(詩)에 화합하여 연(聯) 마다 원운(原韻)을 사용함을 일컫는다. [주2] 초택(楚澤) : 유배지(流配地)를 말한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상수(湘水) 가에서 행음택반(行吟澤畔)했던 고사에서 기인한 것이다.
6) 황취루의 여러사람들이 지은 것을 보고 느낌이 있어 차운하여 서술하다(見黃翠樓諸人作有感步韻以敍之) / 정황(丁熿).
六年孤島上 6년간의 외로운 섬에서 東望染牙邊 동으로 왜구의 변방을 바라본다. 環堵才爲地 빙 두른 담장 같은 땅에 翬樓特占天 날아갈듯 한 누각이 우뚝 하늘을 차지했네. 軒楹交貴介 존귀한 분들 모두 마루 기둥사이 있으니 意氣自神仙 장한 기상에 절로 신선이 되었구나. 豈有窮愁化 어찌 곤궁한 근심이 있으랴. 霜林一樣然 서리 내린 숲도 한결 같아라. [주] 염아(染牙) : 이 물들이기(染齒·漆齒), 전설의 먼 나라 이름, 뒤에 변방의 먼 나라를 가리킨다.
4.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1397∼1467년)은 본관은 성주로, 1449년 부임하여 읍을 옮기고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거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초의 읍치였던 사등이 협소하고 동남의 방비가 긴요하다고 여겨 세종조에 고현으로 읍치를 옮겼다. 경상우도처치사(1453년~1455년)로 재직 때에도 남해안 특히 거제도 연안의 해상방어를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지방행정에 유능하였다. 우리 거제도를 일으킨 위인 중에 한 분임에 틀림없다. 이호성을 칭송하는 글이 여러 문헌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김담(金淡)과 신숙주(申叔舟) 두 분께서 똑같은 제목"[送別巨濟、鎭武討評事李好誠]"으로 이호성을 칭송하는 한시를 남겨 거제문학과 역사를 조명케 하고 있다. 1) 거제로 떠나는 진무토평사 이호성(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 / 김담(金淡, 1416~1464년)은 조선전기 문신, 천문학자.
才高穿札易 재주가 비범해 화살을 쏘아 쉽게 사상자를 내니 謨壯運籌神 계책이 귀신같이 궁리하고 계획하는 일이 장하도다. 却繼留侯躅 제후가 머뭇거려 지체하니 이어받아 물리치고 堪爲養子隣 이웃 자식같이 돌보았다지. 分憂時俗化 지방 벼슬아치로써 당시 풍속을 교화시켜 起廢舊墟新 폐허를 일으키고 옛 성과 건물을 새롭게 했다. 南府恩何重 남녘 거제 고을의 은혜,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天心只在民 천심은 다만 백성에게 있음이라. [주] 천찰(穿札) : 화살이 갑옷의 미늘을 뚫고 들어가는 것.
2) 거제로 떠나는 진무 토평사 이호성(次送別巨濟 鎭武討評事 李好誠) / 신숙주(申叔舟).
水國初還邑 바닷가 거제로 다시 읍이 돌아와서 人安遂及神 사람들이 마침내 신과 더불어 편안케 되었다. 循良廷有議 어진 고을현령을 조정에서 논의하였는데 武略古無隣 무인의 책략이 언제나 백성과 함께 했다네. 發政仁威著 훌륭한 정치와 어진 공덕을 세우니 宣麻聖眷新 임금이 내린 글에 신임이 새롭도다. 行春應露冕 봄에는 응당 예복을 갖춰 순시를 하면 手額走邊民 거제현민이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지.
現 거제시 중심지 고현성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고정부곡’으로 불리다가 부곡이 폐지된 후에는 고정리(古丁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432년 거제현의 치소가 옮겨오고 본격적인 고현성 축조가 끝난 후부터 고현(古縣)이라는 현재 명칭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관찰사 하연(河演)에 의하면, 대마도 정벌이 끝난, 1419년(세종1년) 세종과 태종 두 임금께서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거제도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고현성 축조를 위해 현령 "이호성"을 먼저 보내고, 하연을 관찰사로 임명하여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을 축조했다. 이보흠(李甫欽)의 축성기에는 정이오(鄭以吾)의 아들,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진양(晉陽) 정상공(鄭相公) 정분(鄭苯)공에게 음양을 살피고 샘물을 찾아보아 치소를 옛 관아 남쪽 10리쯤에 옮기도록 했다. 하도민(下道民) 2만여 장정들, 영천 군사(永川郡事) 정차공(鄭次恭), 진주 판관(晉州判官) 양연(楊淵), 곤양 군사(昆陽郡事) 최성로(崔性老), 청도 군사(淸道郡事) 이의(李椅),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오(張俁), 진해 현감(鎭海縣監) 김한진(金漢珍)에게 공사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고, 그 역을 위해 분감을 관리했다. 또 현령 이호성에게 관사(館舍)와 부고(府庫)를 세우게 하니, 이에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이 다 모여서 각기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성 3천 6백여 척과 집 40여 칸이 몇 달 못 되어 완성되었다. 또한 현령 이호성이 관사와 창고 곳간 향교 객관을 짓는 일을 주관했다. 1453년에 끝난 고현성에는 ‘황취루(黃翠樓)’ 누각이 객관과 마주하며 북쪽에 위치했고, 서문 북쪽 편에 ‘거제향교’가 있었다. 토지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 드리는 곳인 사직단(社稷壇)은 고현성 서쪽에 있었고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는 향교에,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당우(堂宇) 성황사(城隍祠)는 고현성 남쪽 1리 지점에, 역질이 돌아서 여귀(厲鬼)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를 올리는 여단(厲壇)은 현(縣) 북쪽에 있었다. 고현읍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는 3천 38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셋과 못 둘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3) 이 첨추(이호성 거제현령)를 격려하며 보낸다.(賀寄李僉樞 好誠○幷小序 時李公疑行巨濟縣令) / 하연(河演, 1376~1453년) 1419년(세종1년) 두 임금 태종 세종께서 신기한 계책을 내었다. 바다에 있는 본토로 거제를 옮기기로 하였다. 나는 예조참판으로 책임을 맡아 시행하였다. 그 이후 관찰사가 되어 지시한 명령을 친히 받들었다. 무릇 군인과 백성의 미래 일인지라, 경상우수영을 살펴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자 공적인 일로 고을을 순시하는데,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금의 은혜가 극진하여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임금의 뛰어난 방책을 지키고자 하는데 하례하지 못해 시를 지어 기증한다. 이에 더욱더 힘쓸 것이다. "하늘이 내린 계책으로 고을을 옮겨 세우기가 중하여 기반을 닦는 데는 성신(聖神)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이호성장군은 어질고 자식을 돌보는 사랑을 가진 임금의 신하이나 세속의 예절이 사납다. 고을을 다녀보니 의관이 다르고 첨지중추부사는 비와 이슬이 새로우리라. 몇 년 전엔 조부의 상주로써 극진했는데 이제는 백성의 안녕에 하례한다네." [己亥春 兩殿 (太宗,世宗) 出神策 徙巨濟於水內本土 吾以禮曹參判主掌施行 厥後爲監司 親承指命 凡軍民事之未 缺 右縣物阜民康 公亦以行縣 缺 世之賞 缺 恩渥霈然 亦 缺 聖圖保 缺 不賀 缺 作詩寄贈 尤加勉焉 "徙建深天策 經營出聖神 將軍仁子惠 獷俗禮臣隣 行縣衣冠異 僉樞雨露新 昔年承重命 今日賀安民"]
5. 고현성 거제현헌(題巨濟縣軒) 1449년 거제현령 이호성이 부임하여, 고현(古縣,고정리)에 새로 성을 쌓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 당시 세종초기의 변방 거제는 어수선한 상황인지라, 거제현 관청이 거제도 전체를 관장하지는 못했다. 오아포 영등포 옥포 지세포 등의 수군진영이 거제현의 대부분 관장했다. 이 후 거제현이 안정을 찾은 1518년 봄날에, 김안국(金安國, 1478~1543년)경상도 관찰사가 경상도 전 지역을 순행하다가, 거제도 고현성(거제읍치)에 머물렀다. 거제현령과 더불어 동헌에서 통술을 들이키며, 객지를 순행하는 외로운 마음을 취중에 기대어 읊은 시가 아래 '제거제현헌(題巨濟縣軒)'이다.
天畔來遊海上城 먼 하늘가 바다 위 성(城)에 와서 유람하니 滄波無限客中情 객지가 정이 들고 푸른 물결 한이 없다. 荒雲落日愁炎瘴 거친 구름 석양아래 갯벌의 독한 기운이 시름겹게 할 때, 喬木鳴鴉認古營 교목(喬木)위 까마귀 울어 고영(古縣城)임을 알리네. 縱有春風留不得 비록 춘풍으로 부득이 머물다보니 唯將尊酒醉頻傾 주고받는 통술에 취하기만 하는구나. 玉京渺渺身千里 하늘나라 아득하고 천리 먼 곳 떠돌아도 歸思難堪白髮生 고향 가고픈 이 마음, 백발 되어 난감하네.
조선전기 김안국(金安國)은 소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보급했고 소학을 기초하여 후학을 계도하고 성리학을 가르쳤다. 당시 사대부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배웠고, 조선시대의 충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 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교화서(敎化書)를 간행·보급했다. 아래 시는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거제향교의 훈도에게 보낸 글이다.
勸示 巨濟學者(거제학자에게 주는 시) 소학교육과 성리학 보급을 장려하며.. 聖朝治敎極休明 어진 임금의 조정이 정치와 교육을 아름답고 밝게 이르게 하니 海島欣聞講誦聲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글을 강독하고 외우는 소리가 즐거이 들리는구나. 正雜途殊宜早辨 정도와 잡도가 다르니 마땅히 먼저 분별해야 하며, 須將小學日修行 모름지기 소학을 공부하고 날마다 학문을 닦아라. [주1] 정도(正途) : 과거를 통해 신사가 된 사람들. [주2] 잡도(雜途) : 돈이나 그 외 것들.
김안국(金安國)관찰사는 거제도 순행 중에, 효자 "이돌대"(李乭大)를 칭송한 장계를 올려 정려를 받았다. [幼喪父事母孝及歿親負土石成墳居廬三年又遷父柩同塟母塋更服三年事 聞旌閭] 어릴 때 아비상을 당하여 어미에게 효도하였고 뒤에 죽은 어미를 떠맡아 흙과 돌로 봉분을 만들어 곁에서 여묘살이를 3년 동안 하였으며, 아비를 나무관으로 옮겨 어미의 봉분에다 장례를 치루고 다시 상복을 입고 3년 여묘살이를 하여,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거제부읍지) 연초면 연초초등학교 건너편 효촌마을에 가면 '효자 장사랑 이돌대 유적비'가 있다. 아래 시는 1590년 홍성민 선생께서 거제도 두 번째 순행 길에 고현성 관청에 있는 동헌에 앉아서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느낌을 적은 글이다. "거제가 신선이 사는 곳인지? 삶의 고뇌가 표연히 씻겨 진다"하시며, 고달픈 직무를 내려놓고 오랜만에 장부의 기개를 읊는다. 또한 이 한시는 소리의 장단과 고저를 최대한 이용했으며, 압운 邊, 天, 仙, 然, 자를 두 번이나 되풀이하여, 흥겨운 운율의 리듬감을 살리니 가요 2절을 노래하듯, 재미를 이끌어내는 詩體라 하겠다.
'거제동헌운(巨濟東軒韻)'
維舟黃橘樹 황귤 나무에 배를 매어놓고 把酒白鷗邊 술잔을 드니 흰 갈매기 곁에 있네 渺靄無窮地 아득한 아지랑이 무궁한 곳, 層波欲缺天 층층 파도는 하늘을 이지러지게 하누나. 馭風疑換骨 바람을 부리는 신선이 되어볼까? 駕鶴便登仙 학을 탄 신선되어 올라가면 편하려나. 快濯塵煩盡 씻는 즐거움에 티끌 번뇌가 다하고 胸襟自灑然 가슴속 품은 생각이 절로 시원하도다. 小島滄環裏 작은 섬은 큰 바다 가운데 있고 孤城地盡邊 외딴성은 변방 끝에 있구나. 窓明山吐月 창이 밝아오니 산이 달을 토하고 簷豁水涵天 처마는 물에 비췬 하늘로 통하네. 壇上玉童子 단상의 귀한 아들, 雲端金骨仙 구름 끝엔 신선의 유골이 있겠지. 相望儻相見 서로 바라보며 상견하니 기개가 보이고 衣袂便飄然 옷소매가 바람에 나부끼듯 편하네.
거제동헌 차운次巨濟東軒韻 / 유홍(兪泓,1524년~ 1594년), 조선 중기의 문신.
心迷秦樹外 마음은 진나라 나무 밖에서 길을 잃고 身在楚雲邊 몸은 초나라 구름 가에 있구나. 霧隱參差峀 안개가 들쑥날쑥한 산봉우리를 숨기고 波涵上下天 물결은 아래위 하늘을 적시네. 風帆馳萬里 바람 탄 돛단배 만 리를 달려가 蓬島訪群仙 봉래산 신선들을 찾는구나. 濩落徒狂筭 휑한 무리들이 미친 듯 셈하니 憑闌思杳然 기댄 난간에서 생각이 묘연하네.
[주1] 초운(楚雲) : 초나라 구름. 남방의 구름. [주2] 확락(濩落) : 텅 비어있는 모양. 마음에 먹었던 뜻을 펴지 못함. 휑하다.
6. 고현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 윤승보(尹承輔) 고현성주(城主)는 본관은 칠원, 자(字)는 선보(宣輔), 호(號)는 다계(茶溪)로 1539년 9월 10일에 태어났다. 임란 1592년 5월9일 거제현령 김준민이 진주성 방어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면서 성주(城主)에 윤승보(尹承輔), 현승엔 김후석(金厚錫), 주장(主將)엔 신응수(辛應壽)를 지명하여, 김희진을 남문장에 윤영상을 북문장에 지명하고 떠났다. 일본군은 5월 7일 옥포에서 이순신과 원균에게 패한 후, 거제읍성(邑城)을 공격하여 5일후인 12일 날, 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가 전사(戰死)하고 함락되었다.
● 고현 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를 추모(追慕)하며. 心中明日月 마음속엔 해와 달이 빛나고 眼底節山河 눈 아래는 산하(山河)가 우뚝하다. 擊劍無窮恨 한없이 칼을 휘둘러도 虜麈未洗波 오랑캐 먼지를 끝내 다 씻지 못했도다. [ 당당하고 용감무쌍한 윤다계(尹茶溪), 크나큰 충절 우러러 기리니 여름 햇살 방긋 웃듯 비추고 충의는 다툴 만큼 고상하다. 혁혁(赫赫)한 공적 그 명성 장하고 조국의 의절(義節) 높아 오랜 세월 영령이 지켜주니 절로 머리털 치켜 올리누나. ]
위 시는 고현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가 직접 쓴 글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 고현성을 지키다 끝내 전사한 그의 공적을 기리며 안타까움을 나타낸 추모(追慕) 시(詩)이다. 조국을 위해 고현성을 지키고자하는 그의 굳은 절개와 용기는 높았으나, 결국 장렬하게 전사하게 된다. 고현성이 함락 당한 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거제도 대부분의 지역이 적의 소굴로 변하였다. 마지막 절에 "오랑캐 먼지를 끝내 다 씻지 못했구나"라고 애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이 땅 거제도의 훌륭한 선조인 윤승보(尹承輔)성주께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뉴스앤거제 nng@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