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방어기제와 믿음
오늘 복음(마태 14,22-33)은 영화 매트리스를 생각하게 한다. 가상(모의)현실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었는데 영화 매트리스의 몇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특히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몸을 비틀며 피하는 장면과 어느 순간 도망치기를 멈추고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자 매섭게 날아오던 수많은 총알이 멈추어 서더니 맥없이 떨어지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주인공 네오는 지금 자신의 현실이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걸까? 도망치던 네오는 이제는 도망치지도 않고서 특별히 새로운 대책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적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킨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온다. 바람이 불며 파도가 치자 배를 타고 있던 제자들은 겁에 질린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조차 두려움에 빠져 ‘유령’이라는 가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간결하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복음에서 늘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용기’라는 말씀에 선뜻 나선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다. 그러다 거센 바람이 불자 두려움에 빠진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만들고 살아온 ‘현실’이라는 세계로 그를 되돌려 놓았다. 무엇이 ‘참된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현실’일까?
실제적인 재난 상황보다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빚어낸 상황이 더 위험할 때가 있다. 시험을 앞둔 학생은 마치 시험을 망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험이라는 실제 상황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 때문에 시험을 망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거짓말한 것이 들통 날까 봐 두려워 저녁이 되어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보다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고 한다. 물론 악성 댓글이나 근거 없는 비방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힘이 있지만 정말로 나를 죽일 만큼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 힘을 부여한 걸까? 어떤 아이는 밖에만 나가면 모든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쉽게 나가지 못하고 기피 반응까지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아이의 마음이 느끼는 세상과 현실 세상은 다르다고 말해주면 될 것인데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으니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자각’일까? 전두엽의 자각과 통찰이 중요한 까닭일까? 내면의 두려움이 악성 댓글에 파괴적 힘을 부여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유독 느끼는 민감성이 내면의 불안을 증폭시킨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그것들이 힘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많은 경우 우리의 생활은 ‘가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상’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무의식적 방어기제’의 관점이 만들어낸 ‘거짓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나의 내면에 어떤 방어기제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여기에서 방어기제와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 성경 말씀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 베드로의 두려움과 믿음 사이에는 뭔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9장 9절 이하에 좋은 말씀이 나온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하느님 앞에 서는 장면이다. 엘리야 앞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바위가 부서지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일어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셨다. 성경의 의미는 자비와 구원의 하느님, 자애와 진실의 하느님,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 주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 여러 가지 방어기제에 의해 조직되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엘리야 역시 하느님은 강하고 거대한 힘과 맹렬한 불 속에 계시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전할 길이 없어 울부짖는 사람처럼 보인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가 개종했을 때 유대인들 눈엔 배신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유대 사회가 유일한 사회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자기 동포들을 위해서 진실을 말하고 참된 것을 전하려는 ‘배신자의 진실?’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번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 더는 새로운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도 매우 고약한 병인데 성경의 의미로는 이것이 불신앙이다.
어쩌면 믿음이란,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자각하고 또 자각하여 자기 통찰력을 키우고 그 통찰력으로 자신의 ‘지금-여기’라는 현실(창조주께서 선물하신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자각과 통찰 없이 어떻게 ‘자아실현’이 가능할 것이며, 자아실현의 삶 없이 행복과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세상의 물질(권력, 명예, 재화 등)과 관계가 없는데도 우리의 마음은 ‘가상-거짓’ 현실의 행복과 의미, 가치를 만들어 스스로 거짓 안정감에 머문다. 방어기제와 믿음을 달리 표현하면 방어기제는 불신앙 쪽으로 기울기 쉽고, 믿음은 건전한 정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