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천 년 왕국
신성한 매실 758
p 펜션은 원지 둔치에서 대략 20 여분 거리였다.
펜션 마당에 차를 주차한 최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최림은 그대로 2층으로 뛰어올랐다.
201호 앞에 도착한 그는 혹시나 해 권총을 빼 들었다.
그런 후, 마음속으로 하나, 둘을 세다 셋을 세는 동시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콰당!
그곳엔 과연 아까 불에 탄 사내가 말한 여자가 있었다.
헐!
그런데 민망하게도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입, 손목 그리고 발목이 결박되어 있었다.
최림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서 결박을 풀어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최림은 그제야 속 시원하게 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조리 중국어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몸짓, 물을 마시고 싶다는 정도였다.
최림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고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은 원지 둔치 방화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국 여자야?”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몸 상태는 어때? 병원에 갈 정도가 아니면 이리 데리고 와.”
최림은 펜션 빈방을 뒤져 여자가 입을만한 옷을 챙겼다.
여자와 함께 나오면서 최림은 왠지 불길한 느낌에 싸했다.
차에 올라탄 여자도 불안한 듯 자꾸만 최림을 옆눈으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산음 경찰서 형사팀 권필봉 팀장은 조사실에서 최림과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젊은이들이 남기고 간 인쇄물이 들려있었다.
현장에 있던 형사팀 직원이 사진을 찍어 전송한 것이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뭣 하는 놈들이지? 천년왕국? 666, 이런 것들이 다 뭐야?’
권 팀장은 미리 지능수사팀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직원을 따로 불렀다.
잠시 후 최림이 여자와 함께 들어왔다.
여자는 아직도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따뜻한 차와 담요를 건네주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통역이 피해자와 어떤 관계이고 왜 이곳으로 들어왔는지를 물었다.
이어, 어떻게 하여 피해자가 납치되었는지도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한참을 뜸 들이다, 통역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뭐래?”
권 팀장이 초조한 표정으로 통역에게 물었다.
“피해자와는 약혼한 사이고, 어제 중국에서 피해자와 함께 그 펜션으로 들어왔는데, 오늘 오후 4시경 갑자기 괴한 두 명이 들어와 약혼자를 납치하였고 자신을 결박하였답니다.”
통역은 들은 대로 대답했지만, 권 팀장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네?”
“중국에서 왜 왔으며 피해자가 중국인인지 아니면 한국인인지 그리고 피해자 이름이 뭔지 물어봐야 할 거 아냐?”
통역은 권 팀장의 날카로운 지적에 재차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가 중국어로 대답했다.
“이곳엔 전도하러 왔으며 피해자는 한국인, 목사라고 합니다.”
통역으로부터 ‘목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권 팀장은 기겁했다.
“뭐, 목사?”
권 팀장은 너무 놀라 얼떨결에 최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 형사, 어떻게 생각해?”
최림은 알고 있는 대로 말하려 하다가, 아직은 아니다 싶었다.
“글쎄요. 병원에 실려 간 피해자의 진술부터 들어야겠습니다.”
그러자 권 팀장은 병원에 나가 있는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팀장의 호출에 재빨리 답변했다.
“피해자는 중태입니다.”
“뭐? 중태? 그렇다면 소생할 가망성이 거의 없는 거야?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안 되겠어. 병원에 직접 가봐야겠어.”
권 팀장은 최림에게 눈짓했다.
그리곤 다른 형사에게 지시했다.
“이봐! 박 형사. 이 여자분을 병원에 모셔줘.”
“네.”
“참! 그리고 범인들이 도주할만한 모든 길에 있는 방범용 CCTV를 확보해줘.”
“알겠습니다.”
박 형사가 여자를 데리고 조사실을 나가자, 통역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형사팀의 유일한 여성인 김유리 형사가 조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팀장님! 긴급 뉴스에 떴습니다.”
“무슨 뉴스?”
“오늘 달집태우기 행사에서 화형을 당한 자가 여기뿐만 아니랍니다. 부산 해운대를 비롯한 전국에서 총 10명이랍니다.”
그녀의 말에 권 팀장과 최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10명?”
권 팀장과 최림은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 TV 앞에 앉았다.
공영방송의 남녀 앵커는 시종일관 격앙된 표정이었다.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자들이 패널로 앉아 있었다.
남자 앵커가 먼저 목청을 높였다.
「오늘 희귀한 살인사건이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습니다.
일종의 방화·살인인데요.
현재 확인된 장소만 해도 부산 해운대를 비롯한 10곳입니다.
더욱 이상한 점은 모두 정월 대보름날인 오늘 저녁에 일어났고,
장소는 달집태우기 행사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범인들은 모두 현장에서 순순히 체포되었고
그들이 현장에 뿌린 인쇄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부산 해운대에서 뿌린 인쇄물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자는 거짓 종교로
다수 선량한 시민을 부당하게
어지럽혔으므로
판결자 전원 일치로 극형인 화형에 처함.
천년왕국, 666’」
TV를 본 최림은 경악했다.
특히,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은 권 팀장은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세상에! 동일 수법이네. 도대체 뭐지? 이건.”
앵커의 발언 이후에 전문가라 칭하는 패널이 말을 꺼냈다.
「이번 사건은 건국 이래 희대의 사건입니다.
그들이 벌인 엽기적인 행각, 즉 피해자를 일제히 화형에 처한 것과
인쇄물 하단에 나오는 ‘천년왕국’ 등의 단어만 들어봐도
이건 우리 사회 체제에 불만을 품은 이단 종교와 연결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각 피해자의 이마에 새긴 666의 의미는 정말 남다른 것 같습니다.」
이어 그 패널은 666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라고 말하며 아는 척했다.
“야! TV 꺼.”
권 팀장은 열불이 나는지 김유리 형사에게 명령했다.
최림은 그새 전두태가 이런 방식으로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게 기가 찼다.
그날, 자기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병원행은 취소! 모두 회의실로 집합해.”
그런데 김유리 형사가 TV 리모콘을 찾고 있을 때, 중요한 장면이 나왔다.
앵커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한 거였다.
「아! 시청자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진행 중에 속보가 하나 더 들어왔습니다.
오늘 사건의 범인들은 경남 산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다시 한번 더 정정합니다.
현재 10곳 중에 경남 산음에서만 범인 두 명이 현장에서 도주하였습니다.
그러면 어찌 된 일인지 그곳을 연결해보겠습니다.」
앵커의 보도에 권 팀장과 팀원들은 모두 눈이 흔들렸다.
“하필이면 우리 관할에만 범인이 도주하다니!”
권 팀장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화면은 잠시 흔들리나 싶더니 이내 사건이 일어났던 원지 둔치로 바뀌었다.
권 팀장을 비롯한 형사팀원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소방대원들이 호스로 달집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망연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리포트가 마이크를 잡았다.
「네, 이곳은 얼마 전 사건이 일어났던 원지 둔치입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중국에서 목회 중인 목사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현재 인근 병원에 옮겨졌으나, 중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범인들은 건장한 체격의 청년입니다.
둘 다 검은 양복에 검은 마스크를 썼으며, 범행 후 유유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제 옆에는 이곳 치안의 책임자인 산음 경찰서장님이 계시는데요,
사건의 경위와 이후 범인 검거에 관하여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장님.」
화면에 경찰서장이 나타나자 권 팀장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졌다.
“뭐야? 서장님이 언제 저곳에 가셨지? 우리 팀, 조 형사는 왜 안 보이는 거야?”
권 팀장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형사팀원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맙소사! 우린 다 죽었다.”
최림 역시 서장의 불같은 성질을 잘 아는지라 신경이 곤두섰다.
“팀장님! 지금이라도 빨리 갑시다. 서장님 눈도장이라도 받아야죠.”
최림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 팀장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원은 취소다. 당장 현장으로 간다.”
하지만 둔치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철수한 모양이었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