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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을 향해
대동강 얼음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코앞에 와 있이니 봄도 머지 않았다. 무박일일 혹은 일박이일 일정으로 카이펑(开封)을 둘러볼 요량으로 세 시경 집을 나섰다.
짧은 일정이니만큼 배낭을 단출하게 해야 어깨가 편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 보조 배터리와 충전기, 귤과 믹스 커피, 상하 내의와 셔츠 한 벌, 세면도구 등을 배낭에 넣었다.
일기예보는 내일 상하이 기온이 최고 22도 최저 9도로 완연한 봄날씨인데 비해 북쪽에 위치한 카이펑은 최고 17도 최저 영하 1도라고 한다. 배낭 속에 셔츠 한 벌을 더 넣은 까닭이다.
전철 10호선과 4호선을 갈아타며 상하이역에 도착했다. 신분 확인과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해서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중국 정부가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돌아선 때문인지 기차역은 지역간 이동 통제가 비교적 느슨하던 두 해 전처럼 열 서너 개의 지역별 출발대기 대합실이 여객들로 발디딜 틈 없이 빼곡하다.
예매해 두었던 상하이를 출발해서 정저우가 종착역인 16:23발 K152 야간 침대 열차에 올랐다. 이 열차는 고속철 요금보다 절반 가량 저렴하고 여행객은 시간과 숙박료를 절감할 수 있는 등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다.
열차의 잉워(硬卧) 3층 침대 객실의 21번 중간층(中鋪)에 배낭을 내렸다. 승객들은 침대열차가 익숙한듯 마주보는 침대의 아래 위 지정 좌석에 몸을 누이거나 통로 창측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삐거득 소리를 짜내며 긴 몸통을 움직이기 시작하던 열차는 속도를 올리며 관성의 미끄럼틀을 타자 미끄러지듯 철로 위를 빠르게 달린다.
사람도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궤도에 안착하기까지 삐걱거리는 역경을 겪기 마련이다. 버거운 중력의 벽을 넘어 한 번 우주 궤도에 들어서면 수월하게 도는 인공위성처럼 관성이 붙고 나면 거저 먹기다. 열차는 속도를 조절하며 달려서 14시간 후 내일 아침 06:23경 카이펑역에 도달할 것이다.
차창 밖 스쳐지나는 풍경들은 우시를 지날 즈음 어둠에 묻혔다. 쿤산, 쑤저우, 우시(无锡), 창저우(常州), 단양(丹阳), 쩐장(镇江), 난징(南京), 추저우(滁州) 등 거쳐 지나는 곳마다 정차해서 한참 동안 뜸을 들이며 북상한다. 정차하는 역마다 승객들이 늘어서 객실 침대 칸은 빈 곳이 없어 보인다. 젊은 학생, 아주머니, 아저씨 등 남녀노소 다양한 장삼이사(張三李四) 승객들이 달리는 열차 침대에 하룻밤 몸을 맡겼다.
저녁 무렵 강릉을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청량리역에 도착하는 비둘기호를 탔던 육군 일병 때의 흐린 기억이라도 꿈속에서 되살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칸에 올라 몸을 누였다. 철로 위 울컹대는 바퀴의 울림이 누인 몸 전체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어렴풋이 들었던 잠이 다시 머리를 쳐든다. 밤 열 시 쯤 달리던 열차가 뻥부(蚌埠) 조금 못미쳐 샤오허쩐(小溪河镇) 부근에 정차해서 소등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사방이 쥐 죽은듯 고요하고 몸 뒤척이는 소리, 코 고는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옆 철로를 쏜살처럼 달려 지나는 열차 소리 등만 간간이 들린다. 철로 위의 'K152 열차 호텔' 4호차에 투숙한 셈이다. 좁고 불편하지만 중국이 아니면 결코 해볼 수 없을 특별한 경험 하나를 더 추가하니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열한 시 반경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6시 반경 열차가 카이펑 역에 정차했다. 새벽 네 시 반경 열차가 상치우(商丘)를 지날 때쯤 잠에서 깨었었는데, 여러 승객들이 어깨 아래로 머리를 깊숙히 숙인채 창측 간이 의자나 침대에 걸터 앉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불편하여 잠을 이루기 어려웠거나 목적지가 가까와졌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출구를 빠져나오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작은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로막은 채 하차한 승객들을 향해 마치 싸움을 걸기라도 하듯 거칠고 높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외쳐댄다. 택시 기사들이 호객을 하는 모습인데 말로만 듣던 허난(河南) 사람들의 거친 기질을 카이펑에 도착하자마자 목도하게 된다.
중국 허난성 황하강 남쪽에 자리한 이곳 카이펑(开封)은 하(夏), 위(魏), 후량(梁), 후진(晉), 후한(漢), 후주(周), 북송(北宋), 금(金) 등 여덟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팔조고도(八朝古都)이자 난징, 뤄양, 베이징, 시안, 안양, 항저우와 함께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불리는 역사가 오랜 도시다.
카이펑의 대표적 명소 중 개봉부, 상국사, 그리고 중국인들이 제일의 국보급 유물로 뽑았다는 '청명상하도'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청명상하원(清明上河园) 등을 가급적 도보로 둘러볼 요량이다.
역사 앞 이차선 도로 건너편에 단층짜리 건물들에 들어선 식당 서너 개가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중 핸드 스피커를 든 호객꾼이 열심히 손님을 부르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관탕빠오(灌汤包)를 시켰다.
닭 요리인 통즈지(桶子鸡), 잉어 요리인 리위베이미엔(鯉魚焙面), 땅콩 케이크인 화셩까오(花生糕) 등 꼭 맛보리라 생각했던 이 지역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인 관탕빠오를 카이펑에 도착하자마자 먹어볼 수 있어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관탕빠오는 강남 지역 샤오롱빠오(小笼包)의 원조격으로 모양새와 맛이 샤오롱빠오와 흡사한데, 크기가 두세 배 크고 발효된 피를 사용한다고 한다. 스피커에서 기차역 앞 허름한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케니 지(Kenny G)의 색소폰 연주곡 '러빙 유(Loving you)'가 감미롭게 흘러나와서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식당을 뒤로하고 2킬로여 거리 개봉부(开封府)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중산로를 따라 북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의 얕고 낡은 건물들이 '마도(摩都)'라 불리는 높고 번화한 빌딩이 즐비한 상하이와 대비되며 전혀 다른 쇄락한 어느 작은 지방 도시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빈허(滨河) 위로 놓인 다리를 통해 7미터 쯤 높이의 개봉 장벽(城墙) 안으로 들어섰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장벽 안쪽 공터에서 성벽을 백 보드 삼아 테니스 연습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아직 이른 아침인 7시 반경 포공호(包公湖)를 마주보며 남향으로 자리를 잡은 개봉부(开封府) 성문 앞에 도착했다. 개봉부(开封府)는 북송 수도 동경(东京)의 행정 및 사법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천하의 으뜸 관아(天下首府)'로 알려져 있다. 개봉부를 둘러싼 성벽 바깥 너른 광장에는 한 무리 사람들이 느릿하게 동작을 맞춰 태극권 수련에 집중하고 있다.
성문 정문과 마주보는 넓고 큰 벽면에는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신수 해태(獬豸)가 전력질주하며 이마에 달린 외뿔로 무언가를 들이받는 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고 옳고 그름, 선과 악, 충신과 간신을 분별할 수 있어 간사한 관리를 발견하면 뿔로 쓰러뜨려 창자를 먹어치운다고 한다.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는 포청천 등 청렴강직한 판관들이 부윤으로서 집무를 보던 개봉부의 성문 앞에 용맹과 공정을 상징하는 신화 속 해태상을 조성해 놓은 까닭일 것이다.
북송의 수도로서 가장 번성한 때의 인구가 100만여 명에 달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고 하니, 분쟁과 송사도 많았을 터이니 관아에 대한 백성들의 공평무사한 법 집행에 대한 요구가 컷을 것이다.
개봉부
개봉부는 후량 카이핑(开平) 원년(서기 907년)에 처음 건설되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 현재는 대지 4만㎡, 건축면적 13,600㎡에 정문, 의문, 정청, 의사청, 매화당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로 천경관, 명례원, 잠룡궁(潜龙宫), 청심루, 옥사, 영무루 등 50여 동의 전당과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의문(儀門), 좌우측에 비정이 하나씩, 비정 뒤에 부사서옥(府舍西獄)과 포공사법박물관이 각각 위치한다. 비정의 개봉부윤제명기비(開封府尹題名記碑)는 송나라 태조 원년 960년부터 휘종 4년 1105년까지 146년 기간 중 카이펑 부윤 183명의 이름과 관작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비석 어디쯤에 구양순, 범중엄, 사마광을 비롯해서 '판관 포청천'이라는 드라마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포증(包曾) 등의 이름도 들어 있을 것이다. 명나라 말 황하가 또 다시 범람해서 카이펑 관청이 유실되었지만 이 비석은 건사되었는지 원본이 카이펑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카이펑과 뤄양 등 황하 중하류 지역은 너른 황화의 품에서 황화문명을 탄생시킨 곳이지만 잦은 홍수로 제방이 천 수백여 차례나 무너지고 물길이 26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물이 넘쳐 모래와 진흙이 덮친 도시에 다시 도시를 세우기를 반복하여 카이펑의 땅 속에는 전국시대 위나라, 당나라, 북송, 금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도시가 아래에서 위로 차례로 차곡차곡 잠자고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질 않는다.
죄인들을 가두어 두는 장소인 부사서옥(府舍西獄) 내부는 한두 평 남짓 크기로 나누어진 좁고 어두운 수감소가 칸칸이 구획되어 있다. 그 벽면에는 각양각종 형태의 고문과 형벌을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하는 자료가 붙어 있다.
코를 자르는 의형(劓刑), 곤장으로 치는 장형(杖刑), 눈을 도려내는 결목(抉目),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 독을 주입하는 짐독(鴆毒), 끓는 물에 끓이는 탕확(湯镬), 발을 자르는 월형(刖刑), 녹은 주석이나 납 물을 입으로 주입하는 관연(灌铅), 단어 뜻 그대로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능지(陵遲) 등 종류별 형 집행을 묘사한 잔혹한 그림들이 소름을 돋게 한다.
뜰 한가운데 포공의 전신 동상이 자리하고 '집법여산(集法如山)'이라 쓰인 편액 걸린 건물 안에 포공의 생애와 행적 등을 전시하고 있는 포공사법문화박물관을 잠시 둘러보고 의문으로 들어섰다. 청사(厅事) 마당 한가운데 '공생명(公生明)'이라 쓰인 계석(戒石)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 좌청과 우청이 자리한다.
청사 안 정면 벽 높이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이 걸렸있다. 그 아래 황금빛 노도 그림을 배경으로 큰 집무 탁자와 의자가 놓였고 그 앞에 용(龍), 호(虎), 개(狗) 두상의 큼지막한 작두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앞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주위 사람들 시선을 아랑곳 않고 무릎을 꿇은채 두 손을 쳐들고 허리를 연신 굽혔다 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무언가 하소연을 토로하고 있다. 무슨 풀지 못한 억울함이 있었길래 천 년 전 판관의 집무실에 들어와서 저리 간절히 호소하는 것인지 궁금증과 함께 안타까움이 인다.
정청(正厅) 뒤쪽으로 의사청(議事廳), 제민당(濟民堂), 매화루(梅花楼), 그리고 '대송남아(大宋南衙)'라는 각자가 적힌 조벽(照壁)이 차례로 자리한다. 매대 위에 기념품 등 잡화가 가득한 제민당에서 발길을 돌려 그 뒤편 매화당으로 들어섰다.
포공이 민소(民訴)를 듣던 곳이라는 말처럼 공손책(公孙策)과 마한(馬漢), 왕조(王朝), 조호(趙虎), 장룡(張龍) 등 부관들이 늠름한 자세로 양옆에 시립하고 있고 무릎을 끊은 채 포공에게 억울함을 아뢰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귀 기울여 듣는 포공 등의 밀랍인형 조각상이 당시의 모습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개봉부의 맨 뒤쪽 조벽(照壁)은 담장역할을 겸하고 있다. 매화당과 조벽 사이 뒤뜰엔 '봄의 전령'이라 불리는 황매화 라메이(腊梅)가 가지마다 앙증맞은 작은 꽃을 틔웠다.
개봉부 경내 좌측 맨 뒤쪽 깊숙히 천경관(天慶觀)을 지나 태상노군으로 추앙받는 노자 등 천존(天尊) 세 위의 조상을 모신 삼청전(三清殿)이 자리한다. 그 좌우 벽면은 공자문도도(孔子问道图)와 노자화호도(老子化胡图) 부조가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도(道)를 묻는 장면과 노자가 함곡관을 벗어나서 서역으로 가서 서역인과 천축인을 교화했다는 전설위상각각 묘사하고 있다. 자못 도교가 유교나 불교 보다 위상이 높다는 것을 은연히 어필하고 있다.
삼청전 앞 마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송 인종 등 황제 5위의 신주를 모신 복우전(福佑殿)과 송 태조 등 황제 3인의 신위를 모 신 성조전(聖祖殿)이 각각 자리한다. 사찰 맨 뒤쪽 높고 깊숙한 곳에 조사당을 조정하는 것과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삼청전 옆 벽면에 '연기원 휴식실(演员休息室)'이라는 팻말이 걸린 통로 안쪽에서 옛 관복 차림 한 무리 사람들이 옷매무새와 얼굴 분장을 고치고 있다. 아홉 시가 가까워지자 일렬로 서서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그들 뒤를 따라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영무루 앞마당 양쪽의 장랑에 걸린 개봉 부윤의 부조도를 둘러볼 때, 관람객을 위해 이곳에서 여섯 가지 공연을 각기 하루 두 세 차례 연출한다는 안내문을 보았던 터였다. 공연 프로그램 목록에는 개아영빈(开衙迎宾), 포공단안(包公断案), 태극 쿵후(太极功夫), 방전촉서(榜前捉婿), 민간잡예(民间杂艺), 연무장 영빈(演武场迎宾)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정문 앞 광장에는 언제 몰려들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운집해 있다. 부관들과 수십 명 관졸들이 양옆에 시립한 가운데 포증이 고소인의 얘기를 경청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10여 분간 지켜보았다. 일면 연기자의 과장된 제스처와 톤을 높인 목소리가 '산처럼 엄중하고 사사로움 없는 법 집행(执法如山 铁面无私)'으로 아직껏 칭송받고 있는 포증의 실제 모습을 보고 있는 듯 하다.
개봉부 내 오른편 명경호(明镜湖)를 끼고 자리한 명례원, 잠룡궁(潜龙宫), 청심루 등은 둘러보지 못하고 남겨둔채 개봉부를 뒤로흐고 대상국사(大上国寺)로 걸음을 옮긴다.
대상국사
주말의 아침은 아직 일러 고도의 길거리 사람 모습은 드문드문하다. 간혹 스쳐 지나는 사람들 중 젊은 남성들은 남쪽 강남지방 사람들에 비해 체격이 커 보이고 걸음걸이도 호기롭다. 대로에서 어수선해 보이는 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대상국사(大相國寺) 정문 앞에 도착했다.
북제(北齊) 때인 555년에 창건된 고찰로 당나라 예종이 황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712년에 대상국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전란과 수해로 훼손되었던 것을 청나라 강희 10년(1671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개봉부와 마찬가지로 이곳 사찰에서도 입장료를 받고 있다. 상하이 등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대도시들과는 달리 지방정부의 재정이 넉넉지 않은 까닭인 듯싶다. 이들 명소의 입장료는 개봉부가 65위안, 이곳 상국사가 40위안, 청명상하원이 120위안이다.
산문으로 들어서니 계단 아래 넓은 마당 너머 천왕문이 보이고 그 좌우로 고루와 종루가 마주보며 자리한다. 좌측 고루에는 재신 관우, 종루에는 지장보살의 조상(彫像)이 각기 좌정하고 있다. 고루 앞에 버드나무를 뽑는 노지심(鲁智深)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본명은 노달(鲁達)로 고전소설 수호전(水滸傳)의 캐릭터 중 한 명이다. 원래 위주(渭州, 현 간쑤성 平凉) 경략부에서 군대 훈련과 도적을 감독하는 직무를 담당하던 제할(提辖)이었는데, 주먹으로 악질 진관서(鎭關西)를 때려죽이고 관부를 피해 출가하여 ‘지심(智深)’이라는 법명을 갖게 된다.
가공할 힘과 완력의 소유자로 맨주먹이나 무기를 든 싸움에 모두 절륜한 실력을 뽐냈다고 한다. 화통한 성격에 인정 많고 의협심이 강한 반면, 불같은 성미와 고약한 술버릇도 가진 전형적인 협객형 인물이다.
여기에 그의 동상이 자리한 것은 한때 이곳 상국사에 적을 두고 소작농들의 채소밭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하며 행패와 도적질을 일삼는 양아치들을 제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 위에서 우는 까마귀 소리가 거슬리자 버드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린 일화에서 그의 기질과 괴력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방문했을 때 시내 어느 광장 가장자리 길 옆에서 안데르센의 동상을 만난 적이 있다.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인어 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등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 그의 명작 동화들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꿈과 감동을 주고 있다.
수호전은 당나라 때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구어체 형식의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여진 최초의 소설로 통념의 경계를 넘어 과장, 미화, 해학, 풍자 등 다양한 문학적 도구와 재료에 무한한 상상력을 버무려 낸 작품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상식과 몰염치가 판치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희망과 위로를 건네주고 있으니 무협소설 장르상 다소 허황된 요소가 있은들 무슨 흠이 될까.
주 건물들을 따라 난 종축 바닥 꽃무늬 벽돌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천왕전과 대웅전 사이에는 방생지가 자리하고 그 위에 걸린 아치형 석교가 아름답고 연못 속 거북과 학 조각상은 수려하다. 석교를 건너면 대형 철제 향로 탑과 그 양쪽에 탑신 각 층 각 면마다 불상을 돋을새김 한 팔각구층 석탑이 나란히 자리한다.
대웅보전에는 협시보살과 함께한 석가모니불을 비롯해서 여러 나한들 가운데 오른쪽 팔을 하늘로 길게 뻗치고 있는 탐수나한(探手羅漢; explore hand Luo's man)과 가슴 속에 부처상을 펼쳐보이는 개심나한 (開心羅漢)의 독특한 형상이 눈길을 잡는다.
상국사의 전각들 가운데 팔각 전각에 사면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그 둘레의 2층 회랑 구조 전각 안에 오백나한상을 층층이 조성한 오백나한전이 압권이다. 장경루에서는 태국에서 온 황금과 옥석으로 장식한 진녹색 유리보살과 상하이 옥불사에서 보았던 석가모니상과 모습이 흡사한 아름다운 백옥석 석가모니불이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장경루에도 좌우와 뒤편 벽 둘레에 아름다운 나한 조각상들을 배치했다. 한 시간 이십여 분만에 상국사 경내를 설렁설렁 둘러보고 거쳐 왔던 전각들을 거꾸로 거슬러서 가며 산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인 청명상하원을 향해서 북쪽으로 뻗은 보행가 거리로 들어섰다. 건물 벽과 지붕이 아치형 곡선 창틀과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으로 치장한 로코코 풍의 2~3층 높이 상가 건물이 양쪽으로 줄지어서 있다.
보행가 북쪽 출구 부근 '대환가(大丸家)'라는 가게에서 꼬치 어묵을 들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장에게 부탁해서 콘센트를 꽂고 보조 배터리 충전을 했다. 휴대폰도 그렇고 보조 배터리도 처음 구입했을 때처럼 한 번 충전하면 시간이 오래 가지 않고 빠르게 방전되어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해서 점하고 있는 A사가 만든 아이폰이 운영시스템 업그레이드 시 배터리가 빨리 소진되어 소비자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해 과징금을 물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지구상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고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럼에도 유수의 세계적 기업이 계획적으로 제품 수명과 교체 주기를 짧게 하여 소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크나큰 해악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것은 해악이라기 보다는 죄악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보행가가 동서로 뻗은 쓰허우지에(寺后街)와 만나는 지점에 성벽처럼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솟은 3층 건물 고루가 자리한다. 큰 북 두 개가 누각 문루 양쪽 옆에 자리한 고루 앞 건널목을 건너면 서점가(書店街)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군데군데 오래되거나 세련되게 단장된 크고 작은 서점들이 눈에 띄는 이 거리에는 음료와 간식거리를 파는 각종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데 젊은이들로 북적대어 활기가 넘친다.
'행복카'라는 커피와 차를 파는 테이크아웃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15분여를 기다렸다.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는 주문을 도와준 여고생 둘은 인근 상치우(商丘)에서 놀러왔다고 한다. 계화(桂花) 향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한국인임을 알자 신기해하는 이 친구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며 함께 인증 숏도 한 컷 남겼다. 서점가(書店街) 북쪽 출구로 빠져나와 시따지에(西大街)를 따라 청명상하원으로 향한다.
청명상하원
상하이에서 자주 이용하던 파란색 공헝(公亨) 자전거가 보여 반갑다. 자전거를 지쳐 송도황성(宋都凰城) 관광구 호수를 낀 도로를 좌측으로 휘돌아서 청명상하원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북송의 화가 장택단이 12세기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東京, 별칭 汴京, 현 카이펑)의 청명절 모습을 담은 폭 24.8cm, 길이 528.7cm 크기의 그림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속 건물과 마을 등을 재현해 놓은 곳이라고 한다.
매표소부터 관람객들이 넘쳐난다. 당초에는 그림 속 정취를 그대로 느껴볼 요량으로 청명절인 4월 5일에 맞추어 이곳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수많은 인파를 보니 당초 계획을 일찌감치 앞당겨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입장표를 사서 입구로 들어서니 청명상하도 그림을 큰 석벽에 새긴 부조가 맞이한다.
동경부두(东京码头)에는 유람객들을 태운 배들이 호수로 나아가거나 부두로 들어오고 있다. 호수 위 난간을 붉은 색으로 칠한 홍교(虹桥)는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변하(汴河) 위에 걸린 폭이 넓은 다리를 재현해 놓은 것일 터이다. 다리 아래로는 배가 오가고 그 위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건너간다. 주말을 맞아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갇혀 지내던 갑갑함을 떨쳐버리려고 모두들 집을 뛰쳐나온 것일 터이다.
홍교를 건너자 비파를 타는 대형 선녀상이 맞이하는 광장이 나온다. 어떤 가게 앞에서 훈제한 닭을 큰 칼로 썰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살코기 한 점을 건네며 맛보라고 한다. 암탉을 오리나 돼지고기 육수에 한약재와 향신료를 넣어 삶아낸 이 지역 고유의 요리 '통즈지(桶子鷄)'라고 하는데 짠맛이 강하다.
내친 김에 점원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땅콩을 갈아서 만든 떡이라는 화셩까오(花生糕)도 한 조각 맛을 보았다. 때때로 황하가 범람하며 펼쳐 놓은 모래밭은 땅콩을 재배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호수와 운하 등 물이 많아 오리 사육에 적당한 강남 지역과는 달리 이곳이나 북경 등 북방 지역에서는 카오야(烤鴨 )등 오리로 만든 요리는 고급 음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여 점원은 카이펑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통즈지와 화셩까오를 함께 든다고 한다. 종이로 포장된 정사각형 모양의 화셩까오 한 덩이를 사들고 나왔다.
이처럼 관람객들로 넘쳐나는 모습은 900여 년 전 청명절 즈음 카이펑의 번화한 거리 모습과 흡사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카이펑의 진정한 번영은 운하가 개통된 후 조운의 중심지가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가 번영 발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중국의 대운하 건설은 기원전 486년에 시작되었으며 수당(隋唐), 경항(京杭), 절동(浙东) 3개 대운하의 총 길이는 2700km로 베이징, 톈진, 허베이, 산둥, 허난, 안후이, 장쑤, 저장의 8개 성 및 직할시에 걸쳐 있다.
카이펑은 그중 수당 대운하의 가장 큰 수혜 도시가 되어 한 때 번영을 누렸으나, 오늘날엔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한 정저우에 성도(省都) 자리를 내어주고 일개 지방 도시로 밀려났으니 어느 나라나 도시든 흥망성쇠는 피해 갈 수는 없는 역사의 섭리인가 보다.
장택단의 걸작 <청명상하도>는 그 절정기인 휘종 때의 변하(汴河) 양안의 번화한 저잣거리와 교외의 자연을 정교하고 절륜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음식배달원, 구법승, 과거생, 수레 수리공, 뱃사람, 짐꾼, 일용직 노동자, 가마나 말 탄 사람, 거지, 점집, 찻집, 숙박업소, 수레, 술통 등 각종 직업군의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을 위해 계절에 따라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포공영빈(包公迎宾), 포공 순시 변하조운(包公巡视汴河漕运), 민속절화(民俗绝活), 악비창도소양왕(岳飞枪挑小梁王), 대송 동경보위전(大宋东京保卫战), 대송절기(大宋絶技) 등 무수히 많은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운 좋게도 포공영빈, 채찍 묘기와 잡기, 고전극 등 공연의 일부를 콩나물 시루같이 빼곡한 관람객들 틈에 끼어 볼 수 있었다. 그 중 축구장 넓이의 '교장(教场)'이라는 공간에서 마상 전투 장면을 실감나게 펼치는 송나라 명장 악비의 무과시험 때의 고사를 재현한 '악비창도소양왕' 공연이 가히 압권이다.
북송의 이강(李纲), 종택(宗泽) 등 항전파 장수들과 군민이 금나라 군의 침략에 맞서 수도 동경(현 카이펑)을 방어하기 위해 치른 전투를 재현한 '대송 동경보위전(大宋东京保卫战)'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동 전투에서 송군은 금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쳤지만, 조정 내에서 휘종과 흠종 등을 필두로 한 타협파들로 인해 결국 보위전은 패하고 168년간 지속된 북송(960~1127년)은 멸망을 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중국 여느 지역의 관광구와 마찬가지로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중국 역대 민간 인물 조각상 소품들을 전시한 '대박조상박물관(大朴造像博物馆)'과 각 시대별 기름 등잔을 전시해 놓은 '상명고등박물관(常明古灯博物馆)'이 그것이다.
두 박물관에 진열된 갖가지 인물상을 비롯해서 백 가지 형상의 사자등, 연화등, 철등(铁灯), 석두등(石头灯), 청화자등, 동물등, 벽등, 연유등, 쥐등 등등 모양, 연료, 재질 등에 따라 온갖 이름이 붙은 등(灯)을 보며 중국인들의 편집광적 유물 수집과 박물관에 대한 집착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해가 지면 시작되는 700여 명의 배우들이 참여해서 <청명상하도>와 <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을 기반으로 북송 왕조의 전성기를 그려낸다는 총 6막 4장의 '대송동경몽화(大宋·东京梦华)'를 관람하지 못한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절반 쯤 기울 무렵 출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상하이로 돌아가는 열차 시각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어 자전거를 지쳐 대량문(大梁门)까지 가서 성벽을 둘러보았다. 대량문은 카이펑 고성의 서문으로 당나라 때인 781년에 세워졌고 북송 때는 '창합문(阊阖门)'으로도 불렸는데, 전쟁과 홍수로 파괴되어 철거되었다가 1998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풍요롭지만 때론 광포한 황화의 품에 안겨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도, 홍수로 땅 밑에 6개 왕조 도성이 층층 묻혀 있는 카이펑을 뒤로하고 북역에서 상하이행 고속철도에 몸을 실었다.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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