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의 복사 올렸습니다
논어공자 인쇄필
논어 - 인간관계론의 보고(寶庫)
춘추전국시대
배움과 벗
옛것과 새로운 것
그릇이 되지 말아야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공존과 평화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이론과 실천의 통일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광고 카피의 약속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공자의 모습 춘추전국시대
『논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노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공자 당시에 『논어』라는 책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학단學團 차원의 사업으로 편찬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정황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사회에 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개진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성격을 이해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경제사적 의미에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게 보아 춘추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경牛耕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深耕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呂不韋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방식도 변했습니다. 네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 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車戰이 평민 병사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변화했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 경쟁이 국가 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공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경卿)―사士(가신家臣)―서인庶人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위계질서의 재편은 먼저 제후와 대부의 강성强盛으로 나타납니다. 천자의 토지 소유권이 제후와 대부에게 넘어가는, 토지 소유권의 하이下移 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주 왕실의 물적 토대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임금인 유왕幽王이 왕비 포사褒팚의 웃음을 보기 위해 거짓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불렀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거짓 봉화에는 각지의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막상 서방의 만족蠻族이 침범해왔을 때 올린 세번째 봉화에는 군대를 이끌고 온 제후가 아무도 없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주 왕실의 위급함을 돕기 위해서 달려온 제후 군대가 없었다는 것은 그것이 설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실은 제후와 대부가 그 세력이 강성해지고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 왕실은 직할지의 병력과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낙읍洛邑의 주 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제후와 대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요. 이렇게 등장한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다시 전국시대에는 7국으로,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대周代의 종법宗法 질서가 진한秦漢의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전환되는 사회 재편기입니다.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士君子)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계층은 민간인 신분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공자학파 역시 춘추 말엽에 활동하던 여러 민간 학파 중의 한 갈래로 분류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이고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공자의 사설私設 학숙學塾은 이러한 수요에 부응한 관리 소개소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경제적 특징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사회 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와 『논어』를 논하기 위해서는 비단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경제적 배경만으로 충분할 리가 없습니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온 사상이 바로 유가 사상이고 그 중심이 공자이고 『논어』입니다. 2천 년 동안 쌓아온 공자상孔子像은 이미 실증적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곡부에 있는 대성전大成殿의 장대하고 화려한 풍경은 공자 당시의 풍경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공자를 빙자하려는 역대 제왕들이 공자를 금으로 칠갑해놓았습니다. 진짜 공자를 만나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논어』와 공자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연구물도 엄청나게 쌓여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상반된 시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이 우리의 독법을 대단히 어렵게 합니다. 『논어』의 시대를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하는 노예주 계급의 복례復禮 노선과 사유제를 주장하는 소인 계급의 변혁 노선이 충돌하는 시기로 파악하고, 공자를 노예주 계급을 변호하는 복고주의자로 규정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논어』에 나타나 있는 인人과 민民의 어법을 면밀히 조사하여 인을 노예주 계급, 민을 노예 계급으로 규정하고 공자의 사상은 시종 인 계급人階級 내부의 담론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편 공자 사상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조명하기도 합니다. 인人과 인仁의 의미는 물론이며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개념도 그것을 계급적 틀에 가두지 않고 윤리적 개념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해석함으로써 공자 사상을 만세의 목탁으로 격상시켜놓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군자士君子라는 제3의 주체를 역사 무대의 전면에 세움으로써 지배와 피지배라는 2항 대립의 물리적 대립 구도를 3항의 견제 구도로 지양시켰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공자와 『논어』의 시대를 둘러싼 논의가 우리들의 독법을 대단히 어렵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시 문안을 읽어가면서 필요한 대목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배움과 벗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러분도 알고 있는 「학이」편學而篇에 있는 『논어』의 첫 구절입니다.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구字句 해석에 관한 몇 가지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구절에 담겨 있는 사회적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가 종래의 종법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 이전의 과도기였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 우선 눈에 띕니다.
'학습’이 그것입니다.
학습은 그 자체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학습이 적어도 수능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기修己는 물론이며 치인治人도 학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론 “기쁘지 않으랴”라고 공자 자신의 개인적 심경의 일단을 표현하는 지극히 사적인 형식으로 개진되고 있습니다만, 학습에 대한 언급은 사회 재편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예가 다음 구절에도 있습니다. ‘붕’朋의 개념입니다. 붕은 친우親友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입니다. 계급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같은 계급 내에서는 물론 존재할 수 있습니다만 멀리서 벗이 온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뛰어넘은 교우交友에 의미를 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붕은 수평적 인간관계이며 또 뜻을 같이하거나 적어도 공감대가 있는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공자의 학숙에는, 초기에는 천사賤士의 자제가 찾아왔으며 후기에는 중사中士의 자제도 입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붕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 역시 사회 재편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다는 마지막 구절의 의미입니다. 공자는 식읍食邑을 봉토로 받는 대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그러한 신분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녹祿을 받는 사士, 즉 피고용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퇴하여 결국 사설 학원 원장으로 일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엽지 않으니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라는 1인칭 서술은 물론 공자 자신의 달관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술회가 공자학단의 역사적 책무에 관한 소명 의식을 천명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그러한 달관이 사회적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치’에 대한 언급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곳 이외에도 ‘습’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 가지(또는 여러 번)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전불습호’傳不習乎가 나옵니다만 이 경우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현의 말씀(傳)을 복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것(不習)을 가르친다(傳)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전傳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不習) 있지는 않은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언言 행行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하나의 사회적 유형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장老莊이나 한비자韓非子의 책에는 도처에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는 부류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문안을 통해 다시 확인되겠지만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관계에 관하여 깊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회의 본질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만은 여러분과 합의해두고 싶은 것이지요.
여러분도 각자 사회에 대하여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집합으로 사회를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의 유기체 또는 건축적 구조로 규정하기도 하고 생산관계, 정치 제도, 문화기제, 소통 구조 등 여러 가지 개념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어느 기자로부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자본론』資本論과 『논어』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의아해했어요. 이 두 책이 너무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 같이 사회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 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 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은 물론 변혁 이론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지만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제도의 핵심 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 혁명 또는 경제 혁명이나 제도 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線型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 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것과 새로운 것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爲政」
이 구절은 널리 원용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는 까닭은 먼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재조명하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과거란 흘러가버린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과거는 추억의 시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古墳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허약하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음 글은 『진보평론』에 기고한 「강물과 시간」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200살, 300살이라고 대답한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미래 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주로 ‘미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초점을 맞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우리가 『논어』의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통일적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 지천태괘地天泰卦의 효사爻辭에서 ‘무왕불복’無往不復이란 구절을 읽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었지요. 20세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세기에 대한 숱한 소망과 전망이 제시되었지만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온고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新)를 지향(知)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온고 쪽에 무게를 두어 옛것을 강조하는 전거典據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온고보다는 지신에 무게를 두어 고故를 딛고 신新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溫의 의미를 온존溫存의 뜻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절이 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生還과 척결剔抉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릇이 되지 말아야 君子不器 ―「爲政」
이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분명합니다. 여러 주註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듯이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입니다. 어떤 그릇은 밥그릇으로도 쓰고 국그릇으로도 쓴다고 우길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그릇(器)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합니다. 또 이 구절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논어』 구를 부정적으로 읽음으로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베버의 경우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입니다.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 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의 거부로 이해했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官僚性)를 거부하였고, 이윤 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 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막스 베버의 논리가 자본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를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뛰어넘고 그것의 대안적 모색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 점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재조명하고 싶은 것이지요.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感性에 이르기까지 두루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공자의 전기前期 유가 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군자불기’ 역시 노예주 귀족들의 사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 개의 기器나 ‘부분적이고 하찮은 기예’(末葉小道)는 소인들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군자불기’가 이처럼 비록 군자학君子學으로 거론된 것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전문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爲政」
이 글은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정」편의 이 구절은 법가적法家的 방법보다는 유가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법에서 적극적 가치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춘추전국시대 같은 총체적 난국에서는 단호한 법가적 강제력이 사회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치德治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治世의 학學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法治는 난세亂世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법가와 유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법가 강의 때 다시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司法 원칙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이지요. 형은 위로 대부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예는 아래로 서인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예의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여기서는 형과 예의 차이를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하지요.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관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입장이지요. 사회적 질서는 이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벌에 의한 사회질서의 확립이 더욱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예는 그 접근 방법에 있어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간관계의 개념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춘추전국시대를 법가가 통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 제국인 진秦나라가 단명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법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한秦漢은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秦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의 과정이며 한漢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수성守城의 시기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부끄러움(恥)에 관한 것입니다. 덕德으로 이끌고 예禮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교통순경이 교통법규 위반 차량 네다섯 대 중에서 한두 대만 딱지를 끊자 적발된 차량 운전자가 당연히 항의를 하였지요. 저 애도 위반이라는 것이지요. 교통순경의 답변이 압권이지요. “어부가 바닷고기 다 잡을 수 있나요?” 처벌받는 사람은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다만 운이 나쁜 사람인 것이지요.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八佾」 자하가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 구절의 뜻을 공자에게) 질문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素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素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은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商) 나를 깨우치는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이 대화의 핵심은 이를테면 미美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소와 보조개와 검은 눈동자 같은 미의 외적인 형식보다는 인간적인 바탕이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글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미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소素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의 의미는 인간적 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품성이란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도야되는 것이며 인간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조형성造形性과 품성에 관한 논의는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조형성이 미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승인하는 경우에도 그 조형성에 대한 평가 기준이 문제가 됩니다. 그 시대의 조형미는 그 시대 특유의 미감美感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스타와 우리 세대의 스타가 조형성에 있어 차이가 있는 까닭이 그런 것이지요. 얼굴 생김새가 미인이기 때문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이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미인론의 일환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素와 예禮와 인간관계에 관한 논의입니다.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 흔히 ‘공주병’이라고 하는 증세들이 그런 것이지요.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개인이 책임짐으로써 끝나는 느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초기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더욱이 정작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현대는 미의 기준이나 소위 미모가 획일적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미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반대로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졌습니다. 미인의 사회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미인론을 펼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과장되기도 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미美는 글자 그대로 양羊 자와 대大 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언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 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미의 문제를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미인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미의 본령을 그 외적 형식으로부터 인간관계의 문제로 되돌려놓는 이 『논어』의 대화는 매우 뜻 깊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존과 평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서 먼저 지적해야 하는 것은 화와 동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F. Saussure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통체적統體的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 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항 대립적 차이이건 또는 모든 것과의 차이화를 통한 개념 구성이든 상관없이 차이 짓기 방식은 결과적으로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하지요. 대비 방식은 이러한 차이화에 대한 경계이며 분分과 석析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근대성과 다른 일면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란 어차피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으로서의 이른바 감성적 인식은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 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화和와 동同을 대비로 보지 않습니다. 화를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해석하고 동을 부화뇌동附和雷同과 동일同一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느 경우든 화와 동이 대對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의 의미도 첫 구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동을 시종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유럽 근대사는 존재론적 논리가 관철되는 강철의 역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근대사의 정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패권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지요. 그러므로 동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구성 원리에 있어서 상통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화동 담론이 우리의 통일론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화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은 통일 과정에서 요구되는 전 과제의 90%를 차지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공존과 평화 정착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이후부터는 대체로 시간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화의 원리는 통일 과정의 출발점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우리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화의 원리는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세계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화의 원리로 우리의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노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동 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子曰 德不孤 必有隣 ―「里仁」
덕德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글이고 별로 어렵지 않은 글입니다. 백범 선생이 평소 자주 인용한 글 중에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라는 글이 있습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미모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백범 자신이 스스로를 미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보다고 이 글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건강(身好)은 실생활에 있어서 미모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구나 백범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로서는 더욱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백범의 이 구절에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를 추가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글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루쉰魯迅이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그렇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 루쉰은 건장한 중국 청년이 러시아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건장하지만 우매한 조국 청년의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였지요. 우매한 대중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쇠 방에 갇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중국인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루쉰의 경우는 심心의 의미를 각성과 의식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심호心好를 각성이나 의식의 의미로 읽지 않고 ‘마음씨’ 또는 ‘인간성’의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보다는 마음씨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모의 기준을 외적인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에서 형식미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백범을 넘어서 그리고 루쉰을 넘어서서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心)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신호불여심호’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가 그것입니다. “마음 좋은 것이 덕德
좋은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덕의 의미는 『논어』의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웃’(隣)입니다. 이웃이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입니다. 심心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성과
품성의 의미라면 덕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좋으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넓어지겠지요. 그리고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 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령공」편衛靈公篇에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그리고 ‘군자우도불우빈’君子憂道不憂貧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할 따름이며 결코 식食이나 빈貧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청빈淸貧의 예찬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아가 ‘사람과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혁기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한결같이 경구驚句로 삼았던 금언이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는 것이었어요. 운동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과의 접촉 국면을 확대하는 것, 그 과정을 민주적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리고 주민과의 정치 목적에 대한 합의를 모든 실천의 바탕으로 삼는 것, 이러한 것들이 모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로서의 덕이 사업 수행에 뛰어난 방법론으로서 검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顔淵」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足食), 군사(足兵)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民信之)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去兵).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去食).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구절입니다. 자공子貢은 호상豪商으로, 공자의 주유周遊에 동참하지 못함을 반성하여 공자 사후 6년을 수묘守墓한 제자입니다. 그리고 공자 사후에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자 교단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공과 함께 부활했다고 하지요.
공자가 국가 경영에 있어서 신信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천명한 까닭은 물론 그 기능적 측면을 고려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으면 백성들은 얼마든지 유입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백성이 곧 식食이고 병兵이었습니다. 백성으로부터 경제도 나오고 백성으로부터 병력兵力도 나오는 법이지요.
이처럼 백성들의 신뢰는 부국강병의 결정적 요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논어』의 이 대화의 핵심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秦나라 재상으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엄격한 법가적 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상앙商?에게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상앙은 진나라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원인은 바로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대궐 남문 앞에 나무를 세우고 방문榜文을 붙였지요.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백금百金을 하사한다.” 옮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금을 천금千金으로 인상하였지요. 그래도 옮기는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상금을 만금萬金으로 인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금을 기대하지도 않고 밑질 것도 없으니까 장난삼아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방문에 적힌 대로 만금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진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만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일화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信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人+언言’의 회의會意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신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信이란 곧 신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정政의 의미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政은 정正입니다. 그리고 정正이란 뿌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정치란, 우리나라 제도 정치권의 현실처럼 정권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정치를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정치란 계급 지배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논의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正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정正은 정整이며 정整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논어』에서 인仁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顔淵에게는 인이란 자기(私心)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仲弓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사마우司馬牛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其言也訒)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에게 맞는 답변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仁을 애인愛人 즉 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지樊遲는 공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모는 마부입니다. 늘 공자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자입니다. 번지에게 인의 의미를 애인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점이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공公(禮)과 사私(己)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은 나(己)와 남(人)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마우에게 이야기한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其言也訒)라고 하는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한 까닭은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訒乎)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知에 관한 공자의 답변은 그 언표言表에 나타난 의미와 앞뒤의 문맥으로 보면 비교적 간단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이어지는 대화는 곧은 사람으로서 굽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왕齊王 건建은 보통 사람의 세 배나 되는 재주가 있었지만 현자賢者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秦의 포로가 되었다고 지인知人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知란 사람을 알아보는 것, 즉 인재를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知란 지인이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실용적 의미로 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전체의 구상에서 보더라도 그럴 뿐만 아니라 인仁과 지知, 애인愛人과 지인知人은 『논어』의 근본 담론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知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인간과 관련이 없는 지식이 과연 존재하는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법입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어떤 측면에 주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그 사람에 관한 파일을 구하거나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하물며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엄청난 정보의 야적野積은 단지 인식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폄하하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회입니다. 상품 가치와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한 점의 인연도 없습니다. 지知는 지인知人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無知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 뿐입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里仁」
이 구절을 함께 읽자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부귀와 빈천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해석에 다소의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특히 도로써 얻은 빈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욱 막연합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得을 탈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도로써 얻은 빈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꼭 빈천은 아니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부귀와 상관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 도로써 얻은 빈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귀를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에 의존했다가 빈천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빈천은 불거不去해야 하는 것이지요.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고 싶은 이유는 빈천을 무조건 탈피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천도 얼마든지 도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떤 가치라는 것을 선언하고 싶은 것이지요.
어느 경우든 우리가 이 글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에 대한 반성입니다. 부의 형성 과정이 정당한 것인가, 그 사람의 출세가 그 능력에 따른 정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보편적인 시각은 오로지 그 결과만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천의 경우도 그것을 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세태입니다. 게으르다거나 낭비적이라거나 하는 시각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빈천의 역사를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 일입니다. 몇몇 드러난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의 형성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에서는 그 역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조 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자유당·공화당·신한국당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그와 그의 가계家系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역사가 줄줄이 구전口傳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부귀와 빈천이 있기까지의 전 과정이 소상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나누는 대화가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청산은커녕 과거가 은폐되고 있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망각되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요.
개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침략과 수탈의 역사입니다. 엄청난 집단적 학살로 점철된 20세기를 청산하고 평화의 세기를 갈망하던 우리들의 소망이 21세기의 벽두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부귀에 대하여 그 과정과 그 도道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그 어두운 역사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까지도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역사의식과 이러한 사회의식이 청산되지 않는 한 한 개인의 부귀와 빈천의 온당한 의미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보학譜學이라는 문화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야 자손을 위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학으로 될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관계망과 역사의 관계망, 즉 시공時空을 관통하는 관계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망網을 뜨개질하는 것이 근본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들의 천민 의식賤民意識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爲政」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 정도의 번역으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가 어렵지요. 짐작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학學과 사思의 뜻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화이부동을 설명하면서 대비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 구절도 완벽한 대비 형식의 진술입니다. 따라서 학과 사를 대對로 읽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경우 학과 사가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다 같이 정신 영역에 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풀이에 대하여 전문 연구자의 반론이 있습니다. 사思의 전田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봉합 부분 즉 숨구멍을 의미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두뇌와 마음 심心을 합한 것이 사思라는 것입니다. 총聰 자의 오른쪽 글자가 바로 사思의 원 글자에 해당한다는 대단히 자상한 전거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전문 연구자가 아닌 나로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학과 사의 대비가 이 구절의 핵심적 진술 구조라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인간의 사고가 두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적어도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라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는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요지는 적어도 사가 관념적 사고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내게는 이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어린 손자인 나를 앉혀놓고 이 구절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罔) 않게 된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할아버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나서 자주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 내용의 핵심을 간추려보게 되기도 하고 또 글 전체의 구성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감옥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어떤 책을 30∼40페이지쯤 읽고 나서야 그 책은 전에 읽은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감옥에서 책 읽는 것이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 권 달랑 올려놓고 읽는 것입니다. 독서는 독서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逍遙일 뿐입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學)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思)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할아버님의 해석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학과 사를 대對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인匠人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精髓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大同은 멀고 소이小異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學과 사思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학이」편에 ‘학즉불고’學則不固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不患人之不知己 患不知人也)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학學이 객관주의적이고 사思가 주관주의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이 주관적이고 사가 객관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사소한 일화입니다만 우리 집에 전기 공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나도 전기 수리공을 도우면서 한나절을 같이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의 그 전기 수리공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집에 책이 많은 걸 보고 그 수리공이 내게 학교 선생이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의 말인즉 선생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철학적이었습니다. 그가 부럽다고 하는 이유는 선생에게는 방학이 있다거나 칠판에 쓰는 것이 전기 배선 작업보다 힘이 덜 든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요컨대 이론은 주관적이고 실천은 결코 주관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관념적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가 이야기한 것은 어쩌면 단순하다, 복잡하다는 정도의 일상적 대화였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내용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지요. 그는 마치 확인 사살하듯이 못 박았어요.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내가 반론을 폈지요.
“머리는 하나지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머리카락이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이지요. 귀찮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머리카락이란 이런저런 모양을 내면서 결국 ‘자기’自己를 디자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수리공도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어리석음이앎의최고형태입니다 子曰 寗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公冶長」
이 구절을 소개하는 것은 어리석음(愚)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영무자寗武子는 위衛나라의 대부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영무자를 예로 들어 지혜로움(知)과 어리석음(愚)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지知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 경우의 지 즉 지인知人의 지知는 인식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유도즉지’邦有道則知의 지는 우愚와 대비되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감히) 따를 수 없다.
여기서 방유도邦有道는 정치가 올바른 나라, 방무도邦無道는 정치가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可及은 따를 수 있다, 불가급不可及은 따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가급이란 의미는 배우기 어렵다, 실천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지知보다는 우愚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예시 문안 이외에도 『논어』에는 유도有道와 무도無道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危邦不入 亂邦不居)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나라에 도가 있으면 빈천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귀가 수치이다.
(邦有道 貧且賤焉恥也 邦無道 富且貴焉恥也) ―「태백」泰伯
사어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곧기가 화살 같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곧기가 화살 같았다.
(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의 재능을 말아서 품에
감추었다. (遽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 ―「위령공」衛靈公
이상에서 예시한 구절을 보면 대체로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하지 않고, 슬기를 드러내지 않으며, 재능을 감추고 물러나 몸을 숨기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사어史魚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도道의 유무를 불문하고 대쪽같이 처세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영무자의 경우에도 주자주朱子註에는, 무자武子는 위나라 대부로서 이름이 유兪이며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때에 벼슬하였는데 성공이 도가 없어 나라를 잃음에 이르자 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렵고 험한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경우 사어史魚의 시矢와 직直은 우愚로 읽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든 지知보다는 우愚를 어려운 덕목으로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경우의 우는 그 속에 대지大知를 품고 있는 우입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어리석은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知와 우愚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知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무야 나무야』에 있는 일절을 소개하고 마칩니다.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모든사람들이모든것을알고있습니다 子曰 孟之反 不伐 奔而殿 將入門策其馬曰非敢後也 馬不進也 ―「雍也」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퇴각할 때는 (가장 위험한) 후미後尾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성문에 들어올 때는 (화살을 뽑아) 말에 채찍질하면서 “내가 감히 후미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 나아가지 않아서 뒤처졌다”고 하였다.
애공哀公 11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주자주에서는 맹지반의 이러한 겸손과 사양의 마음을 평하여 윗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人欲日消) 지혜가 날로 밝아진다(天理日明)고 하였습니다. 맹지반이 후비後備를 맡은 공을 숨긴 까닭은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개선 행진의 경우에는 후비를 맡을 필요가 아예 없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원주原註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해관계 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결국은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자기의 공을 숨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함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欲과 무사無私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욕과 무사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낸다면 그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윤리학에 갇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功過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강의를 할 때 교단에 서 있는 내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나도 학생 때에는 교단 아래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었지요. 그때 느낀 것입니다만 학생이란 위치 즉 교단 아래에 턱 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는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잘 보이는 자리입니다.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강의 내용에 대한 선생 자신의 이해 정도가 너무나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자리입니다. 마치 맨홀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치부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교도소는 거짓말이 많은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언젠가는 탄로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 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에 비하여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거짓말의 수명이 상당히 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路」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 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이 대화에 대하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을 소개하지요. 내가 감옥에서 그 글을 쓸 때 심경이 매우 착잡했습니다. 감옥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나는 비교적 감옥의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이 더 심각하게 읽혔는지도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자朱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迎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구합은 정견 없이 남을 추수追隨함이며, 무실無實은 선자善者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逆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의 이 다이얼로그(dialogue)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파당성派黨性(parteilichkeit)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偏黨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 또는 위악僞惡인 경우에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다음 글은 『맹자』 「진심 하」편盡心下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내가 향원鄕愿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紫)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향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감옥을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논어』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당시의 백가百家들은 당연히 사회론에 있어서 쟁명爭鳴을 하였지요.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德治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논리는 계급 관점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자와 소인은 계급적 개념이며 『논어』는 오히려 주나라 봉건제 아래의 노예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비판받게 됩니다. 그러한 비판과 관련하여 마을의 선한 사람과 불선한 사람(鄕人之善者 其不善者)이라는 관점은 비록 오늘날의 계급적 관점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적 관점의 일환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장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비판의 시제時制입니다.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공자에게 계급 관점이 없다든가 또는 인仁이나 덕德 같은 『논어』의 기본적 가치가 노예주 귀족인 인 계급人階級 내부의 협소한 가치라는 비판은 비판의 시제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우리는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 질서를 뛰어넘는 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어』에 대한 접근 경로도 그런 쪽으로 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논어』에 관한 예시 문안을 더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만 그러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하겠습니다.
광고 카피의 약속
「옹야」편雍也篇에 있는 다음 구절은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구절을 상품미학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승勝하다는 표현은 물론 지금은 쓰지 않지요.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승하다’는 말은 여러분의 언어로는 ‘튄다’로 해석해도 되겠네요. 내용이 형식에 비하여 튀면 거칠고, 형식이 내용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행行과 언言, 사람과 의상衣裳 등 여러 가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못한 옷을 입고, 그 사람보다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문文은 형식을 의미하고 질質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핵심은 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관한 것입니다.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면 공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 시대의 문화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이 구절은 붓글씨 서체와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서예書藝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씨체를 민체民體다, 연대체連帶體다, 어깨동무체다, 심지어 유배체流配體라고도 합니다만 나로서는 매우 고민한 글씨체입니다.
나는 한글의 글씨체는 물론 오랫동안 궁체宮體와 고체古體를 바탕으로 하여 썼지요. 고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궁체의 경우 더욱 그 특징이 쉽게 눈에 띕니다. 궁체는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에서 유래합니다. 여러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귀족적 형식미가 추구되고 있습니다. 정연整然하고 하체下體가 연약하면서 전체적으로 정적靜的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학美學을 가지고 있는 궁체와 고체는 시조時調나 별곡別曲, 성경구聖經句 같은 글을 쓸 때는 그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내가 자주 썼던 민요나 민중시를 그러한 형식에 담았을 때는 내용과 형식이 전혀 어울리지 못하였지요. 판소리 춘향가라든가 신동엽, 신경림, 박노해 등 민중적 정서를 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글씨체였습니다. 마치 된장찌개를 유리그릇에 담아놓은 것같이 내용과 형식이 불화不和를 빚지요. 이러한 반성이 계기가 되어 글씨를 쓸 때는 항상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지요. 글씨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지지부진 답보하고 있습니다만 고민의 대부분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상품미학의 허구성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세대의 감수성이 상품미학에 깊이 포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대뿐만 아니라 상품미학은 현대사회의 문화적 본질입니다.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 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과 AS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사용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 생산 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형식만으로 구매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의 보정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패션의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그러다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오기도 하지요. 어쨌든 패션은 결국 ‘변화 그 자체’가 됩니다. 상품 문화와 상품미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변화의 신선함이라는 메시지는 실상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품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과 예술성의 본질이 이러한 것이지요. 상품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세포라고 합니다. 세포의 본질이 사회체제에 그대로 전이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요.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결국 만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棘子成이 말하기를, “군자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文飾을 할 것이랴”(君子 質而已矣 何以文爲) 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문文이 질質이고 질이 곧 문이다.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 猶犬羊之鞹)고 하였습니다. ‘곽’鞹은 털을 뽑은 가죽을 말합니다. 자공의 반론은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빈빈彬彬하기가(고루 조화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형식도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식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내용을 채우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습니다.
주자는 “극자성이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잃음이 지나치고, 자공이 또 극자성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나 근본과 지엽,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못하였으니 잃음이 또한 크다”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文이 이기는 것이 질質을 멸滅함에 이르면 근본이 망할 것이니 사史한 것보다 차라리 야野한 것이 낫다고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史와 야野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 인식이 정보 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雍也」
이 구절도 위 구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오늘날에는 굳이 지자와 인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지자와 인자를 상대적 개념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옳은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자와 인자라는 특징이 각각 별개의 사람에게 외화되어 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에 복합적으로 혼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굳이 대비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자와 인자 그리고 물과 산이라는 개념은 우리들의 인간 이해에 대단히 깊이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수고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지자의 모습과 함께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그의 상호결정론(over-determi-nation)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의 정치한 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자는 오히려 노장적老莊的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天網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모습
공자와 『논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많고 각각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자와 『논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조실부早失父의 천사賤士 출신으로 회계를 담당하는 위리委吏, 목축을 담당하는 승전乘田 등 말직에서 시작하여 50세에 형벌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에 이르렀습니다. 사구로 있을 당시 자기의 경쟁자이며 개혁가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직권으로 죽였고 전田의 크기에 따라 징세하는 전부제田賦制에 반대하는 등 왕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로써 공자를 규정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온당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에 관한 전문적인 해설을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전문 연구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 독법이 또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공자는 스스로 비천한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공자의 초기 입지를 국國이 아닌 야野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유가儒家의 발상 공간이 국과 국 사이의 야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야라는 공간은 국법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근거지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이 근거지에서 소유小儒를 극복하고 인문 질서를 세우고 대유大儒의 길, 즉 군자君子의 도道를 지향했던 것이 공자와 공자학파라는 것이지요.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두 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재야성在野性이 공자의 인간과 사상을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이 마오쩌둥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공자의 면모에 관한 글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지요. 여러분이 평가해서 읽기 바랍니다.
외모外貌를 성盛하게 꾸며 세상을 미혹시키고 음악音樂을 만들어 우민을 음란淫亂하게 하고 오르내림의 예禮를 번잡하게 하며 …… 음音도 율律로 만들었다. 명名을 세워 일을 게을리 하니 직職을 지키게 할 수 없으며, 상례喪禮를 중시하여 슬픔을 따르니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게 할 수 없으며, 거만倨慢하여 스스로를 따르는 자이며 남의 나라에 들어가 상하上下를 이간離間하고 어지럽힌다.
전성자田成子 상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훔쳤으나 공자는 그의 예물을 받았다.
―『장자』莊子
우리나라에 번역된 나카지마 아츠지中島敦의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원제: 『李陵―山月記』)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자인 자로와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자로의 시각을 통하여 묘사되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매우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공자를 골려주기 위해서 돼지와 수탉을 들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온 자로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자로가 죽임을 당하고 소금 절임이 되고 난 후 공자는 모든 젓갈을 내다 버리고 상에 올리지 않았다는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자로와 공자가 이루어내는 사제 관계는 그대로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절정을 보여줍니다.
유가 사상도 다른 사상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유가를 유가이게끔 하는 지점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흔히 우리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할 때 사士가 가장 상위의 계급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농공상은 사민四民에 속하는 피지배계급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즉 제후와 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고 사농공상을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사회체제였습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士 계급에 속하는 유가는 군자사君子士든 소인사小人士든 사 계급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가의 위상을 사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유가의 사상적 특징을 제3의 계급 사상 또는 중도 사상 또는 중화주의中和主義로 규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배 피지배의 이항 대립적 구도를 사인士人 계급이 개입하는 3각 구도로 바꾸고자 한 것이 바로 유가학파의 사상적 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주의는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정치 논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 유가학파가 복례復禮 복고復古주의자라고 비판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원래 주나라의 정치 구조는 천자를 정점으로 한 제후국 연방제입니다. 제1의 제후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이러한 연방제적 구도가 주나라의 종법 제도입니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하고 제후는 대부들에게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러한 사회체제의 정치론이었습니다. 중립적이지 않으면 그러한 질서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중국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중中은 상하통야上下通也의 뜻입니다. 그것이 정치 질서입니다. 유가 사상은 이러한 중도 사상을 계급적으로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士는 농공상農工商 같은 육체 노동을 하는 계급은 아니지만 공실公室이나 제후, 대부에게 고용되어 녹봉을 받는 무산계급無産階級입니다.
유가학파의 역사적 사명이 만세의 목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양자 대결 구도라는 오래된 사회적 갈등 구조에서 중도적 입장과 제3의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역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주나라의 연방제적 성격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논어』는 인간관계론의 보고寶庫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百家들이 벌였던 토론(爭鳴)은 고대국가 건설이라는 사회학 중심의 담론이었습니다. 굳이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제일 첫 장에 나타나는 친구(朋)의 이야기는 공자 사상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있는 성공회대학교를 찾아오는 분들을 환영하는 인사에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글입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실 성공회대학교는 먼 곳에 있는 학교거든요. 물론 서울의 변두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만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이념에서 본다면 더 멀리 떨어진 학교이지요.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비주류 담론 공간인 셈이지요. 그런 점까지 생각하면 참으로 먼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를 찾아온 분들이 어찌 진정한 벗이 아닐 수 있으며 그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는 뜻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