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32. 漢나라의 1등 공신 한신(韓信)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조(漢高祖) 시대 대장군.
세계사 최강의 무신 중 한 명인 항우를 몰락시킨 핵심인물이다.
그는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고 훗날 용서하고 선정을 베풀어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고, 또 아낙내로부터 받은 작은 은혜를 잊지 않고 후에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으며, 소하가 유방에게 그를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고, 유방과의 대화에서 후세에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으며,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고, 병법의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전술, 전략적 의미의 배수진(背水陣)으로 바꿔 만들어 지금까지도 쓰이는 배수진(背水陣)이란 전술적 혹은 결사적 각오의 의미인 배수진(背水陣)을 탄생시켰으며, 훗날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인 해하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을 나오게 하였다.
이 이외에도 많은 표현과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특히나 군사적으로는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의 유방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시켜 기반을 마련하였고, 결정적으로는 팽성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정예도 아닌 비정예로 이루어진 고작 3만의 별동대로 시작하여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六國) 멸망시켜 유방의 한나라가 중화를 통일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명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유방(劉邦)과 여후의 견제와 본인의 처세 문제가 겹치면서, 천수를 누린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 사실상 '토사구팽'이라는 고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2. 출신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한신의 출생에 관해서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건 명백한 오류다. 한신의 출생지인 회음현은 서주와 회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전국시대 초나라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역사소설 등을 쓰는 와중에 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한왕 신이 이 한신으로 혼동되어 한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묘사하는 작가도 있었고, 이 영향으로 한신이 한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모두 그저 '한신은 회음현 사람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3. 막장 시절
3.1. 밥 좀 주십쇼
한신의 집안은 별 볼 일 없는 가난한 집안에 지나지 않았다. 집안 후광이랄것도 없고,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아래 과하지욕 고사에 나오듯이 일단 한신 본인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 루저는 피했다. 장사꾼 노릇도 그럴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안습한 백수 신세였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찌질이로 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 없는 높은 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장이었어도 뜻은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묫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의 한신은 어떤 정장(亭長)을 줄줄 따라다니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이 덩치 큰 빈대를 정장의 아내는 대단히 싫어했다. 그래서 하루는 일부러 남편의 밥을 새벽에 해서 먹였는데, 해가 뜨고 어느날처럼 아침을 빌어먹으러 한신이 찾아왔지만, 이미 정장 내외는 식사를 마친 후라 한신이 빈대짓을 할 수 없었다. 한신은 눈치가 보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로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 중에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하고 난 뒤, 한신은 워낙 고맙기도 해서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후일, 반드시 부인들이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리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낙네는 되려 벌컥 화를 내었다.
"사내 주제에 자기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보답 운운하는가? 앞길이 창창한 왕손이 밥을 굶고 있어 불쌍히 여겨 밥을 먹도록 해 주었거늘, 어찌 내가 보답을 바라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3.2. 과하지욕 胯下之辱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까일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회음의 젊은 사람들은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네가 멀대 처럼 키가 크고 칼차기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겁만 많을 뿐이다. 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당연한 소리지만 가랑이 사이로 지나려면 무릎을 꿇고 포복 자세로 질질 기어가야만 한다. 자존심으로 죽고 사는 남자에게는 이런 굴욕도 없는 일이다. 보통 어지간하면 화를 내서 싸움을 하거나 하겠지만……
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생각을 해보자. 다 큰 어른이 무릎 꿇고 다른 사람 가랑이 밑을 질질 기어가는 모습을……정말 추할 것이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고향에서는 그야말로 웃음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린 한신이었다. 때문에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 항우와 유방에서는 역이기가 팽형 당하는 후반부까지 "바짓가랑이 사내"라는 멸칭이 따라붙는 걸로 처리해 버린다.
♣多多益善 : 한나라 고조 유방은 천하통일을 한 이후에,
자신의 포로(신하)가 된 회음후 한신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유방 :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한신 :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유방 : 그렇다면 그대는?
한신 : 신은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기분이 상한 유방이 다시 한신에게 묻는다.
유방 :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가?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신 : 페하께선 병사의 장수가 아니라 장수의 장수이옵니다.
이것이 제가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고,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4. 유방의 1등 공신이 되다.
한신(韓信)을 소하가 데려오자 우여곡절 끝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초한지쟁이 벌어졌을 때 한신은 위나라 땅을 평정한 후 장이와 함께 조나라 땅을 평정하고, 연이어 동쪽으로 진군해 제나라도 차지했다.
한신은 제나라를 평정한 후 사람을 보내 유방에게 상서를 올리고, 자신을 제나라 왕으로 삼아달라고 주청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염려하여 한신을 제나라 왕에 봉했다.
한신은 그제서야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천하의 형세는 유방, 항우, 한신이 솥발처럼 천하를 삼등분한 형국이었다. 한신의 수하인 괴통이 모반을 권했지만, 한신은 유방의 중용에 감사해하며 배반하지 않았다.
이후 한신과 유방은 힘을 합쳐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을 해하에서 대파했고, 항우가 자결함으로서 초한지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유방은 한신의 빈틈을 노려 그의 병권을 빼앗았고, 한신을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다시 봉해 하비를 도읍으로 삼도록 했다. 한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누군가가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고 참소하자 유방은 한신을 잡아들였다. 한신이 공신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유방은 그를 동정하여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이때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며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신은 유방이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병을 빌미삼아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또한 그는 주발이나 관영과 같은 후(侯)에 지나지 않는 자리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훗날 진회가 은밀하게 모반을 꾀하자 유방은 진회를 토벌하러 갔다. 여태후는 한신도 연루자임을 알고 소하로 하여금 한신을 속여 입궐하게 한 다음 장락궁의 종실에서 그의 목을 베고 삼족을 멸했다. 유방은 진회를 토벌하고 돌아와 한신이 죽은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