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한국 최초 의료선교사 알렌과 제중원(濟衆院)
당시 유일한 서양식 병원이던 제중원은 찾아오는 환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는데, 그것은 어떤 병에 걸려도 제중원의 서양의사들이 주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 즉시 낫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제중원 개원 첫 해에만 1만 여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고 하니, 놀라운 역사라 할 것이다. 제중원은 선교사들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공식 선교사로 조선에 온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혜론 부부 등은 모두 제중원에서 의사나 선생으로 협력하며 조선의 초기선교를 위해 연합했다. 특히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과학교사로 신교육의 일을 시작하였고 이것이 이후 경신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제중원 원장 알렌이 1887년 10월, 참사관으로서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이 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헤론이 그 뒤를 이어 제중원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창궐하는 전염병으로부터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격무에 시달리던 헤론은 이질에 감염되었고, 1890년 7월, 조선에 온지 5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 앨러스와 두 딸을 남겨둔 채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1891년 5월 빈튼(C.C. Vinton)이 뒤를 이어 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완고한 복음주의자로서 제중원 진료는 관심 밖이었다. 결국 제중원 주사(主事: 정부의 행정관리)들의 무성의와 부패가 겹치면서 제중원은 점차 유명무실한 의료기관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1893년 11월부터 책임을 맡게 된 캐나다 선교사 에비슨(O.R. Avison)은 제중원의 개혁을 위해 운영권을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로 넘겨줄 것을 조선정부에 강력히 요청했다. 6개월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1894년 9월 말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을 자율적으로 경영하도록 허락받았다. 이로부터 제중원은 설립 9년 만에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가 단독 운영하는 민간병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을 개혁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는데, 가장 먼저 불안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계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에게서 1만 불의 재정을 지원받게 되면서부터 1904년 남대문밖 복숭아 골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동양최대의 의료시설과 최고기술을 자랑하는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한편 실업인 세브란스는 병원시설비로 그 후 3만 불을 추가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건축된 병원의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으로 개명하고도 일제 강점기에는 흔히 제중원이라 불렸다. 한편 1908년 6월3일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7명의 졸업생은 한국인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았다. 연세대학교는 창립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에 최초 설립되었던 광혜원(廣惠院)을 복원하고 연세사료관으로 정리하였으며 역사자료, 선교사 활약상, 성서 한글번역의 약사와 선교자료 등의 한국기독교 선교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한편 한국선교 초기, 왕실병원이었던 제중원(濟衆院)과 스크랜턴이 세워 운영하며 민간병원으로 운영하였던 시병원(施病院)등의 의료선교사역을 통해 남대문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이 설립되면서 의료선교는 조선의 선교활동에서 항상 앞장서서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료선교와 근대화를 이끌며 인재를 양성하던 교육선교는 기독교를 서양귀신이라며 배척하던 조선인들을 변화시키고, 감동받게 하였으며, 결국 오늘날의 발전된 대한민국의 밑거름을 일구는 가장 효과적이고 탁월한 선교전략이었음을 알게 된다.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
출처: 꿈을 가진 나그네 원문보기 글쓴이: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