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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수필의 특성과 정의
1. 수필적 언어의 특성
문학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한 개의 단어는 흔히 두 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지시적 의미(指示的 意味)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 의미(含蓄的 意味)이다. 그러나 같은 함축적 의미를 사용한다고 해도 엄밀히 따지면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수필에서 상용하는 언어는 동일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시적 언어는 압축과 생략을 생명으로 하는 ‘절규’하는 언어가 중심이고, 소설적 언어는 현장감이 넘치는 대화가 중심이 된다. 거기에 비해 수필의 언어는 독백적 언어가 중심이 된다.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다. 그러나 같은 산문인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을 택한다.”“수필은 치고 빠지는 것”이라든가, “수필은 탕관에 넣고 끊이면 주옥같은 시가 되고, 가마솥에 넣고 삶으면 대하소설이 된다”고 하는 비유적 표현들은 모두 수필의 언어가 시, 소설, 희곡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질펀하게 눌러 앉아 뭉그적거리는 언어가 아니라, 핵심을 때리고 다음 목표로 이동하는 순발력이 있는 언어이다. 수필의 언어는 “갈고-닦아-빛나게-가다듬어-선택한 언어, 다시 말해서 거친 언어가 아니라, 엘레강스한 언어이다”
낮에는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해 본다. 야윈 잠결. 문득 지나가는 한줄기 소나기. 파초잎에 듣는 빗소리가 상쾌하다.
밤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물가를 거닌다. 달이 비친 수면은 고요한데, 이따금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았다 떨어지면서 내는 투명한 소리. 그 투명한 음향이 밤의 정적을 지나 우리의 가슴에 가벼운 파문을 던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절실한 것을.
아지랑이 속으로 아득히 비상하던 종달새의 가슴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꿈, 사랑, 희망과 같은 어휘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상아빛 건반 위로 달려가는 피아노 소리는 오월의 사과꽃 향기 속으로 번지고,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는 나른한 졸음에 금속의 상쾌함을 더한다. 이런 소리들은 초여름의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들을 때 더 아름답다.
손광성, <아름다운 소리들>
시적 언어는 절규하는 언어. 그런 의미에서 시는 ‘감탄사’란 말은 시적 언어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하겠다. 언어의 회화성에 주력하는 모더니즘 시에 이르면 이러한 절규가 침묵하고 말지만,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시적 언어의 특성이 절규임에는 틀림없다.
치밀한 배경 묘사와 인물 묘사 없이는 소설은 리얼리티를 얻지 못한다. 만약 수필에 이와 같이 치밀하고 장황한 언어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수필의 길이는 한없이 길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뚜렷한 갈등 구조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없는 수필은 곧 지루해질 것이며, 결국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소설적 언어를 쓰면 문장의 탄력이 없다.
연극은 의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극적 환상을 창조하는 데 있으므로, 희곡적 언어는 점잖은 문어체의 언어가 될 수가 없다. 간결하면서도 역동성이 넘치는 구어체의 언어여야 한다. 직접적이면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언어, 폭발적인 언어. 그것이 희곡적 언어이다.
수필은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선은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순발력 있게 이동한다. 치고 빠지는 언어이다. 시처럼 비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는다. 시적 언어가 ‘뜨거움’이라면 수필의 언어는 ‘절제’와 ‘차분’함이다. 희곡처럼 직설적이지도 않으며, 거칠지도 않다. 정제된 언어, 우아하게 잘 닦은 언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언어, 그것이 수필적 언어이다. 낚시질은 손맛으로 한다. 수필은 말맛으로 쓰고 말맛으로 읽는다.
수필은 나직이 속삭인다. 아니면 혼자서 중얼거린다. 수필이 독자에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면 그 일부는 이런 수필적 언어에서 나온 결과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언어적 특성은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차이점 중의 하나이다.
2.수필의 형식적 특성
흔히 “수필은 무형식이 형식”이라고 한다. 이런 진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반박한다. 형식이 없는 예술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 말의 진의는 수필의 형식을 부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필의 형식적‘다양성’을 강조한 데 있다. 수필의 제재란 주제의 성격에 따라서 시적 형식, 소설적 형식, 희곡적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정서 전달이라는 문학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필은 때로는 일기나 편지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흔히 현대는 장르의 벽이 무너진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서 서사성이 강한 시가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시가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는 없다. 또 소설이 시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없다. 장르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수필뿐이다.
수필은 내용 전개에 있어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하나의 종속제재에서 다음 종속제재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적’이란 말은 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해 ‘느슨한 형식’을 취한다는 뜻이다. 시나 소설이나 희곡처럼 엄격하지 않다.
그 밖에 수필이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반드시 결론을 내려야 할 의무는 없다. 의견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의문으로 남겨 두어도 무방하다. 이런 점이 일반 논문과 다른 점이다. 독일 학자들은 수필의 이와 같은 특성을 ‘열린 형식(Offene Form)’이라 부른다.
분량면에서도 수필은 다른 장르와 다르다. 반드시란 조건은 없지만, 대부분의 수필은 원고지로 15매 안팎의 길이로 완결된다. “앉은 자리에서 기꺼이 읽어 낼 만한 길이의 산문이다.” 이런 형식적 특성도 수필의 다른 장르와 구분하는 뚜렷한 기준이 된다.
3. 수필의 제재와 주제의 특성
수필의 특성을 알아내는 기준을 ‘구조의 기본 요소’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시의 기본 요소는 운율과 어조이고, 소설의 기본 요소는 인물과 사건이고, 수필의 기본 요소는 제재와 주제라는 주장이다.” 제재가 정해지면 수필은 7할이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은 수필에 있어서 제재와 주제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수필은 관조의 문학”이니, “자기 성찰의 문학”이니 하기도 하고, “에세이는 철학과 문학의 튀기”라 하기도 한다. “에세이스트는 학식 있는 시인(ein Poeta Doctus)”이란 말도 결국 수필의 이와 같은 특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수필과 에세이가 동의어가 아니며, 현대 한국 수필에서는 이와 같은 철학성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서 수필은 역시 철학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수필이 수필다운 점은 시나 소설이나 희곡과는 달리 이런 지적, 관조적, 자성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학적 정확성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전체를 통찰하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라는 K.A 호스트의 주장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수필에서 상대적으로 주제와 제재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수필에서도 주제를 표면에 들어내지 않고 상황 묘사나 서사로 끝내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나친 설교조의 교훈이나 관념의 표백을 현대 독자들은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제가 드러나지 않고, 묘사나 서사만으로 된 수필은 어딘가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4. 수필의 내용 제시 방법의 특성
“수필은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내용 제시 방법에서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시, 소설, 희곡에서는 작가는 뒤에 숨고 화자를 대리인으로 전면에 내세워 말을 하게 한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작가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나 소설에서 서정적 자아 또는 화자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 아니지만, 수필의 화자인 ‘나’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다.
수필의 이와 같은 고백적 형식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독자는 작가에게 신뢰늘 보낸다. 소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과는 다르다. 수필 독자는 이것은 ‘사실’이라고 믿으며 읽는다. 만약 ‘수필의 허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수필도 허구적 서사를 원용한다면, 필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된 이와 같은 친근감과 신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의 정체성마저 잃어 버리게 될 것이고, 결국 독자는 수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될 것이다. 수필이 허구적 서사를 원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내용을 직접 제시하느냐 간접적으로 제시하느냐 하는 것은 수필이 시, 소설, 희곡과 구별하는 가장 뚜렷한 특성이 된다.
5. 수필의 정의
이상에서 밝힌 네 가지 특성은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차이점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수필의 개념을 정의한다.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을 정제된 언어로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열린 형식의 문학이다.’
이 정의에서 굳이 ‘체험’이라고 한 것은 ‘허구성’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의는 수필의 언어적 특성, 형식적 특성, 제재와 주제의 특성 그리고 전달 방법사상의 특성을 모두 포함한다.
나하고 인형하고
반 숙 자
아침에 눈을 뜨면 옆자리부터 살핀다. 없다. 잠버릇이 고약해서 이불을 박차고 침대 밑으로 떨어졌나보다. 번번이 그렇다. 어느 하루 얌전하게 함께 잠깨는 일이 없다. 침대 밑을 본다. 녀석은 방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다. 일으켜 품에 안으면 녀석은 눈을 흘기며 “엄마는~~~~” 한다. 그러니까 제가 자청해서 굴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차버렸다는 항의 일게다.
후배가 곰 인형을 선물했다. 선물을 가끔 받아보았으나 인형선물은 평생에 처음이다. 그날은 노인에게 뭐 이런 선물을 하냐며 심드렁했다. 그러나 집으로 가져와 끌어안아보고는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다. 우선 이놈의 모습이다. 머리와 궁둥이가 크고 팔과 다리가 상대적으로 작다. 머리에 붙은 입은 튀어나와 하마 같고 그 위에 단추만한 코가 얹혀 있다. 코 바로 아래 인중과 입은 가느다란 선으로 처리했다. 두 팔로 안고 볼을 대면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 같다. 꼭 젊은 시절 내 아기를 안고 있는 느낌으로 반전한다.
옛날 아주 옛날에 나는 아홉 살짜리 딸하고 조그만 자취집에서 툭하면 나란히 누워 팔 베게를 하고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노래를 불렀다. 자꾸 자꾸 부르다가 나중에는 “엄마하고 나하고”로 가사가 바뀌고 노래가 잦아들 때쯤이면 모녀가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 생각이 나면 곰인형을 안고 혼자 노래를 부른다.
어제는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늦게 들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머리를 지키고 있던 녀석이 “비만이야 비만, 운동을 시켜줘야지...”또 눈을 흘긴다. 생떼를 부리는 녀석을 품에 꼭 끌어안으면 다소곳이 안기는 포근함, 애틋함, 내 가슴 유선에 기별이 오는 것 같다.
잠들기 전에는 녀석을 팔에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혼자 누울 때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온기가 느껴진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혼자 둬서 미안해, 심심했지? 오늘은 뭐하고 놀았지? 귀를 잡고 뽀뽀를 하고 통통한 볼기짝을 두드려주면 녀석은 좋아서 귀가 입에 걸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제 발로 청하는 것이 없다. 그냥 내 쪽 이야기만 다 들어준다. 나는 다만 그때의 기분에서 녀석의 마음을 읽을 뿐이다.
애완견 강아지 보다 조용해서 좋다. 서로에게 할당되는 교감이 없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나로서는 강요당하는 교감은 탐탁치 않다. 그러니까 한 포기 꽃나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내가 피곤해하면 벌렁 드러누워 저를 베개 삼아 단잠을 자라하고 밤늦도록 흐릿한 눈으로 책을 읽을라치면 돋보기를 벗겨 제 얼굴에 걸어놓고 그만 자자고 졸라댄다.
며칠 전 동물의 농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리 엄마 꼬꼬댁의 특별한 모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기오리 다섯 마리를 품는 암탉의 이야기다. 암탉은 날갯죽지가 아프도록 오리병아리를 품고 돌본다. 오리의 진짜 엄마들이 있지만 강 건너 불구경이다. 아기오리들은 제 습성 탓에 발발거리며 뛰어놀다가 작은 연못으로 풍덩 빠져 물놀이를 즐기고 아기오리를 좇던 꼬꼬댁은 당황해서 구구거리고. 거위가 무단침입해서 아기오리들을 위협하자 필사적으로 대항하며 새끼를 지킨다.
이런 이상한 모습에는 사연이 있다. 한 달 전 꼬꼬댁은 제 알을 품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야생 오리들이 날아와 알을 모두 훔쳐 갔다. 그 무렵 오리들이 연못에 알을 낳아 돌보지 않는 것을 주인이 꺼내 연못 옆에 모아두었는데 꼬꼬댁이 품어 부화시킨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어머니라는 존재를 둔 것은 창조의 역사 중 으뜸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에게서 모성본능을 빠트렸다면 요물로 전락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도 녀석은 침대 끝머리에 오뚝하니 앉아서 저를 쳐다봐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입이 조금 부어있는 것 같다. 짬짬이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안아주고 발바닥을 간질이면 걀걀걀 숨넘어가게 웃는다. 인형제조업자가 그것을 감안해서 발바닥에 모래주머니를 집어넣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완견처럼 꼬리를 흔들고 얼굴을 핥고 먹을 것을 보채고 어디든 함께 가려고 기를 쓴다면 나는 기력이 떨어져서 지쳐버렸을 것이다. 끝없이 봉사를 요구하는 살아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일이라서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내가 더 두려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은 유한해서 언젠가는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속수무책이다.
나는 요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을 생각한다. 그는 여인 기피증 때문에 독신으로 살다가 어느 날 상아를 가지고 정교한 솜씨로 여인상을 만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여인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 비너스 여신께 상아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청하고 집에 와 보니 정말 인간의 몸으로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다. 차가운 상아에 핏기가 돌게 하는 예술의 초혼력을 말한다지만 곰인형을 귀여워하다 다 늦게 곰 새끼 하나 탄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공연한 상상을 해본다.
첫댓글 <수필의 특성과 정의>를 끝으로 지난 해 부터 시작한 <수필쓰기 실전> 수업을 마칩니다.
다음 과제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간은 복습과 합평으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혀 새롭지도 않고 다소 지루한 내용을 읽어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뮨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데 존경을 표합니다.
늘 관심있게 봐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