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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당 - 삼형제 순교자가 잠든 내포지역 신앙의 전진기지 |
공세리 성당의 유래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바다가 육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이곳은 조선시대 때 충청도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곡(租稅穀)를 쌓아 두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다. 따라서 공세리 성당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이외로 백성의 고혈과 같은 세금과 관련된다. 1865년(고종 2)에 와서 조창제가 폐지되어 공진창도 기능을 잃게 되었다. 지금도 공세리 성당 인근에는 공세창 유적으로 석벽과 석축, 그리고 관련 비석이 있다.
이곳은 내포지역의 관문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보존한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인 1890년에는 충청도 최초의 성당 양촌본당(陽村本堂, 구합덕성당의 전신)이 설립하게 된다.
공세리 성당은 양촌본당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 분리 창설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은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였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초석이 되었다.
드비즈 신부는 부임하여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갑작스런 교구의 발령으로 잠시 본당을 떠났다가 1897년 6월에 2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를 이어서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폐지된 공세창 일부를 매입하여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이후 1930년까지 34년간 본당사목을 담당하여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전교 및 지역 인재 발굴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현 박물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여 오늘에 이어진다.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
내포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지역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 박해를 통해 만여 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는데 그중 가장 많은 수가 나온 지역이 내포지방이었다. 아산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신유박해 때의 하 발바라였다. 병인박해 때는 이곳 인주면 걸매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하느님의 종 박씨 3형제인 박의서(사바), 박원서(마르코), 박익서를 비롯하여 부부 순교자인 강 필립보와 박 마리아, 그리고 삼부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가 영광스럽게 순교한다. 이들을 포함한 병인박해 때 아산 지역 출신 순교자는 모두 32명이었으며 체포된 뒤에는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뿔뿔이 끌려가 고문, 참수 등으로 순교했다.
▲ 박의서(사바)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하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쳤다. 밀양 박씨로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 박원서(마르코)
기록에 의하면 박원서는 본디 태중 교우로 마음이 우람하였으나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하는 등 함부로 지내므로 그의 형 의서가 항상 걱정했다고 한다.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그가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 호송 포졸)더러 “이번에 올라 가거든 나를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님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 박익서 (세례명 미상)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형인 익서, 원서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체는 그의 당질 박웅진(바오로)과 양성우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공세리 지역 순교자 일람
성지 조성과정
공세리 성지 ·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 등을 시작해 2년 뒤인 2002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박씨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 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2008년 9월 6일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내포지방 교회사를 중심으로 특화한 공세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 십자가의 길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공세리 성당 경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거목이 네 그루가 있다. 이 고목들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성당 홈페이지에는공세리 성당의 자랑거리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내용이 좀 정제가 되지 못한 듯하여 약간 고쳤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 공세리 성당은 1890년에 시작된 12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당(충남 지정기념물 144호)으로서, 2005년에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한 성당이다. 350년이 넘은 국가 보호수가 4그루가 있고 그에 버금가는 오래된 거목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성당 -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현재 지역 순교자 32분을 모시고 있다. 특히. 박해시대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요충지로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잡혀서 각지로 끌려가서 순교를 하였다.
▲역사의 유적지(공세곶 창고지)로 유명한 성당 - 성당이 위치한 1만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가 있었던 공세곶 창고지로서 조선조 성종 9년(1478)에 이곳에 세곡(稅穀) 해운창을 설치 운영해오다가 중종 18년(1523)에 80칸의 창고를 짓고 영조 38년(1762)에 폐창이 될 때까지 근 300년 동안 운영했던 공세창고였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성당 - 공세리 성당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성당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70여 편의 유명한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고 현재도 계속 섭외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 ‘수녀 아가다’,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 ‘미남이시네요’, ‘아내가 돌아왔다’, ‘글로리아’ 외 다수가 있다.
◆처음 고약을 개발 보급한 성당 - 당시에는 상처와 종기에 고약만한 약이 없었다. 그 고약을 맨 처음 만들어 보급한 곳이 바로 공세리 성당이다. 1895년에 부임한 에밀리오 드비즈(한국명 成一論)신부님이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원료을 구입해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 주게 된다. 그 비법을 당시 신부님을 곁에서 도와드렸던 이명래(요한)가 전수하여 이명래 고약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보급되었다.
성당 입구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훌쩍 지났다. 넓은 주차장을 보면 공세리 성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주차장 한쪽에는 커다란 배 모양의 조형물이 있고 그 앞에 야외제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모임도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곳이 바다와 접해 있어 배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뱃머리(이물)에 십자가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김대건 신부가 처음 타고 온 라파엘 호가 아닌지 모르겠다.
성당 입구는 덩굴 아치형으로 꼭대기에는 십자가를 세웠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아치를 통과하여 약간 오르막 보도블럭 길을 조금 걸으면 성당 경내가 나온다.
일단 동선은 사전 준비한 안내도에 의해 성당 경내에 오르기 전 왼쪽 잔디 광장 쪽에 있는 피정의 집과 사제관을 먼저 보고 성당 언덕에 올라 성가정상과 맨 오른쪽 성체조배실을 거쳐 성전에 이른다. 그 다음 박물관을 거쳐 드비즈 광장과 순교자 묘지에 이르고 시간을 내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동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기념비와 동상, 보호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성당 언덕 밑 잔디밭 입구에는 성지 안내 표지석이 있다. 내용은 이곳이 수운이 편했기에 내포지역의 양곡을 한양으로 나르는 조창이 있었다는 것과 아울러 해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이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어 이후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표지석 후반부 내용에는 이곳 아산만 일대가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 비류가 처음 도착한 미추홀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곳이 미추홀이라는 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백제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투 현장이며 청일전쟁이 시발지라는 설명도 있다. 모두 편리한 교통으로 인한 외국 문화의 유입이나 외세와의 치열한 투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설명이다.
그리고 표지석 바로 옆에는 가지가 많이 떨어져 나간 노거수가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250-300년쯤 되는 보호수로 공세리 성당을 지켜온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높이가 21m, 둘레가 3,9m.
잔디밭 안쪽의 두 동의 건물은 ㄱ자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주 보이는 건물은 피정의 집이고, 오른쪽 건물은 사제관과 수녀원이다. 앞쪽 정원에는 예수성심상이 떡하니 지키고 계신다.
다시 잔디밭을 나와 언덕에 올라 성 가정상 앞에 이르니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신자들이 성체 거동을 하는 행렬이 있다. 행렬 중 커다란 흰색의 양 한 마리가 따라 다니는 게 참 특이하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기르는 양이란다.
성 가정상은 돌로 쌓은 인공 감실 안에 있다. 성요셉과 성모님, 그리고 예수님을 모셨는데 이름 그대로 성 가정상이다.
성 가정상 바로 앞 길옆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하나는 에밀리오 신부 공적비와 다른 하나는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이다.
에밀리오 신부는 공세리 성당의 설계자이며 발전의 초석을 깐 분으로 이름은 드비즈이다. 에밀리오는 세례명이며 한국명은 성일론(成一論)이다. 비석 뒷면의 약력을 보니 그는 18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94년 7월 1일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그해 1894년 10월 3일 한국에 건너와 공세리 성당에 초대 주임으로 부임을 하여 35년간이나 본당사목하면서 성당을 짓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일으켜 본당을 발전시켰다. 1930년경부터 건강이 나빠 결국 1932년 귀국을 하여 이듬해 선종했다. 이 비는 1964년 3월에 세웠다.
성체조배실은 성당 앞마당 한쪽에 있다. 대성전 모양의 조그만 목조 건물인데 열려 있어 안에 커튼을 걷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공세리 성당 성전
1922년에 드비즈 신부 때 지은 공세리 성당 성전은 충청도 지역의 가장 오래된 근대식 고딕식 벽돌 건물 중의 하나인데, 붉은 색과 회색의 벽돌을 조화롭게 구성한 1뾰족탑식 건물이다. 건립 당시 이래 아산 지역의 명물로 인식되었고, 종탑의 종은 지역민에게 시간 알리미의 구실을 하였다.
드비즈 후면에 돌아드니 분도패를 형상한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다.
분도패(베네딕토패)는 1880년 베네딕토 성인 탄생 1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작된 이 메달이다. 몬테까시아노 수도원(베네딕토 성인이 돌아가신 곳)에서 제작한 것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하게 십자가의 구원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성인의 오른손에는 십자가, 왼손에는 규칙서, 그 아래에는 까마귀와 독배(독이 든 잔)가 그려져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아치형의 은은한 백색 천장과 양쪽으로 줄지어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열주, 벽에 난 반원 아치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들이 기품 있고 우아하다. 이들 아치 중에는 ★슈고ᄒᆞᄂᆞᆫ 쟈와 무거은 짐진ᄌᆞᄂᆞᆫ 내게로 오라. 나 l 너희를 도으리라★ 라는 마태오복음 11장 8절의 말씀이 예스러운 표기로 쓰여 있다.
제대는 오래된 성당이 다 그렇듯, 벽을 향한 옛날의 제대 앞에 오늘날 사용하는 제대가 따로 교우석을 향해 놓여 있다. 좌우의 열주 회랑 앞벽에는 성 요셉 상과 성모상이 각각 높이 걸렸고 그 밑으로는 각각 성인 유해대가 있다.
왼쪽 성 요셉 상 밑에는 성녀 루이스 마릴락의 유해가, 오른쪽 성모상 밑에는 성 앵베르 주교, 성 샤스탕 신부, 성 모방 신부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성전을 나오니 성당 언덕 뒤편으로 난 십자가의 길 입구가 보인다. 혹시 시간 여유가 있으면 다시 와서 걸어보리라 생각하며 성전 왼쪽 편에 있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공세리 성당 박물관
벽돌조에 기와를 올린 유럽풍의 박물관 건물은 성당이 지어질 때는 사제관으로 지었다. 옛 모습을 간직하여 역시 충청남도 기념물 144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바로 옆에 ㄱ자로 붙은 건물은 베네딕토관으로 사무실과 성물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사제관이었기에 사제가 생활하는 공간인 2층을 밖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성전 건물과도 잘 어울린다.
내부는 전시실별로 번호와 이름을 붙여 두었기에 이 순서대로 관람하였다
1. 탄생의 방 - 초대 교회의 생활과 건축
한국교회의 신앙의 못자리요, 순교자의 묘자리인 내포지방은 신앙 전파의 중심지이자 요람으로서 초대교회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특히 공세리 성당은 초기 한옥 구조에서 현재와 같은 고딕식 구조로 봉헌되어진 교회 건축의 대표적 양식이다.
2. 에밀 드비즈 신부의 방
공세리 성당의 역사는 드비즈 신부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그는 35년 동안 온 생애를 공세리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지병으로 귀국하여 선종했다. 초창기 한옥 성당 및 근대식 성당의 신축, 이명래 고약 등 의료활동, 조성학교 운영을 통한 교육활동 등은 그의 눈부신 자취이다.
3. 박해와 순교의 방 - 순교자 관련 유물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를 통해 수많은 순교자가 내포지역에 발생하였다. 아산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발바라를 비롯하여 병인박해 때의 박의서(사바), 원서(마르코), 익서 3형제를 위시하여 총 32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체포되어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4. 영광의 방
1945년 광복 이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한 탄압과 수난을 두고 교회사에서는 이 시기를 ‘침묵의 교회기’ 또는 ‘제2의 박해기’라고도 한다. 대전 교구는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절반의 사제들과 주요 평신도 지도자를 읽게 된다. 당시 순교한 23명의 성직자 중 10명은 북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순교하였다.
공세리 성당에서도 오필도 요셉 신부와 임명 후 부임도 못한 강달순 카다르 신부가 이 행진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그리고 공세리 성당 출신으로 대전 교구 첫 내국인 신부인 강만수 요셉 신부 또한 홍성 성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지만 대전 목동에서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5. 재창조의 방
공세리 성당은 순교정신을 토대로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도 늘 사회와 함께 해 왔다. 사귐, 섬김, 나눔이라는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하였고 함께함의 틀 안에서 세상과 공유, 공생해 왔다. 60여 편의 영화, 드라마, 뮤직 비디오를 통하여 선교의 장, 참여의 장을 실현시켜 왔다면 더욱 예수님의 성체 신비 안에서 거듭나기 위하여 상생의 장을 열어 놓으려 한다.
박물관은 비록 작고 아담하지만 내부가 매우 알차게 꾸며져서 공세리 성당을 찾은 순례객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각종 전시물을 천천히 보고 안내문을 읽어가다 보면 공세리를 중심으로 한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와 수난을 알 수 있고, 성당이 지역 선교 사업은 물론 의료, 교육, 경제 사업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공세리 역사관 뒤에는 드비즈 광장이 있다. 그리고 광장 가는 길 역사관 옆에는 보호수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다. 수령 250년이라 하며 높이 27m나 되는 느티나무다. 여기 성당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나무로 교우들이 이 아래에서 쉬면서 좌담을 나누었던 휴식처였고 안내되어 있다. 공세리 성당 경내에는 이러한 보호수 느티나무가 4곳에 있고 그밖에도 많은 정원수가 있어 사철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낸다.
박물관 뒤벽에는 탈곡기, 재봉틀, 절구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 옛날 신자들이 사용했던 것이리라.
순교자 묘지
이제 마지막으로 드비즈 광장 아래에 있는 순교자 묘지로 간다. 먼저 나타난 것은 박씨 3형제 묘터에 세운 순교자 현양비이다. 2008년 9월 6일 오남한 주임신부가 글씨를 쓰고 순교자 밀양박씨 현손 박상신이 세우고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감수했다고 비석 측면에 기록되어 있다.
뒤편에는 순교자 28위의 묘석 위에 역시 28명의 순교자를 모두 넣어 만든 적갈색의 테라코타 부조가 있고 그 앞에 제대가 있다.
나오는 길에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순례를 마쳤다. 오후 4시가 넘어 다음 일정인 남방제 순례에 시간이 촉박하여 앞서 생각했던 십자가의 길은 끝내 걷지 못했다.
성당을 조금 벗어난 지점에 공세창 남은 흔적이 있었다. 석벽과 그리고 관련비석들이다. 허물어질 것에 대비한 정비가 필요한 것 같다.
여기 침묵으로 앉아 -공세리 성당에서-
'마음의 입' 열어야
당당히 하늘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산만 보이는 언덕
대지에 차오르는 촛불 보이는 언덕
성당 첨탑이 느티나무 숲을 뚫고
흰 구름에다 비밀 풀고 있습니다.
외로운 것들 저마다 눈을 들어
한 점 바람쯤으로
한 점 파도쯤으로 흐르다가
이곳 공세리 언덕 무덤들에 닿아
결 고운 기도로 서성이고 있습니다.
내 오래도록 여기 침묵으로 앉아
가슴 설레며 죽음 기다릴까요?
나뭇잎들 무수히 몸 흔들며
나에게 '마음의 입 열라'
우짖습니다 꾸짖습니다. (김영수)
곧장 이동하여 5시에 조금 못미처 남방제 성지에 도착했다.
남방제 - 최양업 신부의 마부, 조화서 성인 부자를 기른 교우촌 |
충남 아산시군 신창면 서북부로 763-42( 신창면 남성리 412-3)
남방제 교우촌
삽교호 부근 남방제 성지 지역은 서해안의 관문 공세리, 원머리와 가까운 지역적 특성에 따라 1791년 신해박해 이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현 아산시 선장면 신동리, 신성리 일대, 선장면 가산리의 용당, 대흥리의 창말,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의 남방제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기해박해 이후 본격적인 교우촌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용당리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피신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으며, 이때 용당리의 강요한 회장이 선교사들의 피신처와 배를 주선했다고 한다.
남방제란 이름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처럼 저수지를 막을 때 쌓은 제방(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곡창지대여서 저수지가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순교자를 길러낸 신앙의 못자리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이 교우촌은 성 조화서 베드로가 성 조윤호 요셉을 낳아 기른 곳이며, 이밖에 하느님의 종 5위를 위시하여 그밖에 신창 출신 순교자 21위, 타 지역 출신 신창 거주 순교자 24위, 타지역 출신으로 신창에서 순교한 순교자 1위 등 총 순교자 53위의 숨결이 살아있는 순교자들의 터전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네 번째 한국인 사제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아산지역 순교자 일람
특히 순교자 조씨 3대 가족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드높다.
▲성 조화서 베드로
조화서는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고,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의 아들이다. 부친을 잃은 뒤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몇 년 간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나(문경 진안리 성지 참조), 최 신부가 선종함으로써 1864년에 다시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얼마 후 부인 한 막달레나가 죽자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힌 조 베드로에게 아들 요셉이 찾아오자 그는 아들에게 어서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은 완강히 거절하며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도착하여 심문을 받았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배교를 강요하는 수령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고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는데 처형 직전에도 형리에게 천주교를 믿을 것을 권면했다고 한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 조윤호 요셉
성 조윤호 요셉은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 남성리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1866년 12월 5일 외출했다가 포졸들이 아버지를 체포하러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조 베드로가 아들에게 멀리 피하라고 당부하자 조 요셉은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입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 앞에 불려 나간 조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부자를 동시에 죽이지 않는다는 당시의 국법에 따라 조윤호는 아버지가 순교한 후 열흘 만인 12월 23일 전주 서천교에서 순교했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며 회유하였지만 이에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며 거절했다. 형장에 도착해서 곤장을 맞아 기진맥진하여 고개가 숙여진 것을 보고 포졸들은 죽은 것으로 알았지만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에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전주 ‘서천교 성지’와 ‘숲정이 성지’ 참조)
성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안은 3대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성지조성
남방제 성지가 조성되기까지는 온양 신정동 성당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다. 비교적 뒤늦게 알려진 곳이라 제대로 된 표지석이나 조형물 하나 없어 방문자들의 불편이 계속되자 신정동 성당은 2014년부터 교회 문헌과 여러 자료를 참조해 성 조화서 베드로 성인이 살던 곳 근처의 토지를 매입해 나갔다.
그리고 2016년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 부자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2016년 9월 성지 조성 1단계 착공 및 조형물 설치를 위한 기초공사를 완료했다. 이후 남방제 성지까지 전 신자 도보 순례를 시작으로 10월 ‘감사로 하나 되는 기쁨의 한마당’ 바자회를 실시하는 등 성지개발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 노력의 결과 11월에는 성지 조성 1단계 완공과 ‘주보 성인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을 완료하여 12월 11일 남방제 성지 봉헌미사를 드렸다.
남방제 성지에 도착하니 벌써 시간은 오후 4시 50분. 성지 박물관 같은 곳은 벌써 문을 닫을 시간이지만 이곳은 그런 입장이 아니라 좀 느긋한 마음이다.
이외로 성지의 매우 규모가 적다. 넓은 들판 가운데 녹색 철책 울타리로 둘러싸여 문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찍은 두 장 사진이면 전경을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다.
왼쪽은 여러 개의 기념비가 울타리에 연하여 서 있고, 촛불봉헌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이 있고 그 앞에 간이 쉼터가 있다. 그 앞으로 이 성지의 중심이 되는 대형 십자가와 원추형 순교자현양탑, 그리고 제대가 있다.
오른쪽은 더 간단하여 먼 산을 배경으로 한복 입은 성모자상이 서 있을 뿐이고 좌우 철책을 따라가며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비와 촛불봉헌 성모상
순교자 현양탑
모양이 특이한 이 순교자 현양탑은 성령을 향해 상승하는 의미를 담아 원뿔 형상으로 제작되었다. 하단에서 나선형 계단길을 통해 남방제를 비롯한 신창지역 출신 순교자 36명이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을 정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순교자의 행렬에는 하느님을 향한 순교자의 갈망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양탑 대좌에는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라고 새겨 놓았는데, 이는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Te Deum)의 한 부분이다.
맨 꼭대기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앉아 있는 소나무 아래에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이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남방제 성지 인증 도장의 무늬도 이것이다.
나선형은 끝없는 행렬을 의미한다. 남방제 성지가 작거나 좁다고 하지만 이러한 끝없는 순교 행렬을 이루는 곳이 어찌 직고 좁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보다 더 큰 성지는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지 왼쪽편에는 한복 입은 성모자상이 있고 십자가의 길이 사작된다.
성모자상
십자가의 길
각처의 조각은 윗단과 아랫단을 구분하여 각처마다 고통 받는 한복 입은 한국 순교자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했는데 슬픔에 잠긴 모슴, 애통해 하거나 통곡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했다. 각처에 숫자만 있을 뿐 설명은 없다.
12처에는 소가 끄는 쟁기에 목이 매달린 채 죽임을 당하는 여인과 지켜보며 슬퍼하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처절함과 애통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3처의 자식의 주검을 안고 있는 한국적 피에타상은 한층 더 우리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울림이 있다.
오후 5시 30분. 아직 해가 있어 원머리 성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