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1. 함양, 함양박물관, 위수(渭水)
초라한 함양박물관…진시황 영광 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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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渭水) > |
사진설명: 당나라 시절 실크로드를 타고 서역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은 위수 가에 마련된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 위수는 물이 없어 강바닥이 드러나는 등 옛 모습을 찾을 길 없었다. |
2002년 10월 4일. 함양 시내에 도착하니 오후 6시30분이었다. 재빨리 박물관으로 갔으나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서안으로 가야만 했다. 서안황성빈관이 숙박지였다. 9월6일부터 시작된 기나긴 여정의 중간 기착지인 서안(西安)에 보다 번듯하게 도착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함양박물관을 내일 보기로 하고 차머리를 돌려 서안으로 달렸다. 초가을이라 그런지 해도 짧았다. 사방은 벌써 어둑어둑 해졌다.〈삼국지〉등에 자주 나오는 위수(渭水)를 넘어 황성빈관 801호에 짐을 풀었다. ‘밤에 찾아온 도둑처럼’ 서안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서안은 서안이었다. “중국 역사책에서 자주 접했던 서안에 도착했다”는 기분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곧장 함양으로 달렸다.
함양(咸陽).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의 수도였던 곳. 주나라 평왕이 동쪽으로 이동하자 진(秦)은 관중평야 서쪽에 진입하여 옹(현재 봉상현)에 도읍을 정했다. 이 때가 기원전 677년. 기원전 388년 역양(현재 서안 임동현)으로 옮겼다 재상 상앙(?~기원전 338)의 건의에 따라 기원전 350년 함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진의 수도 함양은 현 함양시 동쪽 10리쯤 되는, 위수 남쪽 지점. 그곳은 관중평야의 중심부. 물산이 풍부한 관계로 진은 곧 부강해졌다. 게다가 함양은 동서교통의 요충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자리였다. 처음엔 작은 도성에 불과했으나, 진이 강성해지자 계속 확장돼 효문.장양왕(기원전 250~247) 당시엔 궁궐과 관청건물이 30여리나 뻗쳤다 한다.
함양은 진시황 때문에 특히 유명해졌다.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만든 전제군주(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 진시황 정(政). 조(趙)나라 출신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의 공작(工作)으로 왕위를 이은 장양왕의 아들인 그는 13세에 즉위했다. 처음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했다. 기원전 238년 친정을 시작한 그는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법가인 이사(李斯)를 등용하는 등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했다. 마침내 기원전 230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한(韓).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나라 등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했다. 급속하게 제국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비난을 산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다.
진시황 몰락 몰고온 아방궁 공사
시황제 정은 외치(外治)에도 뛰어난 군주였다. 북으로 흉노족(匈奴族)을 격파하고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했다. 전국시대 각 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요동에서 감숙성 남부 민현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했고,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해 군현을 설치했다.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린 것”으로 알려진 시황제는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춰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했다”고 한다.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새긴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권력이 모이면 부패한다고 했던가. 아방궁과 여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국력을 낭비했고, 특히 만년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였다. 가혹한 법치(法治)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평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갑작스레 사망하자, 수행한 재상 이사와 환관 조고는 자신들의 위세(威勢)를 유지하기 위해 유언을 위조, 어리석은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했다. 결국 기원전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한 멸망이었다. 자신이 세운 황제의 자리와 제국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자신을 ‘시황제’, 자신의 아들을 ‘2세 황제’로 칭하도록 한 그가 아니었던가.
진시황과 진나라의 명운(命運)을 되 집어 본 다음 함양 시내를 돌아보았다. 함양성은 본래 양산의 남쪽, 위수 북쪽에 있었다. 차츰 발전하자 위수 남쪽으로 도성의 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기원전 220년에는 위수 남쪽에 대규모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궁실을 짓고 위수에도 대형의 돌기둥 다리를 건설했다. 함양을 대표하는 궁전은 뭐니 뭐니 해도 ‘아방궁(阿房宮)’과 ‘함양궁’. 함양궁의 궁전건물 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현 함양시 동쪽 15리 지점에 있는 ‘진궁 1호 건축 유지(遺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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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함양박물관 정문. |
기원전 212년 위수 남쪽에 건설된 대규모 조궁(朝宮) 가운데 하나였던 아방궁은 진시황이 죽기 직전 완성됐다. 72만 명을 동원해 수년을 공사한 끝에 낙성된 화려한 궁전이었다. 아방궁의 규모는 〈사기〉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아방궁은 1만여 명이 앉을 수 있고, 11m 높이의 기를 세울 수 있으며, 황제 전용도로가 사방으로 뻗쳐 이궁 별관까지 연결됐다. 의장(意匠)의 홍대(弘大)함과 공정(工程)의 거대함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경탄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다.” 수년 간, 수만 명을 동원해 만들었지만 정작 진시황 자신은 아방궁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2세 황제 호해도 마찬가지였다. 진시황이 죽자 ‘진승과 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각자에서 연이어 봇물 터지듯 반란이 일어났고,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함양에 도착한 초패왕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가 인정사정없이 함양궁과 아방궁을 불태웠던 것이다. 아방궁은 그렇게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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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함양박물관 앞 거리에서 채소를 팔고있는 노점상. |
갖가지 상념을 접고 함양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함양박물관’이라는 편액이 걸린, 솟을 삼문(三門)을 지나 박물관에 들어갔다. 함양 지방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이 보기 좋게 전시돼 있었다. 진나라의 영광을 생각하고 들어갔으나, 막상 보니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토기, 기와, 벽돌 등이 대다수였다. 간간이 병마용(兵馬俑)들이 있었으나 그다지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 앞거리를 오가는, 진나라 후손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시 차를 타고 위수(渭水)가로 갔다. 길이 약 800km. 유역면적 13만㎢. 감숙성 남동쪽에서 발원, 동쪽으로 흘러 섬서성으로 들어가 경수(涇水).분수(汾水) 등의 지류와 합쳐지는 강. 함양.서안 북쪽을 지나 동관(潼關) 부근에서 황하로 흘러들어간다. 송나라가 수도를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까지 위수 유역은 중국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무대였다. 세금으로 거둬진 쌀이 주로 위수를 통해 조달됐다. ‘위수의 이용여부’에 왕조의 흥망이 걸려 있었던 셈이다. 운하나 관개용수로 굴착 등 위수에 대한 수리공사도 성했는데, 한 무제 때의 장안(서안)~황하 간 운하, 수나라 때의 부입거(富入渠).광통거(廣通渠) 공사 등은 특히 유명하다.
길이 800㎞의 위수…옛 모습 간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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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옥수수 대를 태운 연기로 희뿌옇게 된 관중평야 전경. 관중평야의 풍부한 물산을 토대로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
현대에 들어서도 위수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1937년 위혜거(渭惠渠) 공사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관중(關中)평야의 관개면적이 넓어지고 부근은 농경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서 본 위수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수한 영웅들과 평민들이 건넜을 위수는 예전의 그 위수가 아니었다. “감숙성과 섬서성 상류의 나무들이 전부 벌목돼 위수까지 흘러오는 물이 없어 그렇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실망이 컸다. 책에서 보던 위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당나라 시절 실크로드를 타고 서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위수 가에 마련된 여관에 하룻밤 묵는 것이 보통이었다. 배웅 나온 아내나 지인(知人), 부모, 형제, 친구와 술잔을 나누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다음날 아침. 배웅하는 사람은 낙타 타고 떠나는 사람에게 무사히 돌아오도록 빌며, 버들가지로 만든 ‘둥근 고리’를 건넸다. 현재는 물이 없어 바닥이 드러난 상태지만, 옛날의 위수는 ‘이별과 만남’이 가득 찬 곳이었다. 위수를 보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시불(詩佛) 왕유(王維. 699~761)의 ‘위성곡(渭城曲)’이 떠올랐다. 위성은 서역으로 통하는 요로상의 첫 요새, 위수 가에 있었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輕塵)
객사청청양류춘(客舍靑靑楊柳春)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盡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위성(渭城)의 아침 비 거리를 적시니,
객사의 푸르른 버들 빛 더욱 싱그럽네.
그대에게 한 잔 술 또 비우길 권하노니
서쪽 양관(陽關) 나서면 옛 친구도 없으리.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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