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날 (릴케) 민근홍 언어마을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
[감상]
* 성격 : 종교적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서정시, 낭만적, 신비적, 지성적
* 표현 : 대조의 기법
자연의 가을(자연의 성숙) ↔ 인간의 가을(성숙하지 못한 시적 자아)
* 구성
제1연 : 가을의 도래(해시계 : '계절'의 의미)
제2연 : 만물의 완전한 성숙의 기원
제3연 : 외롭고 쓸쓸한 가을, 고독한 자아 그리고 구원의 기도
- 고독한 사람 : 영혼의 성숙을 위한 인간의 고독, 번민, 갈등, 방황 → 불완전한 존재
* 주제 : 가을에 느끼는 서정으로 인간의 실존 깊숙하게 자리잡은 근원적 고독
* 출전 : 시집 [형상시집](1902)
[ 릴케와 나의 시(詩) ](김춘수)
이 시의 제 2연까지는 매우 사실적이다. 로댕의 조각에서처럼 조형이 내면성과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내면성의 과다로 해서 조형이 표현주의 작품들에서처럼 일그러져 있지 않다. 고전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연은 다르다. 갑자기 내면성과 조형이 난삽해지면서 내면성이 두르러지고 있다. '존재의 근원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실존주의적 카오스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제2연까지의 사실적 묘사는 제3연을 위한 전주에 지나지 않는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그의 존재론적 물음의 작은 씨앗을 본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단순한 풍경화가나 초상화가, 또는 이미지스트는 아니다. 그는 피지컬한 시인이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불안을 안고 있는 시인이다. 20대의 나는 그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카오스, 다시 말해 표현주의적 설레임에 매혹되고 있었다.
(김춘수, <릴케와 나의 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