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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배신/헌신
제목 : 배신의 만남, 헌신의 만남
성경 : 눅 22:1-13
찬송 : 290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190623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눅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눅 22: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눅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눅 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눅 22: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눅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눅 2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눅 22: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22: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눅 22: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눅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눅 22: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배신하고 죽이기 위한 만남이 있고, 누군가를 살리고 세워주기 위한 만남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아침 인간극장에 방영된 ‘스롱 피아비의 꿈’이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피아비는 캄보디아 여성으로 한국인 남편을 만나 다문화 가정을 이룬 여인입니다. 남편을 따라 당구장에 갔다가 남편이 아내가 당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구선수로 만들었습니다. 한국 여자 선수로 1위이고, 세계에서는 3위 선수가 되었습니다. 피아비는 당구선수로 성공하여 조국 캄보디아에 학교를 세우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을 실천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만 평의 땅을 사 놓았습니다. 물론 남편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비록 남편이 나이는 많지만 아내를 위한 헌신 때문에 훌륭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권투라는 소재를 통해 가족 사랑을 다룬 영화입니다.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복서를 꿈꾸는 여주인공 매기는 늙고 노련한 트레이너 프랭키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매기가 경기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이유는 가족에게 집을 사주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기의 부모는 딸의 경기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가 보내 준 돈을 흥청망청 탕진합니다. 매기는 백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상대편 선수가 반칙을 하게 되고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맙니다. 매기의 부모는 딸을 찾아와 보상금을 가로 채려 했지만, 트레이너 프랭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실패하게 됩니다. 프랭키는 매기 가족의 실체를 안 뒤 가족을 위해 헌신한 매기에게서 소식이 끊긴 자신의 딸의 모습을 보게 되어 매기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합니다. 트레이너와 선수로 만난 프랭키와 매기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만난 사람들인 반면, 매기의 가족은 가족을 배신하기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만나고 있을 때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유월절을 준비하시며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행복을 경험하나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때 환난의 징조, 예루살렘의 멸망, 무화과나무 교훈, 종말에 관한 교훈 등을 말씀하시며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또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쉬셨습니다(21;37).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유대인 절기 맞춰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린 10 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양(출 12:3)의 피를 문 양쪽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와 같이 모세 시대 유월절 어린양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 유월절에 종교지도자들은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과는 반대로 사람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놓고 궁리하고 있을 때 사탄이 가룟 사람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고, 유다는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공모를 합니다.
배신의 만남
사탄의 역사는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탄의 목표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물질과 세상의 권력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게 합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떤 명분으로 죽일지 궁리했습니다. 그들에게 잘 짜 맞춰진 각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백성이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눅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눅 22: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이끌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이 놀랍게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탄이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에 사로잡히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합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 망하는 길로 갑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수없이 많은 유혹을 던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우리 모두는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어렵고 힘들 때면 자꾸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합니다. 우상을 의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때로는 정말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믿음은 약해지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르고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그때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가룟 유다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면 부자가 될 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엄청난 기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부자가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유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에서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집 한 채, 그럴듯한 소유물 하나 갖지 못한 예수님께 실망을 하였습니다. 가룟인 유다의 이러한 생각을 사탄이 틈탄 것입니다.
[눅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복음서에서 사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굶주리시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시험했으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마귀가 시험을 마친 후 예수님을 떠났다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떠났다고 기록합니다(눅4:13). 마귀는 잠시 물러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 후 마귀는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예수님이 인자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아서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6:23, 막 8:3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 나타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돈궤를 맡은 자였고(요13:29), 셈에 밝고 돈 욕심이 많은 자로 공용 재정을 자주 훔치는 자였습니다(요12:4-6). 사탄은 유다의 연약함을 알았고 그것을 이용해 예수님을 팔 생각까지 넣은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라는 말씀이 현실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탐심을 자극해 배반의 기회를 엿보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이신 예수님보다 당장의 물질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는 어떤 행동을 하였습니까?
[눅 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눅 22: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2: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생명을 주신 예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더 사랑하고 의지하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며, 제자들과 함께 전도 여행을 가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리 마태가 있었음에도 돈궤를 맡아 관리할 만큼 수리에 밝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지 못했고 존경스런 랍비 정도로 받아들이는 믿음 없는 자였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여인을 향해 옥합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쓰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려 한 간교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3년 지내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바꾸지 않고 예수님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를 원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출석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으로 따르며 성령을 의지하는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보다 세상의 가치를 더 사랑한다면 누구든 가룟 유다처럼 결국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배신의 만남은 가장 불행한 만남입니다.
헌신의 만남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유다가 함께 하는 죽음의 공모 회의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시면서도 충실히 주어진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눅 22: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2: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눅 22: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눅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접속장소, 만날 사람, 해야 할 말, 예상 결과까지 다 알려 주셨습니다. 순종하면 길이 보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유다는 순종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제시하는 길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반역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같은 유월절을 보내면서도 한편에서는 유월절에 한 사람을 공모해 죽이려는 모임이 자행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사랑과 공의의 모임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이 희생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살게 될 기적을 회상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 중요한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무조건적으로 큰 다락방을 내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헌신입니까? 이렇게 다락방을 내어 줌으로 가장 중요한 마지막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기 전에 유월절 만찬을 통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성만찬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유대인의 절기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기념하는 예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 알바 아닙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그렇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귀한 다락방을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교차합니다. 하나는 탐욕과 배신의 만남으로 유다와 종교지도자들의 만남입니다. 이는 생명의 주님을 음모해 죽이려는 만남입니다. 또 다른 만남은 사랑과 헌신의 만남으로, 곧 있을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일상의 평정을 유지하시며,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할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만남이자 온 인류를 위한 희생 제사를 준비하는 헌신의 만남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배신하여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행한 만남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헌신의 만남을 가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