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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은 몸소 일본을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박병역기자(truelook@hanmail.net) 2015.04.29 10:59:38
▶ 광개토태황능비(廣開土太皇陵碑) 해설
광개토태황릉비(廣開土太皇陵碑)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 413 ~ 491)이 아버지인 광개토태황(391 ~ 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 9월 29일 세운 비(碑)이다. 이 비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에 있으며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이다. 무려 1,600여년의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족의 역사적 진실을 품고 지금까지 우뚝 서있다.
능비 높이는 5.34m이고 각면 너비는 1.5m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이며 현재 1,590여 글자는 판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 추모왕(고주몽)의 건국 전설, 호태왕의 업적, 선조묘를 지키는 수묘(守墓) 법령으로 나누어 있다. 호태왕비는 훌륭한 서법 예술품으로서 대한민족이 관리해야 할 국보적 보물입니다.그런데 고구려 문화재를 중국은 2004년 8월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다.
▶ 광개토태황능비(廣開土太皇陵碑)
독자님에게 알립니다.
무려 1,600여년 전의 비문을 올바로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광개토호태왕의 비명]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고주몽 BC 37~19년)과 제2대 유리왕, 제3대 대무신왕을 거쳐 제 19대 광개토대왕(서기 391~412)과 제20대 장수왕 2년(서기 414)에 세운 비석이며 무려 450여년의 고구려 역사가 함축돼 있습니다.
碑銘(비명)은 그 시대적 배경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해설로는 독자님은 무슨 뜻인지 전연 납득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비명의 본뜻을 독자님들이 납득 할 수 있도록 [삼국사기의 고구려의 본기 제 1 고구려의 시조편과, 제2대 유리명왕, 제3대 대무신왕,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본문을 발췌하여 [광개토대왕비명의 원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겠습니다.
광개토태황능비(廣開土太皇陵碑) 해설
[1]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
[1] [광개토능비가 있는 집안은] 옛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한 터전이다. 북부여 천제(天帝) 해모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이며, 알을 깨고 탄강하시었는데 성덕(聖德)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다.
[고구려 본기 제 1 삼국사기]: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高氏(고씨)며 諱(휘)는 朱蒙(주몽)이며, 일명 추모왕이다. 먼저 선조님에 대하여 해설하자면 부여왕 解夫婁(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後嗣(후사)를 구하고자 山川祭(산천제)를 올리려 御馬(어마)를 타고 鯤淵(곤연)이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큰 바윗돌이 상대를 처다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은 괴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바위를 옮기게 하였더니 황금빛의 어린아이가 개구리 형상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아들이구나 하시고는 마침내 궁실로 데리고 와서 양육하고 이름을 金蛙(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옹립하였다.
그 후 재상 阿蘭弗(아란불)이 해부루왕에게 말하기를 어느 날 “여호와 하느님”이 내려 오시여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장차 나의 아들(고주몽,추모왕)로 하여금 나라를 창업 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여 동쪽 해변가의 迦葉原(가섭원)으로 옮겨라, 토양이 기름지고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될 것이며 도읍지로는 적당한 곳이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란불”이 권고하니 드디어 해부루왕은 도읍을 옮겨 국호를 “동부여” 라 하였다. 그 구 도읍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자칭 “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살았다.
해부루가 돌아가자 금와가 후사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때 태백산 남쪽 優渤水(우발수)에서 어느 여인을 만나 내력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柳花(유화)라고 합니다. 여러 형제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 한사람이 자신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熊心山(웅심산) 아래 압록강변의 密室(밀실)로 데리고 가서 私慾(사욕)을 취하고는 곧 돌아온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나의 무모한 짓을 문책하시며 다른 사람이 알면 창피하다고 하시며 드디어 쫒겨 나와 지금 優渤水(우발수)의 강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金蛙王(금와왕)이 듣고는 이상스럽게 느껴 궁실로 데리고 와 으슥한 방에 살도록 하였더니 방문이 닫혀 있음에도 해가 있는 것처럼 밀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또 몸을 피하여도 햇빛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그로 인하여 잉태한 날이 되어 출산하고 보니 닷되쯤 되는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 알을 버리게 하였으나 개와 돼지들이 보고도 모두 먹지를 않았다. 또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도 피하여 다녔음으로 하는 수 없이 뒷 야산에 버렸지만 새들이 날아와서 날개깃으로 덮어 주었다. 왕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깨트려 보았으나 깰 수도 없어 다시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더니 그 어머니는 알의 이면을 물건으로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껍질을 깨고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골상이 武骨(무골)로서 기이하게도 영특하여 보령 칠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덕성을 두루 갖추고 다른 아이와는 다르게 항상 활을 스스로 만들고 활쏘기를 잘하여 실수 없이 백발이면 백발이 적중하였다. 부여나라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朱蒙(주몽)이라 하는 고로 이름이 되었다.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놀면서 유희를 하더라도 항상 주몽은 그들 보다 재능이 뛰어나 그의 맡아들 帶素(대소)가 父王(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보통 사람으로 출생 한 것도 아니고 그는 보통 사람보다 너무도 용맹합니다. 만약에 일찍 죽이지 않으면 뒷날 나라를 빼앗을 역모를 기도하지는 않을지 그 후환이 두렵습니다. 하면서 父王(부왕)에게 소청을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으시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양육하는 목동이 되게 하셨다. 주몽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날쌘 駿馬(준마)는 몰래 먹이를 적게 먹이고 둔한 駑馬(노마)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이 찌게 하였다.
왕은 살이 찐 駑馬(노마)는 자신이 타고 몰래 먹이를 적게 주어 살이 야윈 駿馬(준마)는 주몽이 타고 뒷 야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주몽은 화살도 적게 가졌지만 주몽이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모든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기로 모의한 음모를 주몽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고자 하는 구나 너는 지략과 재능이 어느 누구 보다 뛰어나니 어데를 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없겠는가? 그 같은 사실을 알은 이상 더 지체하지 말고 욕이 되어도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멀지 않는 장래에 이 어미가 찾도록 하겠노라
[2].□□□□□□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爲我連浮龜. 應聲卽爲連浮龜.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朱蒙之母柳花) 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고 어가(御駕:임금 수레)를 타고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臨津(임진:나루터)에서 왕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皇天:해모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거북아 떠올라 다리를 연결하여 강을 건너 갈 수 있도록 하라 라고 하시니 소리에 응하여 곧 거북이가 떠올라 교량을 만들어 주어 강을 건넌 후에 거북이는 흩어졌다.
[삼국사기 본문] 주몽의 어머니(하백의 딸, 유화)의 명을 받고 친구 烏伊(오이), 摩離(마리), 陝夫(섬부)등 셋 사람은 벗이 되어 南夫餘(남부여)의 奄利大水(엄리대수) 임진강 에 도착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는 없고 군사들은 추격하여 왔으므로 친구들은 두려워하였다.
군사들이 임박하자 추모왕은 기도하기를 나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저들이 나를 죽이고자하여 금일 도피하게 되었으니 추격하여 오는 자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수호하여 주소서...! 라고 추모왕은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에 곧 자라들이 물위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몽은 떠오른 자라의 등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너자 자라들은 곧 흩어지고 추격하던 기마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모두 돌아갔다.
주몽의 일행이 毛屯谷(모둔곡)에 도착하였더니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한사람은 삼베옷을 입고, 한사람은 장삼(중의 옷)을 걸치고 한사람은 검은 水藻(수조)옷을 입고 있었다. 고주몽이 질문하기를 그대는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며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麻衣者(마의자)가 대답하기를 이름은 再思(재사)라고 합니다.
衲衣者(납의자)가 대답하기를 이름은 武骨(무골)이라고 합니다. 水藻者(수조자)는 대답하기를 이름은 黙居(묵거)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며 姓(성)은 말하지 아니 함으로 고주몽은 이들에게 姓(성)을 지어 주시었다. 再思(재사)의 성은 克(극)씨로 武骨(무골) 성은 仲室(중실)씨로 黙居(묵거)의 성은 小室(소실)씨로 지어 주시고 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창업하여 백성들을 계도하고자 여기에 왔는데 적절한 시기에 어진 賢者(현자)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세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소임을 맡기고 함께 卒本川(졸본천)에 도착하였다.
그 山河(산하)의 경관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농사짓기에도 토양이 알맞아 실제로 듣든 것과 같아 드디어 도읍을 결정하였다. 다만 주몽왕께서 거처하실 거실을 비류수 근처의 忽本西山(홀본서산)위에 성을 쌓고 임시 오두막집을 만들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성을 고씨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고주몽은 졸본천에 도착 하였을 때 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을 妻(처)로 맞이하고 왕이 돌아가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때 고주몽(추모왕)의 나이는 22세이며 漢(한)나라 孝帝(효제) 建元(건원) 昭王(소왕) 2년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21년 甲申(갑신 : BC 37)년 이였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중생들이 찾아와 동명왕에게 善(선)을 부촉하였다. 그 시대의 땅은 말갈과 連接(연접)하여 항상 부락을 침략하여 도적질을 함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아 말갈을 물리치고 항복시킨 후부터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어느 날 왕은 沸流水(비류수) 강물에 흘러 내려오는 채소 잎을 보고 강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沸流國(비류국)에 도착하여 보니 그 나라의 국왕 松讓(송양)이 나와서 왕에게 하는 말이 과인은 이 벽지의 해변 모퉁이에 국왕으로 있으면서 아직까지 군자다운 임금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그대를 만났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구려 그런데 자네는 면식이 없으니 어데서 왔으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대답하여 보시게 하였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로서 某所(모소)에 도읍을 정한 왕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송양이 하는 말이 나의 가문은 누세에 걸처 왕이 되어 내려 왔는데 가뜩이나 지형이 적은 땅에 주인이 둘인 것은 용납 할 수 없으며 그대는 도읍을 정한 날짜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나라에 부용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라고 하자 왕은 그의 말을 듣고 분노하며 말로서 서로 다투다 역시 활쏘기를 하여 승자에게 패자가 따르기로 하였다. 역시 송양은 능력이 부족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2년째 여름에 송양은 나라를 가지고 항복하여 왔기에 그 땅을 多勿(다물)이라 하고 송양을 都主(도주)로 봉해 주었다. 고구려의 말에 옛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多勿(다물)이라 하는 고로 이름이 되었다.
[3].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추모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전투장으로 변한] 인간 세상을 즐거워하지 않으시자 “하느님”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시니 추모왕은 반갑게 맞이하시었다. 추모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시었다.
[삼국사기 본문] 영락(永樂) 즉위 3년 봄 3월에 황룡이 골령에 나타나 동명성왕이 친히 영접하고 [동명성왕은 용머리를 밟고] 곧 하늘로 올라갔다. 가을 7월에 경사스러운 구름이 골령(홀본) 남쪽에 청적색으로 나타났다. 4년 여름 4월에는 안개구름이 7일 동안 하루에 네 번씩 일어나 사람들의 얼굴색을 분별 할 수 없었다.
7월 가을에 城郭(성곽)에 궁실을 만들었다. 6년 가을 8월에는 궁전에서 神雀集(신작집)을 만들어 각 가정에 배포하고, 10월 겨울에 왕은 烏伊(오이)와 扶芬奴(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는 荇人國(행인국)을 토벌하여 쟁취하고 그 땅에 城(성)을 쌓고 邑(읍)으로 삼았다.
14년(BC 24년) 8월에 동명왕의 어머니 柳花(유화:하백의 딸)가 동부여에서 돌아가시니 금와왕은 태후 禮(예)씨를 장례하고 神廟(신묘:사당)을 세웠다. 10월 겨울에 사신을 동부여에 파견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올려 보은의 덕을 기렸다. 19년(BC 19년) 4월에 왕의 맏아들 儒留(유류:類利(유리)가 夫餘(부여)에서 어머니와 함께 도피하여 돌아오니 주몽왕은 대단히 기뻐하시며 맏아들 유류를 태자에 옹립하셨다. 9월 가을에 왕이 승하하시니 이때 년세는 41세 이었다. 龍山(용산)에 장례하고 호를 “ 동명성왕 ”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1]의 본문과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명성왕(추모왕)의 탄생에 대한 고증은 모두루비문(牟頭婁碑文)에 명확히 기록돼 있었다.
1. 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扶余 天下四方知 此國郡最聖德□□治
1. 하백의 외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 추모성왕(鄒牟聖王)은 처음 북부여에서 출생 하셨다. 이 고구려의 聖人(성인)이 덕(德)으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 천하 4방에서 다 알고 있었다. 상기 광개토비명 [2]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해설] 임진(臨津) 나루터에서 동명성왕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해모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라고 추모왕은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광개토비명 [4]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顧命世子(고명세자) 儒留王(유류왕:BC 19-AD 17년)은 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려 나라가 부흥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 유리(類利)는 어려서부터 기절(奇節)이 있었다. 어렸을 때 새를 쏘아 잡는 것을 생업으로 삼더니 한 부인의 물동이를 보고 쏘아 깨뜨렸다. 그 여자는 노해서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아이가 내 물동이를 쏘아 깨뜨려구나. 라고 말하자 유리는 크게 부끄러워 진흙 탄환으로 동이를 쏘아 구멍을 막아 옛과 같이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정해진 아버지가 없느니라 하고 하였다.
유리는 울면서, 사람이 정해진 아버지가 없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자결하려고 하자 어머니는 크게 놀라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앞전에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니라. 너의 아버지는 바로 천제의 자손이고 하백의 외손자이며 부여의 신하가 된 것을 원망하고 남쪽 땅으로 도망가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느니라. 너는 아버지를 찾아가 뵙지 않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다른 나라 임금이 되어 있다면 아들은 다른 나라의 신하가 될 것이니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남긴 말씀이 있느니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얻은 자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다." 라고 하였다. 유리는 산골짜기로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치고 피로하여 돌아왔다. 유리는 집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살펴보니 그 기둥은 돌 위에 소나무였고 나무의 몸은 일곱 모였다.
유리는 스스로 이를 해석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은 일곱 모요 돌 위의 소나무는 곧 기둥이라 생각하고 일어나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고 그 속에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매우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BC 17년) 여름 4월에 고구려로 달려가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바치니 왕이 가지고 있던 한 조각의 칼을 꺼내어 이를 맞추자 피를 흘리며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말하기를 네가 실로 나의 아들이라면 어떤 신성함이 있는가? 하니 유리는 소리에 응해서 몸을 들어 공중으로 솟으며 창을 타고 해에 닿아 그 기이한 신성을 보였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고구려국 본기 제1 유리명왕, 삼국사기] : 諱(휘)는 類利(유리) 혹은 孺留(유류)라 하였다. 주몽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禮氏(예씨)이다 처음 고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예씨 여인에게 장가들어 임신하고 주몽이 멀리 떠난 후에 낳은 아들이 類利(유리)이다. 어린 시절 밭두둑에 나와 참새를 잡으며 놀다가 어느 부인이 머리 위에 물을 긷고 가는 옹기를 잘못 쏘아 탄알이 옹기 그릇을 깨뜨렸다. 그 부인이 몹시 꾸짖으며 욕하기를 저놈의 아이는 애비도 없이 자란 놈이라 고집도 세고 이 같은 짓이나 하고 있구나 하였다.
유리는 말 할 수 없이 무참하여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나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지금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서 얼굴이 나타나면 용납하지 못한다 하여 남쪽으로 도피하여 나라를 개국하고 왕이라 칭한다. 때가 되면 아들에게 일러주어 찾아오라 하시며 너에게 이르신 말씀이 만약에 남자로 태어나면 말해주어라 하시면서 일곱 모난 돌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놓은 遺物(유물)이 있는데 이것을 찾아 가지고 오는 자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느니라,
유리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는 곧 산계곡으로 달려가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싫증이 나서 집으로 돌아 왔다. 하루는 대청 마루위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 주춧돌 사이에서 약간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하여 찾아보았더니 과연 주춧돌이 일곱모이었다. 곧 기둥 밑을 살펴보았더니 조각난 斷劍(단검) 하나를 찾았다. 드디어 단검을 가지고 屋智(옥지),句鄒(구추),都祖(도조)등 세 사람은 남행하여 졸본에 이르러 왕이신 아버지를 알현하고 단검을 받들어 올리니 왕은 몸소 나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단검과 합쳐 보니 하나의 칼이 완전히 연결되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시며 태자로 옹립하시니 이분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유리명제는 2년 가을 7월에 多勿(다물)의 제후 松讓(송양)의 딸을 王妃(왕비)로 맞이하였다. 9월 유리왕은 西山(서산)으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神雀集(신작집)을 집필하여 각 가정에 배포하였다. 백제에 溫祚(온조)를 시조로 옹립하였다. 3년 가을 7월에 골천에 別離宮(별리궁)을 만들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松氏(송씨)가 돌아가시자 왕은 다시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宮室(궁실)을 지었다. 한 사람은 禾姬(화희)라는 골천(鶻川)의 여인이고 한 사람은 雉姬(치희)라는 漢(한) 나라 여인 이였다. 두 여인은 왕의 총애를 차지하려고 서로 자주 다투어 화목하지 못함으로 왕은 凉谷(양곡)에 동서로 두 궁실을 만들어 각각 살도록 조치하고 후에 왕은 箕山(기산:하남성)에서 밭일을 하면서 7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더니 두 여인은 매우 심한 쟁투가 벌어졌다.
禾姬(화희)가 雉姬(치희)에게 몹시 꾸짖기를 너년은 漢家(한가)에서 시집온 婢妾(비첩)인 주제에 어찌 그리도 무례하게 예의가 없는가? 하고 매우 심한 욕설을 하니 치희는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원망하더니 몰래 도망쳐 버렸다. 왕은 그 사실을 듣고 말을 타고 황급히 추적하여 대책을 세워 줄 터이니 돌아가자고 달래어 보았으나 치희는 매우 진노하며 돌아오지 않으려 하였다. 왕은 항상 상심이 되어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黃鳥(황조)들이 날아와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는 감상에 젖어 노래 가사를 지었다.
훨훨 날고 있는 저 황조들도
암수가 서로 의지하고 있건만
나는 어찌하여 홀로 있는가?
생각할수록 눈물만 방울져 뚝뚝 떨어지는구나,
그 누구 가 애끊는 내 마음을 알아주랴
임이여...! 다시 돌아와 나와 함께 살려므나...!
11년 여름 4월에 왕은 모든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鮮卑(선비)는 우리를 믿고 의지하지 않고 위험스럽게 저들은 이로우면 和親(화친)하고 불리하면 곧 군사를 출동시켜 초략하고 있으니 가만히 지키고 있으려니 나라의 우환이 될까 염려스럽다. 만약에 저들을 척결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장군으로 중용하고 많은 賞(상)을 내릴 것이다. 扶芬奴(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進言(진언)하기를 鮮卑國(선비국) 사람들은 우직스럽고 용맹하여 힘으로 전투하면 어렵고 위험함으로 易(역)의 원리로 모략하여 굴복시켜야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무엇을 어찌하면 되겠는가? 대답하기를 우선 使臣(사신)을 저쪽 나라에 들어가 탐문하면서 거짓으로 반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소국이라 병력도 적고 겁도 많으며 국력도 빈약하여 군사를 동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라고 설명하여 주면 곧 鮮卑(선비)들은 우리는 준비도 없고 전투하면 저들은 반드시 쉽게 승리하리라 생각하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臣(신)은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山林(산림)을 의지하여 길목의 틈 사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城(성) 안의 병사는 망만 보도록 하고, 임금님은 城(성)남쪽으로 병사를 출동시켜 지쳐서 허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저들은 반드시 멀리서 보고 城(성)이 비어 있는 줄 알고 쉽게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때 下臣(하신)은 精兵(정병)으로 달려가 공격하고 성에 들어오려고 하는 놈들을 왕은 친히 용맹한 기마 보병으로 협공해 주시면 곧 격퇴되어 승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은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鮮卑(선비)는 과연 열린 문으로 병사를 출동시켜 쳐들어오자 扶芬奴(부분노)는 장병으로 城(성)에 들어온 자와 도주하는 선비 군사들을 일망타진하니 크게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부분노는 당연히 전투와 관련되어 매우 많은 적을 참살시켰다.
왕은 깃발을 높이 들고 북소리를 울리며 전쟁의 승리식을 거행하고 선비족의 괴수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죄하니 받아들였다. 적들은 용맹은 하였으나 계략이 궁핍하여 결국 鮮卑(선비)는 굴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食邑(식읍)을 상으로 주었더니 사양하면서 하는 말이 제왕님의 덕으로 승리 한 것이지 어찌 신이 무슨 공이 있었습니까? 하고는 받지 않음으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하사 하셨다. 13년 봄 정월에는 惑星(혹성)인 守心星(수심성)이 반짝 그렸다.
14년 봄 정월 부여왕 帶素(대소)가 사신을 파견하여 아들을 서로 교환하여 인질로 삼자고 청하여 왔기에 왕은 한탄스러웠으나 부여는 강대국이라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하고 태자 都切(도절)을 인질로 삼고저 하였으나 도절은 두렵게 생각하여 이행하지 못하였더니 대소는 대단히 분개하면서 겨울 11월에 대소는 5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왔으나 큰 눈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자 이내 물러갔다.
19년 가을 8월 근교에서 기르고 있던 일품의 돼지가 달아나고 없음으로 왕은 託利(탁리)와 斯卑(사비)로 하여금 추적하도록 하였더니 멀리 屋澤(옥택)에서 붙들었으나 칼로서 그 다리를 뿌려뜨려 잡아 왔다. 왕은 그 소문을 듣고는 대단히 진노하며 하는 말이 하늘에 제사하는 祭上(제상)에 올리는 특별한 희생물을 어찌하여 상하게 하였는가? 하고는 두 사람을 죽여 갱 속에 묻어 버렸다. 9월 왕은 질병으로 앓아 누으니 巫女(무녀)가 하는 말이 託利(탁리)와 斯卑(사비)를 죽였기 때문에 탈이 되었다고 하니 왕은 사죄하자 즉시 쾌유되었다. 20년 봄 정월에 태자 都切(도절)이 죽었다. 21년 봄 3월에 근교의 돼지가 또 달아나 왕은 薛支(설지)에게 명하면서 제사할 희생물이니 사냥꾼이 사슴을 쫒아 손으로 잡아오도록 하였다.
국내성의 尉那巖(위나암)에서 붙들었는데 국내성의 사람이 가정집에 가두어 두고 기르고 있었다. 돌아와서는 본 것을 왕에게 말하기를 臣(신)이 돼지를 잡으려 국내의 尉那巖(위나암)을 보았더니 그 산의 계곡이 깊고 항상 물이 흐르고 있으니 지세는 매우 험한 지역이였으나 오곡이 잘 될 것 같았습니다.
또 고라니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매우 많아 산물이 풍부하였습니다. 왕께서 만약에 도읍을 옮기시면 곧 백성들은 많은 이익을 얻어 궁핍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또한 兵革(병혁)의 환난도 면할 수 있는 곳으로 오직 최적지 이였습니다. 여름 4월에 왕은 尉中林(위중림)에 밭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에 왕은 국내를 관광도 하고 지세를 살피보고자 沙勿澤(사물택)에 이르렀는데 한 사내 대장부가 못의 큰 바위에 올라 앉아 있다가 왕을 보고 하는 말이 왕의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 왕은 웃으면서 허락하고 인연이라 이름을 沙勿(사물)이라 하고 姓(성)을 位氏(위씨)로 지어 주었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은 도읍을 國內城(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城(성)을 쌓았다. 12월에 왕은 山陰(산음:산능) 밭에서 일을 하면서 5일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大輔(대보) 陝父(섬부)가 왕에게 말하기를 도읍을 새로 옮겨 놓았으면 백성들이 편안이 안도 할 수 있도록 하고 마땅히 政事(정사)에 전념하셔야 가엾은 백성은 억울한 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의 일에는 전념하지 않으시고 말이나 타고 사냥을 즐기시며 오랜 동안을 돌아오지 않으시니 만약에 자신을 새롭게 고치지 않으신다면 신하들은 황공하고 정치는 황폐하여 백성들은 흩어 질 것이며 선왕의 유업을 땅에 추락시키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의 말을 듣고는 대단히 진노하며 陝父(섬부)를 파직시켜 직책이 낮은 司官園(사관원)이 되게 하였더니 섬부는 분을 참지 못하고 南韓(남한)으로 가버렸다. 23년 봄 2월에 왕자 解明(해명)을 태자로 옹립하고 국내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24년 가을 9월에 왕은 밭에서 일을 하다 箕山(기산:하남성)에서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주 특이한 사람이 있기에 조정에 등용시키고 姓(성)을 羽氏(우씨)라 하고 왕녀를 모시도록 하였다.
27년 봄 정월에 왕은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서 용맹을 떨치며 힘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황룡국 왕이 파견한 사신에게서 들었다. 해명에게 기증한 활은 强弓(강궁) 이였는데 그 사신을 대면하고는 끌어당기니 뿌러져 버리니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황룡왕이 대단히 무참해 하였다는 소문을 왕이 듣고는 대단히 진노하며 황용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은 아들로서 불효하였으니 초청하시여 과인을 위하여 주살하여 주십시요 하였다. 3월에 황용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태자와 서로 만날 줄것을 초청함으로 태자는 가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이웃 나라에서 아무런 사유도 없이 초청하여 만나 보자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인지 예측 할 수 없습니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있는데 설마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 황룡왕과 같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겠는가? 하고는 초청을 허락하고 갔더니 황용왕은 처음에는 모략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서로 만나보고는 감히 加害(가해)하지 못하고 예의를 다하여 환송하였다.
28년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해명을 불러 놓고 하는 말씀이 나는 도읍을 옮겨 놓은 것은 백성들이 편안히 잘 살수 있도록 하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 선왕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으나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강한 힘을 자랑하며 이웃 나라와 원수를 맺고 있으니 어찌 자식의 도라 할 수 있겠는가? 下賜(하사)하는 이 칼을 가지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라,
태자는 즉시 자살하려고 하자 혹자가 중지시키며 하는 말이 대왕이시여 태자는 장자이며 이미 지난 일이며 태자는 후에 다녀 온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지금 한 사신도 와서 자살을 말리고 있으며 그것은 사기술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태자가 말하기를 저번에 황용왕이 强弓(강궁)을 주었을 때 활을 뿌러뜨린 것은 나를 두렵게 생각하라는 것 보다 우리나라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뿌러뜨린 것이며, 보복하기 위한 뜻이 아니 였습니다.
부왕께옵서 저를 보고 문책하시고 오늘은 부왕께서 불효자식이라고 검을 주시며 자결하라 하시니 어찌 아버지의 명을 받고 도망 갈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이내 礪津(여진) 東原(동원)의 들판으로 달려가 창을 땅에다 꽂아 놓고 말을 달리게 하여 창촉에 찔려 죽으니 그때의 나이는 21세였다. 태자로 예우하여 東原(동원)에 장례하고 사당을 세우고 그 지역을 槍原(창원)이라 하였다.
논설(김부식) 효자는 부모를 섬기는 것은 당연하나 이는 좌우의 이치를 분별하지 못한 효라 하겠다. 만약에 文王(문왕)의 세자라 하더라도 해명은 따로 도읍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용맹을 떨치며 즐기고 있다가 그 소문을 들은 부왕의 벌을 받은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또 좌전(左傳)에 말하기를 자식사랑은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그릇된 데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은 처음 미리 가르치지 않고 악하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 할 수 있다.
가을 8월에 부여왕 帶素(대소)의 사신이 와서 겸손 한척하며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왕과 먼저 임금이신 동명왕과는 서로 우호하며 사이가 좋았으나 지금은 우리 신하들은 佛法(불법)의 도술>에 유혹되어 여기까지 도망을 와서 취락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국가를 운영할 사람이 없으니 그 병폐가 매우 많습니다. 무릇 나라에는 대소가 있고 사람에게는 長幼(장유)가 있으며 일에는 순리가 있습니다.
즉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을 사대의 예라 하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는 것을 長幼有序(장유유서)라 하며 일의 순리를 事理(사리)라 하였습니다. 금일부터 만약에 왕께서 사대의 예로서 우리나라에 순종하시면 곧 天佑神助(천우신조)로 하늘이 반드시 도와 국운이 영속 될 것이며 끝까지 순종하지 않으면 곧 그 社稷(사직) 마저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 왕은 스스로 自謂(자위)하여 보니 나라를 설립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백성들과 병사들을 모두 합쳐보아도 얼마 되지 않고 군사의 세력이 빈약하니 치욕스럽더라도 인내하며 참고 굴복하는 것이 후일을 企圖(기도)함에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이에 군신들과 모의하여 보고하기를 과인은 벽지촌의 해변 구석에 살고 있으면서 예의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들어보지도 못하였는데 오늘 윗 어른의 가르침으로 이치를 깨달았으니 감히 대왕의 承命(승명)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이때 왕자 無恤(무휼)은 나이가 어렸으나 왕께서 보고하는 말씀을 듣고는 부여 나라 말로 自見(자견:자신을 알라)라고 하면서 그 사신에게 하는 말이 우리 선조님은 신령이시며 나는 손자이니라 인자하시고 재능이 많으신 성현님을 지금의 대왕은 질투하여 살해하고자 父王(부왕)에게 거짓으로 참소하고 치욕스럽게도 말을 기르는 목동으로 계시다 신변이 불안하셨기 때문에 南行(남행)으로 출발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의 대왕은 예전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만 병사들이 많다는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가볍게 보고 능멸하고 있습니다. 청원하오니 使臣(사신)께서 도읍에 귀국하시여 대왕에게 보고하여 주십시요 지금은 累卵(누란)이 있으니 만약에 대왕께서 누란이란 뜻을 안다면 곧 신하로서 장차 “사대의 예”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곧 거부한다고 하여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부여왕이 그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질문을 하시니 한 늙은 신하가 대답하기를 累卵(누란)이란 쌓아 놓은 새알처럼 대단히 위태롭다는 뜻이며 그 알을 훼손하지만 않는 다면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왕 자신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며 장래에 위태하지 않고 편안하려면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29년 여름 6월에 矛川(모천) 상류에서 흑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무리지어 싸웠는데 흑 개구리가 승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것을 보고 議者(의자)가 말하기를 흑은 북방의 색으로 북부여는 파멸될 징조라 하였다. 가을 7월에 豆谷(두곡)에 別離宮(별리궁)을 지었다.
31년 漢(한)의 王莽(왕망:유철)이 우리나라 병사를 징발하여 胡(호)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가하지 않자 강박함으로 다 도망쳐 나와 요새에 숨었더니 그로 인하여 범법자로 취급하기에 遼西(요서)의 大尹(대윤) 田譚(전담)을 추격하여 죽이고 州郡(주군)으로 돌아왔더니 우리에게 허물을 돌렸다.
嚴尤(엄우)가 왕망에게 진언하기를 貊人(맥인)이 법을 범하였으니 州郡(주군)에 령을 내려 위안하여 주심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피의자로 대죄를 내리면 그들은 두려워서 배반하게 될 것이고 부여의 족속들은 반드시 같이 화동 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이때에 부여와 穢貊(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王莽(왕망)은 듣지 않고 조서를 내려 엄우에게 고구려를 격퇴시켜라 하였다. 엄우는 우리나라 장군 延丕(연배)를 유혹하여 목을 베어 京師(경사:長安)에 전하였다. 漢書(한서)와 南北史(남북사)에서 다 이르기를 고구려의 제후 과가 유혹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王莽(왕망)은 기뻐하여 우리 왕의 이름을 고치고 고구려는 제후국이다. 라고 포고령을 내려 천하가 알도록 하였다. 이에 도적 漢(한)은 변두리 지역은 더 심했다.
32년 甲午(갑오:BC147년) 10월에 北沃沮(북옥저)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 乙未(을미)에 도읍을 졸본에서 訥見(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常春(상춘:吉林省(길림성)의 長春(장춘))이며 朱家城(주가성)이라 한다. 장자 유리명제는 19년에 또 눌현에서 國內城(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城)을 皇城(황성)이라 한다. 혹은 丸都山(환도산)이라 하고 산위에 城(성)을 쌓아 국사가 있을 때만 거주하셨다,
32년 겨울 11월에 부여 사람들이 침략하여 오자 왕은 태자 무휼로 하여금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방어하도록 하시니 무휼은 병력은 적었으나 두려운 공포심이 없도록 적에 대비하여 기묘한 설치로 계략을 마련하고 친히 군사를 통솔하여 모두 산 계곡에 숨어서 잠복시켜 기다리게 하였다. 부여 병사들은 직행하여 鶴盤嶺(학반령) 고개에 이르자 산 계곡에 숨어서 잠복하고 있던 병사들을 발동시키니 갑자기 습격을 받은 부여 군사들은 대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기어오르니 무휼의 병사들은 종횡무진으로 공격하여 모두 죽였다.
33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에 옹립하고 국군 통수자로 위임하여 국사를 맡도록 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은 鳥伊(오이)와 摩離(마리)에게 명령을 내려 병력 2만 명으로 서쪽의 梁(양)과 貊(맥)을 토벌하도록 하여 멸망시키고 그 나라 병력과 함께 漢(한)나라를 습격하여 고구려 縣(현)을 쟁취하였다.(이 縣(현)은 본래 고구려의 玄兎郡(현토군)에 속한다)
37년 여름 4월에 왕자 如津(여진)이 물에 빠져 익사하여 죽으니 왕은 매우 애통해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屍身(시신)을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沸流(비류) 사람 祭須(제수)가 소문을 듣고 찾아 왔기에 왕은 骨嶺(골령)에 장례하고 제수에게는 금 열 근과 밭 열경(頃)을 하사하셨다. 가을 7월에 왕은 豆谷(두곡)에 행차하셨다. 겨울 10월에 豆谷(두곡)의 離宮(이궁)에서 돌아가시니 豆谷(두곡)의 東原(동원)에 장례하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광개토비명 [5].大朱留王紹承基業]
[5]. 대주류왕(대무신왕)이 계승하고는 시조께서 창업하신 나라의 기반이 더욱 튼튼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은 혹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며,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장성하자 지략이 뛰어나 유리왕은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11세였다.
유리왕 재위 37년에 돌아가시자 태자로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로서 송(松)씨이다. 2년(서기 19) 봄 정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3년(서기 20) 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말[神馬]을 얻어 거루(駏䮫)라 이름하였다.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까마귀의 검은 색이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습니다.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징조입니다.
대소가 기뻐하며 까마귀를 보내며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인데 지금 색이 붉게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왕이 얻어서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 주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4년(서기 21) 겨울 12월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려고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서 다가가 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 밥을 지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갑자기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을 지금 대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오 하자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때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키가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나는 한 사람이 나타나 왕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쪽 명주(溟洲)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은밀히 북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을 들고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5년(서기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말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엄습하려고 출전했으나 말들이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자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빌자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 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 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어두운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서둘러 골구천에서 빠져 나올 때 신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서 부여를 경솔히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였다. 또 우리 군사들이 먹을 물건 솥을 잃어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랬다.
3월 신비로운 말의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강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에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나라 땅을 빼앗아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전에 병이 심해지자 왕은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가 말하기를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어도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9년(서기 26)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중략)
15년(서기 32) 봄 3월에 대신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쫓아내어 서인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이 되었는데 바탕이 욕심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 우마, 재화를 빼앗아 마음대로 하고, 주지 않는 자에게는 채찍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이었으므로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내쫓아버렸을 뿐이다.
마침내 남부(南部) 사자(使者) 추발소(鄒素)를 대신 부장으로 삼았다. 추발소는 부임하여 별도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 등이 죄인이었으므로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나와 고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잘못을 용서하시고, 개과천선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추발소는 그들을 이끌어 올려 같이 앉아 “사람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나 잘못해도 고칠 수 있으면 선(善)함이 매우 큰 것입니다.”고 말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추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하니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고는 성(姓)을 주어 대실씨(大室氏)라 하였다.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 있는 북과 뿔피리는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던 것이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국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매우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첫째 왕비는 계승권을 호동이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오.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를 주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호동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만약 내가 변명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일이니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중략)
20년(서기 37) 무신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24년(서기 41) 봄 3월에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6]□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6]. □ 제 17대 世孫(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 호태왕은 皇天(황천:하느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위세와 武勇(무용)의 혜택으로 천하 4방을 깨끗이 掃除(소제)하여 □□동명성왕께서 바라시던 나라는 질서가 안녕되어 백성들은 가업에 종사하고 오곡이 풍숙하여 잘살게 되었습니다. 조상님(고주몽)은 皇天(황천)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九州(9주)에 계시며 酒宴(주연)을 베풀러 주시었다. 가섭국(駕葉國)으로 갑인년(서기414년) 9월 29일 을유일 就山(취산)에 移葬(이장)하고 이 능에 비석을 세우고 碑銘(비명)에 훈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제 17대 세손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년호를 永樂(영락), 不樂(불락), 혹은 平樂(평락)도 보인다. 영웅호걸 “ 광개토대왕 “에 대하여 살펴보자.
[삼국사기]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성품이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삼았고, 8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에 잡혀갔던 본국 백성 1만 명을 불러모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4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2년(392)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오자,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 3년(393)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해 오자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8월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 침략에 대비하였다. 4년(394) 가을 8월에 왕은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9년(399) 봄 정월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왕 모용성(盛)이 우리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며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장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 재위 10년 일본을 멸망시킨 역사적 대사건의 기록이 없다] 11년(401)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자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13년(403) 겨울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14년(404)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서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고 하였다.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5년(405)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17년(407) 봄 3월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 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자신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성을 고(高)씨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던 것이다.
18년(408) 여름 4월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다.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 왕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22년(412)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본문 끝]
[7],其辭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叉躬率住討 □富山 負山至鹽水上破其丘部洛 六七百當 牛馬群羊不可稱數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五□ 遊觀土境田獵而還
[7] : 대왕의 훈적을 말하면 영락 5년 을미(395년)에 왕은 碑麗(비려)가 쉬지 않고 침략함으로 몸소 군사를 통솔하고 토벌하여 □富山(?부산)과 負山(부산)의 鹽水(염수) 위에까지 이르러 그 부락 6-700을 파괴하고 牛馬(우마)와 양떼를 얻은 것은 이루 칭할 수 없었다. 임금님은 수레를 타고 □平道(평도)를 지나 東來(동래)의 □城(성)과 力城(역성)과 北豊(북풍) 五□(5성)을 유람하시면서 국토의 경계를 관찰하시고 수렵도 하시고 환도하시었다.
광개토대왕은 몸소 일본을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8]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以倭以 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 爲臣民以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8] 百殘(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받혀 왔는데 倭(왜)는 辛卯年(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臣民(신민)으로 삼았다.
6년 丙申(병신 396년)에 광개토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일본 땅으로 들어가] 백제의 殘黨(잔당)을 토벌하고 軍(군)의 □□首(□□수)를 공격하여 18城(18성)을 쟁취하였다.
模盧城(모로성) 幹 利□城(간저리*성) 閣 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沙城(미사성) □ 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 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註:상기의 각 성(城)은 일본 영토내의 성이 틀림없다. 특히 [28字****缺(결)] 자는 당시 일본국내 존재한 지명이기 때문에 일제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9] 其國城賊不服氣敢 土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遺刺迫城橫 □使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白一千人細布□歸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迷之御錄其後順之誠於是□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9] : 그 나라 城(성)의 도적들은 감히 대왕의 기풍에도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성난 노도와 같은 위세로 아리수 강을 건너 백전 백승을 거두고 종횡으로 城(성)을 압박하자 刺史(자사)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백제의 잔당과 그의 왕은 곤경에 처하자 남녀 1,000명과 비단을 바치면서 대왕을 찾아와 금일 이후는 영원한 노예가 되어 복종하고 태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서약을 시켰더니 自進(자진)하여 사죄함으로 御錄(어록)에 남기고 赦免(사면)해 주었다. 그 후는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순종하였다. 이에 58성과 촌마을 700과 將帥(장수)와 殘兵(잔병)과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과 법사와 함께 도읍으로 환국하셨다.
[10] 八年戊戌敎遣偏師觀 帛진土谷因便抄得莫新羅城加 太羅谷 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 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 遣使白王云 倭人滿 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 王請命 太王恩後 稱其忠□□違使還吉以□
[10] : 8년 戊戌(무술 398년) 法師(법사)를 파견시켜 觀音經(관음경) 원문을 주었는데 그로 인하여 인편으로 토속 물과 비단을 가져 왔다, 新羅城(신라성)의 太羅谷(태라곡)에서 남여 300여명이 모여서 자진하여 조공 바치는 일을 논의하였다.
9년 己亥(기해 399년) 백제의 殘黨(잔당)과 倭(왜)는 위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므로 倭(왜)와 和通(화통)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은 臣民國(신민국)을 순행하고자 平穰(평양)에 머물러 계셨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대왕에게 아뢰기를 수많은 왜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城池(성지)를 파괴하고 백성들을 客地(객지)로 회귀시켜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왕은 태왕님께서 請命(청명)하신 충성의 은혜는커녕 돌아서 위반하고 있으니 환국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註解 : 奴客(노객) : 客地(객지)로 회귀시켜 노예로 삼음
[11].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 其中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新羅城□城倭滿倭潰城 六□□盡吏能來安羅人戌兵□□□□□□□□□□□□□□□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11] : 10년 庚子(경자:400년)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충청북도)까지 쫓아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 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황급히 후퇴하기에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城(성)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고, 발본한 城(성)은 安羅人(안라인:가야)이 戌兵(술병)하도록 하였다. 註 : 戌兵(술병) : 병사로 성을 지킴
신라성의 □성에도 왜병이 가득 차 있기에 왜병들이 있는 城(성) 여섯 개와 □□城을 다 궤멸시키고 관리를 두어 安羅人(안라인)을 戌兵(술병)하도록 하고 □□□□□□□□□□□□□□□도 안라인이 술병하도록 하였다.
옛날 신라는 [제사장의 나라이고] 寐錦(침금: 고구려와 형제 국)이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신라임금이 몸소 조공을 받힌 적이 없으므로 광개토호태왕은 □□의 신라 임금 만은 僕勾(복구:벼슬이름) □□□□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광개토대왕은 바다를 건너 일본을 격파했다
[고구려국 본기 제 6, 환단고기] 광개토호태황제는 聖德(성덕)이 백왕보다 탁월하여 융성한 공덕을 쌓아 천하사방에서 그 위용을 떨쳐 烈帝(열제)라 칭하였다. 18세에 光明殿(광명전)에서 왕위에 오르실 때 천락(天樂:어아가)을 연주하였다.
禮式(예식)을 올릴 때나 적진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에게는 항상 於阿歌(어아가)의 노래를 부르게하여 병사들의 士氣(사기)를 조장하였다. 한때 기마보병을 거느리고 순행길에 摩利山(마리산)의 塹城壇(참성단)을 친히 등정하시여 三神(삼신:여호와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실 때도 역시 天樂(천락)을 연주하였다.
[광개토대왕]은 한때 바다를 건너가 왜국(일본)을 격파하셨다. 왜인(倭人:일본)은 백제가 개입하고 있었는데 먼저 왜는 백제와 은밀히 내통하고 연합하여 신라 영토의 국경을 침범함으로 광개토대왕은 몸소 水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신라 영토 내의] (1)熊津(웅진:전남 공주),(2),林川(임천:부여군임천면),(3),蛙山(와산:충북보은),(4),槐口(괴구:충북괴산),(5),伏斯買(복사매:충북영동),(6),雨述山(우술산:대덕군 공주군),(7), 進乙禮(진을례:금산군,무주군),(8),奴斯只(노사지:대전 유성)등 城(성)의 왜적을 공격하여 쟁취하였다.
[신라 국토내의 각 성에 가득 찬 백제 잔당과 왜적을 다 평정하시고] 아침 일찍 속리산에 등정하시여 하느님에게 天祭(천제)을 올리고 환국하셨다. 이때는 곧 백제와 신라, 駕洛(가락)과 모든 나라는 모두다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고 거란과 平凉(평량:감숙성 평량현)도 모두 항복시켜 평정하였다. (9) 任那(임나), 伊勢(이세)는 倭(왜)에 속했으나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신민국이라 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이 시기가 海東(해동)이 최대로 흥성한 강국이었다.
[13]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 □連船 □平穰□ 相遇王 幢要截 蕩刺 倭寇潰 敗斬 煞無數 十七年丁未敎遣出騎五萬□師□合戰 斬煞湯盡所稚鎧鉀一萬餘領 軍資 器械不可稱數 還破沙□城 婁城城 卄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 屬民中 叛不貢王躬率往 討軍到 餘城而 餘城國변 □王恩 普處於是旋還 叉其慕化隋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立婁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13] : 14년 甲辰(갑진 404년)에 왜는 궤도를 벗어나 약정을 지키지 않고 帶方界(대방계)를 침입하여 □石城(석성)에 수많은 선박(배)를 연결해 놓고 平穰(평양)의 □에서 왕과 서로 만나 줄 것을 요청하면서 幢旗(당기)에 칼을 꽂아 찌를 듯이 방탕한 짓을 하기에 倭寇(왜구)를 궤멸시켜 참패시키고 무수히 참살시켰다.
17년 정미(407년)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師(□사)와 □로 연합 전투를 하여 다 참살시켜 소탕하고 갑옷 1만여 벌과 군수 물자와 기계를 칭할 수 없는 숫자를 노획하고 沙□城(사□성),과 婁城(루성)의 城(성)을 파괴하고 돌아왔다.
20년 庚戌(경술 410)년 [옛 동부여의 추모왕(동명성왕)]의 속민 중에서 반란을 하였거나 조공을 바치지 아니한 왕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토벌하시고 나머지 다른 城(성)과 다른 국왕은 곳곳을 돌면서 은혜를 베푸시고 환국 하셨다.
또한 호태왕의 은덕에 감화되어 따라온 관리는
미구누압노, 비사마압노, 사누압노, 숙사사압노, □입누압노, 이고,
무릇 공격하여 파괴시킨 성(城)은 64개이고, 마을은 1400개 이었다.
[14] 守墓人 烟戶 賣句余民國 烟二 看烟三 東海賈國 烟三 看烟五 敦城□ 四家盡爲看烟□城一家 爲看烟碑利城 二家爲國 烟 平穰城 民國 烟一 看烟十□連二家爲看烟 住 婁人國 烟一 看烟십二梁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連 卄二家 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 韓穢 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 岑韓五家爲看□句牟客頭二家爲看烟永底韓一家爲看烟舍조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家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各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弓利城國烟二看烟□□□城國烟六看烟<11字缺>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一閏奴城國烟二都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전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三穰城卄四家爲看烟□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句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宴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
[14] : 守墓人(수묘인) : 묘를 지키는 사람. 烟戶法(연호법) : 호적법의 일종. 호주와 같은 지위.] 賣句余民國(매구여민국)과 東海賈國(동해매국)의 敦城(돈성) □□城. 碑利城(비리성). 平穰城(평양성) 婁人國(루인국)의 梁谷(양곡), 梁城(양성) 改谷(개곡) 新城(신성) 南蘇城(남소성) 韓穢(한예)의 沙水城(사수성) 牟婁城(모루성) 豆比鴨岑(두비압잠) 句牟客頭(구모액두),永底韓(영저한) 舍조城(사조성) 耶羅城(야라성) 炅古城(경고성) 客賢韓(객현한),阿旦城(아단성) 雜珍城(잡진성) 巴奴城(파노성) 模盧城(모로성) 牟水城(모수성),幹弓利城(간궁리성) □□□城. <11字 **** 缺결> 豆奴城(두노성) 奧利城(오리성) 須鄒城(수추성) 百殘(백잔) 南居韓國(남거한국),大山韓城(대산한성) 農賣城國(농매성국) 一閏奴城國(일윤노성국) 古牟婁城(고모루성),전城(전성) 味城(미성) 就咨城(취자성) 穰城(양성). □那城(나성) 那旦城(나단성),句牟城(구모성) 利城(리성) 比利城(비리성). 細城(세성) ****
[15]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 敎言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酒掃 吾로慮舊民轉當리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 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삽看烟三百都合三百家 [18]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羌錯 惟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烟戶 不合羌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천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15] :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생존시에 시조왕과 선대왕에 대하여 하교하신 말씀은 먼 옛날과 근래에 쟁취한 신민국의 백성들에게 “묘소를 지키는 법”과 酒掃法(주소법)을 교지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염려되는 것은 오래되면 환경이 좋지 않아 백성은 당연히 옮겨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만년 후에 세력이 약해지더라도 묘소만은 안전히 지켜야 된다.
다만 내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취득한 곳에 침략자가 쳐들어오면 韓,穢(한.예)에 령을 내려 대비하고 酒掃法(주소법)은 교지와 같이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광개토대왕의] 敎令(교령)에 따라 韓,穢(한.예)에 220가구를 취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으나 염려한 것과 같이 법칙을 잘 알지 못하여 다시 옛부터 지켜온 백성과 새로 110가구를 취하여 都合(도합) 330가구를 守墓(수묘)하여 看守(간수)하도록 하였다.
시조 上王(상왕:고주몽,추모왕)부터 先王(선왕) 이래로 묘소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 할 것 같아 碑石(비석)에 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烟戶(연호)한 것이니 착오 없어야 한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님께서 시조왕과 先王(선왕)의 묘소에 다 碑石(비석)을 새우고 그 碑銘(비명)에 烟戶(연호)를 기록하였다. 守墓人(수묘인) 제도를 착각하거나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거나 금일 이후부터 서로 매매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비록 부유하여 풍족한 사람이라도 역시 매입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법령을 위배하며 매입하는 자는 제정된 수묘 법령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명해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