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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 31-35절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태복음 13장으로 들어와 우리는 두 가지 비유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첫 번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두 번째는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두 비유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비유의 목적을 통해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로 하자면 처음부터 곡식으로 심으신 자가 있는가 하면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로서 덧뿌려진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경우 얼핏 여러 가지 밭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에 결실을 위해서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훈의 측면에서는 그런 사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길가나 돌밭, 가시떨기 밭은 어떤 자들을 의미하는가?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인 것입니다. 그럼 좋은 밭은 어떤 자들인가?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 허락되었기 때문에 받아 누리는 자, 그리고 더욱 넉넉히 받아 누리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가 없는 가라지가 아니라 열매가 있는 곡식으로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고 또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라나 결실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 가운데 떨어져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가운데 떨어져 결국에는 결실하고야 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어떤 이유로든 말씀을 거부하거나 빼앗기거나 말씀과 관련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는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있게 되면 말씀이 막혀 결국에는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결실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라지의 정체와 관련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알리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로 말미암은 고난과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의 모든 악행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낱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누구인지 다 드러나고야 말 것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가라지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가라지를 보면서 사는 자가 아니라 마지막 때, 그리고 그 이후 완성될 영광의 모습,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임을 알리십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는 인내하면서, 그리고 믿음으로서 살아야 할 것까지 알리신다고 할 수 있는데,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열매 없는 자가 아니라 열매 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란 마태복음 5장을 통해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신 거기에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금과 빛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후 예수님께서 율법을 해석해 주셨는데,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알리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인데, 비유는 두 가지이지만 내용은 한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습니다. 먼저 31절과 32절을 보시면 겨자씨 비유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절은 누룩에 관한 비유인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 비유와는 달리 이 두 비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해설이 없다고 해서 당시 제자들이 이 비유와 관련해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비유 자체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성령의 조명을 따라 깨닫는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럼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당장 보기에는 겨자씨만큼 작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모든 씨보다 작다고 말하지만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겨자씨와 다른 씨를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은 씨가 자란 후에 얼마나 큰가를 비교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가장 작다고 해서 실제로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는 겨자씨 하나를 심었을 때 그 씨가 자란 후 얼마나 큰지를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시작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누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루 서 말에 대해 정확하게 얼마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적은 양의 누룩에 비해 굉장히 많은 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룩을 넣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빵을 만든다고 할 때 빵을 부풀리게 하는 이스트(yeast)를 넣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양으로 비교하자면 가루 서 말에 비해 매우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 같고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 힘을 발휘하면 많은 양의 가루도 부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매우 미미해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고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나무에 비해 겨자씨가 얼마나 작습니까? 가루 서 말에 비해 적은 양의 누룩은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가 나무가 되는 것처럼, 누룩이 그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태어나신 곳은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을 몸을 취하신 것도 굉장히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는데, 정상적인 집이 아니라 ‘구유’(눅2:7)라는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삶 자체가 외적으로 볼 때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전하신 복음에 관해서도 보면, 한편으로는 복음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행함으로서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다는 것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도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실제로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그리고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하여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합당한 내용으로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복음에 합당한 열매가 그들에게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들은 “누가 크냐?”로 싸웠고, 할 수만 있다면 높아지려고 했던 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치적으로 뭔가 일으켰을 때 주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까지 그런 부탁을 하였을 정도인데(마20:20-21), 이것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하였느냐? 분히 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마20:24).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리고 인성을 취하심으로 낮아지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는 높아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친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였지만, 그리고 그렇게 외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 몬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끝이 났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금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승천하신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해 지극히 높으신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장차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도 알리신 것처럼 마지막 심판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에 대한 심판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습니다. 지금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반응할 때 뭔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고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되느냐? 영광스러워질 것을 겨자씨 비유로, 누룩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크게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있을지라도 그 힘은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 어떤 분들은 지상에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계신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주의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동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영광스러워도 천상의 교회처럼 영광스럽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 부분 지상의 관점에서 그 영광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 곳곳에 기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래서 기독교가 다른 모든 것들보다 높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만 보더라도 지상의 영광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지상에서 영광을 구하도록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당연히 몸 된 교회는 지상의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역시 이 땅에서는 미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보잘 것 없고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천국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을 예로 들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처럼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느냐?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행16:5)
이처럼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한 처음에는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커지고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지만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여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적은 양의 누룩으로도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게 할 수 있는 힘이 분명 있습니다.
다만 이런 이해 속에서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기 때문에, 또 그 수가 날마다 늘어간다는 말씀 때문에 오늘 비유에 대해서도 교회의 외적 성장을 말하고자 한다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상 교회의 영광을 구하는 논리와 다름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사도들이 활동하던 당시 교회의 외적 성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교회의 외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런 외적 성장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자라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점점 완성이 되는 형태로 있다는 것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개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하나의 보편 교회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유를 통해 개교회의 외적 성장을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두 비유를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교회로 부르실 것이고, 그들을 복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결국에는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미로서 지금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지금 현재 보이는 그것만을 보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날 우리를 완성시키실 것을 분명히 아는 자로서, 또한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보잘 것 없고 작은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습니다(고전1:26).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도 없습니다. 왜 없게 하셨는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에 있느냐? 뭔가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 스스로 가진 적이 없습니다. 알몸으로 나와서 알몸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만 오고 가는 자들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 있는 자로 가게 하십니다. 미완성인 자로 왔다가 결국에는 완성되어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서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어떻게 말하기도 했느냐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성도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보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자!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지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성도 개개인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보면 세상 기준으로서 성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또 교회조차 지상의 복을 말함으로서 성도로 하여금 천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는 지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습니다. 때문에 가시적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냐?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개교회는 그 몸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라나고 성장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라난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개교회가 그분의 말씀만을 먹고 마시는 데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가! 그리고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순수하게 거행되고 있는가! 죄를 벌하는 교회의 권징이 말씀에 따라 실시되고 있는가! 그런 교회가 말씀을 따라 자라고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보잘 것 없고 작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눈으로 약속된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성도 개개인은 자기 자신을 지금의 상태 그대로만 보시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거짓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이상 그들의 결국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사실로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자라고 변화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질의 부요함, 육신의 건강, 사회 속에서 잘 되는 나, 이런 식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높여주시겠다”가 아닙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로 하자면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비로소 높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높여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자라나게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보면 교회조차 세속화되어 설교자들 가운데서도 세상 복과 관련해 자주 말하기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의 가문과 맥스 주크라는 인물의 가문을 비교하는 예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과 불신자인 맥스 주크라는 인물의 가문을 비교하였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은 명문가 가문으로 이어져 왔고 맥스 주크라는 인물의 가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비교입니다. 우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 그의 사후 150년 동안 729명의 후손이 나왔는데, 그 중 300명은 설교자였고, 65명은 단과대학 교수였고, 3명은 종합대학 교수였고, 6명은 좋은 책들을 지은 작가였으며, 3명은 국회의원,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다고 합니다. 반면 불신자인 맥스 주크라는 인물의 가문은 1,026명의 후손이 나왔는데, 그 중 300명은 단명했고, 100명은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190명은 아주 부도덕하게 살았고, 100명은 술주정뱅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예화를 드는가? 일단은 예수 잘 믿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인데, 문제는 여기에 어떤 사고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가? 예수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 받는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재차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는 별개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은 맞지만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믿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의 신학도 주의해야 합니다. 한 예로 벌코프의 조직신학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 그리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난 뒤 신(新)학파 신학자들의 입장을 소개하는데, 그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신(新)학파 계열의 신학자들은 에드워즈의 역작 「의지론」(On the Will)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능력과 도덕적인 능력을 구분한다. 그들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타락한 상태에서도 영적인 선을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예컨대 지성, 의지 따위), 도덕적 능력, 곧 자연적인 기능들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는 능력,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전적 타락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신(新)학파 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단언한다.”(벌코프, 조직신학 상, p.406) 그러나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불신자의 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제 16장 7항 참조). 왜 그런가? 성경은 분명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롬14:2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에 따르자면 말씀을 따라 옳은 방식으로 행해진 것도 아니며(고전13:3, 사1:12), 바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마6:2,5,16).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옳은 방식으로 행하는가를 살펴야 하고, 또한 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고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어쨌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지상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화가 그런 정신 아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면 이 세상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가 나오고, 교수가 나오고, 국회의원, 심지어 부통령이 나왔다 한들 그의 됨됨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부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혹 됨됨이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만 일하시는가? 세상 복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시는가? 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비교는 예화 자체가 성경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백성과 관련해 어떤 말까지 하느냐? 나그네 인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구약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아 교회를 향한 방식이 많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순종하면 세상 복을 약속하시는 그런 형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11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연연했다가 아니라 그들이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는 외적인 것, 지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그런 세상, 가시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만 구성된 비가시적 교회, 바로 그들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작정에 따라 선택하신 모든 자기 백성들을 마지막 때까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숫자만이 아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열매가 있는 자로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것까지 알리고 계시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비유 이후 다시금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사야 말씀을 인용했던 부분과는 달리 34절과 35절에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비유의 목적과 관련해 시편 78편 2절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드러내시는가? 앞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과 함께 생각하자면 분명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만 드러내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 78편의 맥락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시편 78편 1절 이하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면서 “내 율법을 들으라,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 대하여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시편 78편 3절에 의하면 지금 시편을 듣는 구약 백성들이 들어서 아는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들었는가? 그들의 조상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것이기 때문에 들어서 아는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백성들도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그들의 조상들이 전하여 준 것을 듣고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었지만 시편 기자는 1절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대상은 누구냐? ‘내 백성이여’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하여 내 율법을, 내 입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듣고서 알고 있지만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할 때마다 듣고 또 들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양식은 ‘내 율법’, ‘내 입의 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처럼 큰 나무와 같이 자라고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할 힘은 어디 있느냐?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을 보면 시편을 인용하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주님이 이런 식으로 비유로 말하시는 데에는,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들은 말씀들에 대하여 좀 더 정신을 집중하여 경청하고 그 말씀들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곱씹어 보며 애써서 찾도록 하고자 하시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감추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드러내실 목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구약 백성들에게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약 백성들에게도 요구하신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고 알리고 계신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역사 속에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도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 땅에서는 미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교훈을 남기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는 순간에 그들을 벙어리로 만드실 때가지 교만한 자들의 호통과 비웃음을 참기로 하자. 그동안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서 본문 말씀 중에서 선언하고 계시는 그의 권세에 대한 엄청난 확증을 보여주실 때까지 세상의 경멸에 항거하여 신앙으로 힘을 얻자.” 우리가 받아야 할 권면이 이것입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있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때까지 우리는 그 약속하신 바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바빙크 개혁교의학 1권 5장 60
조나단 에드워즈... 그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사고력과 깊은 경건을 결합했다... 자신의 친구 휫필드와 더불어... 부흥을 수차례 주도했고 옹호했다. 신학적으로 그는 특히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그리고 윤리적 사색을 통해 칼빈주의를 강화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칼빈주의는 이미 카메론에게서 발견되었던 자연적 무능과 윤리적 무능 간의 구별을 통해, 그리고 자유의지, 원죄, 미덕에 관한 독특한 이론을 통해 약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에드워즈파, 신신학파, 혹은 신광명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신광파는 비록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한 칼빈주의 교리를 고수했으나, 프랑스 쏘뮈르 신학자들이 했던 것처럼, 원죄를 부인하고 보편속죄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