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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1 사무 17장-21장
1사무 17,1-11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도전을 받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군대를 소집하여 유다의 소코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소코와 아제카 사이에 있는 에페스 담밈에 진을 쳤다”(1).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이 같은 전의(戰意)는 당시 악령으로 고통받던(16,14) 사울의 통치력 약화를 기화로, 미크마스 전투에세의 패전(14,31)을 설욕키 위한 것이었다.
유다의 소코란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필리스티아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여호 15,35), 오늘날 와디숨트(Wady Sumt)지역에 위치한 '슈웨이케'(Shuweikeh)로 추정된다.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필리스티아 군이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제카는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여호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에페스 담밈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코(슈웨이케) 북동쪽 약 2.5km 지점으로 현재의 '다뭄'(Damum)으로 추정된다.
사울의 이스라엘군과 필리스티안 군인들이 엘라 골짜기 사이를 두고 맞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갓 출신 투사가 하나 나섰다. 그는 키가 여섯 암마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4). '골리앗'(Goliath)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갓(Gath)은 앗세라가 서쪽 약 8.9km 지점으로, 필리스티아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80)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Anakim)이 섞여 살고 있었다(여호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고대의 측략법에 근거하여 한 임마는 약45cm 정도로, 한 뼘을 약 13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0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군은 이 필리스티아 사람의 말을 듣고, 너무나 무서워서 어쩔 줄 몰랐다”(11). “너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랐다” 여기서 '어쩔 줄 몰랐다'(하타트)는 원래 '파괴되다', '부서지다'란 의미로서, 극단의 공포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무서워서'(야레)는 '경외하다', '엄위하다'란 의미로서, 어떠한 유형, 무형의 강력한 힘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부터 전체 병사에 이르기까지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려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총지휘자 사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나 버린 필연적 결과였다.
1사무 17,12-54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다
“다윗은 이사이라고 불리는, 유다 베들레헴 출신 에프랏 사람의 아들이다. 이사이에게는 아들이 여덟 있었는데, 사울이 다스리던 때에 그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이사이의 큰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터에 나가 있었다. 싸움터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맏아들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였다”(12-13).
“유다 베들레헴 출신 에프랏 사람”이라는 말에서 '에프랏'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세 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세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예언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즈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여호 19,15;판관 12,8), 또한 '에프랏 사람'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사이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사이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사이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이사이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1역대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이사이의 아들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이사이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느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 등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수 1,3). 13절에서 이사이의 아들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군인으로 싸움터로 나갔다.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준다.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사울에게 갔다가(16,19.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필리스티아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다가와 싸움을 걸어온 지 사십 일이나 되었다”(16). 이것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이스라엘 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스티아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세 8,6;판관 13,1).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사이에 의해 필리스티아와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다윗은 아버지 아사이의 심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가서 형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형들의 안부를 보고 잘 있다는 표를 받아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그가 본 것은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로 사기가 뚝 떨어진 이스라엘 군인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였다. ‘자네들도 저기 올라오는 저자를 보았겠지. 또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네. 임금님께서는 저자를 쳐 죽이는 사람에게 많은 재산뿐만 아니라 공주님도 주시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집안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거야”(25).
여기서는 사울 왕에 의해 약속된 바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세 가지 상급(많은 재산, 공주, 자유)이 언급되고 있다. 큰 재물을 약속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여호 15,16;판관 1,12). 한편 당시의 왕정(王政)이 실시된 지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으므로, 아마도 사울 왕가(王家)는 어느 정도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많은 재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8,15, 17). 사실 고대 군주국에서는 군주(君主)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고, 따라서 그러한 관습이 군주가 많은 재정을 보유하려 했던 목적 중의 하나였다(8,14).
성경에는 '메랍'과 '미칼'이라는 두 딸만이 사울의 딸로서 언급되고 있다(14,49).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또 다른 딸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기에서 이 두명 만이 언급된 까닭은, 이 둘만이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맏딸 '메랍'은 결국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지만 처음에는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됐던 처지였고(18,17-19), 또한 둘째딸 '미칼'은 결국 다윗에게 주어졌던 것이다(18,20-27). 어쨌든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며,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차기의 왕으로 확정된(16,13) 다윗에게는 그 일이 왕좌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을 보다 평탄게 할수 있을 것이었다.
골리앗을 이기면 주는 사울의 약속 가운데 “집안을 자유롭게 만들 주실 거야”이라는 말은 칠십인역과 시리아 말 역복을 바탕으로 얻어낸 번역이다(탈출 21,2 참조). 대중 라틴 말 성경은 “세금을 면해 주실 거야”로 옮긴다. 그러나 기원전 2천 년대의 시리아 행정 문서에서 “자유롭게”라는 용어는 임금을 섬기는 특별한 신분을 가르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위 번역에 적응시킨다면 “특권층으로 만들어 주실 거야”로 옮길 수도 있다.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세 가지 상급(25절)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결코 근거없는 유언 비어가 아니었음을 계속 보여준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그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너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28). 다윗의 맏형 엘레압의 이 분노는 다윗의 거룩한 분노와는 뚜렷히 대조되는 것으로, 곧 자신의 편협한 소견에서 비롯된 세속적 분노이다. 어쩌면 엘리압의 이같은 분노는 자신을 제쳐놓고 동생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질투 및 시기심이 근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양들은 누구에게 맡겼느냐?”라는 말은 양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에 태만했다는 것, 쓸데 없는 일에 공연히 참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한, 다윗에 대한 부당한(20절) 책망이다.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여기서 '교만'은 목동의 주제를 벗어난 이기적 욕심(25절)을 지적한 말이고, '못된 마음'은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사악한 심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과 '못된 마음'은 모두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을 지적코자 할때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신명 17,12;18,22;예레7,24). 그러므로 결국 형 엘리압은 이같은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함으로써, 다윗의 거룩한 열정과 의분을 한낱 이기적인 교만과 사악함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교만하고 못된 마음은 엘리압 자신의 부당한 비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윗은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지금 내가 무엇을 했다고 그러십니까?”(29)라고 말하고 골리앗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2).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압이 비난했던 것처럼(28절) 결코 쓸데없는 만용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오직 소년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이방 족속 필리스티아 사람의 그 모멸스런 치용과 경멸로부터 주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 믿음과 확신으로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사울은 다윗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실제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2-14절). 골리앗이 다윗의 나이만큼 밖에 안 되었을 때부터 이미 전투 경험을 쌓아온 백전의 노장이기에 싸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전투 경험'은 없지만 '전투 능력'은 충분히 있음을 사울에게 강력히 호소한다.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37).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도전 의사는 결코 일시적 흥분이나, 충동으로 인한 만용이 아니었다. 즉 그때 다윗은 과거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경험에 근거하고, 지금 살아계신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주님을 능멸하고 있는 사자와 곰 같은 골리앗을 직시하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시어 그 할례받지 못한 필리스티아 사람을 거꾸러트릴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생사가 걸린 이 골리앗과의 결투에 결연히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 중요한 대결투였고(9절), 나아가 이 전쟁의 승패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의 압제와 위협으로부터 자유하느냐 아니면 또다시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느냐 하는 역사적 기로의 한판 승부였다. 따라서 사울은 40일 동안이나 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선뜻 도전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다윗의 자원(32절)은 일면 반가운 일이었으나, 일면 무시할 수 밖에 없는 에피소드적 사건이었다(33절). 그러나 거룩한 열정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사울은 크게 감동을 받고, 마침내 골리앗과의 결투를 허락한 것이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37). 여기서 '계시기를 빈다‘란 말은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계실 것이다'로 번역함이 더 좋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사울이 다윗의 승리를 강력히 염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확신까지도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다윗의 말(34-37절)이 그만큼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울은 다윗에게 전투에 나가기 위한 자신의 군복을 입혀주었다.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골리앗과 싸우려는 다윗에게 인간적인 전투 장비 등은 전혀 무가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골리앗의 중무장을 의식하고(4-7절) 다윗에게도 그와 같은 무장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군복을 자신의 몸에 착용한 채 전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봤으나, 체격의 차이로 입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40).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들고 전투에 임했다. 다윗의 막대기는 보통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만든 것으로, 한쪽 끝을 굽어지게 하여 손잡이가 되도록 한 지팡이를 가리킨다. 이 지팡이는 목자가 산을 오르거나, 걸으면서 나뭇가지와 잎을 칠 때, 그리고 웅덩이에 빠진 양을 구출할 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창세 32,10).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막대기는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은 모양의 지팡이를 가리킨다(탈출 4,2).
무릿매는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던질 돌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무릿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져 있어 엄지에 연결하여 무릿매를 돌려 던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무릿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는데, 곧 목자들은 무릿매로써 옆길로 새는 양떼를 멀리서도 통제하고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무릿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듯하다. 즉 우선 벤야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무릿매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며(25,29),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무릿매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이스라엘군과 필리스티아군은 엘라 골짜기를 경계로 서로 대치한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베들레헴으로부터 전장(戰場)에 도착한 다윗은 선봉장 거인 골리앗의 신성 모독에 의분을 느끼고, 그와 결투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45).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칼과 표창과 창은 필리스티아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 곧 이것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력(武力)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란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필리스티아인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주님 하느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민족의 헛된 목석(木石)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다윗은 막강한 무기 대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전투 나왔다. 이느 하느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권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만일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과 맞싸울 장수로 이스라엘에서도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용사를 고르고 골라 내보내어 혹시 이겼다면, 그 싸움의 모든 영광은 그 승리한 용사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조건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다윗이 '창 칼 없이' 막대기와 무릿매만으로 승리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주님 하느님의 승리요,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 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이러한 점까지 내다보면서, 진정 골리앗의 창칼이 썩은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이스라엘의 거인 하느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49).
'무릿매'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정도의 비밀 병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무릿매는 이미 고대 중근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병기였으며, 또한 골리앗은 다윗이 무릿매를 휴대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골리앗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이나 거의 빈큼 없는 무장 상태로 보아 그까짓 무릿매로 인해 어떤 타격을 입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결국 다윗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되고, 이에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군은 필리스티아군을 에크론과 가드까지 추격하여 물리친다.
1사무 17,55-58 다윗이 사울 앞에 나아가다
이 대목은 다윗이 사울을 섬기러 입권하는 이야기의 또 다른 전승이다. 16,14-23의 전승과 독립된 이 전승은 틀림없이 더 오래된 사료가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사울이 그에게 “젊은이, 자네는 누구의 아들인가?” 하고 묻자, 다윗이 “저는 베들레헴 사람, 임금님의 종 이사이의 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58). 이같은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은 사울을 위해 궁중 악사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16,21-25) 우리에게 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제시해 왔다. 즉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사울이, 당시 자신과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지 오래되어 많이 변해있었을 다윗을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여 이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른 견해는 사울은 그때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무쌍한 다윗의 가문(家門)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첫째, 골리앗과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다윗과 대면을 했었고(31-40절) 둘째,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은인(恩人)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두 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1사무 18,1-5 다윗과 요나탄이 계약을 맺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를 다 하고 나자,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 18장 1절에서 다윗과 사울의 대화가 있은 후, 임금의 아들이요 그의 확실한 상속자인 요나탄은 다윗을 사랑했으며, 자신이 다윗과 개인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결속되어 있음을 느꼈다. 요나탄의 사랑은 정치적이면서 개인적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3). 18장 3절에서 요나탄은 다윗과 계약을 맺었으며 상징적으로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 군복,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다윗에게 주었다. 이는 다윗에게 자기의 계승권을 양보할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비록 다윗이 17장 25절에 이미 약속된 임금의 딸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다윗은 임금의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사랑을 얻었다. 다윗은 나중에 요나탄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2사무 1,26).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그에게 군인들을 통솔하는 직책을 맡겼다. 그 일이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이 보기에도 좋았다”(5). 5절에서 사울의 신하들과 백성도 다윗이 권력에 오른 것을 기뻐했다. 사울이 여전히 명목상 임금이었으나,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1사무 18,6-9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다
소년 다윗을 영웅으로 그린 민담에 이어 18,6-30은 다윗이 사울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이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준다. 18장 전체는 다윗이 사울만 빼고 모든 이들 요나탄, 미칼,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울은 악령의 영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병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다윗이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6-7). 18장 6절은 두 가지 다른 문장이 합쳐졌다. 시작 부분에서는 다윗이 전쟁에서 귀환했는데,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맞이하는 이는 사울 임금이다. 그리고 18장 7절의 노래에서는 사울과 다윗 둘 다 등장한다. 손북은 작은 원통형 북으로 성경에서 항상 기쁨이나 흥겨움을 표현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계약 궤를 옮길 때도 축하 의식에 사용되었다(2사무 6,5).
18장 7절 여인들의 노래는 21장 12절과 29장 5절에서도 나오는데, 원래는 우열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승리의 노래였을 수도 있다. ‘수천’과 ‘수만’은 시편 91장 7절과 고대 가나안(우가르트) 문서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우리의 두 영웅이 많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 본문에서는 사울과 다윗 사이의 대조로 해석되었다. 특히 사울은 그 노래를 최악의 의미로 이해했다. 여기서 불쾌해진 사울은 평생 동안 다윗을 의심하게 된다. 이때 사울은 왕권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사울은 사태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묵인 할 수 없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며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1사무 18,10-16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를 암시한 9절에 연결시켜 기록한 10-11절의 내용은 19,9-10과 중복된다. 다만 뒤의 대목에서는 다윗이 어느날 수금을 카고 있을 때 살해 기도가 일어난 반면, 이 대목에서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큰 칭송을 받은 바로 “이튿날”, 이 일이 벌어졌다. 다윗은 16,14-23에 이미 밝혀진 대로 전문적인 비피 연주자였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는 동안에 사울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 충격적인 내용이다. 왜냐하면 옛 전승에서 악기 연주는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효력이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들이닥쳐 그가 집안에서 발작을 일으키자, 다윗이 여느 날처럼 비파를 탔다. 이때 마침 사울은 손에 창을 들고 있었다”(10). 18장 10절에서 이튿날 사울에게 악력이 들이닥치는데, 이는 사울이 하느님께 거절당하는 이유가 다윗에 대한 증오심과 관련 있음을 시사한다. 그 결과 사울은 발작을 일으켰고, 다윗은 음악을 연주하여 사울 임금을 안정시키려고 애쓴다. 사울이 든 창은 홀과 마찬가지로 왕권의 표시였을 것이다(1사무 22,6; 26,7 참조).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서 돌아서셨기 때문에 다윗을 두려워하였다”(12). 18장 12절에서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두려움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알린다. 18장 13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며 제거할 목적으로 그를 천인대장에 임명한다. 사울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바랐다. 이 야비한 보직 임명은 18장 5절과는 대조를 이룬다.
18장 14-15절에서 다윗은 더 위험한 직책을 맡은 후 오히려 더 큰 성공을 거두는데, 이때 사울이 느꼈을 실망감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울의 걱정이 단순한 두려움에서(18,12) 큰 위압감으로(18,15), 그리고 더욱더 큰 두려움으로(18,29) 변해갔을 것이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 앞에 두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죽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전쟁터에 내보낸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전쟁에서 승리하고 언제나 말짱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개선하며 이런 다윗에게 최대의 찬사가 쏟아진다.
이제 온 이스라엘(북부)와 유다(남부)가 다윗을 좋아한다(18,16). 이스라엘과 유다는 통일 왕국의 두 대표 지역이다. 모든 지파가 다윗을 좋아한 것은 사실상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는 표시이다.
1사무 18,17-30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다
사울은 자기가 쫓겨나고 다윗이 대신 임금으로 들어앉을 수도 있다는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마음과 정신이 찢기고 분열된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알고 있지만 이 분별 있는 해결책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한다. 한 판관이 다른 판관의 뒤를 잇듯이 다윗이 사울의 뒤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사울은 위기의 때에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우신 위대한 장수였는데, 이제 하느님께서는 온 땅의 백성이 환영하고 또 전쟁에서 그 자질이 입증된 또 다른 위대한 장수를 일으키셨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는 분명한 길은 다윗을 자신의 후계자로서 공식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그것이 온당한 해결책임을 알고 있고 그러기에 큰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기로 한다(18,17).
“사울은 다윗에게 ‘자, 내 맏딸 메랍을 아내로 줄 터이니, 오로지 너는 나의 용사가 되어 주님의 전쟁을 치러 다오.’ 하고 말하였다. 사울은 ‘내 손으로 그를 치지 않고, 필리스티아인들 손으로 그를 쳐야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17).
그런데 18장 17-19절에 있는 사울의 맏딸 메랍과의 결혼 제의 이야기는 현재 문맥 속에서 사울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 사울은 다윗이 임금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치르게 되는 전투에서 죽기를 희망했고(17절), 결혼 날짜가 다가왔을 때 딸을 주지 않았다. 만일 메랍 이야기가 본래의 기사라면 둘째 딸 미칼과의 결혼 가능성이 생겼을 때 놀라는 다윗의 반응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18,23).
어떻든 현재 본문의 17절에서는 사울이 자신의 큰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큰딸과의 결혼은 왕권에 대한 권리를 더욱 강하게 지닐 수 있다. 성경 저자는 아마도 17장 25절의 약속을 심중에 두고, 그 약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일 터이다. 그러면서 사울은 다윗에게 용사가 되어 야훼의 전쟁을 치러 달라고 한다. 사울이 자신의 딸을 다윗에게 주는 숨은 동기가 21절에서 반복된다. 사울은 자신에게 비난이 돌아오지 않으면서도 다윗을 위험에 청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자기보다 더 많은 성공을 거두고 더 인기가 높은 인물이 제거될 것이고, 자기 아들 요나탄을 다음 왕좌에 앉힐 수 있을 것이다.
18장 18절에서 다윗은 사울의 제안에 겸손하게 대답한다. 임금의 사위라는 지위는 18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줄곧 강조된다(21.22.23.26.27절). 19절에서 사울은 마음을 바꾸어 큰딸을 자신이나 요나탄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린다. 이로써 사울이 이중적 처세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편 사울의 다른 딸 미칼은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를 사울에게 알리자, 사울은 그것을 잘된 일로 보고서 이런 궁리를 하였다. ‘그 애를 다윗에게 아내로 주어야겠다. 그래서 그 애를 미끼 삼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해야지.’ 사울은 다윗에게 다시 말하였다. ‘오늘 내 사위가 되어 주게”(20-21). 20절에서 사울의 둘째 딸 미칼이 다윗을 사랑하는데, 이는 사울과 다윗 둘 다에게 기회가 된다. 사울에게는 손해 보지 않고 다윗을 위험에 빠뜨릴 기회가 되고, 다윗에게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다윗은 사울 집안에서 자기에 대한 지지가 점점 커지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사울 임금이(16,21), 다음엔 사울의 장남 요나탄이(18,3; 20,17), 그리고 둘째 딸 미칼이 다윗을 사랑한다. 미칼의 사랑도 요나탄의 사랑과 같이 추후에도 정치적 충절로 나타날 것이다(20,17).
18장 23절에서 다윗의 응답은 큰딸 메랍이 제안되었을 때와 같이 이번에도 매우 겸손하다. 임금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 값을 지불했는데, 다윗은 아마도 공주에게 걸맞은 신부 값을 지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울이 다시 분부하였다. ‘다윗에게 가서 ‘임금님께서는 혼인 예물로 필리스티아인들의 포피 백 개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임금님의 원수를 갚고자 하십니다.’ 하고 전하여라.’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25). 25절에서 사울은 다윗에게 돈 대신 몹시 위험한 조건(필리스티아인의 포피 백 개)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일종의 사기이다. 사울은 다윗이 그 일을 하다가 필리스티아인에게 살해당하기를 바란 것이다. 다윗이 그 교활한 제안을 눈치 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제안은 다윗이 바라던 왕실 구성원의 자격을 갖게 될 기회를 제공한다.
27절에서 천인대장이었던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필리스티아인 이백 명을 쳐 죽여 그 포피를 사울 임금에게 바쳤다. 자신이 원하거나 예상한 결과는 아니지만 사울은 잠시나마 약속을 지킨다. 드디어 다윗은 선임자의 사위가 되었다.
다윗과 미칼의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무엘기 상 · 하권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칼은 다윗을 사울에게서 탈출시키기 위해 술책을 썼고(19,11-17), 사울은 미칼을 갈림 출신 라이스의 아들 팔티에게 주었으며(1사무 25,44), 다윗은 아브네르와 이스 보셋과 싸울 때 미칼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고, 이스 보셋은 미칼을 돌려보내 두 번째 남편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2사무 3,13). 그리고 미칼이 계약 궤 앞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다윗을 경멸하자 다윗은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그 결과 미칼은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17-23).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고, 자기 딸 미칼마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아 알고서는, 다윗이 점점 더 두려워져서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다”(28-29). 29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점점 더 두려워하게 되었고, 30절에서 다윗은 필리스티아인의 침략에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울의 질투심과 악의가 커질수록 다윗의 성공도 커갔다. 사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사울이 꾸민 모든 계약은 결과적으로 다윗을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그래서 사울은 점점 더 궁지에 빠진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으며(12.14.28절), 사울의 악의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는 심리적 문제 못지않은 신학적인 문제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들이닥쳤으며(10절),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돌아서셨다(12절).
이제 사울이 당면하고 있는 과업은 그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사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이 되어 가는 방향을 바꾸어 보고자 애쓰지만 정작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은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다윗에 대해 그가 취하는 행동 속에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난다.
1사무 19,1-7 요나탄이 다윗을 감싸 주다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1-2). 19장 1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겠노라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자신의 가장 훌륭한 협력자요 후계자로서의 가능성이 가장 큰 다윗을 죽이기로 한 그 무분별한 결정이야말로 사울이 범한 최대의 실수였다. 그는 다윗을 멀리함으로써 최초로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의 임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기 군대를 크게 약화시켜 패배를 자초하게 된다.
요나탄은 아버지께 다윗을 좋게 말하고 그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요나탄은 사울에게 말한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4-5).
요나탄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앞서 다윗을 죽이는 일의 부당성을 부친 사울 왕에게 간곡히 설파한다. 다윗을 위한 요나탄의 변호는 다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스라엘과 사울 왕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다윗을 죽일 경우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되고, 또한 그것은 주님께 큰 범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요나탄의 변호는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윗을 위한 요나탄의 간곡한 설득이 실효를 거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살아 계신 하느님의 권위를 힘입어 정직하게 진실을 호소한 요나탄의 간곡한 변호는 사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6). 혹자의 주장처럼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요나탄을 일시 속이기 위한 거짓 맹세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악신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9절) 사울 왕이 다윗을 곁에 두고도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탄의 간곡한 변호에 사울 왕이 감동을 받아, 일시동안 사울과 다윗간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오래지 않아 또 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느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 왕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는 등 변덕과 광기의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1사무 19,8-17 다윗이 죽을 고비를 넘기다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려왔다. 그때 사울은 궁궐에서 창을 손에 들고 앉아 있었으며, 다윗은 비파를 타고 있었다. 사울이 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였으나, 다윗이 사울 앞에서 몸을 피하는 바람에 창이 벽에 꽂혔다. 다윗은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날 밤”(9-10).
사울이 다윗을 그 밤에 죽이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에 죽이려 한 까닭은, 아마도 섣부른 야간 행동은 오히려 다윗의 야음(夜陰) 도주를 도와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에 대하여 사울이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미칼은 사울의 부하들이 집 주위에 매복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든지, 오빠 요나탄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했든지 궁전에 들어갔다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거나 혹은 어떤 정보를 입수했다든지 함으로써 사울의 음모를 알아챘을 것이다
사울의 전령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칼은 창문으로 다윗을 도피시키고 있다. 이처럼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손을 피해 창문으로 도피한 유사한 경우가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정탐군(여호 2,15), 초대 교회 당시의 사도 바오로(사도 9,25) 등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다윗은 처음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음모를 듣고, 창문을 통해 도망쳐, '라마'(Ramah)의 사무엘에게로 피신했다. 이어 다시 '기브아'(Gibeah)로 돌아와 사랑하는 친구 요나탄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놉'(Nob)으로 도피했다. 놉에서 다윗은 그곳 제사장으로부터 음식과 무기를 제공받고 계속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필리스티아 땅의 '갓'(Gath)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드로부터 의심을 당하자, 그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아둘람'(Adullam)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동지들을 규합했다(19,12-22,1).
“미칼은 수호신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짠 망으로 머리를 씌운 다음 옷으로 덮어 놓았다”(13). 여기서 '수호신'은 곧 '드라빔'(테라핌)을 가리키는데, 단어 형태는 복수지만 단수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드라빔'(teraphim)은 '편안히 살다'란 뜻의 '타라프'에서 파생된 말로, 구복(求福)과 점술(占術), 그리고 신탁(神託) 행위와 관련된 가정 수호신이다(판관18,17). 즉 아람과 갈대아 부족들로부터 도입된 이 우상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우상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반신상(半身像)으로서 보통 나무나 은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는 말 안장 속에 숨길 정도의 작은 크기로부터(창세 31,34) 사람의 키와 맞먹을 정도의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떤 가정 내에서 이것을 소유한 자는 그 가정 전체에 대한 지배권 및 그 가정의 재산을 가장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창세 31,19). 바로 이 같은 점에서, 라헬이 그랬듯이(창세 31,19) 미칼도 이 우상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것은 한 가정을 단위로 해서 모셔졌던 우상이라는 점에서 그 크기는 전반적으로 다른 우상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러나 여기서 '침상에 누이고'라는 말은 미칼이 소유하고 있던 이 '드라빔'이 사울의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이 누워있는 줄로 믿게 할 만큼 큰 규모의 드라빔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이 드라빔은 많은 종교 지도자 및 예언자들의 우상 척결 정책에도 불구하고 족장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전까지 이스라엘 사회내에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다(창세 31,19;판관17,5;1사무 19,13).
우상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만든 미칼은 아침이 되어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이처럼 둘러댐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게 해 준다.
1사무 19,18-24 사울이 다윗을 찾아 라마로 가다
“다윗은 그렇게 달아나 목숨을 건진 다음,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사울이 자기에게 한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다윗과 사무엘은 나욧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렀다”(18). ‘라마'(Ramah)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10,26)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언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1,1).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에게로 도망간 이유는 우선 사울의 살해 음모로부터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될 처신에 대해 예언자의 자문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은 사울이 적어도 사무엘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존중하여, 거기가지 자신을 죽이러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한편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도피처로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쉽사리 택한 것은 이전부터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개인적인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한다.
다윗는 사울이 행한 일을 사무엘에게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인 사울이 정신적으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며 그 결과 다윗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무엘은 사울에 관한 다윗의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울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바 된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13).
여기서 '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 이 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즉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이상의 '교육의 집' 또는 '선지 학교'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리고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은 이 교육을 위한 기숙사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다윗이 부인 미칼의 도움으로 기브아 집을 도망쳐 나온 이후, 아마도 사울은 군사들에게 그의 도피처를 탐색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며, 어쩌면 많은 현상금까지 내걸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윗의 도피처는 발견되었고, 그 사실은 즉각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예언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 - 여기서 '예언자 무리'는 당대의 대예언자였던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훈련을 받던 젊은 생도들이었다(10,5). 그리고 '예언하는 것'(니브임)은 '예언하다'(나비)의 단순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의 신령한 상태 즉 성령에 감화 감동되어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10,5) 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신령한 계시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 예언자 무리는 이때 자의식을 상실한 채 무아지경 곧 황홀경(ecstasy)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때 이들은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소유한 채 경건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때 그 예언자 무리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1열왕 4;7). 그리고 '나욧'에서 그 예언자들의 무리를 직접 지도, 감독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다윗을 잡으러 간 사울의 전령들은 사무엘과 예언자 무리의 신령한 예언의 노래에 휩쓸려 들어가고, 또한 그때 위로부터 하느님의 영이 강권적으로 임하므로, 그들 역시 자제할 수 없는 예언의 상태에 사로잡힌 것이다. 특히 여기서 '예언'(나비)이란 하느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미래의 일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예언자적 예언이 아니라, 영감을 받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울의 젼령들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묵시적(黙示的) 황홀경 상태에 들어가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영감 깊은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라마 나욧의 다윗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울이 그곳 라마의 나욧으로 가는데, 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려 라마의 나욧까지 걸어가는 동안 줄곧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였다. 그는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며, 그날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인가?’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23-24).
사울의 체험은 그가 보낸 세 그룹의 전령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20, 21절). 즉 여기의 '이르기까지'는 사울이 자신이 보낸 전령들과는 달리 예언자 무리의 신령한 분위기를 접하기도 전에 이미 '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계속 예언 행위를 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결국 사울은 자신의 전령들과는 달리 보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황홀경의 상태 속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당시 성령의 역사는 보다 강퍅한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주장하시어, 그로 하여금 다윗을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포기 하게끔 만든 것이다. 즉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사울 왕의 굳은 마음을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황홀경에 빠진 사울은 옷을 벗는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성경 안에서 수치스러운 행동 중의 대표적 경우로 취급된다(창세 3,7;2사무 10,4;미카 1,11). 그러므로 사울이 이 같은 행동을 한 까닭은 근본적으로는 사울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실제적으로는 사울이 황홀경의 영적 심리 상태로 발생하는 체열(體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사울과 길갈에서 헤어진 후 죽을 때까지 사울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본서의 언급(15,35)과 조화시키기 위해 여기 '사무엘 앞에서'를 '그들 앞에서'로 고쳤다.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 앞에서'는 15,35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여기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사울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무엘을 거저 보았을 뿐, 15,35절의 언급처럼 상호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라는 말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알몸’은 수치를 말한다. 사울은 황홀경에 빠진 다음 수치스러운 알몸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다.
1사무 20,1-42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서 달아나 요나탄에게 가서 말하였다. ‘제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까? 왕자님의 아버님께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분께서 이렇게 제 목숨을 노리신단 말입니까?”(1).
당시 다윗은 자신을 잡으러 라마 나욧까지 온 사울의 전령들 및 사울이 하느님의 영의 불가항력적 임재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때(19,20-24), 그 때를 호기(好機)로 삼아 그곳에서 도망할 수 있었다. 다윗이 당시 사무엘의 예언자학교가 있던 라마 나욧(19,18)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궁성(宮城)이 있던 기브아로 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그때 사울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해 있는데도 기브아로 돌아온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친구 요나탄에게 사울이 자신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럼으로써 요나탄의 도움을 요청하고, 향후의 신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4절).
“제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까?” 다윗의 이 질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역설적 질문으로서, 곧 자신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의 '무슨 짓'(아온)과 '무슨 잘못'(핫타트)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인데, 다윗은 이같은 동의어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강력히 호소한다.
“그러나 다윗은 맹세까지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왕자님의 아버님께서는 왕자님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분께서는 ‘이 사실을 요나탄에게 알려 그를 슬프게 해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왕자님의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저와 죽음 사이는 한 발짝밖에 되지 않습니다”(3).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 반드시 자신에게 알릴 것이라는 요나탄의 호언 장담(2절)에 대한 다윗의 반론이다. 즉 사울은, 만일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요나탄이 알면 다윗과 두터운 우정 관계에 있는 요나탄이 다윗이 살해되는 것을 매우 슬퍼할 것이며, 따라서 틀림없이 다윗에게 그 음모를 누설할 것을 예측하고, 그러한 사실만은 요나탄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음모를 아들 요나탄에게 알릴 경우 그에 관한 비밀이 누설될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므로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결코 그에 관해서는 요나탄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다윗이 요나탄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내일이 초하룻날입니다. 제가 임금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모레 저녁때까지 들에 숨어 있도록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만일 왕자님의 아버님께서 저를 찾으시거든, ‘온 씨족을 위한 주년 제사가 있으니 급히 고향 베들레헴에 가게 해 달라고 다윗이 저에게 간절히 청했습니다.’ 하고 말씀해 주십시오”(5-6). 매월 초하루에 식사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함께 모여 공동 식사를 했다. 따라서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으므로(18,27).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하여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다윗이 요나탄에게 모레 저녁까지 들에서 숨도록 요청한 까닭은 관례상 초하루 잔치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므로(27, 34절). 이에 따라 '제 삼일'에야 요나탄이 자신에게 사울의 반응(30, 31, 33절)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다윗은, 왕의 식탁에 불참한 후 요나탄을 통해 사울에게 전달될 변명에 대해 나타날 사울의 반응을 통하여, 사울이 자신을 향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온 씨족을 위한 주년 제사’는 가족 단위로 매년 1차씩 드려지던 제사를 가리킨다(1,3).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는 매년 3대 절기(무교절, 초실절, 장장절)를 맞이하여 세 차례씩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탈출 23,14-17; 34,24). 따라서 매년 1차씩만 드리는 여기의 '주년 제사'는 일종의 시대의 흐름에서 바뀐 제사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절기 중 자신들에게 편한 대로 한 절기를 택하여 '주년 제사'를 드렸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이 제사는 율법에서 엄중히 명령되는 만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 베푼 초하루 잔치에 불참할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때 베들레헴에서 이 주년 제사가 그의 가족에 의해 드려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요나탄을 통해 전달될 다윗의 처사(6절)에 대하여 만일 사울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그가 다윗을 기뻐한다는 증거요, 만일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여전히 증오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사울의 마음을 알기를 원했는데, 이는 사울이 하느님의 영을 접한 이후(19,23, 24)처음 그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다윗은 향후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왕자님은 주님 앞에서 이 종과 계약을 맺으셨으니, 의리를 지켜 주십시오. 그렇지만 저에게 잘못이 있다면 차라리 왕자님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를 왕자님의 아버님에게까지 데려갈 까닭은 없지 않습니까?”(8). 8절은 7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주는 상관 접속사이다. 따라서 본 접속사에 뒤따르는 내용은 7절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다윗이 베들레헴에 주년 제사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탄의 보고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를 가상해서 요나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다. 사실 사울이 죽이려 할 경우 다윗은 요나탄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의리'(헤세드)는 원래 명사로서 언약적 관계에 따라 베풀어지는 특별한 사랑 및 은총을 가리킨다.
“왕자님은 주님 앞에서 이 종과 계약을 맺었으니” 다윗이 요나탄에게 담대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요나탄의 주관 하에 맺어진 하느님 안에서의 계약 때문이었다. 다윗이 이처럼 단순한 우정이 아닌 계약 관계를 근거로 해서 도움을 호소한 까닭은 단순한 우정 관계는 부자(父子)관계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주님 앞에서 그 이름으로 맺은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요나탄은 다윗과 약속을 한다. 아버지가 다윗을 받아들이는지 죽이려하는지에 대한 신호를 보내기로 한다. 따라서 요나탄이 활 쏘는 것으로 신호를 삼으려 한 것은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이 직접 다윗에게 결과를 알려 줄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키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요나탄이 화살을 셋씩이나 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쏘는 사람이 요나탄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고는 시종을 시켜 ‘가서 화살을 찾아오너라.’ 하면서, 그 시종에게 ‘화살이 네 쪽에 있다. 집어라.’ 하면,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아무 일 없을 터이니 안심하고 나오게. 그러나 내가 그 종에게 ‘화살이 더 멀리 있다.’ 하면, 주님께서 자네를 보내시는 것이니 떠나가게”(21-22).
초하루날 사울이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아브네르가 있고 요나탄이 있는 데 그 자리에 사위 다윗은 없었다. 첫 날에는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날 사울은 다윗을 찾았다. 그 때 요나탄이 사울에게 다윗이 씨족 제사를 지내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 온다고 했다고 대답하였다. 사울은 요나탄에게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분노를 터트린다. “이사이의 아들놈이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너도 네 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자는 죽어 마땅하니, 당장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들여라”(31). 사울 자신의 왕권이 다윗으로 인하여 요나탄에게 양위(讓位)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일찍이 사울은 주님의 예언자 사무엘로부터 그 왕위(王位)가 단절될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바 있었고, 이제 사울은 다윗이 하느님에 의해 차기의 왕으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자기 스스로가 하느님의 신을 소유치 않은 비합법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6,14).
사울은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곧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주권에 정면 도전하는 선전 포고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의 악한 감정은 이제 그를 하느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자로까지 발전시키고 말았다.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의 심중을 알게 되어 다윗을 피신토록 암호로 약속했던 화살을 쏘았다. 요나탄은 아이가 달려간 거리보다 더 멀리 활을 쏘았다. 이것은 요나탄이 병기 든 소년에게 '화살이 더 멀리 있다'(22절)라고 말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의도적 행동이다. 즉 요나탄은 다윗과 사전에 약속하기를, 만일 자신이 소년에게 '화살이 더 멀리 있다라고 말할 경우 사울이 그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알고 도망쳐야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22절).
“시종이 떠나자, 다윗은 바위 옆에서 일어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세 번 절하였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는데 다윗이 더 크게 울었다”(41). 요나탄을 향해 다윗이 세 번 절하는 행동은 요나탄이 다윗 자신에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 즉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하는 절을 의미한다(1사무 9,6). 그러나 여기 다윗의 절은 그러한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를 넘어서, 풍전등화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서로 얼싸안고는”의 직역은 “서로 입을 맞추고”이다. '입맞춤'은 보통 '만남의 기쁨'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하기 위해 포옹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슬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여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앞날을 서로 걱정해주면서 우정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창세 29,11; 탈출 4,27; 룻 1,9).
같이 “울었는데 다윗이 더 크게 울었다” 이것은 깊은 사랑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던 친구가 비극적 현실 앞에서 기약없이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며, 그 중 한 친구는 목숨의 보존을 위해 향후 정처없이 방랑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몰려 왕과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갖기는 커녕 친구와 가정과 이별하고, 왕과 원수가 되어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나야 된다는 그 어이없는 현실에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길고 깊은 울음으로 터져나왔던 것이다.
마침내 다윗은 친구와 가족을 등지고 사울의 추적을 피해 사울의 죽는 날까지(31,6) 온갖 고난이 뒤따르는 정처없는 도피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21-31장). 한편 다윗과 요나탄은 요나탄이 길보아 전투에서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하기 전, 십 황무지 수풀 속에서 잠시 상면한 일(23,16-18)을 제외하고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후일 다윗의 노랫 속에는 요나탄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윗의 애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2사무 1,26).
1사무 21,1-10 다윗이 놉의 사제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다윗은 놉으로 아히멜렉 사제를 찾아갔다. 아히멜렉이 떨면서 다윗을 맞았다. 그가 다윗에게 ‘어떻게 아무도 없이 혼자 오십니까?’ 하고 묻자, 다윗이 아히멜렉 사제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면서, ‘내가 너에게 맡겨 보내는 이 일을 아무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부하들과 이곳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2-3).
'놉'(Nob)은 '작은 산', '언덕', '산당'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4km, 그리고 그 당시의 수도 기브아의 동남쪽 약 4km 지점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필리스티아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성막이 파괴된 이후 주님의 성막은 제사장의 성읍인(22,19) 이곳 '놉'으로 옮겨졌던 것 같다. 한편 다윗이 그때 '놉'으로 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제사장의 우림과 툼밈으로 자신의 피신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뜻을 묻고(22,10), 당장 도피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며(3-6절), 자신의 몸을 보호키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한(8,9절)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사울 시대의 대제사장으로서(14,3), 아히툽의 아들이며 피느하스의 손자요, 엘리 대제사장의 증손이다(22,9). 그러므로 '아히멜렉'은 이전 필리스티아와의 미크마스 전투에서 사울 왕을 도와 하느님의 뜻을 묻는 일에 참가하기도 했다(14,3, 36-42).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맞았는데 이 같은 반응은, 사울의 변죽스런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바 혹시 다윗이 사울의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위해(危害)를 가하러 오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이 질문은 왕의 사위이자 국가의 중요 지위(18,30; 20,5)에 있는 자가 호위병도 대동치 아니하고 기별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하여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때 다윗은 자신을 따라 나선 부하 몇 명을 대동하고 있었으나, 당시 사울에게 쫓기고 있던 자신의 처지를 은폐하기 위해 그들을 부근 어디엔가 남겨두고 단신으로 아히멜렉을 방문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때 다윗은 자신과 아히멜렉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이루려 했던 것 같다.
다윗이 이처럼 아히멜렉에게 사울 임금의 명령으로 왔다고 거짓말을 한 까닭은, 만일 자신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왔다는 사실을 아히멜렉이 알 경우 사울로부터의 보복이 두려워 아히멜렉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사울로부터 쫓긴다는 사실을 감춘 채, 마치 자신이 사울의 특명을 받아온 것인 양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사실 이 거짓말은 은연 중 아히멜렉을 위협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같은 속임수로 아히멜렉의 도움을 유도해 냈으나(6,9절), 후일 그 일로 인해 놉의 제사장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야기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하여 다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다(22,22).
사울의 추격을 피해 정처없이 도피 생활을 해야만 하는 다윗의 절박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실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든 광야의 도피 생활에서 무엇보다 굶주림을 면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빵 다섯 덩이를 청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갖고 있는 빵은 제사에 사용할 거룩한 빵뿐이다. 이 거룩한 빵은 이전(以前) 안식일에서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일주일 동안 주님 앞 즉 성소의 제사상에 베풀어 놓았던 빵을 가리킨다. 이 빵은 일 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새 것으로 교체되어야 했고, 물려낸 빵은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의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다(탈출 25,30; 레위 24,8).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빵에 대하여 이 같은 율법 규정을 두신 근본 정신은 이 빵을 아론의 후손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특혜적으로 먹게 하려는데 있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 앞에 놓여졌던 거룩한 빵이 부정(不淨)하게 소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데 그 근본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왕의 임무를 띠고 먹을 것을 급히 요구하는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성결(聖潔) 여부를 확인한 뒤 제사 빵을 내어준 일은 후일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율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라고 인정되었다(마태 12,3-4). 한편 여기서 성소의 제사상 위에 진열되던 '거룩한 빵'에 대한 언급은 필리스티아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실로'의 성소가 여기의 '놉'에 재건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제야 사제는 거룩한 빵을 다윗에게 주었다. 주님 앞에 바친 제사 빵 말고는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 그날 주님 앞에서 물려 내고 따끈한 빵으로 바꾸면서 치워 놓은 것이었다”(7).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사(武士) 다윗은 무엇보다도 무기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정처없는 도피생활을 하는 중 어떤 위험에 직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방어할 무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 왕의 급한 용무를 핑계로 아히멜렉으로부터 무기를 제공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후일 도엑의 입을 통해 사울의 귀에 들어가자, 놉의 제사장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모반한 줄로 알고 사울은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던 것이다.
“사제가 대답하였다. ‘장군께서 엘라 골짜기에서 쳐 죽인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의 칼이 있습니다. 보자기에 싸서 에폿 뒤에 두었는데 그것이라도 가지려면 가지십시오. 이곳에 그것 말고 다른 무기라고는 없습니다.’ 다윗이 말하였다. “그만 한 것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것을 나에게 주십시오”(10).
당시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벤 후, 이 칼을 자기 장막(베들레헴)으로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칼이 이때 놉의 성막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이후 다윗이 그 칼을 승리의 기념물로 하느님의 성소에 봉헌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런데 이 칼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도우심의 징표였으므로, 제사장은 그 칼로부터 진흙과 습기와 녹을 제하고 방지하기 위해 보자기에 조심스럽게 싸서 제사장의 '에폿'을 두는 거룩한 곳에 보관하였던 것 같다.
다윗은 그 칼이 하느님의 절대적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결과 얻은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그 같은 칼을 자기 손에 넣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신의 미래가 매우 희망적이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같 은 사실에서 다윗은 그 칼을 이 세상에 다시 없는 귀중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골리앗으로부터 탈취한 후 하느님께 봉헌한 칼을 다윗이 다시 되돌려 받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 칼은 도우심과 은혜의 표시였다. 따라서 다윗은 그 칼을 뽑을 때마다 그로 하여금 거인 골리앗을 능히 이기도록 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봉헌과 헌신의 표시였다. 즉 다윗은 골리앗에 대한 승리의 영광을 오직 하느님께만 돌리기 위해 그 칼을 성소에 봉헌하였는데, 이제 그것이 꼭 필요한 때 다윗에게 다시 되돌아왔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헌신하고 봉헌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간이든 재물이든 필요 적절한 시기에 여러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려지는 것이다.
1사무 21,11-15 다윗이 필리스티아로 망명하다
“다윗은 일어나, 그날로 사울에게서 달아나 갓 임금 아키스에게 갔다. 아키스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그 나라 임금 다윗이 아닙니까? 그를 두고 사람들이 춤추며 이렇게들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1-12).
당시 다윗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갓의 임금 아키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식한 까닭은 다윗이 사울과 대등한 위치로서 백성들에 의하여 칭송되었기 때문이다(18,7).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 볼 때, 필리스티아의 신하들은 다윗을 마치 자신들의 군주처럼 여러 명의 왕 중의 한 사람, 즉 지역적 군주로 봤음이 분명하다. 결국 이것은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와 그 전승가(18,7)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윗의 그늘에 묻히고, 다윗은 이방의 적들에 의해 그 땅의 영웅으로 부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사울은 수천을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라는 이 노래는 다윗의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아 필리스티아에 대해 대승을 거두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전승가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널리 유행했던 이 노래는 필리스티아 국가에까지 퍼져, 그들도 잘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 말은 아키스의 신하가, 다윗이 자신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던 영웅적 인물임을 알고, 이 사실을 자신의 왕에게 상기시켰던 것을 가리킨다(11절).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키스'가 자신을 몰라 볼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피신해온 다윗에게는 심히 두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사람들 앞에서 태도를 바꾸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 미친 척하였다. 그는 성 문짝에 무엇인가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였다”(14). 다윗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였다. 성문 짝에 낙서를 하고, 수염도 기르고 침을 질질 흘리며 돌아다녔다. '침'은 끈적끈적하여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분비물인데, 이러한 침을 수염에 질질 흘리는 행위는 미친 자의 행위로는 가장 적합한 행동이었다. 한편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한다 고할지라도,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요동치 않는 피난처가 되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키스왕을 두려워하여(12절) 이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모면케 해 주신 하느님의 구원을 훗날 다윗은 시편 34, 52, 56편 등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아키스 왕에게 자신을 전혀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미친 인물로 인식시키려했던 다윗의 의도가 일차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고대 중근동에서는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감으로써 미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친 사람과의 상종(相從)을 적극적으로 기피하였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다윗은 그 위태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아마도 아키스는 갓의 백성들 중 미친 자들을 이전에도 종종 보았던 것 같다. “미친놈이 아니냐! 어쩌자고 저런 자를 나에게 끌고왔느냐?”(15)은 당장 자신 궁에서 그를 쫓아내라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다윗의 미친 자 행세가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다윗은 이때 아키스의 궁을 나와 그 길로 아둘람 굴로 피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