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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욥기로 시작하셨습니다.
욥기가 제기하는 ”의인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하셨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작품은 신학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자주 권장해 주시는 도서 가운데 하나고, 그중에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에서 욥의 고통에 대해서, 심리학자인 융은 욥을 위한 답변이라는 글이 있어요.
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만일 욥이 없었더라면"이라는 글이 있고요
"의인의 고통"
º 도스토옙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ㅡ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
º Jung : 욥을 위한 답변
º 키에르케고르 : 만일 욥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통은 왜? 우리가 느끼는 삶은 어떤 분은 편안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고, 고통이라고 느끼는 분도 있을 실 것 같아요. 신부님께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 가장 큰 고통은 자녀를 잃으시는 고통 같다고..
옛날에 누군가가 덕이 높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온 순서대로 가는 게 행복이야."말씀처럼,
요즘 특히 올해에 젊으신 신부님들이 하느님 나라에 많이 가셨는데, 신부님께서 후배 신부님들을 영안실이나 장례 미사 때 만나게 되시면 반농담, 반진담으로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우리 신부님들 약속하나 합시다. 온 순서대로 갑시다."…
모든 것이 순서대로 되면 참 좋을 텐데..
신부님께서 주위의 신자분들 삶 가운데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자녀를 먼저 보내는 것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할 수 있는 제일 큰 효도가 건강하게 감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있다면은 부모로서 이미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일주일에 두 번밖에 전화 안 해?"라는 말보다..
부모들에게 자식은 나의 품에 있을 때까지 선물입니다. 그러나 떠나면 보내야 합니다.
욥의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나누시다가~~
지혜문학으로서의 욥기
º 고통은 왜?
ㅡ 고통을 피하는 자세
ㅡ 고통을 이해하는 자세
º 지혜란 무엇인가?
ㅡ 욥기 28: 지혜 찬가
(28절: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하는 슬기다.)
ㅡ 욥기 1,1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ㅡ 욥기 42,2-6 :욥의 둘째 답변
욥기에서 고통은 왜?라는 질문 자체가 여러 가지 차원이 있어요.
고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되겠고,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가?인데 우리가 어떤 질병에 걸렸을 때 첫 번째로 던지는 질문은 "내가 왜 그렇게 됐을까?"이에요.
신부님도 몇 달 전부터 의사 선생님이 "신부님 이제 고지혈증 약을 드셔야겠어요?"라는 말씀을 듣고 조그마한 약을 먹고 있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다고 해요.
아침마다 일어나서 그 약을 먹어야 하니까,
'내가 어떻게 살다가 이걸 먹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운동이 부족했을까? 식생활이 잘못됐나? 아니면 뭔가가 있나?'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이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라는 것과 우리가 나일 먹어가면서 한 군데씩 한 군데씩 고장이 나는데, 물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결국 누구나 늙고 병들고 하느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는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면은, 나중에 그 순간이 와도 그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소풍가기 전날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고통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은 그것을 피해 갈 수 있을까?라는 것인데, 욥기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면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우리가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지만, 고통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해요.
많은 사람들이 언제 하느님 체험을 합니까? 편할 때? 아니면 좀 힘들 때?
힘들 때 하느님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고 체험을 하게 돼요.
문제는 지난번 강의 때도 말씀하셨지만,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어요.
따라서 욥이 말하는 지혜로움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러한 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로움이다라고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러면서 욥기는 구약 성경의 차원에서 다음 구절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이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욥기 시작 부분에서 욥기의 저자는
욥?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라고 말해요.
욥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것. 욥기 42,2-6 욥의 둘째 답변에서도 말해요.
문제는 구약 성경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실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 모든 것에 주권을 갖고 계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두려워하는 존재를 구약의 백성은 "주님"이라고 불렀어요.
신약으로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이유는 구약의 백성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신약의 백성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유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구약의 어떤 지혜로움이 하느님을 경외함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면,
신약에 있어서 지혜로움은, 신약에 있어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보는 인생관, 세상을 보는 세계관으로 출발하겠고,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동력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신약의 변화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어요.
욥기의 주제는 고통이에요.
고통이라는 말이 돌고 돌아서 욥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의 지혜 사상이 인간의 고통에 문제와 관련해 야훼 신앙에 관한 냉소적인 태도를 보고 엘리후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그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욥기가 지혜 사상과 대결을 하는 구도예요.
욥기의 저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움직이는 지혜 사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세상은 이야기하지, 인간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내가 보기엔 지혜 사상이 말하는 것이 전혀 지혜롭지 않은데?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조롱하는데?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데?.."라고 이야기하고요.
비슷한 테마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등장해요.
그들이 죄를 지을 때 뱀이 등장하고,
그때 결정적인 문장은 "너희들이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를 먹으면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어"인데 선과 악을 구별한다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면서 느끼시는데, 강의한 사람도 기억을 못 하고 강의를 들은 사람도 기억을 못 해요.
양로원의 가장 큰 장점은 "매일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하시면, 아담과 하와의 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를 먹은 것(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이에요. ^^
그런데 왜 먹지 말라고 했을까? 이 이야기 안에는 당시의 시대를 바탕으로 한(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쓰여진 시대)
편집된 심벌리즘이 있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지혜 사상에서 가장 최고의 덕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구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혜의 끝판왕이다. 이것이 지혜 사상입니다.
그런데 열매하나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뱀이라는 동물이 권합니다.
당시에 뱀은 지혜를 상징해서 법관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에 뱀이 감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혜로움을 통해서 올바른 판결을 하는... 뱀이 상징하는 지혜입니다.
그 뱀이 인간에게 유혹을 하는 것이고, 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열매를 먹고 나면 너희들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어... 그러고 나서 그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결과는 행복하게 살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관한 이야기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여러분들 지혜 사상에 대해서 알고 있지요? 그 지혜 사상은 여러분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인간이 지혜를 깨우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지금부터 들려주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보면,
인간이 지혜를 쫓다가(지혜 사상을 쫓다가) 불행해진 것입니다.
지혜 사상을 통해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함을 통해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이 저자도 지혜 사상에 관하여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욥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엘리후는 야훼 신앙을 조롱하는 지혜 사상의 냉소적임에 대결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제기부터가 다릅니다.
욥이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면, 코헬렛은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약성경에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어로는 qoh로 쓰기도 하고 koh로 쓰기도 하는데, 신부님은 q로 쓰는 게 익숙하시다고...
코헬렛(전도서)
Qoheleth, Kohelet(Ecclesiates- 라틴어 성경)
Ecclesiates에서 코헬렛의 어근이라고 할 수 있는 카할(qahal)이라는 히브리말 동사가 모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사람들을 모으는 이, 그렇게 무언가를 전도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해서 전도서라고 우리말 번역을 했습니다.
요즘은 코헬렛이 누군가의 이름일 수도 있겠다고 여겨 우리말 성경에서도 영미권에서 코헬렛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전에 쓰인 책에서는 전도서라고 부릅니다. 그 코헬렛의 주제는 행복에 관한 것인데요.
1.1 코헬렛 벤 - 다윗의 말씀들
임금 /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표현하신 이유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성과 같은 역할은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에서 "빈"이 아들이라는 의미지만, 라덴의 아들 오사마라고 쓰지는 않아요.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하죠.
그렇듯 누군가를 이야기했을 때 "코헬렛 벤 다윗"은
예수님도 역시 예수님 시대에 요수아 벤 요시프라고 불리셨어요.(요셉의 아들 예수를 히브리적 표현으로)
코헬렛 벤 다윗도 아버지가 다윗이고, 다윗이면? 솔로몬이 아닐까?
더군다나 코헬렛을 쭈욱 읽어보면 코헬렛이 스스로를 임금이라고 소개를 해요.
임금이면서도 다윗의 아들이고 지혜와 관계된 내용이니까? 이 코헬렛이 솔로몬 아닐까?
솔로몬이 자신을 코헬렛이라고 부른 게 아닐까? 이런 식의 생각을 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코헬렛 벤 다윗이 임금인데 예루살렘에서 임금으로 있었던, 코헬렛 벤 다윗의 말씀들에 대해서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겠다.라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임금으로 있었으면 유다 임금인데, 유다 임금 중에서 코헬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임금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솔로몬일 거야! 하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죠.
이렇게 코헬렛에 관한 소개를 하고 바로 이 대목이 나옵니다.
1.2
허무들의 허무 / 코헬렛은 말했다
허무들의 허무 / (그) 모든 것은 허무이다.
הבל הבלים אםד קהלת (하벨 하발림 아마르 코헬렛)
הבל הבלים הכל הבל (하벨 하발림 하코르 헤벨)
헤벨(하벨)- 하발림 : 허무들의 허무의 최상적인 표현으로(최고의 허무)
카인과 아벨에서도 나온 아벨도 히브리어로는 “카인과 헤벨"입니다. 헤벨은 이미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알고 있는 이름이기도 해요. 이 헤벨(아벨)은 "숨"이라는 뜻과 안개와 같은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vanity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숨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형체가 없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 이란 어감을 갖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아마르 코헬렛( אםד קהלת), 코헬렛이 말한다 그리고 다시 반복해서
헤벨(하벨) 하발림( הבל הבל), 하코르( הכל= 모든 것), 헤벨(하벨)
철학에서는 이런 것을 염세주의라고 합니다. 염세주의라고 하면 신부님이 고등학교 때 쇼펜하우어를 탐독하셨다고 해요.
철학계에서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철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들고 자신은 늙어서 죽은 사람"이라고 표현해요.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독일 사회에서 한 동안 노란 조끼가 유행하는 시절이 있었다고...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니체도 허무란? 의미 없음, 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런 그들보다 약 2000년쯤 앞서서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무는 쇼펜하우어나 니체에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신부님이 20대 때 무지하게(??!!! 엄청나게~~) 유행했던 노래가 있었는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가 있고, 또 제목은 희망적인데 내용은 허무적인 ”이 풍진 세상을 살았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노래라고 하셨어요.
이렇듯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느껴오는 것 같아요.
대개 나이 들어 많이 느끼는 감정이죠. 그리고 그 인생무상은 전 세계의 모든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도 근래에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서 신학교에서 함께 만나게 되는데 친구들이 주로 하는 말이 '내가 지금까지 뭐 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어...'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차갑고 냉정하게 말씀을 하신대요
"그건 당연한 거야. 네가 지금껏 헛된 것을 쫓으며 살아왔으니 인생의 헛됨을 느끼는 것은... 지금부터 너희 인생을 헛되게 하지 않게 살 수 있는 바른 길이 있어." 그리고 나서 그와 같은 모습을 좇는 그리스도 신앙인에 대한 모습을 설명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을 가지면서 받게 되는 선물은, 내 인생이 이제는 헛되지 않은, 올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신자분들 중에서도 '나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헛되다고 느낄까?'라는 생각이 들면 ㅡ
이제부터 라도 제대로 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신의 뜻을 찾는다면 인생의 헛됨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신부님이 신학교에 갈 때 스님이 된 친구분을 한 십 년쯤 후에 만나게 되셨는데, 절에서 나오셨어요.
그 이유가 그분이 알고 계신 큰 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남기신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해요(스님들은 돌아가실 때 하시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가 봐요)
"무"라는 한 마디에 절에서 나오게 되셨다고..
불교의 수도 생활의 마지막이 "무"라면 이 길을 내가 계속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헛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인생의 꽉 참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코헬렛의 허무라는 내용은 창세기 시작하면서 나와요, 헤벨이 아니라
히브리 말로 "tohu wa bohu"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그때까지 세상은 아직 꼴이 지어지지 않았고 비어있었다" 에요.
어떤 혼돈의 모습입니다.
º 코헬렛의 1,1에서는 저자에 관한 소개가 잠깐 나오고,
º 1,2절에서는 이제부터 할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모든 게 다 허무합니다.라고 나오고
º 코헬렛 맨 마지막 부분, 코헬렛의 발문(12,9)에서도 저자에 관한 에필로그가 나오긴 하는데
12,8(맺음말)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 허무들의 허무(12,8 결론)
그 코헬렛은 말했다( '그'라는 관사가 붙음으로써 사람의 지위를 살짝 드러냅니다)
그 모든 것은 허무이다
1,2절과 12,8절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신부님은 전체를 4 부분(네 개의 몸통?)으로 나누셨고
1,3-3,22 Proposito(주제, 제시) - 사유와 성찰
코헬렛이라는 인물이 가졌던 인생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드러납니다.(우리에게 무척이나 공감 가는 부분이에요)
1,3-11절에서는 [허무라고 말하는 까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열심히 살았지만 소용없더라. "자식 키워봐야 아무 필요가 없더라." 이 말씀에 신부님들은 굉장한 위로를 받으신대요^^
코헬렛은 그것까지도 굉장히 개인주의적이에요. 내가 열심히 해서 무언가를 축적했는데 그것이 나 죽은 후에 누군가에게 가더라~~ 분하다.
그 과실을 내가 먹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가더라.
코헬렛이 그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는 까닭인 거죠. 나중에 코헬렛에서 나오는데 인간의 생은 제한적이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느님께서 정말로 의롭게 산 사람에게 허락한 수명은 120년 정도더라.
그러고 나서 코헬렛이 말합니다. "내가~~~~ 임금해 봤는데~~~~~"
내가 다음과 같은 것을 느꼈어~
1,12- 2,26 이스라엘 임금 코헬렛
2,24(1,3절을 이어받는 것)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
25
그분을 떠나서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으랴?
26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그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주시어
결국 당신 마음에 드는 이에게 넘기도록 하신다.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
2,24-25절까지 읽으면 말이 안 됩니다. 파란 글자를 빼고 읽으면,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
이렇게 연결하면 말이 됩니다. 신부님이 하고 싶은 말씀은?
코헬렛은 우선적으로 고대 세계가 갖고 있던 지혜 사상을 담은 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코헬렛의 최종 저자는 지혜 사상 문헌에 하느님 사상을 끼워 넣는 거예요. 자신이 알고 있던 하느님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끼워 넣음으로써,
욥기에서는 엘리후가 지혜 사상에 대해서 대립했었죠.
여기에서 코헬렛은 지혜 사상을 수용해요. "지혜 사상? 너희가 한 말이 맞아.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야훼 신앙 안에서도 함께 읽어보니까 참으로 지혜로운 게 무엇인지 너희도 이제 알겠지? 야훼 신앙은 너희가 하고 있는 말을 이미 품고 있어."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우리가 먹은 음식 중에 일부는 소화가 돼서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배출돼요. 욥기나 아담과 하와는 배척하는 것이고(소화하지 않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지혜 사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물론 지혜 사상을 야훼 신앙 관점에서 재해석했을 때 더 빛을 발합니다.
따라서 무리하게 끼워 넣다 보니, 일관성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그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주시어
결국 당신 마음에 드는 이에게 넘기도록 하신다.
왜 내가 쌓은 노고가 누구에게 넘어가는가?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는 이에게 주시는 거야.라는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1-15 [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3,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런데 인생에서 정말 알아야 할 순간을 인간을 알 수 없더라.라는 것이 코헬렛의 생각이고 그러므로 코헬렛이 이야기하는 행복? 인간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요" 인간은 알 수 없더라. 그때를,
인간이 알고 있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뿌릴 때와 거둘 때.
하지만 정작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더라.
3,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3,12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신부님과 비슷한 연배의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굉장히 중요한 라틴말을 해요. "carpe diem"(carpere: 사용하다, diem, dies: 날)
매일매일을 잘 사용해라.라는 의미로 카르페디엠이 철학자들 중에서 쾌락주의자들에게 모토가 되어서 요즘에는 매일매일을 즐겨라는 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낮은 차원의 쾌락이 아니에요. 참 즐거움이란 무엇일까?라고 이야기하면서 스토아적인 쾌락을 의미합니다.(물직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적인 쾌락을 의미)
21세기에 젊은이들에게 제일 유행했던 "욜로( you only live once)"는 신부님이 보시기에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고대의 쾌락주의적인 높은 차원은 아닌 듯하고, 그전에 욜로 보다 더 낮은 차원인 히피 사상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도달할 수 없어. 그러니 굉장히 실용적인 지혜를 찾게 되고, 작은 행복들을 매일매일 살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코헬렛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변화시키는 것이죠, 다음과 같이 읽어봅시다.
3,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3,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3,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때에 관해서 질문하게 하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3,13절로 이야기가 이어져서,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3,14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 거기에서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그분을 경외할 수밖에
익숙한 한 단어가 나왔어요 "하느님을 경외할 수밖에"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왜 그렇게 하시는지, 언제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3,15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
이렇게 읽으면 훨씬 더 알아듣기 쉬운 문장이 됩니다.
3,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3,12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3,14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3,15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것을 다 하느님과 연관시켜 재해석합니다.
3,16-22 [공정과 정의, 인간과 짐승]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정하고 정의롭지 않더라.
유전무죄, 무전유죄ㅡ
3,16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보았다. 공정의 자리에 불의가 있음을, 정의에 자리에 불의가 있음을.
3,17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3,19
사실 인간의 아들들의 운명이나 짐승의 운명이나 매한가지다. 짐승이 죽는 것처럼 인간도 죽으며 모두 같은 목숨을 지녔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더라. 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코헬렛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끼워 넣습니다.
3,17
의인도 악인도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니, 모든 일과 모든 행동에 때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앞선 내용에서 [때]라는 개념을 빌려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본래 지혜 사상이 갖고 있는 사상에 대해서 약간 대결합니다. 마치 엘리후처럼;
지금은 공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상도 주시고 벌도 주신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라는 것이고, 그리고 인간과 짐승은 별로 다를 것이 없더라는 표현은
3,18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어 그들 자신이 다만 짐승일 뿐임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셨다.라고 코헬렛의 저자는 해석해요. 몸통의 첫 번째 부분이 끝나고,
몸통의 두 번째 대목은?
4,1-6,9 Explicatio(전개) - 세속적 행복
억압(4,1-3), 노고(4,21-12); 권력(4,13-16); 말(4,17-5,6); 권력(5,7-8)
신부님은 권력과 말에 관해서 주목하셨어요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누리게 되었을 때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말이다. 기본적인 지혜 사상을 전하고 있고 거기에 관해서 코헬렛 저자는 어떻게 신학화하는지를 이제부터 보아야겠어요.
4,17
하느님의 집으로 갈 때 네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말씀을 들으러 다가가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면서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테마를 여기서 던지지요.
5,2절부터 읽어갑니다.
일이 많으면 꿈을 꾸게 되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온다.
5,6
정녕 꿈이 많은 곳에 허무가 있고 말도 많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 는 표현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죠?^^
5,2절과 5,6절인 위의 부분을 통해서 신학화 하는 저자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5,1
하느님 앞에서 말씀을 드리려 네 입으로 서두르지 말고 네 마음은 덤비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너의 말은 모름지기 적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서원한 이야기를 쭈욱 하고서, 마지막 결론은? 5,6절
5,6
그러니 너는 하느님을 경외하여라.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 앞에서 침묵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신학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9-19 [부]
5,17
보라, 하느님께서 주신 한정된 생애 동안 하늘 아래에서 애쓰는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 유쾌하고 좋은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그의 몫이다.(한정된 생애; 코헬렛에서 중요한 단어)
5,18
또한 하느님께서 부와 재화를 베푸시어 그것으로 먹고 자기 몫을 거두며 제 노고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모든 인간.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5,19
정녕 하느님께서 그를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하시니 그는 제 인생의 날수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카르페디엠"이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
6,1-9 [욕망]
6,1
태양 아래에서 내가 본 불행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을 무겁게 짓누른다.
6,2
하느님께서 부와 재물과 영화를 베푸시어 원하는 대로 아쉬움 없이 가진 사람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리게 된다. 이는 허무요 고통스러운 아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님 주변의 분들은 자식에게 그것을 물려주기 위해 무지하게(??) 애쓰시는 것 같으시다고, 코헬렛의 저자는 그것까지도 허무하다고 이야기해요
6,8
정녕 지혜로운 이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인생살이를 아는 가난한 이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6,9
눈에 보이는 것이 욕망을 뒤쫓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
욕망을 뒤쫓는 것보다 오늘 내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용적인 의미에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또한 인생의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
세 번째 파트입니다. 이제부터는 지혜사상의 Maxim, 격언에 관한 이야기예요
6,10-8.17 지혜 사상의 격언(Maxim)에 대하여
6,10
존재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그 이름으로 불렀고 인간이 어떻게 될지도 이미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보다 힘센 분과 따질 수가 없다.
6,11
말이 많으면 허무도 커지는데 인간에게 좋은 것이 무엇이랴?
말을 적게 하여라,라는 이야기를 한 다음에 무엇보다 자신보다 힘센 하느님과 겨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6,12-7,14 [한정된 생애에서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이것보다는 이것이 낫다. 는 측면에서 항상 선택해야 한다는 실용적 지혜를 이야기해요.
6,12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림자처럼 보내야 하는 허무하고 한정된 생애에서 그에게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리오? 인간이 죽은 다음 태양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려 주리오?
7,13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라. 그분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똑바로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고,
7,14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뒤돌아보니 그때가 행복이었네.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다..라는 것
7,15- 22 [선악]
선과 악의 문제입니다.
7,15
내 허무한 생애 중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
우리들이 많이 느끼는 문제예요. "어휴, 귀신은 저거 안 잡아가고 뭐 해??!!"
7,18
하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하나에도 네 손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 정녕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그 둘 다에서 성공을 거둔다.
이 부분은 선과 악에 관한 문제인데, 그 선악을 넘어서는?
축구 경기 중에 A팀 감독이 선수들에게 "축구는 신사들의 스포츠야 그러니까 너희는 절대로 반칙하면 안 돼!"
B팀에 감독은 "너희들은 열심히 플레이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을 땐.. 뭐 반칙으로, 음 너무 심하지 않은 반칙으로 게임의 흐름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이 중요한 거야."
A팀과 B팀에 축구 시합은 누가 이겼을까요? 아마도 세속적 판단으로 하면 B팀이 이겼을 겁니다. 정말 나쁜 짓만 아니면 적당히 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 같아~
또 예를 들어 거짓말.
문화권마다 다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인도 사람들은 하루에 80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해요. 일본 사람들은 열 번 정도. 한국 사람들은 스무 번 정도 한다고 해요.
그런데 그 거짓말에는 아침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침 먹었어?" 안 먹었는데... "응, 먹었어."
이런 거짓말까지 포함하는 거죠.(악의가 없는 거짓말일 때)
우리보다 적은 수치의 거짓말을 하는 나라는 독일, 일본 정도라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그 둘다에서 성공을 거둔다.라는 의민데, 선과 악의 문제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선과 악이지
꼭 선하게 산다고 해서 복된 삶을 살고 악하게 산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것은 아니더라.. 지혜 사상을 하느님의 섭리와 함께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7,23-29 [여성]
코헬렛은 여성에 관해서 조금 적대적이에요.
7,23
나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여 보았다. "나는 지혜롭게 되리라." 말하여 보았지만 그것은 내게서 멀리 있었다.
지혜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더라.
7,27
코헬렛의 말이다. 보아라, 결과를 얻으려고 하나하나 더듬어 내가 찾아낸 바를.
7,28
내 영이 줄곧 찾아보았지만 나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천 명 가운데 남자 하나를 찾아내었지만 그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여자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 부분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7,29
다만 이것을 보아라, 내가 찾아낸 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올곧게 만드셨지만 그들은 온갖 재주를 부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코헬렛의 해석가들은,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선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온갖 재주를 부린다. 지혜로움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남성과 여성을 통틀어 이야기하면서 여성 비하적인 기존의 지혜 사상의 입장을 코헬렛이 조금 수정하려고 애쓴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신부님이 알고 있기엔 유다 전통도 지혜 사상 못지않게 여성에 관해서는 남존여비에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8,1- [부조리와 지혜]
8,1
누가 지혜로운 이와 같은가?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는 그 얼굴을 빛나게 하고 굳은 얼굴을 변화시킨다.
8,11
악한 행동에 대한 판결이 곧바로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아들들의 마음은 악을 저지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8,12
악인이 백 번 악을 저지르고서도 오래 살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지성 중에 알베르 까뮈가 있고 그의 작품 중에 '이방인'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해요. 한데 고대 세계에서도 부조리함은 문제가 되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코헬렛의 저자는 사회적인 부조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요.
8,12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그분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므로 잘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그들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들은 잘될 거야.
8,13
악인은 하느님 앞에서 경외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잘되지 않을뿐더러 그림자 같아 오래 살지 못함도 알고 있다.
지금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질서 잡힐 것이야 거야.라고 이야기해요.
8,15
그래서 나는 즐거움을 찬미하게 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태양 아래에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애 동안 노고 속에서 그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카르페디엠"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같은 거야.
8,16
내가 지혜를 알려고 또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살피려고 낮에도 밤에도 잠 못 이루면서 내 마음을 쏟았을 때
8,17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인간은 파악할 수 없음을 보았다. 인간은 찾으려 애를 쓰지만 파악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이가 설사 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알 수 없더라. 그런데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그럼 몸통의 네 번째 부분이에요^^
행복에 대한 이야기, 격언들을 이야기하고 나서ㅡ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9,1-12,7 Applicatio [윤리적 적용] 어떻게 살 것인가? 첫째 운명에 관해서 이야기해요
9,1-10 [운명]
9,1
그렇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마음에 두어 고찰해 보았는데 의인들도 지혜로운 이들도 그들의 행동도 하느님의 손안에 있었다. 사랑도 미움도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이 허무일 뿐
9,2
모두 같은 운명이다.
우리식으로 풀어 이야기한다면? "선하게 살았거나 악하게 살았거나 결국엔 다 늙고 죽더라."
9,4
그렇다, 산 이들에게 속한 모든 이에게는 희망이 있으니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운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게 죽은 것보다 낫더라~
9,5
산 이들은 자기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라도 알지만 죽은 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보상이 없으니 그들에 대한 기억은 잊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내세관" 이 없어요.
9,7
그러니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만약 여기서 끝나면, 우리 모두 끝나고 치킨 집에 가서 우리는 만나야 하는데....."코헬렛에서 이러지 않았나요?" 하면서 ^^
9,9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어떻게 살 것인가? 에 관해서 결론은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배우자와 함께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라.
이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행복의 모습이라고 지혜 사상은 이야기하고, 코헬렛의 신학적 저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즐거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의 듣고 집에 가셔서 배우자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다음에 다시 [때]에 관해서 나와요
9,11-12 [때]
9,11
나는 또 태양아래에서 보았다. 음식이 지혜로운 이들에게 달려있지 않고 재물이 슬기로운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호의가 유식한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모두 정해진 때와 우연에 마주치기 때문이다.
9,12
사실 인간은 자기의 때를 모른다.
이것의 결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인간이 자기 때를 모르니까 아예 시도하지 말라는 뜻과 계속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지혜 사상은 좀 애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코헬렛의 신학적 사상은 두 번째 견해입니다.
우리가 언제의 때가 될지 모르니까 계속해서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코헬렛의 저자는 편집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요.
9,13- 10,16 [지혜는 힘보다 낫다]
무언가를 통치하고 무언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사람들은 힘(권력, 돈)으로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혜로움이 훨씬 낫더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10,16절이 코헬렛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10,16
어린아이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고관들이 아침부터 잔치르 벌이는 나라 너는 불행하다
여기에서 어린아이는 순수함이 아니라 아직 지혜를 갖추지 못함을 의미(어리석음)하고, 그런 현재의 나라는 불행하다. 자신의 현재에 관한 한탄일 수도... 작은 어리석음이 지혜보다 더 무겁다. 즉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탁하게 만드는 것
10,14
미련한 자는 말을 많이 한다.
"강의를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하셨어요...ㅋ
11,1-6 [ 알 수 없다]
11,1
네 빵을 물 위에다 놓아 보아라. 많은 날이 지난 뒤에도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지혜 사상에서 여기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예요.("네 빵을 물 위에다~~~"는 배를 타는 무역업을 이야기하고 세상으로 뻗어나가다 보면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폐쇄적인 경제가 아닌 개방적인 경제 활동을 하여라!)
11,2
일곱 또는 여덟 몫으로 나누어라. 땅 위에서 무슨 불행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도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마라는 이야기가 있죠~~
오늘날 경제권에서 일하는 이들이 활용하는 탈무드의 이야기
11,5
바람의 길을 네가 알 수 없고 임산부의 배 속에 든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듯 그렇게 모든 것을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너는 알 수 없다.
본래 지혜 사상의 저자는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너무 하나에 집중하지 말고 널리 펼쳐서 크고 작은 손해도 감수하면서 하다 보면 삶의 여러 가지 순간이 있을 때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을 거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코헬렛의 최종적인 저자는 그것을 신학화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너는 알 수 없다." 그러니 하느님을 경외하여라.
11,7- 10 [젊음]
11,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지혜 사상은 젊은이들에게 젊은 시절을 맘껏 즐길 것을 권하는데, 코헬렛의 저자는 "하지만,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해!"
라고 짧은 신학적 여운을 남겨요.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어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12,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12,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12,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서 되돌아간다.
이것은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두려운 일입니까? 행복한 일입니까? 여기서 대답을 안 하시는 분들은.....🤔
그날이 왔을 때 신부님도 역시나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적어도 지금, 머리로는 "그때,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게 아닐까?"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경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발문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12,9
코헬렛은 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백성에게 슬기를 가르쳤으며 검토하고 연구하여 수많은 잠언들을 지어 내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코헬렛은 코헬렛이라는 사람이 지어놓은 잠언이다. 학자들은 요즘에~~~
아까 코헬렛의 어근이 카할(qahal)이었죠? 그가 모아놓은 것이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잠언들일 수도 있다. "그런 잠언을 모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하는 직업적인 코헬렛, 지혜의 교사라는 뜻으로 지혜로운 경험들을 모아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지혜의 교사가 코헬렛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그런데 코헬렛을 마무리하는 발문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12,12
내 아들아, 이 밖에도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12,13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 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12,14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쁜 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하느님을 경외하여라.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셈하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결론적으로 코헬렛이라는 작품을 신부님은 어떻게 이해하시느냐?
첫째, 어떤 지혜 사상가가 쾌락주의적인, 그러니까 카르페디엠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들을 보았습니다.
아! 우리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쫓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것 같아.. 궁극적인 지혜에도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애.
그러니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말 지혜로은 것 같아.(카르페디엠의 쾌락주의적인 지혜 사상을 모아놓은 코헬렛이 있었을 것 같고)
거기에 한 단계가 덧붙여지는, 허무주의적인, 염세주의적인 편집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다 허무하더라. 허무로다.로 첫 번째 편집이 가해지고
두 번째 편집인 신학적 재해석,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무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의 길을 우리들이 미리 알고, 미리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지금 모든 것이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야."
그러므로 그것이 쾌락주의든, 염세주의로 편집된 그와 같은 내용이건 지혜 사상이 이야기하는 허무한 인생에 통찰을 해보니까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더라. 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날에도 교보문고를 가보면 그 안에 소위말하는 인간의 처세술, 행복에 관한 여러 책들이 있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같은 세속적인 처세술, 세속적인 지혜로움에 대해서 질문하는 인문학적인 해답들을 대할 때, 우리들의 신앙 안에서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매일매일 우리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세상의 지혜와 실용적이 지혜와 만나야 할 것이라고...
세상의 지혜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는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갈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신학생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인데요.. 영적인 의미로서,
'엄마가 해 주는 밥보다 불량식품이 항상 더 맛있습니다.'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지혜는 굉장히 달콤하고, 우리들에게 설득하는 어조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하면서, 그러한 유튜브의 동영상, 책들에 관해서 나는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떤 부분에서 조심해야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수용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우리들의 기본적인 신앙의 잣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인생을 욥이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면, 코헬렛은 행복을 좇는 인간들의 허무함에 관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코헬렛의 대답을 우리는 새로이 알아듣게 됩니다.
영광송으로 마치셨고요. 언제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고 배웁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강의때 느꼈던 감동이 새록새록 살아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