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몽골 기행-- 시와 일기 / 백우선
[시] 8편
흐미*
몽골 대초원에서는
웃는 풀로 날거나 걷는
전생, 후생들과 속삭이며
그들의 목소리로 노래하는가
마두금도 한 줄이 아니듯
노랫소리로나마
어딘가의 그,
하늘의 그와도 함께하는가
*흐미(khoomei): 몽골 전통 음악 창법
마부의 꽃
몽골 테를지에서 말을 탄 젊은 마부는
갑자기 몸을 땅으로 깊이 굽혀
노랑꽃을 꺾어 여인에게 웃으며 건넸다.
한 여인과 내가 탄 말 둘의 고삐를 잡고
앞서 가다가였다.
잠시 뒤에는 또 그렇게 하얀 꽃을 꺾어
나한테도 주었다. 나는 그 꽃을
나란히 가는 그 여인의 말에게 먹이며
네가 태운 분을 잘 모셔다오라고 일렀다.
그 말은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거렸다.
불빛
별이 안 보이듯이
네가 잘 안 보인다.
너를 볼 수 있는
동그란 창
둘은 열어둔 채
내 불빛을 다 끈다.
에지노르
—바이칼호(자연호) 딴 이름 에지노르(어머니호)
자식들 떠나가는 것 보려고
알혼섬 건너편 사흐르따 나루에서
이르쿠츠크 거쳐 울란우데 근처까지
멀리멀리 한 나절 두 나절
버스와 열차를 따라오며
손을 흔들고 흔들었다.
어디든지 언제든지
해로 달로 환히 비춰 보겠다며
물결을 낮추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어 피는 꽃
몽골 초원은 온통 꽃밭,
꽃들은 소가 되고 말이 되고 양이 되고 염소가 되고…
꽃젖이 되어
사람들 얼굴에 꽃으로 피어나고
하나가 되어
몽골 서고비 쳉헤르 초원의
한 고개 위에서였다.
일행은 둘러앉거나 서서
반한 풍광으로 녹아들었다.
칭기스칸 보드카를
민들레 꽃잎 두셋씩을 안주 삼아
병뚜껑으로 나눠 마시며
낙원의 꿈들로 부풀었다.
잠시나마 그곳의 또 다른
말이나 소가 되어 있었다.
낙타의 눈
낙타는 보여주었다
눈으로 본 것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푸르스름했다
언제 다 훑어보았을까
내 삶의 색이었다
솟대
바이칼호 알혼섬에서 우리 동네까지
땅을 하늘로 고루 받쳐 올리고
하늘을 땅으로 고루 받아 내린다.
천지인이 한 몸으로 푸르게 넘실거린다.
[여행 일기]-09.02. 이르쿠츠크~울란바토르 / 백우선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토르로 가는 열차 여정이었다(22:30 소요). 밖의 들꽃, 자작나무, 마을을 보거나 준비한 도시락, 라면, 누룽지, 안주로 식사도 하고 보드카나 맥주도 마시고 잠도 잤다. 나와 3명의 칸은 승무원실 바로 옆이었다. 그곳의 위험을 처음에는 몰랐다. 금연이지만 한두 모금은 괜찮을 듯싶었다. 문 밖에서 망을 보았으나, 연기가 열린 창보다 옆 칸 틈을 더 밝힌 것은 예상 외였다. 열차 폴리스를 부르겠다 어쩌겠다 하여 거친 지시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술판은 계속되고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웬일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수리공이 와서야 고쳐졌다. 문에 붙인 고무 띠가 벌어져 문설주에 걸렸던 것이다. 취기는 고조되었다. 우리 칸은 술칸이 되었고, 술의 칸(Khan)도 탄생했다. 승무원이 들어와 냅다 맥주와 보드카, 안주까지 빼앗아 갔다. 폴리스를 부르겠다는 말이 또 나왔다. 문 고장 고성 항의는 정당했지만,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무마가 필요해 보였다. 문을 조금 열어놔야 하는데 술김에 쾅 닫아버려 그걸 안에서 고치느라 한참이 걸렸다.
이래저래 승무원 대 형제의 열전은 지나갔지만, ‘술 칸’의 태풍은 식지 않았다. 한 형제가 ‘술 칸’의 손을 꽉 잡고 차근차근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몇 번 손을 빼내려 했지만, 더 꽉 움켜잡고 이번에는 노래까지 조용조용 불러가며 진정시켰다. 점점 그 태풍도 잔잔해져 갔다. 그 마지막 장면은 내게 참 감동적이었다.
—사막의형제들, 『바이칼에서 몽골까지 열흘』, 책만드는집, 2020.3.20.
백우선 약력
1981년 『현대시학』시 천료. 1995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탄금』 등. 동시집 『지하철의 나비 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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