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를 찾아서...46화>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듯이 보이던 벧세메스의 문이 열리면서 붉은 빛이 하얀 신당의 바닥을 물들이자, 고개 숙여 기도문을 읊조리던 다른 신관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마다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기대에 부푼 눈을 문으로 향하던 모든 이들은 벧세메스의 문이 모두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문은 반도 채 열리지 않은 상태로 멈춰버렸고, 그 사이로 하얀 예복에 금관을 두른 쟈크 대신관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쟈크 대신관이 재단 앞에 섬과 동시에 커다란 벧세메스의 문은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신당의 이곳저곳에서는 웅성거리는 소음이 끊이지 않았고, 신관들은 저마다 기대감에 목을 쭉 빼고 대신관을 응시하였다.
소음이 그치기를 기다리는지 쟈크 대신관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쟈크 대신관을 바라보던 아델라이드는 순간 쟈크 대신관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껴졌다.
차츰차츰 사람들의 소음이 줄어들고 쟈크 대신관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늘어갔다.
마침내 모든 소음이 멈추자, 쟈크 대신관은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아래로 가게 편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교님을 대신해서 성스러우신 라센님의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쟈크 대신관이 말을 잠시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신관들은 쟈크 대신관의 입을 주시하며 다음 말이 어서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 대신관은 오른손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토신관님 나오십시오."
모두의 시선은 대신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네토 신관에게 향했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금발머리가 이제는 많이 퇴색한 늙은 신관이 묵묵히 대신관의 말에 따라 다른 신관들이 터주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섰다.
나이 드신 신관들과 주변의 많은 신관도 네토신관의 호명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혹자는 따뜻한 미소를 던져주기도 했다.
쟈크 대신관은 네토신관이 옆에 서는 것을 지켜본 뒤에 다시 오른손가락을 들어서는 중앙을 가리키며 또 다른 이름을 호명했다.
"라파크 신관님 나오십시오"
사람들의 입에서 앞에 네토 신관이 불렸을 때보다 더욱 큰 감탄성 등이 들려왔다. 라파크 신관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신관으로 믿음이 강하고 신력도 높아 머지않아 고위신관에 이르게 될 인재였다.
몇몇 신관들은 우려의 눈빛을 던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긍정의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소에 라파크신관을 많이 따르던 아델라이드도 다른 신관들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기쁜 마음으로 축복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델라이드 수련관도 나오십시오"
대신관의 입에서 아델라이드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사위는 마치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침묵이 잠시간 이어졌고, 아델라이드조차 숨을 멈추고는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대신관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들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주듯이 자신을 주시하는 쟈크 신관의 눈빛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쟈크 대신관님 호명을 잘못 하신 것은 아니십니까? 어찌 아직 신관의 성식(聖式)도 치루지 못한 일개 수련생이 차기 주교 후보로 호명될 수가 있습니까?"
차갑게 내려앉았던 침묵은 어느 신관의 믿을 수 없다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마치 막힌 뚝이 무너지듯이 사방에서 항의의 소리와 한탄의 소리로 터져 나왔다.
"맞습니다. 대신관님. 이것이 진정 라센님의 뜻이란 말씀입니까? "
"이럴 순 없습니다. 어찌 신관도 아닌.."
"그만하십시오."
사방에서 터져 나오던 소리들은 대신관의 이 한마디로 한순간에 멈춰버렸다.
"라센께서 내리신 일입니다. 라센께서 그를 후보로 지명한 이상 그는 후보자로서의 의식을 치뤄야 합니다. "
"하지만.."
대신관에 말에 항의하려던 앞줄의 한 신관이 대신관의 차가운 눈빛을 받고는 움 추리며 말을 삼켰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후보들의 입관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시험이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신관께서는 다시 의식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현 주교님께서는 안식의 의식에 마지막 힘을 쏟고 있습니다. "
말을 마친 대신관은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되새기듯 주변에서 끊임없이 쑥덕거리는 신관들의 소리를 무시하고는 아델라이드에게 독촉의 눈빛을 보내었다.
얼떨결에 주변의 손에 밀려 앞에 나서게 된 아델라이드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도대체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어째서 자기가 호명된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져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은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듯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자신을 부르던 대신관님의 목소리와 주위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다른 신관들의 질시와 한탄의 목소리들이었다.
'내..내가...'
<'불새'를 찾아서...47화>
사라락- 사락-
<태양의 성전>에 이르는 가로수를 따라 길을 걷던 이슈카의 귓가에 바람에 흔들리며 사락거리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코앞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어디선가 싣고 온 이름 모를 꽃 내음이 가득한 손으로 황토 길을 따라 이어진 나무들의 잎사귀들을 흔들어 대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이슈카는 바람이 흩으려 놓고 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제 금방 해가 질 테니까."
레파티앙은 이슈카에게 향하던 고개를 홱 돌려 하덴을 째려보았다.
"다 너 때문이야! 내 말 안 듣고 욕심부리니까, 이렇게 늦은 거라구."
레파티앙은 책망의 눈빛으로 하덴에게 말했다.
"내가 조금만 먹으라고 그랬지. 맛있다면서 그렇게 먹어대더니 말이야. 내가 뭐라고 그랬어. 잘 밤엔 물기 많은 음식 많이 먹는 거 안 좋다고 그랬잖아. 그것도 찬데서 말이야."
레파티앙은 하덴에게 지난 밤 무식하게 먹어대던 챠카디 열매로 인해 아침나절 내내 배앓이 한 것을 상기시키며 나무랬다.
"레파티앙, 그러지마. 그거 때문에 하덴이 많이 아팠는데.."
이슈카는 핼쑥해진 얼굴로 슬며시 레파티앙의 눈치를 살피는 하덴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이에 아군을 얻었다고 생각한 하덴은 약간 희색이 돈 얼굴로 레파티앙에게 말했다.
"맞아. 이 의리 없는 놈아. 내가 아파 죽겠다는 데도 너는 <성전>에 조금 더 빨리가지 못하는게 더 속상하냐?"
"그럼 재빨리 쌌으면 될거 아냐? 미어터져 나오는 것도 참아가면서, 절대로 바닥에는 똥 못 싸겠다고 한 게 누구야? 엉? 결국엔 바지에 지릴 때까지 참다가 폭사시키듯이 쏟아 대놓을 거면서!"
레파티앙은 하덴이 참고 참다 끝내는 거대한 폭발소리를 내면서 문제의 이물질들을 배출해내던 것을 상기시켰다.
"내참, 나도 설사 해봤지만, 너처럼 무식하게 많은 양에, 커다란 소리는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숲의 새들이 놀라서 다 날아갔겠냐?"
"너..너.."
하덴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도 채 있지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봐, 할말없지. 네가 그렇게 무식하게 먹어대지만 않았어도 , 아니 괜히 고집부리며 배 잡고 동동 구를 것이 아니라 조금만 빨리 쌌어도 그게 싫으면 차라리 낑낑거리며 참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성전>에 도착했으면 네 소원대로 사방에 안정적이 벽이 있고, 하얀색 변기가 달린 곳에서 그 우렁찬 소리를 자랑할 수 있었을 거 아냐? "
하덴은 레파티앙이 매섭게 쏘아대는 말에 기어이 고개를 떨구고는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저..하덴 우는 거 아냐? "
이슈카는 하덴이 지나쳐 달려갈 때 순간 반짝거리며 떨어지던 방울을 생각하며 말했다.
"됐어. 저 자식 좀 창피한 것도 알고 그래야지. 그 버릇 고치지, 안 그러면 평생 못 고칠 거야. 좋은 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서 무서울 거 없는 거 때문에 용기가 지나쳐 배짱 두둑한 건 좋은데, 저렇게 계집애처럼 가끔 소심한 게 문제란 말이야. 검 들고 휘두를 땐 멋있는 놈이, 어째 저렇게 사소한데서 띨방하게 구는지 모르겠다니까. 아니 다 큰놈이 똥을 못 가리니 되겠냐고.
우리가 좋은 집에서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기가 그렇게 좋다고 나서서 자청한 모험이면 좀 같게 굴어야지.
'난 죽어도 풀숲에선 못 싸!' 라니!! 아이구, 속 터져서..
이 모습을 학교 아이들이 알면 기절할거다. 만약에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나를 미친 놈 취급할 걸? 저 놈 저래 뵈두 학교에서 인기 많아.
성격도 털털하고, 워낙에 정의파라 물불 안 가리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실력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니까. 꽤 잘난 인물로 알려져 있거든.
내가 반드시 저 버르장머리 고쳐놓고야 말겠어."
레파티앙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하덴의 버릇을 고쳐놓고 말겠다고 말했다.
이슈카는 이런 레파티앙의 모습을 보며 레파티앙이 하덴을 참 많이 생각한다고 여겼다. 비록 하덴에게 말은 매섭게 쏟아 부었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않음이 이슈카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슈카는 멀찍이 사라져 가는 하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연신 중얼거리며 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차는 레파티앙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뭐해? 늦었다며?"
이슈카는 눈을 찡긋거리고는 씨익 웃었고, 그 뜻을 알아챈 레파티앙도 덩달아 씨익 웃었다.
"간다."
"그래."
둘은 동시에 눈빛을 교환하고는 하덴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얼마안가 둘은 가로수가 끊기는 지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덴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 둥치에 앉아서 발로 땅을 비벼대던 하덴은 멀찌감치 들려오는 이슈카와 레파티앙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길가에 서서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얀 색 대리석에 구불거리는 글자들이 새겨져있는 두 기둥이 보였다. 출입구인듯 했는데, 문이라고 하기에는 문짝도 없이 단지 두 기둥이 석가래같은 것을 받들고 서서 휑한 느낌을 주기도 했고, 어딘가 신비한 느낌도 주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문은 생각보다 더 컸고, 기둥의 주춧돌에서 부터 작은 글씨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그 기둥 사이의 저 너머로 완만한 돔을 이루고 있는 온통 흰색 일색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건물은 굉장히 컸고, 사방이 각 4개의 기둥을 두고 약간 안으로 들어가야 건물 외벽이 드러나는 형식의 건물이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정면에 보이는 곳 한 곳에만 있었다.
"머,멋있다."
드넓은 평야 위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흰색의 웅장한 건물을 보며 레파티앙은 말했다.
"이게 성전이란 거구나.."
이슈카는 색다른 감회에 입을 열었다. 아직 자신이 이 레파탸드라는 별세계에 오게 된 이유도 모르는 그로써는 자신의 비밀을 풀어줄 지도 모르는 <성전>앞에서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아,하아압'
이슈카는 가슴을 크게 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끊임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갑자기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흥분에서 오는 두근거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꽉 재워오는 그 느낌은 이슈카에게 흥분감 외에 약간의 두려움까지도 안겨주었다.
이슈카는 심장이 더이상 이상하게 두근거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시고 참았지만, 곧 심장에 압박감이 더해지면서 결국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우,후우,후.."
"왜그래? 이슈카? 괜찮아?"
이슈카의 거친 심호흡 소리에 레파티앙이 걱정스레 물었고, 한쪽에 서서 성전을 관망하던 하덴도 가까이 다가와 이슈카의 안색을 살피었다.
"괘,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저 건물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그만 숨 쉬는 것을 까먹었지 뭐야? "
이슈카는 둘러대며 장난스레 웃었다.
"뭐야? 그런 거야? 헤- 이슈카도 그럴 때가 있어? "
하덴이 이슈카의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웃었고, 레파티앙도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럼 이제 들어 가볼까?"
레파티앙이 두 기둥으로 이어진 문 앞으로 다가가서,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이슈카를 불렀다.
"이슈카, 자 먼저 들어가!"
"나 먼저?"
이슈카의 느닷없는 레파티앙의 제의에 저도 모르게 톤을 높여 말을 내뱉었다.
"뭘 그렇게 놀라? 이슈카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 잖아. 그러니까 이 성지에 이슈카가 먼저 발을 들여놓으란 말야. 게다가 너는 <티카>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들어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래, 맞아. 이슈카 얼른 먼저 들어가"
레파티앙의 말에 맞장구치며 하덴이 이슈카를 입구로 밀어 넣었다.
두 기둥사이를 지나며 이슈카는 왠지 따스한 빛 사이를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있을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이슈카는 빙긋이 미소짓고는 몸을 돌려 레파티앙과 하덴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너희들도 들어와!"
"그래."
"풋-"
"왜 그래?"
하덴이 느닷없는 레파티앙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사실 문이라고 해봤자, 사방이 다 뚫려 있는데서 그냥 기둥 두개 받쳐둔 건데, 지나가자니 우습잖아. 이 문으로 가나, 이 옆으로 돌아가나 어차피 성전으로 가는 길인데 말이야"
"그러네?"
하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레파티앙의 말에 응대했다.
"그럼 나는 돌아서 들어 가볼까?"
어느새 하덴의 얼굴엔 장난 끼가 감돌았다.
"아서라, 그래도 <성전>에 들어가는 길인데, 예의는 갖춰야지. 아무리 담이 없어도 길이 아닌 곳으로 가면 그건 손님의 예가 아니지."
레파티앙은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며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좋아, 그럼 어디 나도 <성전>에 들어가 볼까!"
하덴은 팔을 그게 휘저으며 큰 보폭으로 성전의 문을 향해 돌진했다.
퍽.
"어?"
퍽. 퍽. 퍽.
"어 이거 왜 이래?"
문을 지나려던 하덴은 문의 입구에서 몸이 채 들어가지도 못하고 뭔가에 부딪쳐 튕겨 나오자 의아해 했다.
"어디 비켜봐."
하덴을 옆에 비켜 세운 레파티앙이 문을 통과하려고 했지만, 예의 알 수 없는 막에 막혀 다시 튕겨 나갔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이슈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갔잖아."
"그러게.."
레파티앙은 얼빠진 표정으로 소리치는 하덴을 뒤로하고 문가에 서서는 손으로 입구를 더듬어 보았다.
딱딱한 것은 아니지만 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투명 막이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막혀있는데..."
<'불새'를 찾아서...48화>
"돌겠군"
노려보듯 레파티앙과 성전의 입구를 바라보던 하덴은 자신의 짤막한 머리를 거칠게 넘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막혀있는 건 나도 알아. 그럼 내가 허공에다가 혼자서 쇼했겠냐?
내 말은 저게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막혀있냐는 거야?
내 눈으로 코앞에서 이슈카가 들어가는 것까지 분명히 보았는데, 나랑 너는 왜 못 들어가고 튕겨 나오냔 말야."
쏟아내듯이 말을 내뱉던 하덴은 갑자기 생각난 듯 성큼 성큼 성전 입구의 오른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하려구?"
하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레파티앙이 물었다.
"거기만 길이냐, 입구가 막혀있으면 돌아서 가겠다 이거야! 사방을 뚫어놓았는데 어디론 가는 들어가겠지."
말을 하면서도 갈 길을 가던 하덴은 입구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하덴은 이쯤이면 되겠지 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는, 두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 두 손을 앞을 향해 올리고 내달렸다.
그러나, 몇 발자국 채 가지 못해서 하덴은 여지없이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 나오고 말았다.
"이이런! "
화가 난 듯, 하덴은 발을 들어 보이지 않는 막을 걷어찼다.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되 먹은 거야!"
하덴은 주먹으로 주위의 허공을 두드리며 혹시 뚫려있는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
"소용없을 거야! 그만 이리 와! 하덴"
그런 하덴을 바라보던 레파티앙이 손짓을 하며 하덴을 불렀다.
하덴은 잔뜩 구겨진 인상을 한 채로 레파티앙을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도대체 뭐야? 왜 이런 거야! "
"그걸 나한테 묻는 다고 내가 알겠냐? 다만, 내 생각엔 두 가지 경우로 보여진다."
레파티앙이 검지 손가락의 등으로 턱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두 가지??"
레파티앙의 말에 하덴은 어서 말해보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더욱 다가섰다.
"그래, 두 가지. 일단 우리 모두가 못 들어 간 것이 아니고, 이슈카는 멀쩡히 들어갔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지.
첫째로, 이슈카가 들어감과 동시에 입구가 봉쇄됐을 경우.
그러니까, 재수 없게도 정말 재수 없게도 우리 앞에서 탁하고 입구가 닫혔다고 보는 거지."
레파티앙은 두 손을 들어 마주쳐 문이 닫히는 효과음까지 내며 말을 했고,
이 설명을 듣던 하덴은 더욱 인상을 구겼다.
"뭐 그런 개떡같은 경우가 다 있어. 이 씨..그럼 두 번째는 뭐야?"
"두 번째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지. 바로 이슈카이기 때문이야."
레파티앙은 성전의 입구 건너편에 서 있는 이슈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또 무슨 소리야? "
이해가 안 된다는 하덴의 표정을 바라보던 레파티앙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입구 너머에 서있는 이슈카를 불러, 다시 입구를 통과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이에, 입구 너머에서 레파티앙과 하덴을 지켜보던 이슈카는 잠깐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입구로 다가와 서서는 손을 들어올려 마치 벽을 집듯이 하고는 천천히 입구를 나오기 시작했다.
하덴과 레파티앙을 밀쳐내던 성전의 입구는 거짓말같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이슈카를 통과시켜 주었다.
이를 보던 하덴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이슈카를 바라보았고, 이슈카는 자신도 신가하게 느껴져 자신을 몸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래 바로 저거야."
레파티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펴서는 이슈카쪽으로 가리키며 하덴에게 말했다.
"이슈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가 저 소리야!"
하덴은 추스르지 못하는 턱을 바치며 확인하듯 말했다.
"그래! 혹시나 했던 <티카>가 진짜 <티카>라는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통과하지 못했을 이유는 없어. <태양의 성전> 주위에 사람이 살 수 없고, 또 일반인의 근접까지 막고 있는데 무방비상태로 성전을 개방해 놓았을 리는 없잖아.
뭔가 무녀들만 출입할 수 있고, 또 성전을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해놓았을 가능성이 높지.
그게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막이라는 거야. 그렇기에 <티카>를 가지고 있는 이슈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 수 있는 거고 말야."
레파티앙은 이슈카를 바라보며 확신하듯 말을 맺었다.
"그럼 뭐야? 우린 영원히 절대로 못 들어간다는 말이야?"
하덴은 여기까지 고생하며 왔던 것을 떠올리며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럴 것까지야 없지. 이슈카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이슈카를 먼저 들여보내고 이슈카에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면 되니까."
"일반인의 출입은 안 된다며!"
레파티앙의 말을 듣던 하덴은 조금 전 레파티앙이 하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중이떠중이의 출입을 막았다는 거지, <태양의 성전>에 참배하러 오거나 순례하는 사람까지 막았겠냐? 세상의 모든 법칙과 규칙엔 예외라는 것이 있다. 단지 너무 악용돼서 탈이지."
하덴을 가르치기라도 하듯이 설명하던 레파티앙은 말을 마치며 스스로도 대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혼자 들어가야 된다는 소리야?"
옆에서 조신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있던 이슈카는 자신이 먼저 들어가 야 된다는 소리에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렇지, 이슈카. 그게 바로 키포인트야. 훌륭하게도 요점파악을 잘했구나. 자, 알았지?
너 혼자 먼저 들어가서 일행들이 있으니 들여보내 달라고 말해. 알았지?"
레파티앙은 마치 어린애에게 심부름을 시키듯이 또박또박 말을 하고는 이슈카의 머리까지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이슈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을 막는 레파티앙에 의해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레파티앙은 아예 이슈카의 손을 잡고 성전의 입구로 다가갔다. 이슈카가 마지못해 레파티앙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우물쭈물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이슈카의 어깨위에 조용히 올라타고 있던 퍼피가 큰소리로 삑삑거렸다.
이슈카는 갑자기 바로 귓가에서 삑하는 퍼피의 소리에 놀라서 순간 어깨를 움추렸다가 펴고는, 어깨 위의 퍼피를 잡아내려 손위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왜 그래? 퍼피!"
이슈카는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리저리 굴리며 연신 삐삐 울어대는 퍼피를 달래보았지만, 퍼피는 이제 이슈카의 손위에서 방방 뛰면서 삐삐거렸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 서있던 하덴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저..저게 뭐야!!"
하덴은 쏟아질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채 다물어지지 않은 입을 그대로 쩍 벌리고 있었다.
레파티앙 역시 하덴이 넋 빠진 채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고는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덴과 레파티앙이 바라본 곳은 <태양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예의 기둥입구였다. 만지면 하얀 분가루가 묻어 나올 듯 새하얗던 기둥과 기둥 위에 새겨져 있던 문자들 붉은 색을 내고 있었고, 그 주위는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물 속을 바라보듯 이제 주위는 물결치고 있었고, 급기야는 기둥에 새겨진 문자가 내는 붉은 빛까지 삼켜버릴 듯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요동치던 주위는 뭔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두어 번 크게 휘청이더니 잠잠해졌고, 그 순간 순백의 원피스에 황금실로 태양이 수놓인 케이프를 두르고 하얀 두건 위로 얇은 황금색의 서클렛을 쓴 몇 명의 여자들이 앞에 나타났다.
"성..성전의 무녀!"
<'불새'를 찾아서...49화>
"성..성전의 무녀!"
아버지를 따라 신전의 예배당에 자주 다녔던 하덴은 한번도 무녀들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신전의 신관들과 비슷한 분위기와 옷차림을 통해서 그녀들이 바로 <태양의 성전>의 무녀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신전의 신관들과는 달리 무녀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무신자들을 개화시키거나 혹은 정치등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기에 실제로 무녀들을 만난다는 것은 레파탸드에 전염병이 돌거나 재해가 생기지 않는 이상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하덴과 레파티앙은 자신들이 무녀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 온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말로만 듣던 성스러운 <태양의 성전>의 무녀들을 만나게 되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슈카 또한 신비한 현상을 동반하여 나타난 그녀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기이한 현상이 이슈카에게 놀랍기도 했지만, 이제 자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쥔 자들을 대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놀라움과는 다른 어떤 흥분감과 긴장감이 일었던 것이다.
모두가 무녀들의 등장에 놀라 당황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비틀리던 주위의 공간은 무녀들의 등장과 동시에 마치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아 조금전의 그 비틀림이 까맣게 잊혀질 정도였다.
먼저 누가 먼저 입을 열었는지 이슈카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굳이 알려고 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서있는 어떤 무녀의 질문에 대해 누군가가 대답을 했고, 이에 대한 답변인 듯 무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죄송합니다만, 성전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희생을 감내하는 자애로운 무녀라는 칭호와는 어울리지 않게 답변을 하는 무녀의 목소리는 꽤나 차갑게 느껴져 이슈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 추렸다.
"대무녀님을 뵙기 위해 먼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좀 뵐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저희에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무녀님"
정말 절박한 듯이 답한 것은 레파티앙이었다. 레파티앙은 마치 절이라도 하는 듯이 두 팔을 가슴에 댄 채 허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무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대무녀님께서 라센님의 부름을 받아 그 품에 안기셨습니다. 안됐지만, 이대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
무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슈카들은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녀의 말의 의미를 해석한 순간 그들은 귀가 멍멍해지면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졌다.
레파티앙과 하덴은 레파탸드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대무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잘 못들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 하덴은 혹시 무녀들이 자신들을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가 이내 고개를 탁탁 털어 버리며 낙심에 빠졌다.
이슈카는 다시 막막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자신이 이곳에 오게된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어쩌면 스님도 대답해 주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슈카에게 대무녀의 죽음은 역시 충격이었다.
어두운 밤을 희미하게나마 비쳐주던 달빛이 먹구름에 가려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슈카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덩어리가 식도에 꽉 막혀있는 듯했다.
"그..그런 일이, 어째서?"
레파티앙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같은 말을 계속 뇌까리며 중얼거렸다.
이들을 지켜보던 어떤 무녀들은 이런 이슈카들의 모습에 작게 흐느끼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그것은 이슈카들 못지 않게 아니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무녀의 작은 흐느낌은 앞에 서 있던 나이가 많은 무녀에 의해 금새 그쳤고, 이어 나이 많은 무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곧 해가 질 테니, 서둘러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감정이 메마른 듯한 건조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대무녀님의 부재만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의 성전 출입은 엄격하게 금해 왔습니다.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신전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가시는 길 목적지에 다하는 때까지 라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자,잠깐만요."
마지막 인사를 하며 그들을 떠나보내려 하는 무녀의 말을 듣고 이슈카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이슈카는 목에 걸린 큰 덩어리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억지로 삼켜 넣느라 불안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티,<티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듣기로, <티카>는 <성전>의 무녀님들에게만 있다고 해서 <태양의 성전>으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슈카는 침을 삼키며 잠시 말을 멈췄다.
이슈카의 돌발적인 질문에 놀란 레파티앙과 하덴은 묵묵히 이슈카의 다음말이 이어지길 기다렸고, 무녀들은 <티카>라는 말에 신경을 집중하여 이슈카를 주목하였다.
"<티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예의 메마른 목소리가 말했다.
"네. 저..전 먼 곳에서 그러니까 여기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선 여자들만이 그것도 라센에게 선택된 자들만이 <무녀의 점> 그러니까..."
이슈카는 팔목을 덮던 옷자락을 팔꿈치까지 걷어내어 팔목에 새겨진 붉은 점이 무녀에게 보일 수 있도록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티카>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불새'를 찾아서...50화>
대전. 투명한 유리창을 지나온 저녁놀이 햐얀 대전의 바닥을 다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물결 무늬가 새겨진 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서 머물던 다홍빛은 갑자기 주위의 일렁임 속에서 춤을 추더니 하얀 구체에 눌려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나타난 것은 다홍빛을 단번에 날려버린 반투명의 빛 가닥들이었다. 실타래가 엉킨 듯이 하얀 빛 가닥들이 얼기설기 엉켜 만들어낸 그 구체는 대전의 바닥에 새겨진 둥근 원 안에서부터 생겨나 점차 커지더니 마침내는 대전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빛을 뿜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이 가시고 나자, 둥근 원 안에서는 하얀 성복을 걸친 다섯 명의 무녀와 간편한 여행복을 걸친 3명의 남자가 서있었다.
"따라오십시오."
빛들이 모두 사라지고 뿌옇던 시야가 밝아오자, 짙은 갈색머리를 곱게 뒤로 넘겨 새하얀 베일로 단정하게 감싼 제레타 무녀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이슈카와 그 일행들에게 말했다.
하덴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빛의 이동에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내 작은 탄성을 질러대었고, 레파티앙은 그런 하덴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자신도 자못 놀라움에 탄성을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이동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제레타 무녀의 안내에 따라 무녀들의 원안으로 들어 온 그들은 무녀들의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뿌연 막에 둘러싸여지는 것을 보았다. 삽시간에 생성된 그 막은 둥그렇게 주위를 감싸더니 어느새 그들을 아무나 근접할 수 없는 성지, 바로 <태양의 성전>의 대전 한가운데로 데려온 것이었다.
잠시 빛의 이동에 감탄하고 있던 레파티앙과 하덴은 곧 다시 그들을 재촉하는 제레타 무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무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레타 무녀는 가슴속에서 부터 울려오는 두근거리는 박동소리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혼신의 힘으로 인내할 뿐이었다.
제레타 무녀는 에티나 무녀가 대무녀님을 시해하고 성전에서 추방되던 날에도 이처럼 가슴이 뛰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숨을 가다듬어 보았다.
'이게 정녕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제레타 무녀, 그녀는 이슈카라 불리는 소년의 팔목에 그려져 있던 <티카>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당혹감과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제레타 그녀 또한 <티카>를 지닌 무녀이기에, 이슈카의 <티카>가 진짜이며 또한 그 힘이 이 성전 내 있는 어떤 무녀보다도 강력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성무녀님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졌는지도...'
이 생각이 제레타 무녀의 뇌수에 박히자, 그녀는 이제 놀라움을 넘어선 묘한 공포감까지 느꼈다.
'어떻게...'
이슈카라는 소년의 팔목에 그려진 <티카>를 대하는 순간, 제레타 그녀뿐만이 아니라 같이 동행한 모든 무녀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제레타 무녀는 순간적으로 그 소년의 팔을 끌어당겨 볼려고 할 뻔했다.
<티카>가 무엇이던가.
라센에게 축복 받아 선택된 여자만이 지닐 수 있다는 성스러운 <무녀의 점>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이 한 사내아이의 몸에서 발견되다니, 그것도 그 어느 무녀보다도 강력한 성력을 지닌 것이 말이다.
제레타 무녀의 머릿속은 점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찌 남자아이에게서 <티카>가 나온단 말인가, 이런 일이..
정녕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제레타 무녀는 이슈카의 예쁜 외모를 떠올리며 그가 어쩌면 그저 남장을 한 여자아이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가 곧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설사 저 아이가 진짜 여자아이라 해도 <티카>를 지닌 몸으로 저 나이까지 살아있을 수가 없다. <성전>에 속하지 않는 <티카>는 선택받은 자의 증표가 아니라 성력을 도둑질하려는 자의 표식이다.
신전에서 저 아이를 그냥 두었을 리가 없어.'
제레타 무녀는 타성적으로 발길을 옮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저 아이의 말대로 저 애가 먼 곳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말은 더 믿을 수가 없다.'
제레타 무녀는 이슈카가 자신이 이곳이 아닌 먼 곳에서 왔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레파탸드 대륙은 라센에게 영원한 축복을 약속 받은 땅이다.
따라서 레파탸드 대륙이 아닌 곳에서는 <티카>를 지닌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아이는 ...'
혼잡한 생각에 휩싸여 어느새 제레타 무녀가 도착한 곳은 두 성무녀가 수도하고 있는 수심당(修心堂)이었다.
대무녀님의 별세로 최고위에 올라 <성전>의 지주를 맡게된 2대 성무녀가 <태양의 성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수도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제레타 무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에 따르는 무녀에게 문 앞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하고는 이슈카와 레파티앙 그리고 하덴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