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 거란군을 피해 개경을 나올 때 현종은 400㎞가 넘는 나주를 최종 피난처로 정하지는 않았다.
거란군이 평양성을 제쳐 둔 채 수도 개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황급히 궁궐에서 빠져나와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피난길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경기도 연천에서 지역 토호와 무인(武人)들이 현종을 잡아 가두려 했고, 경기도 양주에서는 향리(鄕吏)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충남 천안과 공주에 이르렀을 때, 호위하던 장병 5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다. 10일 흐른 후에도 승전 소식이 들리지 않자 현종 일행은 목적지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전북 여산까지 내려오자 남아 있던 장졸들마저 불만을 내뱉었다. 가는 곳마다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야전에서 숙식해야 했던 무관들이 하나둘 도망치려 했다.
간신히 그들을 달랜 현종은 전라도의 가장 큰 도시인 전주에 도착했다. 아마도 현종은 전주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곧바로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영겸(趙容謙)이 영접했다. 그런데 조영겸이 관복이 아닌 야복(野服)을 입고 나타났다. 보통 신하가 왕을 맞이할 때 무장을 해제하고 관복을 입어야 하는데, 조영겸이 칼을 차고 있었다.
그는 현종을 전주에 잡아두고서 위세를 부리려고 계획했다.
그 만큼 거란의 침입은 고려 민심을 소용돌이치게 했고, 후백제 지역이었던 전라도에 고려 왕실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날 밤 조영겸은 현종이 머무르고 있는 행궁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을 치고 현종을 겁박했다. 신하 지채문의 지략으로 간신히 전주를 빠져나온 현종은 1011년 1월13일 나주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험난한 피난길이었다.
현종은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한테서 갖은 행패와 수모를 당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하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현종의 몽진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현종과 두 왕후[3]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4]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5][6]. 이때의 몽진은 안습의 연속이다.
"적성현[7]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과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선조가 나서서 지킬 거라고 말을 하며 돌아가라고 설득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서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그들이 돌아가면서 해결되었다.
임금의 몽진에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의 태도가 이처럼 다른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현종 당시 고려는 지방 분권에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를 보더라도 통일 신라 말기에 호족들이 득세했다는 구절과 함께 조선 태종이 실시했던 사병 철폐를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 그만큼 호족들과 지방 귀족들의 득세가 심했고 조선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 신하들을 여러 차례 누른 것은 그만큼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하고 거만을 떨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 = 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현종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다.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에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이 공격해오는 위기를 맞는다.[8]
이 공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경종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당시 천추태후는 황주에 유배중)와 시녀 2명, 승지 몇 명만 남았다.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때 임신중이었다!.참고로 원정왕후는 전쟁 당시 임신중이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소생의 자식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를 보면 이때 임신한 아이는 유산했거나, 태어나기는 했는데 너무 일찍 죽었거나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하였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하였다. 그 다음엔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앗겼던 말과 안장을 되찾아왔다.
현종의 몽진은 이처럼 안습에 안습을 거듭하였고 심지어는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다. 온갖 반란에 휘말리고 고초를 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도중에 도와준 사람이 나주 백성들과 공주 절도사인 김은부 딱 1명이었다고 한다(...). 어찌나 고마워했던지 현종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딸 3명 모두를 왕비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