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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 10-12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모세는 야곱이 유다에 대하여 예언한 내용 중에 그 중심부를 기록합니다.
1. 본문 10절 첫머리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입니다.
1) 이 구절이 우리에게 모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1) 그것은 유대인들이 상습적인 악한 의도에 따라 구름으로 뒤집어 씌우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순수한 의미를 캐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기로 된 메시아가 약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즐거운 마음으로 영접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의적으로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들 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힘든 꼬불 꼬불한 길을 통해서 곁길로 들어서게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독하고 오만한 영과 함께 분쟁욕에 이끌려서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제 아무리 빛이 밝아도 암흑 속에서 연거푸 넘어집니다.
(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비록 그리스도의 영광을 신앙적인 열심에 이끌려 제시하려는 마음에서였지만 어느 정도 광적인 경향을 보여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 광적인 신자들은 어느 특정한 말씀만 너무 강조하다보니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계기만 가져오는 효과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오히려 확고하고 강력한 장애물로 포위를 해서 옴짝달싹 못하게 해놓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러한 귀감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 있는 우리들인 만큼 다투는 마음을 버려야겠습니다.
2) 우리는 이 문장의 진의를 파악해 보도록 하십시다.
(1) 먼저 우리는 성령의 참되신 의도를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성령께서는 유다 지파에게 최상의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 약속된 지복이 절정에 달하기까지 이 왕국 상태를 보존함으로써 이 백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위엄이 유지되는 것은 그 목적이 전체 백성에게 공통되는 구원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에게 약속된 복은 그것이 한 머리에서 흘러 나와야 확고할 수 있었습니다.
(2) 다음으로 우리는 야곱의 의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은 동일한 내용, 곧 한 왕이 나타날 것이요, 그 왕의 지배 아래서 이 약속된 행복(幸福)이 그 완전한 면모를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마저도 유다 지파에 속한 것이 보다 나은 복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다 더 좋고 탁월한 상태에 대한 소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완전하고 확고한 행복과 영광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3)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덧붙일 점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왕국은 메시아 강림까지 보류되고 지연되던 더 큰 은혜에 대한 서곡이자 희미한 묘사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영적 왕국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재물과 권력에 대한 생각을 펴가며 값없는 사죄, 의(義), 그리고 새 생명보다는 지상적으로 포근한 낙(樂)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메시아 시대에 예상할 수 있었던 지극한 복이 그들의 옛 왕국을 통해서 어렴풋이 나타났다는 점을 시인합니다.
2. 본문 10절 중간은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입니다.
1) 야곱은 치리자의 홀, 곧 이스라엘의 주도권이 '유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고 말합니다.
야곱은 여기서 다윗이 왕으로 임명될 시기를 두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왕국이 다윗의 가문 안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이요, 그때 가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자손을 두고 특별히 약속하신 복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 약속되는 것은 다윗 왕국 기원이 아니라 메시아 안에서 그 왕국의 절대 완성입니다. 또 여기서 '떠나간다' 는 말은 분명히 '중지한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이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야곱의 말은 지속성을 뜻합니다. 왕이 자기 보좌에 앉을 때 율법사가 그 왕의 발 사이에 앉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그 왕권이 구성된 뒤에는 더 완전한 상태가 이어질때까지 폐기되지 않을 왕국에 대한 묘사입니다.
야곱이 다윗의 장차 왕국을 이런 호칭으로 부르면서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것이 아브라함 자손을 위해서 오래 전에 예정된 행복한 영광에 대한 보증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유다 지파에게 양도하는 이 왕국은 그것이 마침내 약속된 복의 완전 상태를 향해 치달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흔한 왕국이 아니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은 이 사건이 우리에게 오류를 확증시켜 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반론을 펴는데 이것은 너무 오만한 처사입니다.
왕국이 얼핏 보기에는 그리스도의 강림시기까지 존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포로살이로 들어간 때부터 홀이 부러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것이 그의 확고한 소유가 되는가 싶더니 곧 갈기갈기 찢어지고 거의 모든 권력은 에브라임 지파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견해에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야곱의 입을 통해서 어딘지 모르게 덧 없는 왕국을 약속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르호보암이 백성 대다수를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그 홀이 무너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 앞에 그들의 무릎을 끓을 것이다" 하는 말 속에는 분명히 유다의 권위가 모든 지파 위에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통상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영원한 정부와 유다 지파를 연관시킵니다.
백성들이 추방에서 돌아왔을때 왕족의 홀 자리에 마카비시대까지 지속된 정부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 세 번째 정부 형태가 이어졌는데 그것은 왕국으로부터 선발된 70인에게 주요 심판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왕족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헤롯이 그것을 무시했을 때 그는 가까스로 사형을 면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다윗부터 그리스도 때까지 왕족의 위엄이 밝게 비췬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탁월성은 유다 지파에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성취된 셈입니다.
2) 그렇지만 이 구절을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나은 기술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명심할 점은 유다 족속은 왕국의 주도권을 누리기 전부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두머리로 세워짐으로써 그들의 위엄이 탁월하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실 모세는 다른 곳에서 백성들이 애굽에서 속량 받은 때부터 나머지 지파들이 자발적으로 유다 지파의 우위성을 인정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명심할 점은 이 위엄에 대한 보다 훌륭한 본보기가 하나님께서 다윗 안에서 시작하셨던 그 왕국 안에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분리 현상이 따랐습니다.
그 결과 유다 지파에는 적은 부분의 권위만 남습니다.
그렇지만 신령하게 거기에 수여된 권리는 무슨 수로든지 제거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왕국이 풍요함으로 가득 차고 기고만장해 할 때, 여호와의 등불이 예루살렘에 비취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 왕국 멸망을 예언하면서(겔21:25) 이 홀이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지기까지 어떻게 여호와에 의해서 보존되기로 되었는가 하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얼핏보면 유다 지파가 왕족 장식을 박탈당할 때 야곱의 예언은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언제고 이 왕국의 눈에 보이는 영광을 높이 보여 줄 의무가 하나님에게 얽매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왕좌의 회복을 예언하는 모든 약속들은 거짓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암9:11).
이런 가르침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줄곧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왕국이 항상 동일한 광채로 항상 빛날 것으로 확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은 그것이 무너지고 일그러진다 해도 그것이 후에 가서 잃었던 광채를 회복할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선지자들은 바벨론 유랑에서 귀환을 패망의 종식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왕국 회복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 성전과 제사장직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이 바벨론 해방으로부터 그리스도 강림 때까지 전 기간을 여기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관은 단 하루, 단 한 사람의 머리에서 벗겨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벗겨져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 합법적인 왕 그리스도에게 씌우기까지 벗겨져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사11:1) 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기원이 모든 왕족의 영광과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다윗이 아니라 이새를 언급하는 것은, 메시아가 호화로운 궁중이 아니라 이름 없는 개인의 허술한 오두막에서 나올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뿌리와 둥치만 남고 모두가 베어진 나무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된 것은 이 왕국의 위엄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거의 발아래 짓밟힘을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사실상 야곱이 한 말의 뜻은, 곧 하나님께서 어느 때든 교회 외적 상태에서 약속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동안 인간들을 벌하는 가운데 자기 심판을 행사하시고 자기 백성의 신앙을 단련하는 방향에서 제한되었을 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실 유다 지파가 왕좌를 세 번째 계승하는 마당에 이 왕국 대부분을 박탈당한 것은 결코 가벼운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더 가혹한 시련은 왕의 자식들이 그들의 부친 앞에서 살해되고 자신이 멀쩡한 눈을 그대로 뜬 채 바벨론으로 질질 끌려가며 온 왕가가 마침내 노예와 포로살이로 전락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가슴아픈 시련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소망의 성취를 깨닫지 못하고 슬픈 절망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의 눈으로 땅 속에 숨겨진 홀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길을 탈선할 정도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실제 지배권을 유다 지파에 두지 않는 우리 견해가 얼핏 유대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유대인들이 아직도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으로 속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뜻에서 야곱이 예언했던 지배권은 헤롯 시대 이후 중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이미 5백년 전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며 왕족의 위엄은 안티오커스의 독재가 성행하는 동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기까지 아스몬 족이 왕의 지위와 권력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4) 이렇게 야곱의 의도는 자기 후손들이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자신들의 마음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오래 지연됨으로 인하여 생기는 싫증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 앞에 그들의 일시적인 왕국을 통해서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국이 무너졌다 해서 소망을 저버릴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관련되는 변화가 구속주가 나타날 때까지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민족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노예로서 탄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에 따라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들이 계속적인 징계를 통해서 구속에 대한 소망을 불태우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동시에 이 약속을 성취시킬 민족적인 집단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천 오백 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조국으로부터 추방되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아무런 정치 형태를 갖지 못하고 있는 판에 그들은 무슨 구실로 야곱의 예언에서, 한 구속주가 자기들에게 올 것으로 상상하겠습니까?
5) 여호와께서 야곱의 아들들에게 특별히 한 부족(部族)을 바라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못하게 하시며 더 이상 쓸데없는 상상에 오도(誤導)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신 것은 그들을 신앙에 머물도록 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에서 시편에서 에브라임과 나머지 부족을 비교하면서 에브라임을 내세우면서 이 가족의 선발이 송축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곧 우리 신앙을 확증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이미 약속되셨던 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2천년 전부터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듯 그리스도의 기원이 지적되었다는 점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3. 본문 10절 끝 부분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그에게 백성들이 모여들 것이다 - 흠정역)" 입니다.
1) 여기서 야곱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한 민족에 대한 왕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권위 아래 여러 민족이 모여들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연합할 것이라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약속 혹은 순종이라는 단어는 이것이 백성들의 집합(集合)이 이루어지는 형태입니다
곧 전에는 그들이 추구하는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이 함께 하나의 공통된 우두머리에게 순종하기로 동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과장하는 뜻에서 그에게서 태어날 지파들을 가리켜 모든 "민족들" 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민족들의 모임은 훨씬 더 광범위한 것입니다. 유다의 일반적인 지배를 언급하면서는 야곱이 그들의 가족을 전체 민족 단위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왕의 경계선을 확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마치 '자기 형제들보다 탁월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이요 그에게 한가지로 어미의 아들들이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마침내 다른 민족들을 자신에게 굴복시킬 그분이 이어서 나타날 것이다' 라는 식입니다.
2)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세상 기업이 약속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여러 민족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서 전에 흩어져 있던 자들이 함께 집합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이한 증거가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곧 그들이 언약에 함께 참여하도록 소개된 것은 그들이 한 우두머리 아래서 아브라함의 본래 자손들과 한 민족을 이루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4. 본문 11-12절은
"⑪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 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⑫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입니다.
1) 야곱은 이제 유다 자손들에게 제비를 통해서 떨어질 토지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1) 그곳의 포도의 소출이 얼마나 풍성하던지 어디를 가나 포도 나무가 다른 지역의 나무 떨기 마냥 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귀란 대개 말뚝에다 붙잡아 매는 법인데 포도나무가 이처럼 천하게 쓰일 정도라는 말입니다.
(2) 유다가 포도주에 그의 옷을 빨며 그의 눈이 포도주 빛으로 붉게될 것이라는 과장법 역시 동일한 의도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 포도주의 소출이 얼마나 풍성하던지 마치 물을 쓰듯 할 것이요, 얼마나 많이 마시던지 눈이 붉게 될 정도라는 말입니다.
무절제나 탕진을 복으로 여기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에 풍성한 소출과 풍요가 묘사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남용이 허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상대로 아주 풍성하게 대하시면서도 그분의 은사를 깨끗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라는 원칙을 규정하심으로써 이 물질들이 육신의 무절제를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야곱은 합법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유다 자손들이 스스로 자제하지 않을 경우 사치와 사악하고 그릇된 남용에 흐를 정도의 풍요를 두고 극찬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풍유를 피하는 것은 본 장 처음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그 큰 신비를 가지고 장난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 탁상공론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 대한 신뢰를 증대하는 뜻에서 규정해 놓으신 땅의 구분이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배은망덕이 터무니없는 무감각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나안 땅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던 모세가 마치 자기 손으로 전답 몇 마지기를 구분하듯이, 각 구획을 정확하게 다루었다는 점을 생각하고서 경탄을 하게 됩니다.
설령 모세가 이 땅의 포도나무 존재에 대해서 전반적인 보고를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모세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던들 유다에게 풍요한 포도원을 할당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한 그의 이가 우유를 마심으로 희게될 것이라는 말로써 그에게 풍요한 초장을 할당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3) 이 모든 것은 비유로 메시야 시대에 누릴 풍요로운 은혜의 혜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누리는 목가적 행복이기도 합니다.
이런 복이 지금 우리의 것이기도 하고 또 장래와 영원토록 우리의 것입니다.
창 49: 13-21
스불론은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이 계속해서 스불론(13절), 잇사갈(14-15), 단(16-18), 갓(19), 아셀(20), 납달리(21)에 대한 예언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3절은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입니다.
1) 이 축복에는 별로 희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 하고 각자에게 거주지를 분할 하기 위해서 하늘에서부터 손을 내뻗으신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제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전에 해안지역이 스불론 지파에게 할당되고 있는데 이것은 2백년 후에 그들이 제비를 통해서 받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대를 물려주는 이 은총은, 그것이 마치 옛날 하나님께서 백성의 입양(入養)을 확고하게 하는 담보와 같은 것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통해서 한 지파 뿐 아니라 민족 전체가 그들을 위해 저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제공된 이 축복을 기민하게 포착하도록 격려를 받았어야 옳았습니다.
2) 스불론 지역에는 해변 뿐 아니라 항구도 있을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경계선을 시돈까지 긋고 있는데 그 경계선에는 넓고 큰 항구가 여럿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으로 스불론 자손들이 더욱 더 열성적으로 그 땅에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지역을 소유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들을 위해 분명히 제안되고 정해진 집이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고자 하셨습니다.
2. 본문 14-15절은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입니다.
여기에는 이 부족의 기업에 대한 언급과 그들 장래 상태에 대한 암시가 동시에 나옵니다. 잇사갈의 경우는 그의 기운 때문에 '건장한' 나귀 곧 힘이 세기에 노동을 거뜬히 견뎌내는 촌농부와 같이 이야기됩니다.
뒤에 나오는 노예 기질은 바로 그의 나태한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잇사갈 자손들이 힘은 세지만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요 따라서 등에 지워진 안장과 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당나귀처럼 노예살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중요하고 쾌적한 땅에만 족한 나머지 그들이 한적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들의 이웃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도 싫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이 굴종이 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그들의 칭찬이나 저주와 무관한 것이지만 추측컨대 그들에게 신령하게 허락된 자유를 그들이 무기력 때문에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게으름이 지탄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본문 16-17절은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 다" 입니다.
1) 먼저 16절은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심판한다'는 단어에는 그의 이름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둔-) 이라는 히브리어에는 '심판한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의 시녀가 자기에게 나아준 아들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과 권리를 변호하셨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이 이름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곧 단의 아들들이 이 민족의 통치에 있어서 결코 하찮은 몫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삼손이 전체 백성을 다스렸다 해서 통치권을 삼손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맥은 이 지파의 영속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한 말의 의미는, 단이 비록 첩(妾) 의 소생이긴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자손이 일반 정치 형태에 있어서 주도권과 명령권에 대한 몫을 받을 뿐 아니라 기수(旗手)로 임명되어 이스라엘 진영의 4분의 1을 인도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17절은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의 음흉한 성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후손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의미는 그가 진지하고 용감하게 공개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용맹스럽지 못하고 잔꾀를 부리고 올무를 이용해가면서 싸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몰래 묻어 버림으로써 말과 그 위에 탄 사람을 넘어 뜨리는 뱀과 같이 그가 비록 감히 연합 전선을 쳐서 공격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상대편 원수들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는 단의 잔꾀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인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명백히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원수들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오직 은밀한 사기수단을 써서 그들을 상대할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잘못이 아니면 최소한 그의 약점이 아닌가 합니다
4. 본문 18절은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입니다.
1) 먼저 무엇 때문에 이 거룩한 사람 야곱은 자기 강론을 계속하지 않고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터뜨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메시야 오심을 두고 예언할 때 이 구원 문제를 언급했더라면 더 어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마치 높은 망대에서 내다 보는 사람처럼 여러 가지 변화에 계속 부대낄 뿐 아니라 거의 삼켜버릴 정도로 덤벼드는 폭풍에 시달리는 자기 후손의 상태를 감지하게 되자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혈족에 속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아주 포기할 정도로 모든 부성애를 벗어버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숱한 고통, 숱한 위험, 숱한 공격 그리고 숱한 파멸로 그의 후손을 위협하는 숱한 살육들을 내다보고서 그들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 광경을 보고 인간으로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리에 대한 집념으로 온갖 시험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자기 백성의 수호자가 되어 주마고 약속하신 여호와에게 자신을 일임(一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이 아니라면 왜 그가 그의 강론 맨 처음이나 나중이 아닌 이 대목에서 자기가 여호와의 구원을 앙망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자기 신앙을 통째로 흔들 정도로 강력할 뿐 아니라 자기 마음을 삼켜 버릴 정도로 부담스러운 이 참상이 자신에게 전개되었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책은 그것을 이 방패로 막는 것 뿐 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의 자식들이 자기와 함께 동일한 확신의 연단에 이르도록 하려는 뜻에서 미리 그들을 충고하고자 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이 구원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로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품에 안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이런 점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체험되는 문제입니다.
주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정하심과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감지한 우리가 같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아래서 자신을 돌아보되 자신의 무지와 부패며 무능까지를 살피는 중에 다시 주의 성령 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주의 은혜가 임할 때 종합적이고 세밀한 적용점까지 나아갑니다.
그것은 줄기에서 바로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니라 잔가지에서 맺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구원을 소망해야 합니다.
곧 그것이 성난 바다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아니 파도에 거의 삼킨바 되더라도 그리고 앞으로 더 큰 폭풍이 불어닥칠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 구출을 생각하고서 구원을 소망해야 합니다.
추측컨대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정도로 지독한 그의 후손의 배은망덕, 위증, 그리고 모든 악을 성령으로 미리 내다보았을 때 이러한 유혹을 상대로 씨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대망 한 것은 자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 대한 구원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생명의 언약을 수많은 세기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자기가 죽고 난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에 신실하실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마치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영생을 붙잡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가 희미한 그림자 가운데서 멀리 보이는 구속을 의지하면서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면 대낮이 밝아온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동일한 괴로움 속에서 실족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5. 본문 19절은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입니다
야곱은 여기서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갓의 이름을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갓의 이름은 야곱이 레아를 통해서 많은 자손을 두게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의 부친은 이제 그의 이름에는 '다수'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당분간 그를 압박할 수많은 원수들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점을 그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것을 예언해 주는 것은 자기 후손이 자신들의 힘만 믿고 교만해 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의도하신 길이라는 사실을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낮추시기로 작정하신 고난을 이겨낼 준비를 갖추도록 하려는 뜻에서 예언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들에게 말없는 인내를 권고하면서 최종적으로 그들이 압제를 벗어날 것이요 그들을 뿌리 뽑아 버렸던 원수들을 맨 마지막에 가서야 승리할 것이라는 위로를 덧붙임으로써 지금 당장에는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단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실 그 날까지 영구히 새로운 공격으로 전투에 임해야 하는 전체 교회에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6. 본문 20절은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입니다.
아셀의 기업에 대한 예언에서는 그가 가장 훌륭한 곡식을 풍성하게 얻을 것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식량 공급이 없어도 자급자족할 것이라는 내용 밖에 다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왕의 진수' 란 그 식량이 아주 양질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혹자는 영양 많고 맛좋은 빵을 먹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아버지다운 관심에 따라서 우리 모두가 먹고 산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7. 본문 21절은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입니다.
혹자는 납달리 부족에게는 날쎈 면이 주로 예언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족이 팔의 힘보다는 웅변적이요 상냥한 말씨로 스스로를 지키고 방어할 것이라는 식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써 이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격노한 감정을 완화시키며 무슨 마음 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비슷한 방법으로 달래는 것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납달리 자손들이 팔로 방어하기보다는 인정과 상냥한 말과 평화의 기교를 통해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는 뜻에서 이 미덕을 그들에게 할당합니다 그래서 야곱께서는 사냥 중에 잡혔지만 죽음을 당하지 않고 총애를 받는 놓인 암사슴에 비유해서 예언합니다.
8.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발설된 야곱의 예언은 자기 자손들의 자질과 그들 이후에 계속되어질 그들의 모든 형편을 주의 영에 의지하여 이 예언 속에 담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말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의지인 셈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예언에는 때로는 후손들의 열성을 자극하는 내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게으름이 지탄되기도 합니다.
그 후손들의 강점이 칭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약점이 보완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여전히 자신과 함께 자기 후손 전체를 낮추어서 주의 구원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로 있습니다. 자신과 후손을 주의 선하신 손에 맡기며 약속하신 분의 품에 안기는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약속에 신실하시리라고 믿고 확신하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영생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택하여 부르신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인 셈입니다.
창 49: 22-28
요셉은
모세는 야곱이 요셉에 대해서(22-26). 베냐민에 대해서(27) 예언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또 모세는 야곱이 예언의 결론을 제시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2-24절은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입니다.
1) 본문에 '무성한 가지'를 '영광의 아들'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는데 둘 다 적합합니다.
그러나 "무성한 가지" 라는 의미를 택하는 것은, 그것이 '첨부' 또는 '증대' 를 의미하는 요셉의 이름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비유가 우물 가까이 심겨져 있어서 축축한 땅에서 물기와 영양을 빨아들여 더 빨리 자라는 나무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종합하면 요셉이 태어나서 우물 근처에 있는 나무처럼 자랄 것이요 그 결과 아름답고 크게 자라서 주위에 있는 장애물을 능히 이겨내는 나무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을 이 나무의 계속되는 비유에 비춰볼 때 부드럽고 작은 가지들이 많은 나무들로 불려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담을 넘는다' 는 표현은 넓게 가지를 뻗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게다가 야곱의 강론은 이 지파 전체를 얘기하는 데서 그치거나 미래에 대한 예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개인 역사가 그의 후손들의 그것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내용은 요셉 그 개인에게만 특수한 것이요, 또 다른 내용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지파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학대를 받았다' 는 것은 그 개인에게만 적용될 내용입니다.
3) 그런가하면 야곱이 그를 나무에 비견하면서 그의 형제들, 보디발, 그리고 그의 아내는 '활 쏘는 자들' 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뒤에 가서 그는 비유를 바꿔서 요셉을 그 활에 힘이 있으며 팔이 절대로 느슨하게 되거나 기력을 상실하지 않는 불요불굴의 활 쏘는 자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야곱은 요셉의 무적의 요새(要塞)를 두고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제 아무리 세고 무서운 공격이 오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그와 동시에 이것은 요셉이 자기 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부축을 받았기에 설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특별히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을 주로 교회 안에서 두드러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교회 안에서 가장 밝게 비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야곱께서는 요셉이 받은 그 도움은 하나님께서 이 가족을 자신이 선택하셨던 바로 그 사실에 기인했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조상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무슨 혜택이 허용되든 하나님의 값없는 언약을 그들이 명심해야 한다는 점을 지극히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마시는 물의 근원을 따져보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게으름입니다.
그와 동시에 야곱은 자기 열 자식들의 불경건하고 못된 분노를 은연중에 지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아우를 살해하려는 가운데 마치 포악한 거인들 마냥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한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께서는 또한 아우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베풀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요셉을 자기들의 원수로 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셉을 통해서 보호받는 편을 택하라는 점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릴 경우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는 시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20:7).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신뢰하는 가운데 스스로 패망의 길을 향해 치닫지 않도록 큰 경계를 가져야 마땅했습니다.
또 스스로 여호와 안에서 고귀한 승리자의 모습을 견지해야 마땅했습니다.
5) 다음에 이어지는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는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야곱이 요셉이 자기 집안 양육자와 반석, 곧 지주였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려 했다는 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소유격으로 보고 '반석의 목자'로 보는데 우리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반석'을 가족의 의미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 반석이라는 것을 우리가 품군을 시켜서 우리안에 있는 양떼를 먹이게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목자의 직무를 그의 종 요셉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으로 봅니다.
그분께서 신령한 복의 분배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 상징을 통해서 사상의 정복자와 생명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모순의 표적(히12:3)으로 세워진 가운데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경이적으로 보존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숱한 화살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 질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야곱은 요셉이 살려진 것은 그들의 양육자, 곧 목자가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말로써 그들에게 요셉의 승리를 부드럽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2. 본문 25절은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거시오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입니다.
1) 다시 야곱은 요셉이 사망에서 구출 받고 그처럼 큰 위엄에도 추켜세워진 것은 자기 근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라는 점을 좀 더 상세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순수한 선(善) 하심만을 추천하는 것은 그들이 위기를 벗어나거나 어떤 영예로운 자리에 오를 때 조금이라도 자만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말에서 하나님을 이러한 명칭으로 부름으로써 야곱께서는 다시 요셉이 받은 모든 유익을 언약과 무상(無償)의 입양(入養)의 근원으로 돌립니다.
이것은 "네가 비록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는 아버지로서 관심을 입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네가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와 맺으신 언약으로 돌리기를 바란다" 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야곱은 자기 후손들에게 경배하도록 위임하는 하나님을 모든 허구적인 우상들로부터 구별하고 있습니다.
2) 야곱께서는 요셉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요셉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의 숫자와 보존에 있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기서는 자신이 자기 조상들에게 축복 받은 바 이상으로 더욱 더 효과적으로 요셉을 축복했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 축도의 효과가 멀지 않다는 것, 곧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기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마치 말씀 만으로만 먹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약속들의 결과를 자주 연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족장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번창했던가?
해안의 모래와 하늘의 별에 비길만한 무수한 자손이 어디에 따로 있었던가?
그러므로 야곱이 그 동안 숨겨 있었던 자기 축도 결과가 마치 깊은 바다에서 떠오르듯 나타날 충분한 시기가 도착했다는 점을 공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것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더욱더 분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리에게 흘러 넘친 하나님의 은혜의 풍요는 요셉이 받고 즐긴 어떠한 축복보다 100배 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6절은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입니다.
이 말을 장소의 거리로 보려는 사람도 있고 시간의 영속성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다 잘 어울립니다.
요셉에게 주신 지복(至福)이 광범위하게 세상 저 끝 산에까지 퍼질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이 땅의 가장 확고한 기초인 영원한 산이 서 있는 동안 내내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확실하고 순수한 의미는 모세가 이 축도를 반복하는 다른 구절, 곧 이 땅의 비옥성이 산꼭대기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산들이 영원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요셉의 자손들이 가장 칭송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또한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에 있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소원이 바람에 흩날려진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입니다. 야곱의 축복이 본질적이라는 점을 이 말로써 표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요셉을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나지르; 나실인)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들 모두에 미치는 공통적인 영광 때문에 그들의 '왕관'(crown) 이었거나 요셉의 뛰어난 위엄 때문에 그들 모두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양자(兩者)의 의미는 다 타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기 본래 자리를 내놓고 자신도 유다의 홀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탁월성이 잠시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4. 본문 27절은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여기서 베냐민족이 저주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레위족의 아내를 더럽힌 죄로 그들이 무법천지의 강도마냥 정욕대로 살다가 처참한 살육을 통해서 거의 패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을 영예로운 찬사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울과 모르드개가 모두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을 복음 증거자를 살상하는 이리에서 복음의 전파자로 변화된 사도바울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거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지파 전체의 성격과 습관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이 약탈을 통해서 살아갈 것이 얘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하는 말로써 모세는 부지런한 약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5. 본문 28절은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지파라 이와같은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입니다.
1) 모세는 이 말로써 그 예언이 야곱의 자식들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그들 전체 종족에게 확대되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미 명백하게 입증한 대로 이 표현은 그들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덧붙여진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님의 천상적인 위엄을 더욱 더 뚜렷하게 감지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우리는 당시 야곱 후손의 숫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합할 경우 백 배로 불어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께서는 단지 8백 명이나 1천명이란 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과 민족들을 자기 문장 속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무모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후에 사건 자체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친히 시행하시기로 작정하셨던 바를 실제로 그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멀리 있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감각에는 아예 숨겨져 있던 이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이 예언 성취 그 자체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릴 경우에 우리 타락성에는 화가 미치고 말 것입니다.
2) 그러나 여기서 야곱이 자기 후손을 축복했다는 이야기가 별로 이성에 합치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장자의 자리에서 추방함으로써 그에 대해서 결코 유쾌하거나 행복한 것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또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꺼려하는 마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하는 말에 '어의역용'(語義逆用)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나쁜 의미' 가 아니라 '좋은 의미' 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건실하고도 아름답게 조화시킵니다.
곧 야곱이 부드럽고 아버지의 마음가짐에서 자기 자식들을 계도한 일시적인 처벌은 이 축도의 근거가 되는 은혜의 언약을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오점을 말살함으로써 그들을 그들이 떨어졌던 본래 영광의 자리에 회복시켜 놓습니다.
그 결과 최소한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족장들이 되도록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날마다 자기 백성을 단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처벌은 비록 그것이 수치와 창피의 계기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처벌한 것을 통해서 그들의 행복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을 경우에 그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악에 빠지며 숨겨져 있는 독(毒)이 마침내 온 전신을 파먹는 부패를 가져올 위험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라는 상징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육신이 얼마나 제 멋대로 방자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범죄를 보고도 못 본 척 하실 경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 나서 회개할 경우에, 이 결과는 처음에 느꼈던 저주를 흡수해 버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 두시기 보다는 우리를 처벌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더 복을 더해 주신다는 점을 입증해 줍니다.
3) 여기서 우리는 질병, 가난, 기근, 헐벗음, 그리고 사망 그 자체도 그것들이 우리 구원을 조장하는 한 당연히 신령한 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들의 저주스러운 성격이 뒤바뀐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요, 피를 뽑는 것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보다 더 건강에 유익이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라는 말을 써서 야곱이 자식들의 안녕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축복을 선언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넣어 주신 것을 선언했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사건 자체가 이 모든 예언이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입증하는 그대로입니다.
4) 이것은 오늘날에도 꼭 같습니다.
즉 그것은 오늘날에도 로마서 8장 전체에서 보고 우리가 체험하는 그대로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8:28-30절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강조되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로마서 8:28-30절에 이어서 디모데후서 3:12-17절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리고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 머리를 숙이고 그분께 기도하십시다.
창 49: 29-33
야곱의 장례에 관하여
이 부분에서 모세는 야곱이 자기 별세 후에 매장될 땅에 대하여 유언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막벨라 밭에 있는 굴" 에 대하여는 24장을 참조하여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은 역시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15:16) 장차 이스라엘 민족의 분깃이 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1. 본문 29-32절은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 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 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 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입니다.
야곱께서 그의 아들 요셉에게 특별히 '자신의 유해(遺骸)를 가나안 땅에 묻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창47:27-31).
모세는 여기서 동일한 명령이 그의 모든 자식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반복합니다(29-32).
이것은 모두 한 마음으로 그 나라에 가서 상호 협조하는 가운데 이 임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분께서 왜 그의 무덤 문제를 그처럼 양심의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이 거룩한 사람의 본을 부당하게 미신(迷信)의 선례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물론 그분 곧 야곱께서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은 그곳에 묻히는 것이 하늘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생전에 불안한 소유권에 의해서 가졌던 그 땅을 죽어서라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것은 일생을 다 마친 그 분에게 개인적으로 무슨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그의 살아남은 자식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됨으로써 그들이 그것을 열망하게 하려는 데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의 마음이 이 땅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늘 상속자가 아니었던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생각하시고 그처럼 그의 자손들에게 풍성하게 나오실 것을 도무지 소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명령에 무게를 더하는 뜻에서 이 모든 일은 자기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자기 조상들에게 그처럼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곧 야곱께서는 "나의 조부 아브라함께서 이 무덤을 자신과 자기 가문을 위해 사 놓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선친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법을 거룩하게 지켜왔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것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상징이 우리들 가운데 계속되도록 해야 한다" 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본문 33절은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입니다.
1) 이 표현은 구태의연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 표현을 통해서 이 거룩한 사람의 평온한 임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야곱이 이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에서 이 연로한 성도는 자기 유해(遺骸)처리에 대한 지침을 내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마치 건장한 사람이 가볍게 잠을 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게 임종을 맞이했다는 식으로 얘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야곱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이처럼 용감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예언자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있어서 그분에게는 정말 경이로울 만큼 담대하고 침착한 마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은 그분의 자식들에게 그의 예언에 대한 확신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 나타났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려움 없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선한 양심의 결과' 라는 점입니다.
사망은 그 자체가 아찔한 것인 만큼 악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되고 있다는 낌새를 차리는 순간 크나큰 고통으로 번민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한 양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평화롭고 침착하게 무덤에 가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마련될 저 영원한 처소를 생각하게 될 경우, 우리는 이 무너져 가는 장막을 떠나는 것을 두고 가슴 아파 하지 않을 것입니다.
2) 특별히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여기 이른바 "그 발을 침상에 거두었다" 는 말은 앉아서 축복하던 야곱이 이제는 누워서 그 발을 침대에 모두었다는 뜻입니다.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고 하니 그의 별세는 극히 순조로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호흡을 거두는 직전까지 앉아서 분명한 정신으로 그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그 뒤에 즉시 자연스럽게 별세하였습니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는 말은 그 열조(烈祖)들이 묻히운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방금 숨진 것을 가리켜 무덤에 돌아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와 같은 표현은 선조들의 묘지에 묻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신31:16, 왕상2:10, 16:28, 왕하21:18).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세(來世)에 들어감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