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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윤 목사
먼저 <가짜중>이라는 제목의 유머를 소개하고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배가 고픈 어떤 사람이 구걸하자니 자존심이 상하여 가짜 중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동냥을 하지 말고 시주를 받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중들이 입는 중복을 입고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불경을 모르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다라, 가나다라, 가나다라....” 였습니다. 어느 한 집에 도착해서 “가나다라, 가나다라, 가나다라....”를 박복해서 외쳤습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시주를 하려고 쌀을 퍼주려다가 그 사람이 가짜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쌀 되박을 들고 말했습니다. “주나 봐라, 주나 봐라, 주나 봐라...” 그랬더니 그 가짜 중이 다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나 봐라, 가나 봐라, 가나 봐라...” 옆집에 사는 여자가 놀라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잘해 봐라, 잘해 봐라, 잘해 봐라....” 다른 중이 지나가다가 이 모습을 모고 목탁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왠만하면 주지 그래, 왠만하면 주지 그래, 왠만하면 주지 그래...”
오늘 이 시간에는 ‘선행’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됩니다>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제일 처음 1월 둘째 주에는 “사랑하면 됩니다”, 셋째 주에는 “기뻐하면 됩니다” 이어서 넷째 주와 다섯째 주에는 각각 “화평케 하면 됩니다” “인내하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2월 첫째 주에는 “은혜 받으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고, 지난주에는 “자비를 베풀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선을 행하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선을 행하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 중 여섯 번째로 ‘양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양선이란 원어로 "아가 도쉬네"인데 NIV 영어성경에서는 ‘goodness’ 즉 ‘선행’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양선’은 지난 주일에 살펴본 성령의 열매 ‘자비’와 비슷합니다만,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양선은 자비보다 좀 더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자비를 ‘고통이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양선은 좀 더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불쌍하다는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선을 베푸는 것을 ‘양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양선, 선행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선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여러분,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머니 말씀>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5가지를 적어놓은 글이었습니다. 5위는 “좀 더 자거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랍니다. 4위는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이고, 3위는 “내가 얼른 죽어야, 니들이 편할 텐데”입니다. 2위는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위는 무엇일까요? 시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1위가 무엇일까요? “아가야! 난 널 내 딸처럼 항상 생각한단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뽑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앞뒤를 살펴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나중에는 다 해결될 것이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가족들과 갈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기시고 피 흘리셔야만 인류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만,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또 마가복음 2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중풍병자에게 하셨습니다. 꼼짝달싹도 못하고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이 말씀도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1절도 이해하기 힘든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물 위에 던져라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떡이 없어 굶고 있는 친한 이웃에게 주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탁에 던지라는 것도 아니고, 물 위에 던지라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뜻 들으면 떡을 던져서 물고기 밥을 주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나일강은 비가 내리는 우기철만 되면 홍수가 나서 강 하류가 범람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홍수가 나일강 하류를 기름지게 만들었습니다. 상류로부터 많은 흙이 떠 내려와 쌓이면서 하류에 있는 땅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홍수가 나면 그해에 반드시 풍년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인해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면 애굽 사람들은 강물에 여러 가지 씨앗을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뿌린 씨앗들이 범람한 물을 따라 내려가, 나일강 하류에 있는 Delta(삼각주)에 도착하여 뿌리를 내리다 보니 나중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전도서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이었지만, 애굽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홍수 때 강물에 씨앗을 흘러 보내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강물에 떡을 흘러 보내면 언젠가는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이집트 선교 때도 보았지만, 중동지방에서 먹는 떡은 둥근 형태로서 물에 적셔도 빨리 풀어지거나 쉽게 녹아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 상류에 있는 사람이 떡을 떠내려 보내면 강 하류 사람들이 그것을 건져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류에서 떡을 건져 먹은 사람이 언젠가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을 행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분명히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라비아 박바드의 어느 왕에게 한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왕자가 8살쯤 됐을 때, 강에 나갔다가 그만 거센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습니다. 왕은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며칠 동안 군대를 동원해서 강 하류를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왕은 ‘왕자의 시체라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겠노라’고 전국에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왕자에 대한 소식은 없었습니다. 왕은 크게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난 후 뜻밖에 왕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도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왕자가 강 하류의 어느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왕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왕은 왕자에게 어떻게 살아났고, 무엇을 먹고 목숨을 부지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강물에 휩쓸려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강 한복판에 우뚝 솟은 한 바위에 걸려 그 바위에 올라가서 목숨을 구했는데, 강 상류에서 한 가죽 주머니가 떠내려 오더랍니다. 그래서 그 주머니를 건져서 열어보았더니 그 속에 빵이 들어 있더랍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 왕자는 그 빵을 먹고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왕은 수소문한 끝에, 강 상류에 살고 있는 ‘모하메트 벤핫산’이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가 아침 저녁으로 가죽에 빵을 담아 강 하류로 떠내려 보낸 것입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선행을 하라. 그러면 그대가 어느 날 반드시 보상을 받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속담이 맞는지를 한번 시험해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이 속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대로 그는 임금님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도서 1장 2절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전도서는 허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혜, 권력, 재물, 쾌락, 명예, 등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것들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헛된 가운데 헛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행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시중에 이런 유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은 후 지옥을 가게 된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좋은 일을 하나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행한 좋은 일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예, 제가 길을 걸어가다가 500원 짜리 동전을 주워서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옆에 있던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 500원 주어서 지옥으로 보내라.“
통계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이 한 해에 기부한 금액이 1,900억 불이나 된다고 합니다. 계산을 해보면 매년 1인당 평균 760불을 기부금으로 내는 셈입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의 98%가 매년 어떤 형태로든지 이 기부행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기부하고 있습니까?
1년에 남을 위해 얼마나 시간을 내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4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상 할 수 없으면 괜찮지만,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아테네의 어느 극장에서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노인 한 분이 늦게 도착해서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렸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이 자리를 찾아 앉기를 기다릴 뿐,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외국인석에서 스파르타인이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아테네인들이 손뼉을 치며 스파르타인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니까 아테네인은 선이 어떤 것인지 알기만 했을 뿐 실천하지 않았던데 반해, 스파르타인은 직접 실천함으로 선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기자는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아이티 돕기를 하는 것은 선을 행하기 위해 매우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지난 달 중순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20만 명 이상 죽고 900만 명의 전체인구의 1/3가량인 300만 명이 다치고 집을 잃는 등, 아이티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별히 2세 이하 30만의 아동들이 절대 영양부족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24만 명의 임산부들이 영양공급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형제와 집을 잃고 지진으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먹을 것은 커녕 마실 물조차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심한 지진으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있는 아이티 돕기에 많이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한대로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심으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물 위에 떡을 떠내려 보낸 모하메트 벤핫산처럼, 우리가 선을 베풀면 언젠가는 그것이 우리에게 되돌아올 줄로 믿습니다.
나누어 주어라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두 번째 선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1절에서 ‘물 위에 던진다’는 말은 불특정 다수를 지칭합니다. 누가 그것을 주워서 취할지 모르지만, 물 위에 먹을 것을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득을 볼지 모르지만, 멀리 던져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절에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는 말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떡이 없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이웃에 사는 어려운 사람에게, 교회 공동체 안에 돈이 없어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예측이 불가능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할지, 어떤 극심한 고통을 겪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험을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험회사를 배불리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돈이 남아서 쓸데가 없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 보험을 듭니다.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일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 유학생보험에 가입을 합니다. 갑작스런 질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건강보험과 생명보험을 듭니다. 혹시 화재나 도둑이 들어 어려움을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재보험을 듭니다. 언제 타게 될지, 언제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면서도 사람들은 적게는 1년에 몇십 불부터 많게는 몇 천불씩 보험을 듭니다. 사람들이 보험을 드는 이유는 내일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무슨 재앙이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보험을 드는 것처럼, 미리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임하게 될지도 모르는 재앙에 대비해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에 처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맹장에 걸린 한 가난한 소년을 어머니가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을 수 있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돈도 없으면서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을 수술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병원에 사정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의사가 불쌍히 여겨 수술을 해서 그 아이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6.25 사변이 터졌습니다. 공산당들이 쳐들어와서 관료들과 부자 등 소위 지주계급들을 잡아 산속으로 끌고 가서 잔인하게 총살시켰습니다. 당시 소년에게 맹장 수술을 해준 의사도 끌려갔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총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자기에게 수술 받았던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오더니 총살시키려는 공산당원의 바지를 붙잡고 살려 달라고 이렇게 호소하더랍니다.
“저 분은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 편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게 되었는데, 돈도 받지 않고 수술을 해서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결국 그 의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잠언 19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야훼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빚을 지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가두게 되지만, 선을 심으면 반드시 선을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누어주면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일산 한소망교회 유영모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날 유영모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야단을 치면서 공무원 시험이나 치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정이 너무 어려운 것을 동네 어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목사님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등, 무려 16~17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공부를 했고 지금은 한소망교회를 담임하면서 훌륭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유목사님은 자신이 똑똑하고 잘나서 그런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고향에 갔다가 고향교회를 섬기시는 어느 연세 드신 권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째로, 너희 할머니나 어머니가 거지들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다. 너희 집안 어른들은 배고픈 거지들이 오면 항상 밥상을 차려주어 먹고 가게 했단다. 둘째로, 시골교회에 많은 목사님들이 거쳐 갔는데, 너의 집안 어른들이 항상 그 목사님들을 잘 섬겼다. 호박 하나를 따도 목사님께 먼저, 송편 하나를 빚어도 목사님께 먼저 드리고, 평생 동안 목사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적이 없었단다. 셋째로 너의 어머니는 평생 동안 새벽기도 시간에 너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 열매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것이다.” 시골교회의 노권사님이 지나가는 투로 하신 말씀이었지만, 유영모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의 계시 같이 마음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 동안 자기가 잘 나서 공부도 하고, 박사학위도 받고, 목회도 하게 된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집안 어른들이 그 동안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가 뿌린 것을 자손이 거두게 됩니다. 부모님이 뿌린 씨앗을 우리가 지금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뿌리고 있는 씨앗을 우리 자손들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 37편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선을 베푸는 의인의 후손은 결코 구걸하며 살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선을 베푸는 사람이 선을 거두고, 선을 베푸는 가문이 선을 거두고, 선을 베푸는 교회가 선을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양선은 성령의 열매요, 더 나아가 축복의 열쇄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봉사와 섬김과 나눔을 통해 여러분들의 떡을 물 위에 많이 던지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주위에 있는 이웃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여러분들의 떡을 많이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삶 속에서 양선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을 베풀 때, 놀라운 은혜와 복이 여러분들 삶 가운데 더 나아가 여러분들의 후손들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