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6-21
히스기야의 실수를 뛰어넘자 / 김철한 목사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떠내려가는 먹을 것을 찾은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달려들어 그 죽은 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물살이 빨라지고 폭포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오는데도 이 독수리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고 썩은 고기를 붙잡고 있었다. 마침내 폭포에 다다른 독수리는 하늘 높이 치솟으려 했지만 발톱이 썩은 고기에 박혀있어 함께 폭포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앞일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면 이 독수리는 하늘로 날아올랐을 텐데 먹이 감에 정신이 팔려 배부름을 탐하다 변을 당했다.
신앙인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독수리다. 언제 어디서든지 신앙인의 눈은 앞을 보며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독수리처럼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죽어 버리는 무능한 신앙인도 있다.
히스기야 그는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신앙의 왕이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을 치리한 왕인데,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낸 왕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서 여러 왕들의 전후에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왕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주어진 계명을 잘 지켜낸 선한 왕이었다. 그의 신앙의 삶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함으로 죽을 병을 이기고 건짐을 받은 치유의 이야기이다. 얼마나 주님을 신실히 의지하는 자이면 예언자의 예언을 바꿀 수 있을 만한 기도의 응답을 받았겠는가? 유언을 남기고 죽어야 할 왕 히스기야는 15년 더 살도록 응답 받는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위해 신유의 증거로 해 그림자 십도를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
그런데 이 신앙의 사람.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히스기야의 실수가 무엇인가? 그이 실수가 히스기야로 하여금 구원과 축복을 못 받게 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이다.
1. 교만에서 오는 방심의 실수를 저지른 왕이다. (왕하20:17∼18)
히스기야 왕은 병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때 바벨론 왕의 경축 사령단이 부로닥발라단의 예물과 편지를 가지고 왕에게 나와 왔을 때, 히스기야는 자기의 보물고와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보였다.
왕하20:13에 보면, 왕궁과 나라 안에 있는 것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을 만큼 공개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의 교만이며 방심이었다. 당장 히스기야를 위협하는 앗수르를 하나님이 물리쳐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간섭이었는데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나라의 도성이 지켜지고 국가의 안위도 지켜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바벨론 사령단에게 보여준 모든 것들은 국방의 방범이 하나님보다 소유하고 있는 병기나 군수품이나 물질에 있음을 보여주는 방심의 실수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왕하20:17에 예언을 한다. "왕의 열조가 오늘날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불행한 예언이 떨어졌다. 이처럼 신앙인들은 히스기야처럼 실수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신앙으로 사는 사람을 사랑한데서 축복을 부어주고, 창고에, 통장에 가득가득 눌러서 담기게 하실 때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축복주신 것을 의지하고 물질이 나를 지켜 주실 것처럼 의지한다. 이것이 교만이고 나태한 방심이다. 신앙인들이 도둑질을 하고 우상숭배를 해서 실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주신 것 그 자체를 의지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언제나 주시는 분 하나님, 도우시는 분 하나님, 지켜주시는 분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바벨론의 사자들이 국가 기반을 다 알고 가서 훗날 전쟁의 전략으로 써 먹게 될지 히스기야는 정녕 몰랐단 말인가? 고도의 정보 수집 능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왕이 왕궁의 무기나 금은 보화를 의지하지 않았다면 정보는 세어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시33: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엇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도울 힘이 없는 사람, 도울 힘이 없는 물질을 과시하는 실수를 하지 말자. 지금까지 보이는 것만 의지하려했다면 실수를 뛰어넘자.
2. 자기 안전을 이유로 삶의 고민을 하지 않는 왕이다. (왕하20:19)
히스기야가 방심함으로 저지른 실수에 따른 대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벨론 나라에 모든 귀중한 보화를 빼앗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 비극 앞에서 히스기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즉, 기도하는 영적 도전 정신을 갖지 않는다.
왕하20: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하고" 라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히스기야의 두 면을 본다. 하나는 왕하20:11∼11까지의 말씀으로 병을 얻을 때에 모습이다. 얼마나 그는 울었는가 얼마나 그는 매달렸는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절망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가? 그러나 여기 왕하20:19에서는 조상의 것을 다 빼앗긴다고 했는데도 고민을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옳다고 받아드린다. 그러면 신앙이 성장했기 때문에 만사를 받아드리는 것인가? 아니다.
왕하20:19 하반절을 보면,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한다. 즉 이 말씀은 왕의 마음속에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잘 조명해 준다. 그것은 자기 안전만 보장된다면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고 전심으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개인주의적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식을 가지고 후세대를 생각하는 신앙인이라기 보다 자기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영적 고민을 삭제한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실수도 이와 비슷하다. 내게서 한 다리만 건너간 일이면 기도제목으로 삼지 않는다. 히스기야가 자기 혼자 안전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역사의 비극이 기다린다는 예언 앞에서 가슴 아파했다면 어떠했을까?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눈물 흘리던 때처럼 눈물 흘리고 기도의 영적 도전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우리들도 나 자신의 안전이 보장 되면 그것을 이유로 태만하고 삶의 비극을 외면하고 도전하지 않는데 이런 실수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인은 도전을 해야 한다. 문제 앞에, 예언 앞에, 미래적 운명 앞에 나만 배부르다고 너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신앙의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함께 하는 신앙 정신이 없이 나만 잘되고 안전하면 된다는 신앙 정신으로 산다면 이런 멋없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신앙의 매력은 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도록 하는 도전 정신에 있다. 그러므로 고민을 해야 한다. 세상 근심이 아니라 거룩한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배부르다 나는 잘 산다. 그러나 나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지어야지, 영혼을 건져내야지, 속회를 살펴야지 등 도전하는 자 되어야 한다.
3. 미래의 비젼을 소유하지 아니한 왕이다. (왕하20:19下)
신앙의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히스기야는 그 종교개혁의 완성을 후세대가 이어가도록 해야하는 미래의 비젼이 없었다. 그는 나이가 젊었지만 생각은 늙어버렸다. 민족의 미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날 동안의 태평한 삶에 자기를 맡기는 현실 안주자였다. 종교개혁자의 정신을 상실해 버린 미래가 없는 지도자였다.
왕하21:1을 보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12살 때 왕이 되었으니 죽을 병들었던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음을 받은지 3년후에 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즉, 므낫세란 히스기야의 자식은 결국 히스기야 후세를 이어갈 왕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운명은 포로로 잡혀가야 되는 비극의 왕자 인생이다. 결국 므낫세는 악행하는 왕으로 선지자를 죽이고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의 왕이었지만 포로로 잡혀가는 아들의 장래 운명에 대해 하나님께 '안됩니다' 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는 히스기야는 아들에 대해 무관심한 왕이었다. 아니, 미래의 비젼을 소유하지 아니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미래를 향한 비젼을 지녀야 한다. 자라나는 자녀와 청소년, 청년들에게 무관심하고 교회가 제대로 굴러가는 줄 생각하는 것은 히스기야의 실수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여 교회가 부흥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식대에 가서 우리의 자식들이 신앙의 고유성을 계승하지 않고 악행과 불신앙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시행착오이며 실수인가? 비젼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 실수하지 아니하는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이 되려면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1998년『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갤럽에 의뢰하여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청년기에 해당하는 18∼29세의 비종교인들을 향해 "종교를 가진다면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가?" 라는 설문을 가지고 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중 36.9%는 불교라고 했고, 35.4%는 천주교, 27.7%는 기독교로 응답되었다. 청년들이 세상으로 나가고 교회를 떠나가고 신앙을 가진다 하더라도, 기독교로 나오겠다가 3대 종파 가운데 3위가 되었다 하는 것은 미래가 밝지 않다는 의미이다.
어느 대학생의 고백을 읽어보면,
"친구가 다니는 교회 대학부에 몇 달 다녀 본적이 있다. 예배 후에 4∼5명이 조별로 모여 성경공부를 한 것 같다. 지금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선명하게 남는 것은 조별 성경공부를 할 때 배가 처지도록 잘 먹었다는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이 대학생은 성경도 배워보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교회가 의미를 주지 아니한 채 개 떼처럼 먹으로 몰려 다니는 기억을 비판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기르는 일에 전 교회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한, 공연문화에 걸맞는 공간이 제공되야 하는데, 공간을 제공하기는커녕 교회당 안에서조차 드라마 한 번 공연 못하는 율법적 교회가 많다. 맛있는 먹이 감에 정신이 팔려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 위기의 독수리처럼 교회 안에 재정이 넘치고 장년들이 넘치고, 교회수가 많아진다고 앞일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모든 것이 태평하고 안전하고 축복의 창고에 좋은 보화들이 가득하다고 안주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께로 나아오게 하기 위해 우리의 기도 다시 시작하자.
오목천교회는 히스기야가 되서는 안된다. 나만의 신앙을 뛰어넘어서 역사와 민족, 교회를 바라보자. 다른 사람의 비극이나 슬픔에 대해 고민을 하자. 그리고 청년세대를 키우는 비젼의 소유자가 되자.
만약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면...
"왜 교회를 다시 지으려 합니까?"
그것은 안주하는 실수, 태평하게 지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왜 전도폭발훈련과 베델성서를 시작하십니까?"
그것은 도전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왜 교회학교를 부흥시키려고 합니까?"
그것은 신앙을 계승해야 하는 비젼(Vision) 때문이다.
한마디로 목회하는 이유를 말한다면, 예배하고 가르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이유를 말한다면 히스기야의 실수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우리는 죄를 지으므로 실수하는 것이 아니다. 나 이외의 문제에 무관심한 실수를 깨뜨리고 올바른 지도력을 가진 성도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