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2: 9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 - 히 2: 10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
히 2: 9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 -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잠깐 동안'(브라퀴 티)를 7절과 다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1]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인하여'(디아)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 빌 2: 8-9 -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Morris, Lane).
2]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신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휘페르 판토스)에서 '판토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 '판토스'는 중성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Morris, Bruce, Robinson).
두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카리티 데우)는 몇몇 사본에 '코리스 데우'(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 Jerome, Ambrose).
* 마 27: 46 -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막 15: 34 -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 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 15, Lane, Morris).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당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9 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이 필요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히 2: 10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1]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만물이 인하고'(디 혼 타판타)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만물이 말미암은'(디 후 타 판타)는 '만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2]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폴로스 휘우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이 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3]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본 절의 '주'(아르케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온전케 하심'(털레이오사이)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 출 29: 9, 33 - 9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33 그들은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 쓰는 것을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이라.
* 레 8: 33 - 위임식은 이레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끝나는 날까지 이레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 레 16: 32 -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자기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 레 21: 10 -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 민 3: 3 -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 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 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미이다(Bruce).
왜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나?
이 말은 예수님이 본래 온전하신 분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구속 사역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온전한 구원자가 되셔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구원과 영생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