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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4: 7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6 ) - 고후 4: 10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2] 질그릇에 가졌으니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가령 사 64: 8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도공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질그릇이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 사 64: 8 -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애 4: 2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고 있다.
* 애 4: 2 -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딤후 2: 20-21에는 금 그릇이건, 은 그릇이건, 나무 그릇이건, 질그릇이건 간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 딤후 2: 20-21 –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런 것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질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 없는 것으로 비유되어서 바울 자신과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이다.
3]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1) 복음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생로병사는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문제는 어떤 인간도 비켜 갈 수 없는 현실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종교라는 이름이나 철학이라는 이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해보려고 하였다.
불교는 이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여 자기가 도를 닦아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철학자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는 없어도 스스로 죽을 수는 있다고 하면서 자살하는 철학자들도 많다.
과학자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섰다. 최근 줄기세포 복제의 문제를 보면 결국 생로병사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지금 우리가 보는 고린도후서 4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육체의 후패, 즉 낡고 늙어간다. 그리고 죽음과 그 후에 심판까지 말씀하고 있다. 이런 연약함을 오늘 말씀에 보면 질그릇이라고 한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고 약한 그릇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 흙이란 땅의 티끌이다. 인간이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 시 90: 1-12 –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말씀이 인간의 실존이다. 범죄 하여 생명나무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이다. 땅의 티끌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일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자신의 날을 계수함을 아는 것이 지혜다.
시편 90편에 나타난 인간의 실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질그릇이다. 그러면 이 질그릇인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질그릇 그대로 있는지? 아니면 질그릇이 보배로 바뀌는지 그 문제를 생각해보자.
(3)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4: 18 을 보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경의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 늘 우리의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 복을 받았다고 할 때에 그 복도 무엇을 복이라고 합니까? 부자가 되었다. 건강해졌다. 소원이 이루어졌다. 성공하였다는 것들을 복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이런 내용이기에 지금도 예수를 믿고서 문제를 해결 받고 복 받으라고 하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고 병이 들게 되면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다고 여긴다. 과연 그러합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한다.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싫다고 버린 십자가의 예수를 말한다. 6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바로 우리의 보배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의 목표다. 그 예수님이 보배이며 나머지는 그 보배를 빛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라도 그 겉모습은 질그릇 그대로다. 예수를 믿는 순간 다른 성질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부터 점점 더 나아지는 질그릇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보라!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것을 과시하려 한다. 그런 본능이 있는데 설교시간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세뇌를 받으니 성경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무엇이 가려져 있습니까? 수건이 가려져 있다.
예수를 믿어도 질그릇이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연약하고 더 깨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능력이 질그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고후 4: 8 욱여쌈을 당하여도 -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바울은 전도 사역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낙심치 않고 잘 감당했음을 증거 한다.
그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부서지지 않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았다.
1]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욱여쌈을 당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리보메노이'(*)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말해준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언급된 대로 성도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즉 '능력의 심히 큰 것'의 원천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에 질그릇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관념적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사역에서 전인격적으로 경험한 데서 기인한다.
* 고후 6: 3-10 –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전 4: 9-13 –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 고전 15: 30-31 –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실로 바울에게 있어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는 것이 그가 가장 강해질 수있는 비결이었다.
* 고후 1: 8-9 –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2]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 은유적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이다.
그 의미는 대적들이 포위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것이다(Tasker).
고후 4: 9 박해를 받아도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것을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Barrett).
본 절과 앞 절을(8절) 통해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어떠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의 영이 있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3: 17).
1]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이 육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에 반대하여 육이 당하는 고통을 사실화하고 도리어 육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2]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롬 8: 35-39 –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가 이 세상에서 모든 어려움을 다 당한다. 심지어 날마다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끊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능력이다. 이 능력은 질그릇에서 나오지 않는다.
고후 4: 10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본 절과 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그는 항상 주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듯이 고난의 길을 갔지만,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그를 통해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다.
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혹자는 바울이 '죽음'에 관해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헬라어 '다나토스'(*)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네크로신'(*)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단순한 죽음 외에 '죽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Barrett).
그렇다면 본문은 성도로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경험했고 그의 실존에는 이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 고후 6: 5 -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 고전 4: 11 -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 갈 6: 17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2]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시가 나타나고 있다.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
* 롬 8: 36 -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골 1: 24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표징이다.
* 엡 3: 13 -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