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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9:1-11:36) 11:25-36
(9) 비밀, 하나님의 언약적신실성(11:25-32)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25)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27)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30)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본문개관
로마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1:25-32절은 바울이 11:11절부터 특별히 논증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이방인들의 구원,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종국적 회복 문제에 대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울이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과 관련하여 논증해 온 모든 것의 결론에 해당된다. 로마서 11:25-32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25-26절 상반 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는 비밀의 내용, 곧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 상태, 이방인 선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적 구원과의 연관성에 관하여 말한다. 둘째 부분은 26절 하반 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여러 본문(사 59:20; 시 14:7; 사 27:9)들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담고 있는 이 비밀은 이미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어졌던 것임을 밝힌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28-3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적신실성과 긍휼하심에 근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의 연관성을 말하고 있다.
본문주해
①하나님의 비밀
25-26절 상반 절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이방인 신자들에게(11:20-24) 그들을 교만하지 않도록 하려는 “비밀”이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그의 서신에서 “비밀”이란 단어를 인간의 사색적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계시 내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지만(롬 16:25-26절), 로마서 11:25-26절 상반 절에서는 이 “비밀”을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분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완악하여져 있다. 둘째, 이스라엘의 일부분이 완악하여져 있는 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일시적인 것이다. 셋째,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 왔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체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비밀”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완악하여졌다는 것은 바울이 9장 초두에서부터 11:24절까지 계속해서 제기해 왔던 것이다. 바울은 9장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표현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위에 의존함으로써 의에 이르지 못한 일(9:32),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복종치 아니한 일(10:3), 전파되는 구원의 복음에 불순종한 일(10:21) -을 사용하였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여 바울은 11:2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가 완악하여 진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인 이 ‘완악함’ 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 그 의미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의 불신앙을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접붙임을 당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이것이 바로 비밀이 가리키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비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완악하여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구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한 이방인의 구원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올 때까지 한시적이라는 사실이 또한 비밀에 해당된다.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를 가리키고 있는지 본문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구원하기로 택하신 자들 전체를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방인들의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의존하고 있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완악해진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방인들이 충만한 수와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11:18). 이방인들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가 너를(이스라엘) 민족들(이방인들)에게 빛이 되게 할 것이요, 너로 하여금 나의 구원을 땅 끝까지 가져가게 할 것이다”(사 49:6)에 예시된바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가?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구원자의 오심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긴 하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의 문제에 관하여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선교와 구원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장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 왔을 때 “이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이스라엘”을 이미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일부 완악하여진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구원받게 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소위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신적 수동태 동사 “구원받게 될 것이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구원이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 의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어떻게, 왜,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11:26b-32절에서 설명한다.
②시온에서 오는 구원자
26b-27절에 나타나 있는 구약 인용은 이사야 59:20-21절, 시편 14:7절, 그리고 이사야 27:9절의 혼합 인용이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는 이사야 59:20-21절로부터 왔고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과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는 이사야 27:9절로부터 왔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구약 인용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11:26b에서 말하고 있는 “시온으로부터 오는 구원자”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27a절에서 말하고 있는 “나로부터 오는 언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는 문제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사 59:20-21)에 따르면 “구원자”는 명백하게 하나님을 가리킨다. 소위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취급하신다고 보는 두 언약 주창자들은 본문에 그리스도의 이름대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구원자가 사용되고 있는 점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계없이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유대 문헌 가운데서 이사야 59:20절의 구원자가 메시아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점과 바울이 이미 이사야 본문을 성취의 시대에서 그리스도론적으로 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그가 데살로니가전서 1:10절과 로마서 5:9절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부르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볼 때, 여기 “구원자”는 하나님보다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325)
물론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올 때 어떻게 유대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핍박자였던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써 바울의 회심과 소명이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 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영접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민족 전체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구원도 이방인들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326)
③나의 언약
‘나의 언약’은 일반적으로 예레미야 31:33절에 나타나 있는 “새 언약“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언약 앞에 ‘새로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있는 점과 ‘나의’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구원약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쨌든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제거하심으로써,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영접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언약을 지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
④하나님의 긍휼하심
바울은 28-32절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28절에서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편으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에 원수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의 백성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자들임을 밝힌다. 29절에서 바울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고 하면서, 비록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아브라함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창 12:1-2; 신 7:6-7; 겔 20:5; 사 41: 8-10; 시 135:4)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30-31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방인들의 구원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어떻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힌다.
바울은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났다면,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방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비록 현재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순종하고 있지만, 이방인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불순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패러다임이 된다. 이와 더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은, 동시에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의 패러다임이 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궁극적 구원의 확실성을 찾을 수 없다. 이리하여 바울은 32절에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오히려 그들에게 대한 자신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으신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불순종을 통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승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긍휼하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승리는 사실상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승리이기도 하다.
(9) 하나님에 대한 송영(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36).
본문개관
찬송가 가사처럼 일종의 시적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11:33-36절은 유대인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로마서 9-11장의 총 결론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로마서 1-11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결론적인 문단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문제는 물론 인류전체의 구원문제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과 그의 판단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다. 33-36절의 짧은 4절로 구성되어 있는 이 문단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33절은 시적 형태의 서론부분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3중적 속성의 깊이, 곧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은 실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둘째 부분에 해당하는 34-35절은 하나님의 3중적 속성에 대한 3중적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구원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의 경이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36절은 하나님의 전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본문주해
①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성
바울은 33-36절의 문단을 하나님의 3중적 속성의 깊이에 대한 경탄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의 깊이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람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의 깊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다. 여기 ‘하나님의 지혜’는 구원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서 1:18-3:20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은 물론 유대인들도 다 같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죽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적 죽음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은 물론 죄의 영향 아래 있었던 전 피조세계를 자신과 다시 화목하게 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세상의 지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특한 지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6절 이하에서 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켜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이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여기 하나님의 지식은 거의 하나님의 지혜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에 근거한다면, 하나님의 지식은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범죄 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중에 일부를 은혜 가운데서 구원할 것을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범죄 자리에 내버려두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왜 하나님이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그대로 버려두셨는가에 관하여 사람 중 그 누구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식을 헤아릴 수 없다.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이어 언급하고 있는 두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깊이’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판단을 추적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판단’은 로마서 2:2절이나 5:5절의 경우에서처럼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인 심판을 뜻하기보다도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결정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는 토기장이처럼, 똑같이 죄인인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은혜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정을 미리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추적하여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의 깊이’이다. 여기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다음 그것을 실행하는 행동의 방법을 지칭한다.(참고, 창 18:19; 출 33:13; 신 26:17; 시 81:13; 103:7; 잠 8:22; 겔 18:25-29) 인류의 구원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과 그 방법은 불신자이든, 신자이든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알리기를 원하시는 부분에 국한되어 알 뿐 그 밖의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0-11절에서 이와 관련하여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일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②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바울은 33절에서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의 깊이를 말한 다음 34-35절에서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를 제기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이사야 40:13절의 자유로운 인용으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 질문은 욥기 41:3절 상반 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바울의 구약인용은 때때로 칠십인 역이든 히브리 성경역이든 정확하게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구약의 본문을 자유롭게 변형시키기도 한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왜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은 누구보다도 구약본문의 깊은 의미를 바로 알고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유롭게 인용한 이사야 40:13절과 욥기 41:3절이 다 같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곧 피조물인 유한된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의 깊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의 구원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을 하나님의 영 이외에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34-35절에 나타나고 있는 세 가지 수사학적 질문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관하여 그 어떤 조언이나 도움, 선물도 드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망상이다. 구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며 인간의 권한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방법을 오직 감사함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36절은 33-35절의 논리적 귀결로서 창조, 타락과 구속, 그리고 완성의 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 캘빈으로 하여금 회심과 그의 『기독교 강요』저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36절은 동시에 종교개혁의 최종적인 원리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의 성경적 원리를 제공하였다. 세 가지 전치사 구, 곧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그에게로’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의 근원자, 모든 구원역사의 근원자, 구원역사의 수행자이며, 그리고 구원역사의 목적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의 모든 구원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구원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여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처럼 로마서는 단순히 인간중심의 구원론을 뛰어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중심의 우주적 구원론을 강조한다. 구원역사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제1문의 질문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처럼,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36절에 언급된 “아멘”은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로마서의 후반에 해당하는 12장 이하에 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