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누가 묵어도 묵을 떡인디
거무칙칙한 색깔의 뻘밭이 차창 밖으로 한정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뻘밭은 판판하게손질되어 있었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두렁들이 아귀를 맞춰가며 뻘밭을 반듯반듯한 네모로 나눠놓고 있었다. 그것은 소금밭이었다. 질펀하게 편쳐진 소금밭 가운데로 뚫린 길가로는큰 허위대에 비해 실한 느낌이 없는 건물들이 등성등성 서 있었다. 판자로 벽을 둘러치고양철로 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들은 소금창고였다. 드넓은 소금밭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었고, 거무충추한 색의 옷을 입은 허우대 큰 건물들의 모습이 소금밭은한층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마른 갈대줄기 하나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소금밭 여기저기에서 땅커풀이 얼부풀어오르며 들뜬 얼음장들이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인태의 아내 목포댁은 창밖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 냉기 가득한 소금밭에 하염없는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저눔에 소금밭이 똑 내 가심이로시... 남편 일로 조바심나는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망연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해 있다는기별을 받고 허둥지둥 기차를 탄 길이었다. 병원에 있다는 것뿐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알 수가 없었다. 광양경찰서로 전근을 떠난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조마조마하게 살아오다가 기어코 그런 기별을 받고 말았다. "거그넌 전쟁터시. 허고, 무신 수럴 써서라도 금방 빠져나을 것잉게. 나가 누군디, 최익숭이눔이고, 김사용이눔이고 기엉코 원수를 갚고 말 것이다." 이사를 할 필요 없는 분명한 이유와 함께 남편은 이를 갈며 혼자몸으로 벌료를 떠났었다.
목포댁은 또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에 대한 마음졸임과 경찰가족으로서의 세상살이가 자아내는 한숨이었다. 비록 계급이 낮았을망정 남편이 경찰 노릇을 제맛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일정 때였다고 그녀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경찰 안사람 노릇도 역시 일정 때가 제철이었다 싶은 것이다. 일본 순사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위세를 누렸던 것은 그만두더라도 그때는 지금처럼 빨갱이라는 것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위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도 좌익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쪽에서잡아내려고 눈에 불을 켰었다. 그것들을 잡아내기만 하면 특별 상금을 받거나 승진이 되었다. 그 위세당당했던 꿈 같은 시절은 해방이 되자마자 뒤엎어져 정반대의 암흑 천지로 바뀌고 말았다.
"워메 큰 탈나부렀네. 대일본제국이 요리 허망허게 망해뿔다니. 참말로 알다가도 몰를 일이시. 그나저나 인자 워째야 쓸꼬. 큰 탈나부렀어, 큰 달." 해방이 되던 그날 사색이 된 남편은 마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이런 말을 중얼대며 어지러울 지경으로 방안을 맴돌았던 것이다. "봇씨요. 방안만 요리 뺑뺑이럴 돌지 말고, 우리도 항꾼에 일본으로 델다도라도 주임님헌테 매달리씨요." 그녀는 머리를 짜낸다고 짜내 그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즈그 발들에떨어진 불똥도 못 꺼 환장헐 판이디 우리 겉은 것덜얼 일본으로 델꼬가야?" 남편이 얼굴을찡그려붙였다. "다 즈그덜 위해서 순사질 헌 것인디, 몰른 척이사 헐랍디여." "아, 시끄러!
왜눔 순사덜이 조선눔 순사덜얼 사람으로 보는지 알어?" 남편은 냅다 소리를 질러대며 몸을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소스라쳤다. '왜눔'이라는 소리가 남편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 입을 나불거렸다간 남편의 주먹이 날아들 것만 같아 그녀는 입을다물고 말았다.
남편은 안절부절 못한 채 이틀을 더 보내고 결국 피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자우리 시상은 깨끔허니 끝장나부렀네. 집언 아부님헌테 맽게놓고 자넨 새끼덜 델꼬 친정으로뜨소." "당신도 항꾼에 친정으로 피헙씨다." "여러 말 말어. 목포는 더 큰 불구뎅이여." "가먼 워디로 가시게라?" "무담시 아는 것이 병이시. 나가 알아서 피헐 것잉게 자낸 새끼덜이나 잘 간수혀." 남편은 핫바지저고리를 걸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남편의 추레한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문닫혀졌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댓 명의 청년들이 들이닥친 것은 다음날이었다. 그들은 집을 에워싸듯이 하고 남편을찾았고,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우르르 마루로 뛰어올라 집안을 뒤지기시작했다. "요런 백여시 겉은 새끼가 금세 냄새맡고 째부렀구마." "금메 말이여, 우리가 한발 늦어뿌렀는갑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허, 요것 잠 봐라. 해방된 지가 원젠디 요것덜언 이적지 일장기럴 신주 모시디기 떡허니 걸어놓고 있단 말이여." "아니, 머시여!" 이런 외침에 그녀의 가슴은 그만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너무 경황없이 며칠을 보내느라고 일장기 떼내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저눔에 여펜네도 남가눔허고 똑겉은 악질 반역자시." "하먼, 일심동체 아녀?" "쩌리 비켜나그라, 때레뿌식어뿔랑께."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했고, 그녀는 두 귀를 막으며 몸을 조여뜨렸다.
그녀는 반항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 못한 채 청년들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자치대라고 했고, 그들의 입에서는 친일파 처단, 민족반역자 처단이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남편이 어디로 도망했는가를, 왜 일장기를 그대로 붙여놓고 있었는가를, 그녀는 이틀 동안 계속 추궁당했다. 그들은 겁을 주거나 소리를 지를 뿐 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풀려나기는 했지만 남편의 말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자치대의명령이었다. 물론 시아버지도 끌려가 조사를 받고 나왔다. "젊은 사람덜이 참말로 무던혀.
일본 것덜 같았음사 폴세 사지가 녹아내렜을 것인디..." 자치대에서 풀려나온 시아버지가가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한 혼잣말이었다. 잔뜩 기죽어버린 시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녀는 남편이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팔월의 늦더위가 더 더워질 지경으로 세상은 온통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바깥세상과는 달리 썰렁한 냉기로 차 있었다. 그녀는 그 냉기에 갇혀서비로소 해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외로움,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스스로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 그것이 그녀가 깨달은 해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과 자신이 해방 전에 저지른 죄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먼, 해방이 되얐응께." "금메, 해방이 되얏단 말시." "음마, 해방이 되얐는디도?" "어허, 해방이 되얐당께로."
사람들은 앞으로의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들을 분분하게 했고, 옳다는 말끝에도, 의심스런말끝에도, 아니라는 말끝에도 해방을 갖다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표 안 내는 속에서 해방을얼마나 고대해왔으며, 이제 해방을 얼마나 반기고 있는지를 그녀는 날이 갈수록 알아가고있었다. 그 확인이 되풀이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가는 고적감에 파묻혀갔다.
그 고적감은 앞으로의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무서움이었다. "죄럴 졌으면죽은 디끼 죄딱음험시로 사는 것이 도리다. 몸안 상허고 요만헌 것도 다 인심이 후헌 덕잉께." 시아버지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걸음이 늦었던 어느 순사는 도망을 치다가 잡혀 몰매를 맞고 병원으로 실려갔고, 어떤 순사보는 숨어 있다가 잡혀 '저는 왜놈의 앞잡이 민족반역자입니다' 하는 글을 쓴 커다란 종이
를 가슴과 드에 붙이고 이틀 동안 읍내를 돌기도 했다. 해방된 세상은 나날이 달라져갔다.
자치대가 치안대로 바뀌고, 곧 새 나라가 설 것이라고 했다. 그 나라는 너나 없이 공평하게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나라가 서게 되면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해서 소작인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고, 그 다음으로 할 일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법으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들은 시아버지가 가져왔고, 신경을 곤두세운 그녀는 그런 사실들을낱낱이 머릿속에 담았다. 새 나라를 세울 준비를 하는 것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도, 서울에 있는 그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여운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법으로 다스린다는 그 새 나라가 하나도 반가울 것이 없는 그녀의 앞에 신변의 위협은 현실로 나타났다. 치안대 사람들이 하루거리로 집에 나타나고는 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좌익농민조합을 한다고 해서 남편이 잡아서 징역보낸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주로 그런 사람들이 치안대에서 힘을 쓴다고도 했다. 그녀는 앞길이 암담하게 막혀버렸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과 치안대라는 것의 위세는 일정 때의 총독부나 경찰의 위세만큼이나 등등해 보였다. 순사질을 한 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관공서에서 일했거나 일본과 친하게 지낸 부자나 지주들까지도 그 위세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이 틀림없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고, 어서 새 나라 세우기를 고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세라는 것은수많은 사람들의 그런 믿음과 떠받듦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고것은 사람 심으로는 위치케 혀볼 수 웂는, 하늘이 갤치는 순리요. 공은 딱은 대로 가고 죄는 진 대로 가드라고, 인자우리 겉은 인종들이야 그 순리가 시키는 대로 허기로 맘묵고 참허니 기둘리는 도리밖에 또무신 방도가 있거냐. 발싸심헌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시아버지의 기운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금방 새 나라를 세울 것 같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기세는 미쳐 한 달이 가지 못하고 꺾이기 시작했다. 남한땅을 해방시킨 미국이 자리를 잡고 군정을 실시하게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고 치안대고 힘을 잃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 판세의 돌변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치안대를 해산시킨 미군정은 치안대 대신 전처럼 경찰대를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에일정 때의 경험자들을 그대로 써준다는 것이었다. 옛날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경찰 노릇을 하게 해준다는 그 말을 몇번이고 들어도 그녀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인자 우리 겉은 사람 살판 생겼당께요. 싸게싸게 남 순사님헌테 연락 취하씨요." 앞뒤로종이를 붙이고 읍내를 돌았다는 그 순사보를 지낸 사람이 처음 찾아와 한 말이었다. "와따매, 아짐시넌 걱정도 팔자요. 미국은 일본맹키로 공산주의다 빨갱이다 허는 것에는 딱 정떨어져 하는 나란께로 좌익 못자리판인 치안대 때레뿌식어뿔고 경찰을 새로 맹금시고 우리럴불러들이는 것 아니겄소. 왜 우리럴 불러들이느냐, 일정 때부텀 좌익얼 때레잡은 것이 우리덜이고, 지끔도 누구누구가 좌익인지 그 연줄을 훤히 아는 것이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폐일언허고, 나럴보고, 남 순사님도 싸게 나오라고 허씨요." 순사보가 아니라 정식으로 경찰이된 그 사람이 두번째로 찾아와 한 말이었다. "금메, 하도 요상시럽게 왔다리갔다리허는 시상이라 논께..." 시아버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허, 워쩔라고 요리도 땁땁허니 말귀럴 못 알아묵고 이러요. 요러고 늦장부리고 있다가는 남 순사님 밥통 딴눔이 채가뿔 것이요. 인자 알아서 허씨요." 그 사람이 세번째 찾아와 내던지고 간 말이었다.
남편이 집을 찾아든 것은 밤중이 아닌 대낮이었다. 남편은 그 동안의 경위 같은 것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산중에 너무 깊이 백혔든 것이 손해나 안 보게 될란지 몰르겄다." 남편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며 흘리듯 말했다. 남편의 서둘러대는 기세 앞에서 그녀는, 경찰을 다시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해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기는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남편은 다음날로 경찰이 되었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라 지서주임이 된 것이다. 캄캄한 밤이 환한 대낮으로 뒤바뀐 그 느닷없음 앞에서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은 인생의 가망없음에 대하여 참담해했던 만큼 그 느닷없는 변화는 현실감이 없었고믿어지지도 않았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뒤바뀜을 '천지개벽'이라고 한 시아버지의 말이 합당한 것만 같았다. 짦은 기간 동안에 두 번의 천지개벽을 겪은 그녀로서는 세번째의천지개벽을 겪게 될까 무서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미국이 워떤 나란지 당신이 몰릉께로 고런 새 날아가는 소리럴 허는 겨. 미국이 워떤 나라냐! 대일본제국을 이겨뿐 나라다이것이여. 을매나 힘이 씨먼 대일본제국을 이겨뿌렀겄냐 그 말이여. 대일본제국을 이겨뿐 미국은 대대미국인 것이고, 그 힘으로 따지자먼 아무리 에누리혀서 잡아도 미국 힘이 일본 힘보담 두 배는 된다 그것이여. 고것이 무신 말인고 허먼, 대일본제국이 이 땅에서 사십 년 가차이 버텼응께로 힘이 두 배인 대대미국인은 팔십 년은 버틸 것이다 그 말이시. 우리 남은평생을 따지자먼 사십 년으로도 족헌디, 그 두배나 되는 팔십 년이 미국 덕에 우리 편이 된셈인디 무신 근심 걱정 헐 것이 있냐 그런 말이시. 알아묵겄는가, 못 알아묵겄는가?" "그리만 됨사 무신 근심이고 걱정 허겄소마는... 하여튼지 간에 미국은 우리럴 불구뎅이서 살려내준 은인이고 보살이시요." 그녀는 다소 안도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제, 그 은혜 갚자먼 일정 때보담 더 열성으로 빨갱이럴 때레잡아야제." "봇씨요, 아무리 미국이 씨다고 허더 시상이 원제 워치케 돌변헐란지 몰릉께 눈치 봐감서 인심 안 잃게 요령지게 허씨요." "자네가 철든 소리럴 허니라고 허는 갑는디, 고것은 하나만 알았제 둘언 몰르고허는 소리시. 인자 판이 뒤바뀐 이상 미국이 시키지 안허드락도 좌익이고 공상당언 씨럴 몰리고 뿌리럴 뽑아야혀, 또 그눔덜헌테 판얼 뺏길 수는 웂는 일잉께로. 앞으로 판이란 것이니가 죽냐, 나가 죽냐 허는 판이란 것을 알아야 써." 그녀는 가슴에 냉기가 왈칵 끼쳐드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너나 없이 공평하게 사는 새 나라를 고대하던 세상의 활기와 술렁거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근디 말이요... 만일에, 만일에 미국이 채럴 잡고 나서지 않었으먼 시상 판세가 워찌 되었을께라?"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입을 놀렸다. "자네가요분 일얼 당허등마 부쩍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쓰게 됐네그랴. 자네 생각으로는 워찌됐을 것 같은가?" 남편은 묘한 웃음을 입에 물고 되물었다. "음마, 나 무식헌 거 귀경허고잡아 이러신다요 시방?"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화난 시늉을 해보였다. "미국이... 미국이...
손을 안 댔으먼 판이 워찌 됐을 것이냐... 그것 참 고약허고도 중요헌 문젠디, 미국이 이땅에손얼 안 댔음사 쏘련도 손얼 안 댔을 것이고, 그리 되었으면... 필시 여운형의 뜻대로 나라가섰겠제." 남편의 말은 더디었는데 그만큼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이 년 가까이 지서주임 노릇을 열성스럽게 해냈다. 일정 때와 달라진 것은 언제나권총을 차고 다녔고, 잠자리에서도 그것은 머리맡에 놓여졌다. 처음에는 그 사람 죽이는 구멍 뚫린 쇠뭉치가 징그럽고도 무서웠는데 차츰차츰 친밀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것이 머리맡에 놓여야만 그녀도 편한 잠을 잘 수 있게끔 되었다. 좌우익으로엇갈린 시국은 그만큼 뒤숭숭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남편의 열성은 마침내 경찰서장 승진을가져왔고, 벌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임시에 여운형이라는 사람이 암살을 당했다. 그 일로세상은 시끌시끌했다. 장례식을 보려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모난 돌이 채이드라고, 너무 똑똑헌 것이 죄여." 남편의 한마디였다.
이런 반란사건을 당하기 전까지의 벌교 생활은 순탄했었다. 좌익을 검거하는 일로 언제나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건 으레 하는 일로 만성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당한 것이 반란사건이었다. "당장 떠야 써. 맨몸으로 당장 뜨라니께." 남편은 방에 들어오지도않고 이 한마디를 외치듯 하고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고메, 세분째 천지개벽이 오고 말았구나! 그녀는 시아버지와 함께 허둥지둥 세 아이들을 수습하고, 돈만 챙겨가지고 무작정 집을 나서야 했다. 우선 아는 얼굴이 많은 벌교를 벗어나야 했다. 걷고 타고 하면서 목포 친정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남편한테서 돌아오라는 기별을 받고보름이 넘어 다시 벌교를 찾아든 그녀는 자신들의 피신이 얼마나 아슬아슬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경찰 노릇 그만두라는 말은 남편 앞에 내놓지 못했다. 그 말은 속에서만 맴도는 안타까움이었다. 수없이 간 떨어져내리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생각하면 권력이고 권세고 다 필요없게만 느껴졌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한시름 놓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또 느닷없이 전근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영전이 아니라 좌천이었다. 남편은전혀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좌천당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반란군들이 득실거린다는 광양으로 밀려가고, 결국 몸을 상해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애가타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로 입원이나마 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기차가 완전히 멎기도 전에 뛰어내린 목표댁은 곧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몸을바로잡았다. 기차를 향해 눈을 흘겨댄 그녀는 부산하게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남인태는 왼쪽어깨에 총상을 입어 수술을 받고 가료중이었다. 목표댁은 붕대에 감긴 남편의 어깨를 보자마자 눈물바람부터 했다.
"넘새시럽게, 인자 그만 울소."
남인태는 아내를 질벅였다. 그는 아내나 식구들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사투리를 썼다. 공무중에 표준말을 흉내내야 하는 고역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였다.
"내빌라두씨요, 내 설움도 풀어야제라."
목포댁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저 사람덜에 비허자먼 나넌 다친 것도 아닌디, 자네 설움꺼지 풀자리가 아니시. 눈물 딲소."
남인택의 음성은 낮았지만 그 어조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만한 눈치 못 챌 목포댁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남편 옆으로는 두 사람이 더 누워 있었다. 그들의몸에 감긴 붕대만으로도 그들이 남편보다 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쏟았던 것은 남편의 부상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안도해서였다.
"의사 말이 워쩝디여? 혹시..."
목포댁은 그 다음 말은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빙신이 될란지 안 될란지는 치료가 끝나봐야 알 일이제." 남인태는 무뚝뚝하게 말해놓고나서, 자신의 말이 재수없게 여겨져, "빙신이야 되겄는가" 하고 토를 달았다.
"요리 다치기꺼지 헜는디, 그 공얼 생각혀서 워디 존 디로 안 보내줄께라?"
목포댁은 남편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쓰잘데웂는 소리 말소."
남인태는 퉁명스럽게 말해버렸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마누라의 그 머리 돌아가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의 퉁명스러움은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생긴 것이었다.
남인태는 처음부터 이번 부상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려고 궁리하고 있었다. 광양이라는 데는 경찰복을 입고는 한시도 맘놓고 살 수가 없는 따이었다. 반란군에다 민간빨갱이들까지 합세해서 군경과 밀고 밀치는 공방전이 거의 매일이다 싶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 위험지대에 부임해서 그가 줄기차게 매달린 생각은 첫째, 안전도모, 둘째 조기전출이었다. 안전도모를 위해서는 서장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축소해가며 군인이나 서북청년단을 앞세웠고,그 축소시킨 권한마저도 부하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안전한 장소인 경찰서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살이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벌어진 긴급상황 앞에서는 도저히 발뺌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을에 병력을 투입시키고 난 다음인데 그 반대편 마을에 또 반란군이 출현한 것이다. 그 내키지 않은 야간출동에서 몸을 사린다고 사렸는데 그만 어깨에 총을 맞고 말았다. 그는 수술을 받고서야 그부상을 전출에 이용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생명에는 아무 지장 없는 부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보다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돌아가서는안될 일이었다. 그 난장판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그곳이 난장판인 것은전선도 없고 작전도 없는 싸움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과의 전투를 따지기 전에 아군의 조직이라는 것부터가 난장판이었다. 군인에, 경찰에, 서북청년단에, 지방청년단까지 얽히고 설켜 모두 제멋대로 설쳐대는 바람에 좌충우돌이었고, 거기다가 어느 조직이고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형편이어서 총질을 해대는 것에 비해 토벌효과는 그리 좋지가 않았다. 그런상황 속에서 민간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속에 반란군들은 날이면 날마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언제 어떻게 개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서북청년단원들은 민간인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군인들하고도잦은 충돌을 일이켰다. 경찰이나 군인이 무색할 정도로 투철한 그들의 반공의식은 국책 수행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그 도가 지나쳐서 판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인태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그들을 십분 이용해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의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인태는 부상을 이용할 수 있는 묘안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기별을 보낸 것은 병간호를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미리 돈을 장만시키기 위함이었다.
제각의 대문 앞 오망한 공지에는 햇살이 따스하게 괴어 있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부는날이라도 크고 두꺼운 대문이 바람을 막아주는 탓으로 햇빛만 반짝 비치면 거기는 안방보다따스했다. 그래서 길남이와 종남이는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고, 회정리 이구 아이들이 놀러오기도 했다.
"성, 영 심들제?"
쪼그리고앉은 종남이고 입술까지 흘러내린 누런 코를 훌쩍 들이켜며 물었다. 그러나 고개를 잔뜩 웅크려박은 채 손을 놀리고 있는 길남이한테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종남이로서도 자기 때문에 애를 쓰고 있는 형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마디 한 것뿐 무슨 대꾸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길남이는 동생의 썰매를 만드느라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틀째 만들고 있는 썰매는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양쪽 받침 밑에 쇠줄을 붙이는 것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쇠줄붙이기가 썰매를 만드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기도 했다. 썰매가 잘 나가고 못 나가고는 그 쇠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우선 쇠줄이 좋아야 했고, 좋은 쇠줄을 요동하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여야 했다. 썰매에 달 최고의 쇠줄로는 유리창문 밑에 붙은 쇠줄을 당할 것이 없었다. 그 쇠줄은 굵고 곧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못을 박는 구멍까지 뚫려 있어서 요동못하게 붙이기도 쉬었다. 그러나 그건 최고인 만큼 구하기도 힘들었다. 철물점에 가면 수북하게 쌓여 있지만 돈이 없었고, 관공서나 학교의 유리창문 밑에 달린 것은군침만 돌게 하는 먹지 못하는 떡이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서부터 썰매를 만들어달라고 졸라대는 동생 종남이의 성화를 견디다못해 길남이는 회정리 이구의 동철이를 찾아갔었다.
"잉, 창문철로? 고런 것 구허기야 눠 떡묵기제. 근디, 을매 줄래?"
쇠줄을 창문철로라고 말한 동철이는 그의 버릇대로 대뜸 대가부터 따지고 들었다. 그가'을매 줄래?' 한 것은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것을 얼마나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동
철이는 아이들이 탐낼 만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그는 아무 때나 아이들 앞에 내밀어 보이고는 했다. 그건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그의 말대로 손님을 끄는 일이었다.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아이가 나서면 동철이는 꼭 장터의 장수처럼 먹을것을 놓고 흥정을 했다. 그가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는 것은 먹을것이면 무엇이거나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과 그들이 내미는 먹을것이 잘 맞지 않아 흥정이 어려운 경우는 더러 있어도 동철이가 먹을것 자체를 가리는 경우는 없었다. 그가 제일 높은 갚을 쳐주는 것은 인절미나시루떡 같은 것이었고, 죽은 쥐만 빼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고 일단 물건값이 되었다. 동철이가 그렇게 먹을것을 밝히는 것은 끼니를 굶도록 가난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물건들이 끝도 없이 어디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아이들은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서로가 다 알고 있었다. 동철이가 어디선가 훔쳐온다는 것을.
"고구마 두 개."
길남이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말을 기운차게 내놓았다.
"고구마 두 개?" 동철이는 되묻고는, "한쪽에 고구마 한 개씩이라 고것이제." 눈을 말똥하니 뜬 채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고구마도 크고 작은 놈이 있는디, 을매나 허제?" 고구마 크기를 당장 확인하자는 듯 고개를 쑥 뽑아늘였다.
"요만허다."
길남이는 동철이 코앞에다가 주먹을 불쑥 내밀어보였다.
"주먹뎅이만 하다아..." 동철이는 꼭 어른 시늉을 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잠시 생각허는 듯하더니, "쪼오타, 길남이 니니께 특별허니 싸게 혀줘야제." 하며 눈을 찡끗해보였다.
"원제 찾으로 올끄나?"
길남이도 그의 눈짓을 친숙하게 받으며 물었다.
"낼 아칙에."
"알았어, 낼 만내."
"근디 길남아!"
길남이는 돌아서다 말고 몸을 되돌렸다.
"니, 쇠줄만 갖고 썰매 못 맹근다는 것 알지야? 판자때기도 있어야 허고, 못도 있어야 허고, 톱, 장도리, 별것별것 다 있어야는디, 니 다 있냐?"
길남이는 동철이를 멍허니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듣고보니 판자만 있었지 다른 것들은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니, 못도 썰매작대기에 박을 대못, 판자에 박을 중못, 쇠줄에 박을 새끼못, 못만 해도 천층만층인 것 아냐?"
길남이는 어느새 동철이 앞으로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길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하고 나이는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동철이한테서는 언제나 어른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도 두 살을 더 먹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길남이는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판자는 있고, 톱허고 장도리넌 워치케든 빌릴 것잉께, 못값은 을매냐?"
"야, 그리 복잡허니 따지지 말고 니 판자럴 나헌테 갖고 오니라. 나가 썰매럴 삐까번쩍허게 맹글어줄 팅께, 몰아때레서 고구마 열 개만 내라. 으쩌냐?"
동철이는 눈을 반질반질 빛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으며 길남이는 잠시 생각했다. 고구마가 열 개면, 이 오는 십, 동생하고 둘이서 점심을 닷새나 굶어야 될 판이었다. 자신은 굶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배고픈 귀신 들린 동생이 참아낼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구나 썰매를가지려고 그런 짓까지 한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생판 난리가 나게 될 것이다. 닷새씩이나 점심을 쫄쫄이 굶어대며 동생이 비밀을 지키리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생을 위해 자기 혼자 열흘씩이나 점심을 굶기는 싫었다.
"야, 멀 그리 생각허냐!"
동철이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힝, 니가 내 맘 홀릴라고? 길남이는 마음을다잡으며 앞뒤를 차근차근 따져나갔다. 닳아 없어지는 것 아니니까 톱이나 장도리는 빌려쓰면 될 것이고, 못이 아무리 여러 종류가 필요하다 해도 쇠줄 두 개에 고구마가 두 개였으니까 못은 고구마 한 개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고구마 일곱 개가 순전히 수고비인 셈이었다.
씨펄눔, 순 도적눔 심뽀시!
"야, 워째 눈깔이 괭이눈깔로 변해뿌냐?"
동철이가 약간 켕기는 기색으로 길남이의 눈치를 살폈다. 길남이는 속으로 욕한 것이 틀긴 것만 같아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아녀, 아무리 생각혀봐도 고구마 열 개럴 구할 수가 웂어서 속이 상헌 것이여."
길남이는 얼떨결에 둘러대고 있었다.
"그려, 니도 느그 아부지 웂이 무당집에 붙어사는 신센께로."
동철이는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겼다. 그가 기분이 잡치거나 속이 상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그럴 때 그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불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글먼 워치케 헐래?"
동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못이라도 바꿔먹자는 속셈이었다.
"못이나 구해도라."
"고구마 두 개"
"얼래 , 쇠줄이 고구마 두 개였는디 그까진 못이 워째 두 개여?"
"못이 한 가지람사 고구마 한 개로 되겄지만 못이 세 가지다 이것이여, 세 가지."
동철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길남이의 눈앞에다 디밀었다. 못이 아무리 세 종류라 해도고구마 두 개를 내놓기는 억울했다. 한 개로 하자고 말을 할까 하다가 길남이는 그냥 돌아섰다.
"야, 길남아! 말얼 끝내고 가야제."
동철이가 다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말허먼 멋 혀. 나넌 한 개먼 쓰겄는디, 니가 안 깎아줄 것인디."
길남이는 배짱에다가 오기까지 부리고 있는 참이었다.
"화아, 시발눔아, 말얼 허여 속얼 알제." 동철이는 하늘로 고개를 젖히며 헛웃음을 치고는,"글먼 요렇게 하자. 무신 말이냐 하먼, 썰매 작대기에 대못얼 박아야 허는디, 그 대못얼 박을라먼 그냥 박는 것이 아니라 못대가리 쪽이 작대기 속으로 들어가게 못얼 꺼꿀로 박아야허는 것 니도 알지야? 그려, 그러자먼 못대가리럴 장도리로 뚜둘겨 웂애야 허고, 꺼꿀로 박고나먼 못 끝이 에지라져 또 뽀쭉허니 갈아야 하고, 고것이 을매나 심드는 일이냐. 나가 그썰매작대기럴 맹글어줄팅께 고것꺼지 합쳐서 고구마 두 개럴 내라."
길남이는 빠르게 생각을 했다. 별로 손해볼 것 없는 일이다 싶었다. 썰매작대기를 만드는것도 큰 일거리였던 것이다.
"좋아, 근디, 되나케나 맹글먼 안되야!"
길남이는 동철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부지게 말했다.
"걱정 말고, 고구마 요만 헌 것으로 네 개란 것 잊어뿔지나 말어라. 썰매작대기는 특별허니 맹글어줄 팅께."
동철이는 주먹을 들어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길남이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근디, 니가 썰매럴 잘 맹글 자신이 있냐?"
"하먼, 공작숙제는 나가 우리 반에서 질이여."
"햐아, 장난이고 맹그는 공작숙제허고 사람이 올라타고 달리는 썰매하고 똑겉은 줄 아냐?
야가 시방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 허네."
동철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봉창 뚜딜기는 소린지 아닌지는 두고 봐."
길남이는 오기를 부리며 돌아섰다. 고구마가 아깝기는 했지만 썰매를 손수 만들어보고도싶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공작품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재미가 있었다. 특히 공작품을 만드는 손재주는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길남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철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동철이가 먹을것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면서도 동생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가난한것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잠시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영영 죽어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방죽에서 총살당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철다리 옆 부둣가 식당에서 물일을 해주고 얻어오는 국밥 한 그릇으로는 세 동생들을 먹여살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장남인자기가 동생들 배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철이는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돌아온 아이였다. 그가 귀환동포로 불리는 회정리 이구에 사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는 거기에 살면서도 귀환동포라는 말을 끔찍하게 듣기 싫어했다. 그는 몹시 화가 날 때면, 특히동생들에게 일본 욕을 퍼부어댔다. 그는 언제나 주머니에 조그만 칼을 넣고 다녔다. 아이들이 아무리 졸라도 그것만은 먹을것과 바꾸지 않았다. 접었다 폈다 하는 그 칼의 손잡이는뿔로 덮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무슨 무뉘가 새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값비싼 칼 같았다. "우리 아부지가 쓰든 것이다."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 않듯 그도 그때말고는 아버지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야학을 다녔다. 그러면서 그까짓 공부는 해서 뭘 하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했다. 어느날인가는 불쑥, 야학의 여선생을 지 각시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무 엉뚱하고,너무 기막히고, 너무 싹수없는 소리라서 자신은 입을 못 다물고 있는데 그는 느물느물 웃고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는 또 가슴에 얼어붙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율어를 차지한 그 사람들이 쌀을 고루 나눠줘서 죽끓여 먹던 사람들이 밥을 해먹는다는소문이 읍내에 쫙 퍼졌는데, 그것이 정말이냐고 여선생한테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여선생은 딱 부러지게 대답은 하지 않고 긴가민가하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질문을 했던것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는데, 결국 질문은 하나마나가 되었고, 그러잖아도 배고
픈데 질문을 하느라고 기운을 빼서 자기만 손해를 보고 말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여기서끝나지 않았다. 소문이 정말이라고 여선생이 대답했다면 동생들 끌고 율어로 이사를 갈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말을 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질린 쪽은 자신이었다. 그는 마음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나 짓이 너무 어른 같을 때가 많아 별로 정이 들지 않고 서먹거렸다. 그는 곧잘 니넌 특별허니어쩌고 하며 눈을 찡긋거리고 했다. 그렇다고 정작 특별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물건을 바꿀 때는 다른 아이들이나 마찬가지로 먹을것을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나 그 말이나 눈짓이 꼭 싫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나 눈짓은 이상스럽게도 가슴을 찡하니 울리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는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긋 하게 되고는 했다. 어쨌거나동철이는 자신보다 불쌍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랬고, 학교 못 다니는 대신 야학을 다니는 것이 그랬고, 어머니의 벌이가 형편없는 것이 그랬고...
길남이는 신작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며 소화 아주머니를 생각했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고구마를 바꿔 설매를 만들게 된 것도 소화 아주머니의 덕이었다. 점심은 고구마 하나씩으로 때우지만 아침과 저녁은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남덜언 죽도 못 낋이는 판에 우리는 밥얼 묵는 것은 다 기자님 덕분이다" 하는말을 되풀이했다. 종남이가 불쑥 "엄니, 다 알어" 했다가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모른다.
길남이는 끼니 때마다 되풀이 되는 그 말이 하나도 지겹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소화 아짐씨,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소화 아주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배를 곯았을 것인가는 어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길남이는 어머니가 하라는대로 겉으로는 '기자님'이라고 불렀지만 속으로는'소화 아주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얼굴도 이름도 예쁘고, 마음씨까지 예쁜 소화 아주머
니가 무당인 것이 싫었고, 더구나 무당을 높여 부르는 것이라는 기자님은 더 싫었다. 그런데길남이가 진짜로 부르고 싶은 말을 따로 있었다. 아주머니라고 하니까 너무 먼 것 같고, 너무 늙은 것 같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나이에 어울리는 말, 그것은 '소화 누님'이었다.
그
러나 그보다 더 곱고 예뻐서 부르고 싶은 것은 이름의 뜻을 딴 '흰꽃 누님'이었다. 소화,소
화... 그 흔하지 않은 이름은 뇌일수록 정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슬픈 느낌이 생기기도 했다.
봉선화, 채송화 그런 것들처럼 꽃이름 같기는 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어머니 몰래 물었던 것이다. "흰꽃이란 뜻이제." 솨화 아주머니는 정말흰꽃처럼 잔잔하게 웃으며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나 속으로라도 '소화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버릇없고, 신령님이 벌을 내릴 것 같아 소화 아주머니로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소화 아주머니가 순천까지 넘어가게 된 다음부터 길남인느 어머니가 애닳아하는 것만큼 걱정이 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거의 매일밤 꿈을 꾸었는데, 소화 아주머니를 찾아 길을떠났다가 어디인지 모를 산속을 헤매기도 했고, 신령님 옆에 있는 호랑이를 탄 소화 아주머니가 시퍼런 물이 출렁거리는 강 저편으로 끝없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발을 동동 굴러대다가 놀라 잠이 깨기도 했다. 좋은 꿈을 꾸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길남이는 어머니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지만 소문이 귀기울려 소화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왜 잡혀들어갔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성, 날이 땡땡 춰야 썰매럴 탈 것인디, 워째 해가 쨍쨍 비치고 이런당가."
춥거나 배고픈 것은 한시도 못 참는 것이 썰매 탈 욕심으로 해 뜬 것을 타박하고 있었다.
동생의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 길남이는 쇠줄을 구부린 뒤쪽 끝에 못을 박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동생은 어제와 오늘 점심을 굶었으면서도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길남이는 반쯤 박힌 못을 장도리로 가만가만 두들겨가며 반대쪽으로 휘어지게 하고 있었다. 쇠줄 양쪽에 못을 쳐서 서로 엇갈리게 구부려 쇠줄을 고정시키는 일이었다. 못은 처음보다는 몇 갑절 쉽게 마음먹은 대로 말을 들었다. 솜씨가 익숙해진 탓이었다. 반대쪽에 못을하나만 더 박아 구부리면 쇠줄을 까딱도 하지 않게 고정되고, 그럼 썰매는 완성이었다. 길남이는 서너 개 남은 못 중에서 녹이 덜 슬고 잘생긴 놈을 마지막으로 골라 들었다. 그의 왼쪽손가락 여기저기에는 피멍이 잡혀 있었다. 장도리질이 빗나가며 입은 상처들이었다. 길남이는 못을 비스듬히 누인 상태로 잡고 못끝을 쇠줄에 바짝 붙여 장도리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반쯤 박아 반대쪽으로 휘어야만 쇠줄을 물고 힘을 받게 되었다.
"다 되얐다!"
길남이가 썰매를 떠다밀며 소리쳤다.
"와아, 우리 성 최고다아!"
종남이가 환성을 터뜨리며 썰매를 끌어안았다.
길남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팔다리가 찢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정신이 아지랑이밭으로 아른아른해지는 속에서, 어머니가 집에 없어서 썰매 만들기가 편했다는 것과 한시라도 빨리소화 아주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재판을 받고 오늘에야 풀려나게 된 소화 아주머니를 모시러 아침 일찍 순천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가 연루된 자들의 집에는 새해부터 소작을 일제 내주지 않기로 한 지주들의 결정은 며칠에 걸쳐 읍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는 골목골목에서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
"인자 칠상이 느그 집 큰탈 나부렀다."
"허먼, 농새 뺏게불먼 멀 묵고 살어."
"묵을 거 암것도 웂으면 굶어죽는다."
"참말로 칠상이 니 큰탈 났다."
대여섯 살씩 나보이는 그만그만한 꼬맹이들이 양지바른 토담 구석에 모여서서 작은 입들을 다투듯이 놀리고 있었다. 그런데 네댓 명에게 둘러싸이듯이 서 있는 한 아이만 고개를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진 그 아이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있었다.
"다 공산당 해서 그런 겨."
"긍께 공산당 허지 말어야제."
"칠상이 니 멍청이다. 느그 아부지 공산당 못허게 니가 말기제."
"요런 빙신아, 워떤 어런이 고런 일얼 아그덜 말 듣냐."
가운데 선 아이는 아랫입술을 다 꼭 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자눈물이 나려고 했던 것이다.
"칠상아, 니 인자 워쩔래?"
"안 굶어죽으라먼 동냥이라도 해야제 워째."
"동냥?"
"그려, 동냥. 니 동냥이 먼지 몰러?"
"허먼, 칠상이가 거지놀이럴 헌다고?"
"안 굶어죽을라먼 그래야제."
가운데 선 아이의 고개는 더 수그러들었고, 굳어졌던 양쪽 볼이 씰룩거렸다.
"칠상이가 쪽박 들고 장타령허는 동냥아치가 되야?"
"히히, 고것 참 우습겄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금방 장난기가 서리고, 가운데 선 아이를 향한 눈들에 윤기가 들었다.
"잉, 칠상이넌 노래럴 잘헌께로 장타령도 잘헐 것잉만."
"맞어, 장타령이 바로 비렁쟁이 노랜께."
"칠상아, 지끔부텀 연습해야 쓸 것잉께 워디 한분 혀봐라."
"어얼시구시구 들어가안다아, 저얼시구시구..."
가운데 선 아이가 아앙 울음을 떠뜨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머쓱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제각기 눈길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칠상이는 외서댁의 남편 강동식에 의해 좌경화된, 샘골댁의 남편 유서방의 아들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를 조심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어서 마음놓고 입을 모았던 것이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먹고 굶는 것에 대해서는 곤충의 촉수처럼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아이들에게 그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반응이 날이 바뀌어감에 따라 모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참말이제 혀도혀도 너무덜 한다. 세세만년 살것도 아닌 한편상에 워째 그리 모지락시럽게 척지고 살라고 허는고." "있는것덜이 허는 짓거리란 것이 다 그리 베락맞얼 짓거리덜뿐인 것이여, 닌장맞을." "각단지게 베락얼 열두 분썩만 맞어라." "죽을병 들어 눈 사람 가심에칼질허고 뎀비는 것이 꼭 요것이구만그랴." "그나저나 남은 입덜이 워찌 살란지 큰일 아니라고?" "참말로 삥아리 겉은 어린 새끼덜 델꼬 안에서들 당헐 고초가 깜깜헐 일이시." "글씨말이시, 요런 일맨치로 각다분헐 일이 또 어디 있겄어." 이렇듯 처음에는 거의 모든 소작인들의 입에서 지주들의 처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거칠게 쏟아졌고, 그와 반대로 관련 소작인들을 염려하는 소리는 바람자듯이 점차 잠잠해져가면서, 그들이 소작논을 거둬들여 어떻게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은근한 관심들을 쓰기 시작했다. "근디 말이시, 요분에 지주덜이 거둬딜이는 소작이 을매나 될랑가 몰라?" "금메 말이여, 입산자만이 아니고 진작 죽어뿐 사람덜것꺼정 몰수헌다니께 굉장허덜 않겄어?" "근디 그 농새럴 워찌헐랑가?" "즈그 손수 안헐 것잉께 새로 소작얼 부치겄제." "천상 그러겄제?" "말이 났으니 말인디, 소작 뺏긴 사람덜 가심 절통헌 것이야 다 지 죄딲음 허는 것잉께 우리가 으짤 수 웂는 일이고, 몰수해딜인 전답은 누가 묵어도 묵을 것 아니라고?" "그렇겄제." 이렇듯 믿을 만한 사람끼리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일을 당한 당사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침묵이 아니었다. 절망이었고, 체념이었다. 그렇게 되리라는 낌새는 오래 전부터 느껴져왔던것이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그 현실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주들을 찾아가 사정을 하거나 빌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지주들이 자기네를 원수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먼저알고 있었다.
어두운 고샅을 허리 구부정한 남자가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좁고 어두운 고샅을 한사코왼쪽으로 붙어서 걷고 있었는데, 왼손에 들린 묵직한 느낌의 물건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미처 열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얼마를 걸어가던 그는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고샅에는어둠뿐이었다. 그는 어깨숨을 쉬며 판자문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어이 와, 아가. 숙자야아."
판자문을 흔들어대는 기세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크지 못했다. 계속 주위를 경계해왔던것처럼 일부로 죽이고 있는 목소리였다. 방문에는 불빛이 희미하게 배어 있는데 사람의 기척은 나지 않았다.
"야아야, 숙자야, 사람 왔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다시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누구다요?"
방문이 열리며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싸게 문 따그라."
"나가 누구다요?"
여자아이는 마루에 그대로 선 채 물었다.
"아, 목청 들으면 몰르냐. 싸게 문이나 따랑께."
그는 짱증스럽게 말하며 문을 마구 흔들었다.
"음마, 음마, 문 뿌시거지겄소. 아부지, 나와봇씨요."
여자아이가 놀란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저런 오살헌 년이, 그는 욕을 내뱉으며 또 좌우를 살폈다.
"뉘기여?"
방에서 남자가 나오며 물었다.
"나요, 칠복이."
그는 힘준 음성으로 빠르게 대답했다.
"칠복이이? 자네가 워쩐 일여, 어둔디."
남자가 마루로 내려서며 컬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크게 불리는 것에진저리를 쳤다.
"무슨 일이여, 뜽금웂이"
"누구, 와 있는 사람 웂제라?"
그는 대문을 들어서며, 사랑방에 불빛이 없음을 확인하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웂구만. 누구 또 오기로 혔는감?"
"아니구만요. 오늘밤에넌 아재허고만 둘이서 쪼깐 헐 이약이 있구만이라."
그는 보라는 듯이 왼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것을 약간 높이 치켜올려 오른손으로 바꿔들었다.
"헐 이약이 있음사 들어봐야제."
남자가 점잖을 빼는 목소리를 꾸미며 앞장섰다. 작인 장칠복이가 마름 오동평이를 찾아온것이다.
"이약허소."
등잔에 불을 당긴 오동평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요것이 지리산 토종꿀인디요, 산삼 담 가는 보약이라는디, 잡숴보시씨요."
장칠복이는 보퉁이를 오동평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지리산 토종꿀? 지리산이 빨갱이 천지가 된 것이 언제라고 꿀이 나오고 자시고 헐랑가?"
장칠복이는 그만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랫배에 힘을 주며 헛기침부터 한번 했다.
"어허, 무신 말얼 그리 섭허게 혀뿌시요. 꿀이야 따서 오래 묵힐수록 약효가 나는 법인디,요것언 일 년도 더 넘은 것이요. 우리 장모님이 내 생일에 갖고 온 것인디, 우리 집서 묵은 것만도 열 달이 넘었소."
장칠복이는 정말 역정을 내는 것처럼 얼굴이고 목소리를 꾸며대고 있었다.
"꿀이야 부자지간에도 믿지 말라고 허는 말 안 있더라고? 그려 그냥 해본 소리시."
오동평이 헛웃음을 치며 눙치고 있었다.
"장모가 사우 가짜꿀 먹이진 않겄제라. 즈그 딸년 신세 엎어뿔 심뽀 아닐람사."
장칠복이는 한번 더 못을 치고 있었다.
"하먼, 사우 사랑 장모닝께." 오동평이는 어느덧 흡족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고는, "요것에까시가 들기는 들었는디, 고것이 무신 까시까?" 보퉁이를 끌어당기며 장칠복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묵어도 안 걸릴 만헌 까시요." 장칠복이 자리를 고쳐앉고는, "속씨언허게 그냥 확 까놓고말혀뿔겄소. 긍께, 요분 좌익헌 사람덜 소작 뺏어갖고 새로 작인 정헐 적에 나도 한몫 부쳐도라 그것이요."
그는 가슴이 벌떡이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마셨다.
"새로 소작얼 부치기는 부쳐야겄제."
오동평이는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막연한 말을 흘렸다. 그는 장칠복이가 왜 찾아왔는지이미 간파했던 것이고, 이제 낚시를 던지고 있었다.
"동평 아재, 나도 더 나이 묵기 전에 심 잠 얻어야 쓰겄는디, 아재가 눈 딱 감고 한분 봐주씨요."
"금메, 나서는 사람이 많은디다가, 자네야 기왕 부치고 있는 소작이 있응께로 그 일이 말맨치로 쉽덜 안혀."
"아재, 아재 심으로 소작 부치고 띠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담 쉰일이 아니시요. 은혜
두고두고 갚을 팅께 나 잠 잡아줏씨요."
"고 까시가 너무 크시."
오동평이는 끌어당겼던 보퉁이를 다시 제자리로 밀어놓았다. 거절이었다. 아니, 꿀 정도로는 배가 안 찬다는 뜻이었다. 씨부랄눔, 지도 종놈 신세에 더 불쌍헌 눔덜 피 뽈아묵자고,장칠복이는 배창자가 뒤틀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밥상은 차려진밥상이고, 배가 고픈 쪽은 이쪽이었다.
"좋소, 가실에 쌀 반 가마니 내겄소."
장칠복이는 급한 성질을 못 이기고 불쑥 말을 뱉었다.
"글씨이, 쌀이고 보리고 그것이야 나중 이약이고, 자네야 기왕 부치고 있는 소작이 안 있응가. 고것이 문제시."
오동평이는 두 다리를 뻗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칠복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솟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자칫 잘못 나갔다가는 부치고 있던 소작마저 떼일지 몰랐다.
"아재, 사람 피 보트게 허지 말고, 워쩌먼 쓰겄는지 아싸리허게 말해뿌시요."
"어허, 요것이 자네 일이제 나 일인가?" 오동평은 먼산바라기를 한채 담벼연기를 푸우 내뿜고는, "근디, 한분 소작얼 부쳤다 하먼 인정상, 의리상 일이 년 만에 띨 수 웂는 일 아니겄는가?" 고개를 갸웃하게 틀어 장칠복이를 의미 깊은 눈길로 겨냥하고 있었다.
"알겄구만이라. 한 가마니럴 채우겄소."
장칠복이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려, 자네가 새끼덜이 많제." 오동평은 뻗었던 다리를 접어들이며 꿀보퉁이를 다시 끌어당기고는, "요것에다가 인삼 서너 뿌리 갈아서 쟀다가 묵으먼 지대로 된 정력보약이라든디."
흘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말이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장칠복이는 그 말을 못 들은척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통금이 다 되얐는디 그만 가보소."
오동평이 먼저 일어섰다.
"워쨌거나 고맙구만이라."
장칠복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안직은 고마울 것 웂네. 나가 심이야 쓰겄지만, 꼭 된다고 믿지는 말소."
오동평이 방을 나서며 하는 말이었다.
"아재, 나가 인삼얼 구헐 것잉께 아재가 먼첨 구해뿔지 마시요."
장칠복이는 토방으로 내려서며 기어이 이 말을 하고야 말았다.
"아니시, 그럴 것 웂네."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나 아재만 믿겄소."
대문을 나서며 장칠복이 말했다.
"어이, 염려 놓고 잠 편케 자소."
오동평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흔쾌하게 울렸다.
회정리 삼구 초입에 자리잡은 노덕보의 집에서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왁자했다.
"아이고 요런 웬수녀러 것덜아, 지금 아깝고 배 꺼지는디 싸게싸게 자빠져 안 자고 무신눔에 북새질이여 북새질이이."
부엌에서 나오던 조성댁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아랫방으로 내달았다. 아이들 떠들던소리가 뚝 그치면서 지게문도 캄캄해졌다. 조성댁은 내달아온 기세 그대로 지게문을 열어젖혔다.
"요런 웬수녀러 새끼덜아, 밀금헌 죽 한 그럭씩 처묵은 것이 얹힐 성불러 그리 뛰고 발광이냐. 낼 아칙에 배고프다고만 혀봐라, 주딩이를 쫙쫙 찢어놀 것잉께. 죽 처묵은 것덜이
밥 처묵은 것덜맨치로 뛰고 발광을 허먼 그 배가 워찌 될 것이냐. 싸게 찍소리 허지 말고자빠져들 자! 또 북새질만 쳐봐라."
조성댁은 방안의 어둠 속에다 대고 한바탕 소리를 퍼붓고는 지게문을 닫았다. 방문 앞에서 돌아서는 그녀의 가슴에는 찬바람 이는 공허감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나무라고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으로 밀기울마저 탈탈 털어 시래기죽을 끓였던 것이다. 서운상과 얽혀있는 소작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당장 내일부터는 무슨 수로 끼니를 대나하는 막막하고도 답답한 심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이들한테 포악을 부리게 되었다.
묽은 죽으로 헛배를 채운 노덕보는 벽에 몸을 부린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조성댁은그런 남편을 한동안 바라보고 섰다가 조심조심 흔들었다.
"예 말이요, 정신채리고 나 말 잠 들어보씨요."
"말언 무신 말. 들으나마나 헌 소리."
노덕보가 짜증스럽게 팔을 휘저었다.
"우리가 살 방도가 있당께요!"
조성댁이 빠락 소리를 질렀고, 노덕보는 눈을 껌벅이며 몸을 바로 잡았다.
"무신 말인고 허니, 되지도 안헐 일로 서운상이 찾아댕기지 말고, 좌익헌 사람덜헌테서 거둬딜인 전답을 새로 소작놀 것잉게 싸게 그 구멍을 뚫으라 그것이요. 내 생각이 으쩌요?"
"그려, 가만 있어보소."
노덕보의 어조가 달라지며 얼른 담배쌈지를 집어들었다. 그는 담배를 빡빡 빨아대며 무슨생각인지를 하고 있었다.
"근디, 고것은 곤란헌 문젠디. 넷이나 다 그리 허먼 몰라도, 우리가 항꾼에 힘얼 합치자고약조헌 말이 있는디 나 혼자 그래불먼 남자 체면에 의리 웂는 짓거리가 되제."
"음마, 음마, 체면이 밥 믹여주고, 의리가 떡 준답디요? 오늘 저녁으로 밀지울도 딱 떨어져뿌렀소. 새끼가 넷에, 엄니, 당신, 나, 입이 일곱인디 체면이고 의리고 찾을 마당이요, 시방? 다 지 살 구녕 지가 찾아야제 공염불이 무신 소양 있소. 그라고, 넷이서 항꾼에 그리헌다는 것도 앞 짜른 생각이오. 지끔 서로 표식은 안 내지만 속으로는 넘 먼첨 소작 얻을라고 눈에 불킨 판인디, 당신언 태평스럽게 그 사람덜꺼정 끌어딜일라고 허다니, 그래갖고는 될 일도 안돼뿌요. 다 경쟁잔께."
노덕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네 말도 맞는 말인디, 결국은 다 알아질 일이고, 그리 되먼 사람 체면이..."
"엄니허고 새끼덜 굶기는 것보담 낫제라. 우리넌 가만 있었는디 알음있는 사람이 권한 것이라고 헐 수도 있고, 그때 가서 둘러붙일 말이야을매든지 있응께, 고런 것이야 다 나헌테맽기씨요. 으쩌요, 헐라 안 헐라?"
"늙은 엄니나 어린 새끼덜얼 굶게 쥑일 수야 웂는 일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