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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3 중 제3부 (단편)
노인기
-3부 -
그랜버드(Grand Bird)(우등고속버스)를 개발하기에 시간이 없었다. 내부 의견들이 좁혀졌다. 기존 업체는 시간을 더 지체한들 좋아지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태창은 친구의 소개도 있었지만 상용차 외에 특수차나 버스 같은 대형차 경험은 부족했다. 그리고 시간이 없었다.
결단은 위아(WIA)에서도 내려야 하지만 작은 형님도 결단이 필요했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욕심이 앞서 괜히 시도했다가 여러 사람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임원진(WIA)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진 가운데 최종 결정은 책임자인 공장장이 내린다.
평소 말이 없고 과묵한 그의 입술이 떨렸다. “우리 회사는 ‘그랜버드’ 우등고속버스의 양산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협력사들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많은 어려움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A사에서 납품하는 프레스 단품들은 assemble(조립) 자체가 되지 않아 김직장이 해머(Hammer)로 겨우겨우 맞추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정해진 날짜에 양산하기란 여러분 보다시피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임원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또 회의를 가진 결과 약 두 달 사이에 A사의 기술 문제가 해결되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우리 일에 적합한 업체를 찾던 중 군산에 있는 기아특수강을 제일고객사로 둔 전문업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프레스 경험이 많은 태창금속을 우리 회사의 새로운 협력사로 하여 A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공장장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하듯 다급한 심경을 쏟아냈다. 위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제품도 아직 완전하게 보완된 것은 아니었다. 공장장은 자체 생산품도 신경 쓰이고 외주 품도 신경이 쓰였다.
작은 형님 또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새로운 거래처가 생겨서 좋지만 너무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큰 대형 제품은 처음이었다. 개발해야 할 금형도 스물다섯 벌이 넘었다. 12M 가까운 버스 길이가 곧 제품이다. 그리고 차선 넓이 만한 버스 폭이 버스의 가로 제품이다.
기존 특수강의 제품은 그대로 생산하고 별도로 버스 제품을 개발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고생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두꺼운 각 파이프를 각도에 맞게 절단하고, 그리고 용접하여 도장까지 해야 한다. 후레임에는 간 살들이 많이도 붙어있었다. 위아 직원들은 돌아가며 우리 회사를 패트롤 하듯 일정하게 방문했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 맞이하는 서해안 바닷가의 겨울은 도시나 내륙지방하고 판이하게 달랐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자체 금형 개발은 가지 수가 많아서 도저히 다 할 수 없어 일부 외주처리를 해야만 했다.
우선 샘플로 십여 대를 만드는데,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힘듦이 찾아왔다. 자칫 잘못하다간 A사가 겪은 일을 혹 우리도 답습하는 것은 아닐까? 정해진 날짜가 되면 과연 저 큰 제품이 물 흐르듯 양산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고 한편으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황급히 하다 보니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의 양이 특수강 한 달 양에 비해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에 직원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어느 순간 새로운 거래처가 생겨 좋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피곤에 겨워 의욕마저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박카스와 우루사를 마치 보약처럼 먹었다. 해안가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도대체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데 이토록 춥단 말인가? 양 볼을 때릴 땐 마치 면도날에 베이는 것 같았다. 손은 이미 굳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귀는 몸에 붙어있지 않은 듯 아무 감각이 없다.
새로운 개발품과도 싸우고 시간을 잘 유용하기 위함도 시간과의 싸움이고 그리고 추위와 바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양의 눈!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입고(入庫) 날짜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위아 공장장이 측근 세 명을 거느리고 우리 회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사무실에서 현재 진행 상태를 묻고 D-데이까지 중간 점검 정도라 생각했다.
잠시 후 박 공장장은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고 심지어 전화받는 여직원까지 모두 자리를 비우게 했다. 사무실은 형님과 공장장 단 두 사람만 남았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웠다. 어찌나 무거운지 두 자릿수 영하의 날씨마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간간이 새어 나오는 음성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로 박 공장장의 음성으로 지금까지 톤을 높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사무실 문이 닫혀있어도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해 있음을 알았다.
반면 형님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들려도 매우 짧았다. 아마 묻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이고,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듯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표정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듯 애매한 얼굴을 하고 나왔다.
박 공장장은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누구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 또한 평소 때는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깍듯하게 배웅을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다. 사무실에서 나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 누구 하나 ‘뭣 때문에 사람을 물리면서까지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약속한 날 열일곱 세트를 무사히 납품했다. 본래 열 세트(set)였으나 중간에 다섯 세트가 늘어나 열다섯 세트를 준비하다가 혹시 몰라 두 세트를 더 준비해서 예정에도 없던 열일곱 세트가 되었다.
작업은 당일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도장(塗裝)작업이 맨 나중 공정이었다. 건조는 시간이 없어서 미처 하지 못하고 심지어 페인트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차에 실었다. 광주 위아까지 08시 이전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로는 빙판으로 눈이 수북이 쌓였다. 트럭은 빙판에 대한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있지 않았다. 짐을 싣고 밧줄로 단단히 고정을 마치자 04시 30분. 시동을 걸었다. 핸들은 얼음장같이 차가워 장갑을 끼고 운전했다.
열일곱 세트는 5톤 트럭이 과적에 걸릴 정도로 상당히 무거웠다. 어느 곳 하나 눈이 덮이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온통 새하얗다. 칠흑 같은 어둠이고 도로는 눈이 그대로 덮여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트럭에 올라탄다.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걱정이 되었는지 형님은 자신의 휴대폰을 나에게 건넨다. 그때는 아직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기 전으로 기업의 대표들만 겨우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한 뼘 정도의 안테나는 끝이 둥글고 검었다. 몸통은 검은 가죽으로 쌓여있어서 조심히 다뤄야 했다.
지금까지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제품의 중량과 미끄러운 도로로 인해 너무 긴장한 탓일까.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떤 곳은 핸들이 먹혀들지 않아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를 달려왔을까? 어둠은 점차 희석되어 나무와 산들의 형체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도로 표지판에 ‘광주’가 등장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미끄러운 도로로 인해 핸들을 너무 꽉 잡아서일까? 갑자기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거의 마지막 관문으로 오르막과 긴 터널을 지나면 다시 내리막인데 도로가 미끄러울 때는 내리막길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다. 짐을 실은 트럭은 제어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힘든 구간을 막 올라 터널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형님이었다. “어디쯤 가고 있냐?”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밤을 꼬박 지새우고는 곧장 어둡고 빙판 진 도로로 차를 몰고 나선 것이 몹시, 마음이 쓰였나 보다. “조심해서 가고 납품 마치면 전화해라”
광주 공장까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다행히 눈은 녹아 사정이 훨씬 나았다. 사람들은 차에 실린 제품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도 들어오기는 했네’ 다들 기대하지 않았나 보다.
전날 과연 내일 아침이면 태창에서 물건이 들어올 수 있을까? 들어온다, 아니면 못 들어온다. 마치 스포츠 경기 중 누가 이길까? 내기라도 하듯 “그것 봐 내가 들어온다고 했잖아.” “어 이상하다. 태창은 분명 버스 제품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품질팀은 예상대로 까다로웠다. 라인(Line)에서 급하다고 사람들이 찾아와 독촉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이 걸려도 정확하게 측정기구를 들이댄다. 많이 긴장되었다. 만드느라 고생하고 얼어붙은 도로를 운전해 여기까지 온 것도 고생인데 혹 불량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면 제품은 내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버스나 특장차 경험이 없는 회사에서 만든 제품임을 알고 검사 요원은 전수검사를, 실시했다. 이럴 때 검사를 받기란 눈길을 헤친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몇 가지 지적 사항이 있었으나 처음 하는 것에 비해 대체로 양호했다. 품질팀의 검사가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지게차가 파렛을 들고는 쏜살같이 라인으로 사라졌다.
그동안의 시간이 꿈같이 지나갔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데 오늘 비로소 깨어난 것 같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치 구름을 타고 오는 것 같았다. 고객사와 협력사가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듯 진통이 필요한가 보다.
저절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입속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어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힘들면 뱉어내는데 그러나 준비된 사람은 나에게 다가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형님은 자기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대한중기의 보잘것없는 제품을 보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혜안(慧眼)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기아특수강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번 기아기공 즉 위아의 그랜버드 우등고속버스의 후레임은 전체 뼈대 중 우리 회사의 제품이 80%를 차지했다. 더군다나 버스 제품은 처음인 회사에 그렇게 높은 비중의 제품을 떠맡겼으니 모두가 마음 졸일 수밖에 이 광경은 마치 도박과도 같았다.
그러나 형님은 큰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위아 같은 대기업의 신제품 개발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다시없는 기회였다. 자신을 보고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만 본다면 결코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생의 시간은 잠깐이요. 그로 인해 회사는 엄청난 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또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위아와 새로운 협력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특수강 못지않은 높은 비중의 고객사가 새로 생긴 것이다. 회사는 전에 없이 분주했다. 잠시 숨 고를 틈도 없이 바빴다.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기 위해 레이-아웃(Lay-Out)을 새로 정하고 양산시스템을 별도로 갖춰야 했다.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아마 못 잊을 것 같다. 박카스와 우루사의 효능이 전혀 무색할 정도로 피곤에 겨웠다.
이후 생산은 순조로웠다. 물론 제품 자체가 크고 사람의 손으로 핸들링하기는 다소 무리가 되었어도 수량이 늘어날 것을 대비해 설비를 보강한 것이 적중했다. 출발은 처음 맞이한 서해안의 겨울만큼이나 혹독하고 고통스러웠어도 그랜버드가 밸런스 아웃(balance out) 될 때까지 약 15년간 회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날 우연히 두 친구의 만남에서 꾼 꿈은 그 후 다시 꾸어지지 않았다. (박건욱 부장은 기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우등고속버스의 성공적인 개발을 인정받아 이사로 진급했다.) 이후 위아의 그랜버드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덩달아 종업원 수도 배는 더 불어났다.
어느 날 아침 회의 시간에 대형 프레스 라인을 구축할 것이라는 깜짝 발표가 있었다. 물론 대형라인의 소문은 전에도 있었지만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1,000톤 600톤 800톤으로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라고까지 밝혔다.
기아특수강의 엑슬(axle)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엄청난 능력(파워)을 요구했다. 차축(車軸)은 마치 기아특수강의 엑슬-하우징(axle housing)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납품하는 제품들은 모두 차축 즉 엑슬 케이스(case)에 붙는 브라켓트(bracket) 종류들로 제품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형님은 삼 개월간 검토에 들어갔다. 계산기가 잠시도 손을 떠나지 않는다. 다각 도로 치밀하게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혹 미처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봐 재차 검토했다. 그리고 결단은 신중했다. 형님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곧바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장 안은 기계 소리와 포클레인이 쿵쿵 콘크리트 바닥에 천공을 내는 소리가 떠나갈 듯 고막을 울린다. 한 달도 더 걸린 것 같다.
기초 피터 공사가 끝나고 몇 주간의 양생을 거친 다음 어느 날 새벽에 난데없이 육중한 크기의 중장비들이 공장 마당에 들어선다. 레커와 노베어(저상 추레라) 여러 대가 어디선가 기계를 분해하여 싣고 온 것이다. 하나같이 중량이 느껴질 정도로 우람했다.
조립은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전장 제어(기계의 다양한 동작을 컨트롤하는 장치) 부분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빨강, 파랑, 검정, 흰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의 가느다란 전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것들이 기계와 전기 컨트롤러에 연결되어 사람의 명령에 의해 다양한 움직임으로 작동한다.
드디어 기초부터 안착하여 가동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과연 저 쇳덩어리가 돌아가기는 할까? 연속 동작을 시켜보니 잘 돌아갔다. 소음과 진동은 기계의 크기와 능력에 비해 생각보다 적었다.
앞서 잠깐 소개한 대로 광명시 가리대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프레스 공장을 하고 있던 사장이 어느 날 기아자동차 트럭의 적재함 제조공장이 있으니 같이 가봅시다. 해서 우연히 대형 기계의 작업능력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는지 그 즉시 자신의 목표를 새로 정했다. ‘돈은 벌지 못해도 좋으니 반드시 대형 프레스만큼은 우리 공장에서 가동해 보겠다.’ 그날의 결심이 있고 난 후 13년 만에 꿈은 이루어졌다.
형님은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중간중간 알게 모르게, 어려움도 많았지만, 심령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기계의 능력에 적합한 일들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 부분이 관건이다. 한마디로 어렵다는 뜻이다. 가령 고객사에서 ‘당신이 기계만 준비하면 이런 아이템을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준비하세요.’ 하고 모정의 약속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객사에서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협력사에게 강요했다가 혹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고객사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투자하고 확장하고 하는 것은 순전히 본인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결코 타인이 참여할 수는 없었다.
형님은 고객사로부터 ‘만약 대형 기계를 설치한다면 이런 아이템은 바로 이관해 드릴게요.’ 하고 어떤 약속이나 그 비슷한 말이라도 들었으면 한결 어깨가 가벼웠을 텐데,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두 고객사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다못해 자사의 대형 제품들 가운데 몇 아이템은 별도 이관 검토 중이라는 그런 말조차도 없었다. 순전히 자기의 뜻한 바대로 추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아직 대형라인은 이렇다 할 아이템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우군산 공장에서 고작 금형 몇 벌 들여와 시범적으로 근근이 가동하는 정도였다.
아, 그런데 그만 외환 위기 즉 IMF를 맞았다.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금액은 겨우 30억 달러 정도로 곧 도래하는 외채 상환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는데 이것은 곧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국가 부도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국가가 부도가 나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온 나라가 마치 난리가 난 것 같았다. TV 광고도 허리띠를 졸라매자. 모든 것에서 하다못해 전기와 생필품조차도 불필요한 것은 자제하고 꼭 필요한 것들만 사용할 것을 온 국민에게 호소했다.
기아 자동차도 IMF에 흔들렸다. 그것도 심하게 요동쳤다. 연일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생산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한 달 조업일수가 점점 줄어 마침내 10일도 채 일하지 못했다.
형님의 시름은 깊어 갔다. IMF는 자기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국가 차원을 넘는 것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다. 이자율도 높아 감당이 안 되고 직원들의 봉급을 맞추기도 힘에 겨웠다. IMF 전에는 각종 상여금과 대학생을 둔 자녀들의 학비까지 전액 지원이 되어 인근 지역에서 입사지원자가 많았었다.
IMF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반면 생산일 수는 점점 줄어들어 일부 몇몇 사람들은 무기한 휴일에 들어갔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봉급을 지원했다. 이런 엄청난 위기에 주변 회사들은 벌써 석 달도 넘게 급여가 지급되지 않고 있는데···.
한번은 월급날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많이 지쳐있을 자기들의 대표이사를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힘내십시오.’ 하단에 직원 일동하고 커다란 현수막을 걸었다. 아무도 몰랐다. 현수막은 오래도록 걸려있어서 그날의 힘듦과 힘들지만 그래도 대표님을 중심으로 함께 헤쳐나갈 것을 다짐하는 약속과도 같았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다. 회사의 모든 기계는 가동을 멈췄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대형 기계를 놓을 때는 어느 정도 물량을 확보하고 나서 놓아야지 기계가 어디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떡하니 저렇게 앉혀 놓고 IMF로 인해 제대로 한번 돌려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게 생겼구먼’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비꼬는 말이었다.
형님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내 꿈도 여기서 끝인가 보다.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마저 뿌리치고 세상으로 나왔는데 그리고 세상에서 원 없이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여기까지만 내게 허락이 되었나 보다.’ 말없이 서 있는 기계들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때 기계도 울고 자신도 울었다.
형님은 우두커니 집에만 있기에는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가족들을 데리고 잠시 무주로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의 고민과 괴로움을 알 턱이 없는 어린 자녀들은 계곡에서 물놀이에 정신이 없다. 함께 모여 막 점심을 먹으려는 데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온다.
‘이런 산골짝에서도 전파가 잡히나?’ 여기까지 와서도 전화를 받아야 하나? 에이 잘 못 온 것이겠지 하고 휴대폰을 그냥 받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 또 휴대폰 벨이 울렸다. (당시는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고 소리만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또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2시간 정도 지났을까? 3시 무렵에 또 전화가 걸려온다. 그때는 누구지 뭐 때문일까.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노대표님 나 이종필 이사요. 빨리 우리 집으로 오시요”
특수강 공장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그길로 짐을 챙긴다.
한참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재촉하고 서둘러 집에 내려준 다음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저녁 무렵 도착하였다. 이종필 이사는 회사의 안부를 물을 틈도 없이 바로 입을 연다.
“대형 기계가 몇 톤이요?”
“1,000톤입니다.” 이 이사는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에 심이 굵은 볼펜으로 형님의 말을 받아 적었다.
“또 다음 기계는 어떻게 되오?”
“800톤과 600톤입니다”
“음~” 얼굴 가득 불편한 표정의 이 이사는 신음하듯 내뱉는다.
“이사님 무슨 일입니까?” 옆에서 답답했는지 형님이 말문을 연다.
“온니(Only)를 생산하는 금성기계에서 노조들이 생산을 거부했다지 뭐요”
“네? 생산 거부를 하다뇨?” 형님도 적잖이 놀랐다.
“회사에서 급여도 잘 나오지 않자 노조들이 금형을 붙잡고 우리 특수강을 상대로 농성을 벌이는가 봅니다. 자신의 회사에서 돈을 못 주니 우리 특수강에서 대신 지급해 줘라. 만약 못 준다면 더 이상 제품은 생산하지 않겠다. 금형을 볼모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지 뭐요.” 기아 본사에서도 그런 협력사에 휘둘려 끌려간다면 어떻게 자동차산업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더 이상 노조에 가입된 협력사와는 점차 거래를 줄여가고 잠정 중단할 것을 전달받았다.
형님도 뜻밖인 듯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해서 말인데 노사장 태창의 기계에서는 생산이 바로 됩니까?”
이 이사의 말은 갑자기 나지막하고 떨렸다. 그리고 촉박함마저 느껴졌다. 물음을 던진 그의 눈빛은 잠시나마 갑과 을이 바뀐 것 같았다.
“네, 바로 됩니다.”
“한 번이라도 찍어 봤소?”
“대우자동차 제품을 지금도 하고 있고, 저 기계를 놓은 목적도 결국 온니를 염두에 두고 계획한 겁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금성기계에서 잘하고 있는데··· 괜히 불편을 끼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형님의 말이 끝나자 이 이사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비상을 알린다.
금형을 금성기계에서 반출하더라도 무턱대고 할 것이 아니었다. “그랬었구먼, 잘 되었소. 태창도 하루라도 빨리 우리 뜻에 따라주기 바라오.” 그길로 형님도 회사의 임원들을 소집했다. 다들 흥분되어 멀리서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대우자동차 금형은 충분히 재고를 쌓은 다음 반납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회사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리하게 투자를 감행한 것에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여기서 끝장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특수강 차축부의 제일 큰 협력업체에서 그만 노조와의 분란으로 더 이상 거래가 어렵게 되자 동일한 설비를 갖추고 있는 우리 회사로 하루아침에 몽땅 옮겨오게 되었다.
노조원들의 저항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완강했다. 오직 자신들의 요구사항 외에 그 어떤 합의점도 거부했다. 그렇게 협상은 결렬되자 분위기는 점점 험악하게 흘러갔다.
특수강은 지체할 수 없었다.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노조원들은 일부 금형을 천정 크레인으로 기계 꼭대기에 올려놓고 저항했다. 금형을 내리지 못하게 크레인은 아예 고장을 내버렸다.
금형은 특수강에서 책임지고 이관해 주기로 하고 물류비는 우리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앞날이 걱정되어 잠을 설쳤는데 하루아침에 일이 많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에 이르렀다.
금형을 적재한 다섯 대의 25톤 트럭은 쉴 사이 없이 계속해서 실어 날랐다.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다. 저녁 7시부터 밤새도록 이어지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끝이 보였다. 공장 2개 동과 1개 천막동이 금형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날 저녁 운송비만 3천만 원이 넘게 들었다. 놀랍고도 대단한 작전 같았다.
구사일생 우리 회사는 마치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아이템도 종전보다 배는 더 늘어나고 거짓말같이 철판(鐵板) 입고량도 열 배는 늘었다. 마치 IMF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사람은 늘어나고 생기도 돌아왔다.
대형 기계는 이때를 위함 같이 무리 없이 잘 돌아가 주었고 품질도 고객사의 눈높이에 부응했다. 그렇게 숨 막혔던 시간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잔잔해졌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 회사는 안타깝게도 문을 닫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이번 금성기계의 일은 우리에게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사측과 노측은 처음부터 완강하게 대립한 것은 아니었다. 사측의 입장은 곧 회복될 것이니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보자. 하고 노조 측은 특수강의 온니 금형을 우리가 쥐고 있으니 특수강을 압박해서 돈을 받아내자. 결국, 언성은 높아지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특수강 입장에서도 만약 태창에서 설비를 갖추지 않았다면 많이 난감할뻔했다. IMF가 처음이듯 이런 일은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우리 회사는 위기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결과가 좋았다. 어려움을 통과할 때마다 안팎으로 성장하는 것이 보였다. 또 한 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형님의 대형(大型)라인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이 모든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이 말이다.
그렇게 IMF는 기업들과 개인들에게 매서운 한파같이 몰아쳤다.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같이 그칠 줄을 몰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더욱 당황이 되었다.
범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순전히 우리 국민의 자발적인 헌신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구제 금융을 받은 나라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빨리 IMF를 졸업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 노래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기 마련! 자동차산업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기술력이 하루가 멀다고 발전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엑슬하우징은 독립 현가 방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승합차와 화물차에만 국한돼 있는데 그나마 승합차 생산은 이미 멈춘 지 오래다.
술렁이는 국제유가는 자동차 산업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자동차 회사는 연비 개선에 기술력을 집중했다. 트럭도 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랜버드를 처음 개발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시대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형님은 그 옛날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친 일이 늘 마음에 걸리는 듯.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회사로 출근하기를 좋아했다.
어느덧 아버지는 연세가 많이 들어 거동도 예전 같지 않으셨다. 넓은 들을 노려보시며 허리띠를 불끈 졸라매는 그 당당함은 이제 많이 퇴색되어 겨우 형체만 남아 있을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그래도 아들의 사업장에 들어서면 기운이 솟는지 생기가 돌았다.
현장을 둘러보시고 제품들 가운데 볼트(Bolt) 나사산이 쉽게 망가져 번번이 불량을 받아오는 것을 알고는 막기 투명호스를 사다가 나사산 길이만큼 자른 다음 산에 끼워 넣으니 그다음부터 불량 없이 납품이 잘 되었다.
농사일과 공장일은 전혀 다르지만, 아버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지혜롭다 못해 탁월하셨다. 소소하지만 고질병같이 잘 풀리지 않는 한두 아이템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하시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일이 되어 한사람 몫을 훌륭하게 해내셨다.
아버지는 전날 무리가 됐거나 환절기 때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결근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부지런함이 밴 몸은 연세가 있으셔도 신기할 정도로 잘 적응하셨다. 그렇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무를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10년 가까이 아들의 공장일을 도왔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나는 늦게 태어나고 또 일찍 부모 곁을 떠나서 아버지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나온 세대가 워낙 차이가 있다보니 이래저래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부자(父子)지간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말씀은 하지 않았어도 늦게 태어난 아들을 볼 때마다 기쁨보다는 왠지 걱정이 앞섰을 것만 같다.
나의 혼사가 오고 갈 무렵 아가씨 측 부모님과 첫 상견례가 있었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이미 연로하셔서 그러한 자리에 함께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큰 형님과 형수님이 부모님을 대신하여 참석하셨고, 그리고 그 만남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 후 사업의 변화를 조금 더 풀어보고 장문의 글도 마칠까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자동차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엑슬하우징은 초기 SUV, 승합차량 그리고 트럭. 트럭은 화물을 적재함으로 아직 차축을 대신할 만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형님은 다음 신차종이 개발되면 트럭과 승합차를 제외하고 전 차종에 독립현가 방식을 접목할 것을 예견하셨다. 독립현가 방식은 액슬 하우징(axle housing)에 비해 승차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연비도 월등하게 좋았다. 만약 그리되면 회사는 하루아침에 일이 급감하게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랜버드 우등고속버스도 개발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풀체인지(full-change)에 들어갔다. IMF를 혹독하게 치른 고객사는 더 이상 고비용의 제품은 외주처리를 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가급적 지출을 줄여 내실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형님은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깊었다. 지금까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런데 그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광주 위아는 밸런스 아웃 되거나 기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자체 생산하고 외주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별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특수강은 기존 엑슬방식에서 확실하게 신기술을 탑재하여 트럭과 승합차를 제외하고 더는 엑슬을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치열하게 생산했던 일들은 마치 역사의 뒤 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이 사라져 간다. 일은 예상했던 대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몇 달이 못 되어 급감했다. 종업원 숫자도 1/3로 줄었다.
‘자동차 1차 밴드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사실 1차 밴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두 고객사의 아이템만 해도 힘에 겨울 정도로 바빴다. 물론 마진도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1차 밴드가 되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은 늘 있었는데.’
자동차산업의 흐름을 신속하게 읽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고 후회되었다. 이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1차 밴드와의 M&A를 몇 차례 시도했으나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로 그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형님은 현실을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또 아니었다. 모든 것은 끝이 있음을 알고 꼭 자동차가 아니어도 보다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아이템)은 없을까?
때마침 반월공단에 용융아연도금으로 꽤 이름이 있는 회사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2세 경영으로 선친은 젊을 때부터 도금업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오래전 서울에서 처음 도금을 하다가 이후 몇 군데를 옮긴 다음 80년대 중반쯤 비로소 지금 이 자리에 안착하게 되었다. 심혈을 기울여 건축하고 도금 라인은 당시 일본의 최신식 기술을 도입했을 정도였다. 인수할 당시만 해도 크게 아쉬운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2세로 넘어오면서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돌아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형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패트롤 돌면서 도금을 익히고 고질적인 부분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때 직원들도 이전하고는 많이 다름을 알고 점차 생기를 찾아갔다. 도금 공장 특성상 이웃 회사와 가까이 지내기가 어려운데 인수하고 그해 바로 흑자로 돌아섰다. 참 놀라운 일이다. 도금업은 자동차 부품업하고는 많이 달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우리 회사가 생산한 자동차 부품사업은 주로 버스와 트럭의 동력 전달 장치 위주의 부품들이 주를 이뤘고 승용차부품은 하지 않았다. 형님은 승용차 부품업으로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말이 자동차부품이지 기존 사업하고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 우울함의 정도가 IMF 못지않았다. 바로 미국발 경제위기 즉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문이었다. 그 여파가 어찌나 강렬한지 마치 우리나라에서 발발한 것 같았다. 국가도 또 기업들도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형님은 무슨 연유인지 당진에 6만㎡ 더 되는 땅을 매입했다.
우선 3만㎡가량 형질변경을 하고는 바로 토목에 들어갔다. 사업을 시작한 이래, 숱하게 자신의 공장들을 건축했어도 이번이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크고 넓었다. 육중한 중장비들은 산을 깎아내리고 또 얕은 곳은 성토하여 채웠다.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의 넓은 지역은 공장을 건축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다져졌다. 지내력 시험을 통과한 다음 곧바로 건축에 들어간다.
미국 디트로이트 GM 공장에서 대형 프레스 한 개 라인을 아예 통째로 옮기기로 작정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인도하기까지 6개월의 말미(末尾)가 주어졌다. 기계의 중량(重量)과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단번에 실을 수도 없고 각각 네 등분씩 나누어 중량물 전문 추레라에 실었다. 그렇게 짐을 실은 추레라는 총 20대이고 주변기기들을 실은 25톤 카고 트럭만 해도 20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무척 큰 프로젝터로 부산항에서 출발한 팀들은 당진까지 오는데 닷새도 더 걸렸다. 중량으로 인해 주로 밤에만 이동하다 보니 늦을 수밖에 마지막 한 대가 도착했을 때는 십오일도 더 걸렸다. 여러 기계들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으로 크기와 중량이 다른 것에 비해 갑절은 더 크고 거대했다.
각각의 순서대로 조립을 하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다. 250톤과 150톤 레커 두 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러 서서 블록들을 쌓는 데 매 순간 숨을 죽였다. 여러 조각들이 모여서 비로소 완성되는데 그 한 블록이 많게는 180톤이 훨씬 넘는 것도 있었다. 이런 퍼즐 조각 같은 것들이 모여서 외형의 틀을 완성 지었다면 다음으로 전기제어(電氣制御)가 들어갔다.
이 부분은 앞의 도비 부분과는 차원이 다르게 시간과 정확도를 요구했다. 엄청나게 큰 기계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로 회사의 용도에 맞게 전기장치를 기존 것은 폐기하고 아예 새것으로 재정비했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다. 각 기계마다 로봇을 설치하여 사람을 대신하게 했다.
몇 달간의 정비를 끝내고 현대, 기아 자동차의 협력사로 외형과 규모가 가장 큰 S사의 금형들이 들어왔다. 특수강의 대형(大型)과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금형을 세팅한 후 자동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놀라웠다. 기계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한 대로 잘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후 S사로부터 또 다른 제품이 들어왔는데 회의용 테이블 두 개를 합한 정도로 드물게 큰 제품이었다. 금형이 어찌나 큰지 생산할 곳도 마땅히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다른 모회사에서 생산했는데 그만 기계의 힘이 부족하여 형상(形狀)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등한 파워의 우리 기계에서 찍어 보기로 하고 금형이 들어온 것이다.
S사의 부서장들이 거의 다 모였고 두 회사의 품질팀과 개발 요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T/O를 진행했다. 물론 형님도 손에 땀을 쥐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과연 저 기계가 자기의 능력만큼 힘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계약한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 시 운전도 해보지 않고 결정한 것이어서 더욱 초조했다.’
드디어 기계가 쿵쿵하고 웅장한 회전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 그런데 기계는 형상이 선명하게 나오도록 찍었어도 아무 무리가 없었다. 저마다 긴장된 마음으로 제품을 살펴보는 요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진다. 형상은 마음에 들게 아주 잘 나왔다.
시범적으로 T/O만 해보고 끝내려 했으나 이왕 금형이 자리를 잡은 것을 기회로 생산을 감행했다. 일일 생산량인 500대를 넘어서 아예 이틀분 즉 1,000대를 작업했다. 우리 회사는 S사뿐만 아니라 여러 고객사로부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집채만 한 기계들은 미국이 아닌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광명시 가리대 삼거리 공장에서 일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젊은 청년은 우연히 옆집 사장을 따라 기아 자동차 트럭 적재함 문짝을 찍는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르는 동안 어려움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정면으로 돌파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온 지 어언 30년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갔다. 꼼꼼하고 누구보다도 사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그로 말미암아 자회사도 여럿 생겨났다. 자신의 꾼 꿈은 어디까지였을까?
지금쯤 고향은 뜨거운 햇살 아래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맴~맴~메~ 매미 울음이 구릿빛 농부의 슬픈 애가를 대신 불러줄 무렵, 어쩌면 산새 우는 이름 없는 고향을 떠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한 번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알알이 맺힌 황금빛 벼 이삭이 손가락 사이로 쏴~악 쏴~악 무겁게 스쳐 갈 때 어디선가 날카롭게 내뿜는 아버지의 고함이 잔잔하던 들판을 순식간에 요동치게 한다. “아무개야~ 내일부터 벼 밸끼데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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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인기 작가님!
Memory3 제3부 옥고를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IMF 시대 위기를 맞은 산업 현장에 닥친 시련,
절망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기회를 잡고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에 주먹을 불끈 쥐어봅니다.
전화위복! 귀한 진리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신 작가의 필력에 감동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덕향문학의 보석 같은 존재이십니다.
덕향문학이 자랑스럽습니다. 작가님이 계시니 더욱더 빛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편집하여 출판사로 송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