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 학원에는 검정원이 2명 있다. 할아버지 검정원님은 도로 주행 검정을 할 때 가르쳐 가며 검정해서 될 수 있으면 합격을 시켜 주려고 노력하고, 나는 그냥 매뉴얼대로 검정해서 수험생들이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 어느 새 소문이 나서 나는 인기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인기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제는 가르쳐 주면서 검정을 했다. 다른 길로 가려는 친구도 살짝 이야기 해서 제대로 가게 만들고, 시동이 꺼지려고 하면 꺼지지 않게 잘 말해 주었다.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지나가려고 하는 데 그냥 지나가버려도 감점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합격을 시키면서도 이 사람이 면허를 따서 도로에 나가서 사고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대충 그냥 합격 시켜 준 수험생들은 자신이 잘 해서 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합격할 실력이 되어서 합격한 것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 그러나 내가 2, 3번 떨어뜨리고 그 다음 시험에 너그럽게 채점해서 합격한 수험생들은 그동안 2, 3번 떨어지면서 열등감 속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의 운전 실력이 합격할 실력이 안된다는 것도 알고, 너그럽게 채점해 준 나에게 고마워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수험생들은 처음에 시험에 임할 때는 ‘이런 시험쯤이냐.’라는 교만을 가지고 있다. 두 번 째 시험에서는 겸손하게 되어 시험에 임하고, 세 번 째 시험에서는 완전히 겸손하게 시험에 임한다.
2, 3번 시험에 떨어지고 4, 5번 째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그냥 가지 않는다. 강사들에게 커피며 과자며 음료수 같은 것을 잔뜩 사가지고 온다. 그건 진짜 감사의 표시이다.
간혹 그런 것을 가져 오는 수험생들 중에 뇌물이라고 의심이 되는 것들도 있다. 시험에 합격하기도 전에 가지고 오는 것들이다. 어떤 수험생은 잘 가르쳐 달라며 돈을 주는 사람도 있고, 건빵이며 뻥튀기를 가지고 온다거나, 어떤 사람은 물휴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인데 물휴지 몇 박스를 가지고 와서 강사들에게 돌렸었다. 어떤 수험생은 시험 보는 당일 날 커피 세 박스와 초코파이 몇 박스를 사고 오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떨어뜨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는 뇌물인 것 같아서 돌려 보냈다. 그런 것을 먹으면 체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난을 많이 당할수록 겸손해진다. 잘 익은 인간이 되려면 세찬 눈비를 많이 맞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이 정도로라도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학원 강사 중에 8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7삭 동이로 태어나서 뇌병변 1급 장애로 지금까지 누워서 기저귀 차고 지내고 있다고 한다. 눈도 사시가 되어 있고 밥도 먹여 줘야 한다. 쌍둥이 남자 아이와 그 밑으로 딸아이도 있는데, 환자 아이 돌본다고 아내는 직장도 못 나가고 집에서 계속 간호만 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10만원 씩 보조를 해주다가 지금은 그 마저 없다고 하고, 아동 시설에 보내려고 해도 우리나라 복지가 아직 미흡해서 수요가 공급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가 아파서 한 번 씩 병원에 가면 MRI니 뭐니 해서 계속 검사를 받아야 되니 비용이 한 번 갈 때마다 몇 백 만원 씩 든다고 한다. 또 의사가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걱정이 많다고 한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식들이 건강한 것이 돈을 버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소망의 집도 연락을 해 보고 여러 시설에도 연락을 해 보았지만, 다들 성인 수용 시설이라서 아동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살 돈이 있고 비교적 건강하게 산다면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불평할 일보다 감사할 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걱정, 근심, 두려움, 불평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삶이 되자.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겸손하게 살면서 하나님보다 앞서나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보다 앞서나간다는 것은 미리 근심 걱정을 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된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두려움을 가득 숨기고 살아간다. 그 한 예가 있다.
몇 년 전, 서울 모 대학교 법대 지하 1층 남자화장실에 낙서가 하나 남겨졌다. 몇 월 며칠 날 엽총을 가지고 와서 다 쏴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누가 장난을 쳤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낙서는 곧 지워졌다. 하지만 그 날이 점점 가까워올수록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이러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 '누가 진짜 엽총을 들고 오면 어떻게 하냐.'고 우려했다.
결국 대학 측은 화장실 낙서에 적힌 그 날이 다가오자 출입문마다 긴급 공지문을 붙였다. 공지에는 '학생들의 안위에 관계되는 불미스러운 낙서가 발견됐다'라고 쓰여 있었고, 법대 건물 1층 정문을 제외한 모든 출입구는 그 전날 자정부터 그날 자정까지 통제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측은 ‘황당한 낙서지만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대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보여 준다.
두려워하는 것은 죄가 된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두려운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두려운 마음을 내쫓는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믿음의 삶, 겸손의 삶은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감사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