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유 창
<군인 아파트 현관 앞의 아이>
울산에서 연대장 임무를 마치고 원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때 재웅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는 대부분 군인 자녀들이 다녔고 학부모는 중령 이하가 많았다. 결혼이 늦었던 나는 그중 드물게 대령 학부형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재웅이 담임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대장이나 연대장 시절, 나는 신병을 받을 때마다 부모님께 직접 전화를 드리며 안심시켜 드리곤 했다. 자식을 맡겨 놓은 부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 아들의 담임 선생님께는 인사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그 무심함의 대가는 어린 재웅이에게 돌아왔다. 어느 날 재웅이가 말했다. 선생님이 지나가다 출석부로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가신다고. 또 화장실 청소 당번도 다른 애는 보통 일주일이면 바뀌는데, 자기만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꾸며 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뒤늦게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도 어딘가 속 보이는 일 같았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결국 우리는 끝내 담임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로서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었다. 나는 대신 출근할 때마다 아파트 현관 앞에 도열 해 선 재웅이에게 말했다. “송재웅, 오늘도 파이팅!” 퇴근 후에는 늘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은 출석부로 머리 안 맞았어?” “화장실 청소는 언제 끝난다니?” 그것이 아버지가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위로였다.
재웅이는 부모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묵묵히 버텨 주었다. 그러나 아이가 참으면 참을수록 내 마음은 면도날에 베인 듯이 아렸다. 아이의 잘못으로 꾸중을 듣는 것도 부모 마음에는 아픈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서툰 처신 때문에 아이가 부당한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미안함이 더 컸다. 그 고통은 학년이 바뀌고 나서야 끝났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그 어린 재웅이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당시 촌지가 공공연히 오갔던 교육계 풍토의 잘잘못은 차치하고, 아직도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다.
<마애 여래불이 준 아이>
재웅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학교 계단에서 다른 학생에게 밀려 굴러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아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이 귀한 집안이라 아들은 내게 특별한 아이였다. 누나 아영이가 태어난 뒤, 나는 삼각산에 주둔하는 부대의 순찰을 갈 때마다 삼천사 마애여래불(보물 657호) 앞에서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꿈에서 부처님이 아이를 안아보라 하셨고, 그 뒤 재웅이가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아이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서울에서는 방배동 뒷산을 넘어 무상사에 들렀고, 고향에 가면 어머님이 다니시던 대원사를 찾았다. 치앙마이에서는 아침마다 한 시간 반을 걸어 도이스텝(Doi Sethup) 산 중간에 위치한 파라다 사원(Pha Lad Temple)에 가서 매일 기도 드리곤 했다.
<다리 밑에 가지 못한 여름>
원주 야전군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여름 토요일이었다. 바쁜 직책이라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좀 쉬려 했는데 재웅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원주천 다리 밑에 놀러 가요.” 친구가 가족들과 다리 밑에서 물놀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장이 실무자 가족들과 물놀이를 해야 하는 불편도 있었지만, 피곤하다는 생각에 그 요구을 받아주지 않았다. 더욱이 시골 중학교 가는 다리 밑에 사는 거지가 비만 오고 나면 가재와 이불을 꺼내 말리던 기억 때문에 더 내키지 않았다. 재웅이의 작은 소망 하나를 나는 그렇게 쉽게 거절해 버렸다.
그때의 그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순간 하나의 추억이 또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내가 같이 갔더라면 재웅이에게 하나의 좋은 추억이 생겼을 텐데…. 아버지의 후회는 한참 뒤에 생겼다.
<계급을 강등 시킨 아들>
재웅이가 이수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장군으로 진급해 지휘관 보직을 받아 모 부대 공관에서 생활할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가정환경을 조사차 묻자, 재웅이는 아버지가 군인으로 대령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왜 그랬느냐고 늦게 가족이 물으니, “ 허름한 전세 집인데 장군이라고 하면 선생님이 집에 올까 봐….” 그랬다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먹먹했다. 아버지 계급을 낮춰 말한 괘씸함보다는, 전세로 살고 있는 현실이 아들에게 미안했다.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에 더 미안했다.
<아들이 자라던 시간>
재웅이는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느 날 외박을 얻어 전세집에 들리니 느닷없이 물었다. “아빠, 나 육사 시험 한 번 볼까?” 순간 가슴이 뛰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아빠가 걷는 ‘군인의 길을 벌써 이해하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아빠를 보고 ‘국가에 대한 어떤 사명감을 배워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나는 한동안 마음이 무척 들떴다.
자식이 부모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일만큼 행복한 삶이 또 어디 있겠는가. “미리 준비되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우선 수능시험을 잘 보아 적성에 맞는 전공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 혼자만 국가에 봉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에서 할 일은 충분하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선택한 목표였다. 충분한 각오 없이 육사를 선택했다가 설령 입학하더라도, 학업과 강한 훈련 속에서 잘 못하면 유종의 미를 거둘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소한 자식으로서 아빠의 삶을 한 번쯤 생각해 준 아들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자랑스럽다. 아버지 길을 따라오겠다던 그 말 한마디가.
대학 진학 때가 되자 재웅이는 Y 대 법대를 희망했다. 나는 현실적인 이유로 다른 전공을 권했다. 법대를 나온 후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실패했을 경우의 리스크를 생각해서였다. “졸업 후 직업과 연계된 전공과목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는지 ‘서울 모 대학 세무학과에 수시로 원서를 접수시켰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합격했다.
대학 시절 내내 거의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다. 장학금을 받을 때마다 나는 성적표를 몰래 복사해 지갑에 넣고 다녔다. 친구들을 만나면 슬쩍 꺼내 보이며 아들 자랑을 했다. 그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팔불출 아버지였다.
< 아버지는 그때 몰랐다>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 휴대폰도 없이 학교에 다녔다. 내가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학생이 무슨 휴대폰이 필요하냐.” 며. 그때는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졸업 후 핸드폰이 없어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아버지의 고집이었다는 것을.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외롭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
대학 졸업 후 아들은 한국증권거래소(KRX) 입사를 준비했다. 1차 합격 후, 2차 면접 전날 밤에 긴장하여 위층과 아래층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긴장을 풀어주고 싶어 일부러 2층에 올라가 태연한 척 말했다. “재웅아, 이거 하나 스캔해 줄래?” 그러자 아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면접 있는 거 모르세요.”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긴장한 아들에게 평상심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그 마음은 끝내 전하지 못했다. 그 일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다행히 재웅이는 한국 증권거래소에 합격했다. 전국에서 스물세 명을 뽑았는데, 세무학과 출신은 재웅이 혼자뿐이었다. 나는 그때 참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지가 육사생도 때 외가 초상집 가서 나를 자랑하셨던 것처럼, 나도 세상 사람들에게 아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제사를 맡은 아들>
2019년 설날, 추위를 피해 치앙마이에 있었다. 설날 이전에 귀국하여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려 했으나, 비행기표를 늦게 예약하려다 값이 비싸 설날이 지난 다음에 귀국하기로 하였다.
비행기표 예매 전에 “제사를 잘 모실 수 있겠느냐?”고 재웅이와 집사람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다. 그들은 “조상님들의 제사를 잘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하여 늦은 비행기표를 예매할 수 있었다. 재웅이와 가족들은 제사 모시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주었다. 화면 속에서 재웅이는 조용히 향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가 하던 일들을 아들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구나 하고.
이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예쁜 손녀까지 안겨 줄 것 같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아파트 현관 앞에서 서 있던 어린 재웅이가 남아 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아직도 말하고 싶다. “아들아, 그때 참 많이 미안했다. 그래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