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愛山) 김진호 목사님의 한문 설교
‘무화과’ 간행에 참여하면서
오세종 (예수원교회 목사)
상동교회에는 애국지사 전덕기 목사를 추모하는 기념비문이 있다. 이 비문을 지은 이가 애산(愛山) 김진호 목사다. 애산은 탁사 최병헌 목사나 전덕기 목사의 이름에 가려 그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걸쳐 민족의 수난기에 걸쳐 한국기독교 역사에 우뚝 섰던 목사요 애국지사다.
애산은 고종 10년(1873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26세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상경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민영환의 충절사로 온 나라가 비통해 할 때, 그는 민족을 구원할 길을 교회에서 찾아보자고 승동교회를 찾아 갔다. 그곳에서 ‘민영환의 절명사’에 대해 물으니, ‘민영환은 역적이라’는 대답에 크게 실망하고, 다시는 교회를 찾지 않겠다고 돌아섰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얼마 후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찾아갔다. 전덕기 목사로부터 ‘충정공은 역적이 아니라, 충신이라’는 대답을 듣고, 즉시 개종을 결단하고 상동교회에 입적하여, 전덕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전덕기 목사 사택에 거하며,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 교원으로 역사를 가르쳤다. 그 때, 전덕기 목사와 이동녕 선생은 애산에게 비밀 애국조직인 신민회에의 가담을 권하였다. 애산은 양기탁의 문답을 통과한 후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오, 하나님께 바친 몸’이라는 결심을 하고 신민회 회원이 되어 활약했다.
신민회는 소위 상동파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인물들인 전덕기 김구 이동휘 이동녕 이준 남궁억 신채호 이상설 최남선 양기탁 주시경 윤치호 이회영 이승훈 이필주 이승만 김진호 등이 그 때의 주축이 되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모였다. 이들은 전덕기 목사가 사망하고 (1914년), 일본 순사들의 교회 사찰이 극심해지자, 대부분 만주 등지로 그 근거를 옮겼다. 이 때, 애산은 신흥우의 권유로 1916년부터 배재학당에서 성경, 한문, 조선역사를 가르쳤다. 배재학당 교원 시절에는 강매 선생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3.1 만세운동 때에는 만세를 부르다 서대문서에 구금되었고, 인천내리교회 담임 시절에는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상해로 탈주시키는 일을 도왔다.
한편, 이태원에 교회를 세웠고, 배재학당에서 19년 6개월을 복무하고, 궁정동교회 삼청동교회를 담임하며 원동교회도 돌보며 목회를 했다. 1940년에는 함북 청진으로 파송되어, 경성으로 전근하였는데, 가난한 생활로 인해 부인은 남의 집 빨래, 바느질품을 파는 일까지 하면서도 주을교회, 생기령교회, 어항교회 설립하고 6개 처 교회를 돌보았다. 8.15 광복을 맞고 사흘이 지나자 공산정권에 검거되어, 소련 사회부로 이첩되어 권총으로 위협을 받고, 또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맞으며 숱한 고문을 받았다. 1947년 6월, 월남을 결심하고 남하하는 길에 해주에서 또 검거되었으나 용당포에서 밀선을 타고 남하했다. 그 해 9월부터 궁정교회로 다시 돌아가 시무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 가덕도 목사 수용소, 진해 등지로 피난하여 총리원의 보조로 근근히 지내다 종신했다. 1998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애산은 ‘무화과’(설교집), ‘매일일기’ ‘병중쇄록’, 빙어(氷語), 임하춘추(현대사) 등의 저술과 1,500편이 넘는 순(純) 한문설교, 그리고, 각종 기록들을 남긴 대학자다. 이 정도의 한문 설교를 적을 정도라면 오늘날로 비교해서 말하자면 외국어 동시통역사 수준이라 할 것이다. 애산의 유고는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 개화기 역사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유고들은 지금, 애산의 손자인 여산(與山) 김주황 목사(용인서지방 애산교회)가 보관하며 그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애산은 대단한 설교가요 집필자였다. 그의 집필력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다. 손자 김주황 목사가 정리한 그의 1,500여 편의 한문 설교를 집필 연도별로 구분하면 이렇다.
제1권(유실되었음), 제2권(1927년), 제3권(1928년), 제4권(1929. 8-1930. 8), 제5권(1930. 9-1931.2), 제6권(1931. 2-1934. 5)이 있고, 또 1939년 이후에 쓴 ‘일기책 형태의 설교집’(한문 설교)이 1년에 근 365편 씩 작성하여 그곳이 또 1천 편을 넘는다. ‘일기책 형태의 설교문’ 제1권(약 365편)(1939년), 제2권(약 365편)(1941년), 제3권(약 365편))(1942년), 그리고 1947년 월남할 때까지 1946년-1947년 사이에 적어 놓은 설교문이 또 81쪽이나 되는 등 방대한 분량의 한문설교가 남아 있다. 그 밖에도, 1947년 애산이 월남한 이후로는 설교문을 한글로 적기 시작하여 그 것도 무려 1천여 편이 넘는다.
이번에 간행하는 『무화과』 설교집은 원래는 그 중 제2권 설교집이었으나, 원본 제1권의 유실로 인하여, 이 책 간행에는 ‘제1권’이라 개제(改題)하여 간행하게 되었다.
필자가 애산 김진호 목사님에 대해 그 문한(文翰)을 약간이라도 접하게 된 것은 옛 목사님들의 유고집을 읽던 중 애산 김진호 목사님이 지으신 한시 두 어 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상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10여 년 전 쯤에 윤춘병 감독님께서 애산의 유고집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필자의 집에 까지 오셔서 그 해독을 부탁하셨던 일이 있어서, 그 일로 인해 애산 목사님의 행적을 접하게 되었다.
이번에 애산의 한문 설교집인 ‘무화과’ 설교문 번역에서 초서 번역의 대가이신 조면희 선생과 권재흥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 할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필자 이 번역의 윤문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크나큰 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애산의 한문 설교집인 ‘무화과’에는 일일이 설교자의 이름과 그 설교를 행한 장소에 대해 기록해 놓지 않아서 자세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 무화과에는 애산 본인의 설교 뿐만 아니라, 당대 명사들의 이름이 설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 설교자로 등장하는 이들이 설교문을 한문으로 작성하여 시행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애산이 그들의 설교문을 듣거나 수집하여 한문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당시 개화기 기독교가 한글 보급에 남달리 힘썼던 한글 보급정책으로 볼 때, 그 설교문을 구태어 왜 한문으로 기록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는다.
무화과에 설교자로 등장하는 명사들의 성함과 애산이 설교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명직 4회, 강매 3회, 다석 유영모(柳永模) 2회, 조병옥 2회, 김근하 2회, 김종우 감리사 2회, 박경희(朴敬熙) 2회, 이익령(李翊寧) 2회, 이시웅(李時雄) 2회 등의 설교가 2회 이상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강한주(姜漢周), 김석규(金錫奎), 김성재(金聖載), 김영섭, 김인식(金仁湜), 림상신, 림정섭, 박대희, 박민형(朴敏炯), 박봉조(朴鳳朝), 박인서, 박채희, 백명철, 백영옥, 서태원(徐太源), 신석구, 신영구(申鴒九), 옥강(沃江), 오윤경, 윤필강, 이상철(李相徹), 이수경, 정남수, 정선엽(鄭宣曄), 함준모, 홍병철(洪秉徹), 황치헌 목사 등이 각각 한 번 씩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케이블 목사 2회, 도이명(都伊明, C. S. Deming) 등 선교사의 설교, 그리고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중국 목사 등의 설교문도 수록되어 있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아마도 애산이 배재학교에서 근무 할 때에 초청하여 들은 설교들을 한문으로 기록해 놓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설교한 장소에 대한 기록도 일일이 다 기록한 것 같지는 않으나, 일부는 그 장소가 명기되어 있다. 체부동 10회, 정동교회 5회, 홍제원 2회 그 밖에 중앙교회, 이태원, 연천(涓川), 서강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학자요 교육자요 애국지사이신 애산 김진호 목사의 한문 설교집 ‘무화과’를 윤문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한 애산의 외침이 날선 검처럼 폐부를 찌르는 듯 울려온다.
2011년 조세(肇歲)
예수원교회 목사 오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