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자(世子) 제(禔)를 폐함
18년에 정부 문무백관이 연명으로 상소하되 세자 제(禔) 성색에 침혹하고 학문을 힘쓰지 않으며 세자의 체면을 지키지 않으니 세자의 위를 폐하여지이다. 왕이 허락하다. 혹이 말하되 이때 세자는 세자 되기를 싫어하는 원인이 있으니 그 아버지 태종의 역사를 잘 아는지라.
세자로서 장래 왕위에 올라도 안심할 수 없고 자기가 장자로서 마땅히 세자가 될 터인데 위험과 불안을 느껴 아무 까닭 없이 세자의 위를 사양할 수 없는 고로 일부러 미친 모양으로 방탕하고 세자의 체면을 지키지 않고 방종하기 짝이 없었다 한다. 그리하여 태종이 세자를 폐하고 그 둘째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로 세자를 삼으려 하니 효령은 도망하여 피하였다고 전하여졌다.
왕이 세자를 폐하시고 세자의 아들을 세우고자 하는데 군신들이 가로되 왕자 중 어진 이를 세우소서. 왕이 가로되 충녕군(忠寧君) 도(祹)는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또 정치에 통달하니 나는 충령에게 전코자 하노라. 군신들이 다 하례하여 가로되 신들도 충령을 가르침이라 하거늘 드디어 충령으로 세자를 삼다.
그 이듬해 19년에 왕이 군신을 모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왕위에 있은 지 19년이라.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마음이 편치 못하고 또 숙병이 있어 서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세자에게 위를 전코자 하노라 하시고 보평전(報平殿)에 계시며 대신으로 하여금 세자를 불러 놓으시고 대보(大寶)를 주심에 세자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卽位)하시니 곧 세종이라.
그러나 군국대사는 상왕께 계품하시다. 태종이 위를 세자에게 전하시고 상왕위에 있으나 오히려 군국대사를 간섭하시더니 병조판서(兵曹判書) 강상인(姜尙仁)과 심정(沈正)이 무슨 군사의 일을 왕께만 품하고 상왕께 품하지 않았더니 상왕이 대노하여 다 극형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양령이 너무 광패함으로 상왕이 조말생(趙末生)과 이명덕(李明德) 등을 불러 말하시되 양령이 광패하여 가르쳐도 듣지 않으니 이제후로는 양령을 정부에 맡기노니 법을 범하거든 3조 3잡이 다 다스려도 나는 상관치 않고자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