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5장 18-2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게 열매라고 할 때 이 열매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요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보이셨지만, 단순히 발을 씻기시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요13:1).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고자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이런 사랑을 받았고 또 계속해서 받는 너희라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도 하시는데, 영생을 위한 선택이든 그들의 사역을 위한 사도로서의 선택이든 모든 시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럼 출발만 하고 과정과 끝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다만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하나님은 명령과 순종의 방식으로, 또한 구하고 받는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명하십니다. 그래서 구하도록 하십니다. 명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다면 구하도록 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하시는 것이 있고, 구하도록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할 수 없는 그 일을 누가 이루시느냐?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루시는데, 이루시는 과정에 명하시고 구하도록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택하여 세워 결국 완성에까지 이르게 하시는데,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열매가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또 항상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계속해서 구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은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명하시고 구하라고 하시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려고 하는 자세로 나타나야 합니다.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노력하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지만, 모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오늘 본문은 그 성격이 약간 달라지는데, 18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앞에서는 계속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명에 대한 순종해야 한다,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권면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럼 이런 사랑을 보이면 상대편에서 동일하게 사랑으로 응답하는가?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 그도 역시 선으로 응답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대접한다고 하면 대접 받은 사람 역시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선을 베풀면 항상 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복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복음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을 베푸는 사랑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영생으로 택할 뿐만 아니라, 너희를 복음의 사역자로 택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미워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는가?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합니다. 즉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럼 세상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가?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여러분,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 없이는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기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예수님에 앞서 주의 길을 준비했던, 주께서 오실 길을 곧게 했던 세례 요한의 증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사도들의 복음도 마찬가지요, 구약 전체 가르침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죄를 드러내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어떤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의 모든 방향이 죄를 향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만한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빛을 비추셨지만 이런 모든 점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에,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세상을 악하다고 하는 그리스도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도 동일하게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과도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이상,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그의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상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도록 보여주신 많은 이적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 가운데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도 있지만,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그가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냈지만, 다수의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들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일반계시라고 말하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성의 빛도 있고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본성을 빛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리고 창조와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모습으로 내놓습니까? 로마서 1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는 지혜 있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 짐승,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0-23).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입니다. 당연히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대체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죄요 악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9절을 보시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렇게 알리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간단히 말하면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은 자기의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본래 우리는 모두가 세상에 속한 자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타락한 자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방향은 죄를 향해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만한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셨습니다. 본래는 세상의 일부로 있었지만 거기서 구별하여 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세상과 세상으로부터 구별함을 받은 사람의 차이를 요한복음 15장 안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성자이신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의 삶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요한복음 15장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는 계명과 무관하지 않고, 계명은 결국 사랑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럼 세상은 어떠합니까? 세상에는 사랑이 전혀 없습니까? 미움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도 세상적인 의미에서 사랑이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도 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에서도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외적으로 같아 보이는 그런 사랑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우리는 우리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늘 공로를 자기에게로 돌립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삽니다.
단적인 예이지만 이런 차이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받을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사고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그런 다름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다고 할 때 하나는 진리라면 하나는 거짓이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입니다. 만약 세상이 단지 다르다는 것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었다면 결코 우리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거짓의 분명한 차이, 그리고 이런 차이가 결국 영생과 영벌로 결과 되는 차이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의 내용을 받지 않는 이상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하면 우리와 저들은 같은 지상에서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 그리고 저들이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영생을 향한 길입니다. 영생을 향해 가면서 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목욕한 자로서 발을 씻으면서 가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가는 길은 영생의 길이 아닙니다. 영벌을 향해 갑니다. 목욕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가면서 발을 씻지도 못하는, 그래서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보고는 비판합니다. 우리에 대한 저들이 비판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마5:16). 그래서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선한 열매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인이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제자들이 종이라고 할 때 종은 주인보다 클 수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느냐? 주인인 나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데, 너희라고 다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박해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앞에서 내 말을 지키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너희 말도 지키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21절은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의 복음을, 사도들의 복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게 될 것인데, 다시 말해 박해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왜 이런 일이 있는가?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란 주의 이름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주를 따르는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주를 따르면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런 권면도 하게 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모든 고난이 주의 이름 때문에, 주를 따르는 것 대문에, 주를 따르면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 자체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증명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창 영광에 참여하게 될 자임을 증명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서 저들을 위로하실 때 장차 있게 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핑계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일반계시의 충분성), 특히 유대인들은 더더욱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지만, 세상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 안에는 본성의 빛이 있습니다. 사람 밖에는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해 있다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 어리석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했다면 저들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시작부터가 죄인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죄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들어 죄가 죄를 낳는 만듭니다. 그러나 내가 와서 말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죄가 더욱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경우는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고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죄는 더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거움을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다는 표현으로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즉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한 이상 너희 죄는 더더욱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하여 드러내시길 23절은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5:23) 왜 이런 말씀이 가능합니까?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공경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적합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많은 이적들이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예배할 뿐, 이사야의 말씀처럼 마당만 밟고 돌아갈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 칼빈은 유대인들은 이중적인 위선을 하나님을 향해 차원 높은 신앙인 것처럼 가장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고서도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모세의 율법은 귀하게 여겨 받는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멸시하였습니다. 왜 이런 결과로 나타났습니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24절을 보시면 반복적이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2절에서는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그 말씀의 참됨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적을 보이심으로 증명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한 일’이라고 할 때 선지자 혹은 사도들도 못했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그의 모든 일이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 그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이적 가운데는 예수님만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이적은 선지자와 사도들도 행했습니다. 이때 선지자와 사도들이 행한 일은 주께로부터 받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으로서는 하나님께 받아 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신성으로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죄가 가볍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아예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볍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볍다고 해서 벌을 받지 않는 가벼움은 아닙니다. 아무리 가벼운 죄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가장 심각하고 무거운 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비교적인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셨습니다. 보이셨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보이셨다는 것은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한 그 일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능력이고,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있는가? 25절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일단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시편 35편 19절입니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특히 후반부에 있는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다윗처럼 지금 예수님도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을 말할 때 여러 표현이 있지만 구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시편이지만, 시편을 포함하여 구약을 말할 때 율법이라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 한 부분을 인용하시면서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사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까닭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을 미워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비유로까지 말씀하신 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 아닙니까!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에 보면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갑니다. 이제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자기 종들을 농부에게로 보내는데, 농부들이 종을 잡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종을 보내지만 동일하게 대할 뿐입니다. 결국 주인은 자신의 아들까지 보냅니다. 아들에 대해서는 존대할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상속자이기에 그를 죽이고 우리가 대신하여 유산을 차지하자고 말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다워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때리고 죽입니다. 이런 역사가 구약에서부터 지금 예수님에게까지 오고 있는 겁니다. 까닭 없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만 미워하는 것인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하시는 것은 너희가 내게 속한 자라면 이와 같은 일이 너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들에게도 있었고, 내게도 있었듯이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내게 속한 자라면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 없습니다. ‘까닭 없이’입니다. ‘이유 없이’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고, 구원을 증거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요, 영생이라고 하는데, 그 복됨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생을 위하여 굉장히 힘든 일을 행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미워합니다. 박해하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무슨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굳이 이유를 대자면 저들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 무지하기 때문이요, 또한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택자의 경우 무지한 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완악한 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지만, 그렇지 않은 자의 경우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무지함 가운데, 완악함 가운데 내버려두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탓을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면 하나님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의무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벌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합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한 형벌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증거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26절과 2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 가실 때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승천에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은 복음의 증인으로 서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증언은 27절로 나타납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증언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음을 증거 하면 복음에 대한 적대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8절 말씀대로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게 됩니다. 박해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함께 하시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박해를 할지라도 그 박해에 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히려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실 때 더더욱 진리를 분명하게 증거 하도록 하신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하셨는데, 복음이 모든 자로 하여금 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순종하게 되는 일도 있는데, 그 모든 일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는 만큼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고, 진리로 살게 하십니다. 결국 사도들의 복음 증거가 있을 때 모든 자가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구원의 은혜가 있는 것은 진리의 성령의 역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만이 아닙니다. 20절에서 내 말을 지킨 것처럼 너희 말도 지키게 되는 것 역시 진리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은 늘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과 진리로 사는 사람, 이 두 부류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로 산다 할지라도 한결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부패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셨다면 우리의 모든 방향이 진리로 사는 방향이 되도록 주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면 이끌어 가시는 그 길을 가도록 우리도 힘을 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의 말씀이 매 주일, 주중에 들려진다면 들려지는 그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본래는 세상에 속한 자였지만 그런 우리를 구별하여 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말은 세상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말씀의 사고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난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고를 버리고 말씀의 사고로 살아간다고 할 때 그 고난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하고, 오히려 그런 고난에 대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에 대한 증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주를 따르면서 받는 고난에 더욱 동참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