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성동구청 기독신우회 예배 메시지
성경 본문: 이사야 41:5~7
설교 제목: 광장을 가득 메운 함성
최근에 서울을 방문한 어떤 외국인이 말하기를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한다.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는 군중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한국을 소개하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는 칭찬 일색이다. 지하철이 어떻다는 둥, 카페에서 휴대폰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둥. 그런데 그런 외국인이 주말에 시청이나 광화문 등에서 벌어지는 집회 현장을 방문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이런 것이 아닐까? 아마 전쟁이 난 줄 알았다는 그 외국인의 평가가 적절할 지도 모른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공통의 소원을 노래한다. 삼일독립운동도 광장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한 민중의 함성이었다. 물론 그 함성에 대하여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헌법에 삼일운동의 정신을 명기했다. 그것은 자주 독립국가에 대한 염원이다. 그리고 우리 헌법에는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그 정신과 이념을 밝혔다. 독립과 민주이념이 소중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광장에 모여 함성을 지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사야 44장에는 광장에서 들을 법한 요란한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힘을 내라 하고
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
이사야 44:5~7
여기에는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면서 거대한 우상을 건설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그 거대한 우상을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할까? 그리고 줄로 잡아당겨 누운 우상을 바르게 세울 때 일꾼들의 함성은 말 그대로 이구동성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우상을 세우고 있다. 이것이 이사야 44장을 읽으면서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다.
일제 강점기 때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써서 독립이 요원하다는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을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통일이 가능할까? 대한민국이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진정한 평화와 화합을 실현할 수 있을까? 종교가 인간의 덕성을 고양하여 군자의 나라와 성자의 나라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빈자의 죽음이 없고 강자와 부자의 횡포가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우리 모두 한 가족이며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우리나라 헌법 전문의 끝부분에는 우리의 바람이 다짐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는 광장에 모여 함성을 지르면서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헌법전문에는 그 바람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이라고 했다. 우리는 더 안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데 이런 세상이 가능할까? 우리는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적어도 이런 세상을 바라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에게는 국가의 주권도 있고 군사력도 과거보다는 크게 향상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안전한 나라일까? 우리에게는 기본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삶은 정말 자유로울까? 도산 안창호는 진정한 독립은 죄와 허위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의 자유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진실의 걸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행복할까? 참된 행복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여기서 얼마나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바람은 좋은데 그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나는 우리 조상들과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빛나는 전통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늘의 삶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혼란과 위기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 우리는 모이고 외치고 함성을 높이는 것으로 족할까? 아니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인식과 소망에 허상은 없을까? 그것을 진단하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 성경말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이사야 44장에서 나는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모여 우상을 만들고 세우기 위하여 함성을 지르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의 함성과 오늘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의 함성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다를까? 아마 그 둘은 장소와 시대는 달라도 그 바람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다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앞에서 광장에 모여 우상을 세우는 사람들도 두려움에 떨면서 그렇게 행동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렇게 두려워 떨고 있다. 그들은 저 멀리 땅끝에서부터 부름을 받아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달림을 받았고 소수자와 주변인으로 살았다.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10월 27일 주일 오후에 광화문과 시청 앞 등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여 함성을 지른 적이 있다. 그것도 광장을 가득 메운 함성이었다. 그 후로 주말이면 어김없이 서울의 광장에는 시민들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함성을 지르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두려움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그렇게 함성을 지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10월 27일 광화문에서 울려 퍼진 함성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을까 아니면 정부 당국자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 향하는 요구였을까? 적어도 그 함성은 두려움에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두려움을 떨쳐버린 사람들은 우상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것이다. 그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소란하고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광장에 모여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어쩌면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꿈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면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될 때 이루어지지 않을까? 정의를 요구하는 것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렇기에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헛된 일을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상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비극이다. 자기가 자기를 들어 올리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어쩌면 현실을 잊어버리고 도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두려움을 몰아내고 내적인 변화와 혁명을 이루어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에 진심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그 약속을 받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회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토론하면서 문제의 근원에 이르러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문제를 바르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인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함성으로 우리의 광장을 가득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