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
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들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는 내일을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이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안부를 전하고
분홍신 신고 걸어가 닿을 내일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폐광촌에 혼자 핀 민들레처럼
- 시의 꿈
부탁해요
안락의자에 앉아서 내 시를 읽지 마세요
부탁해요
심심할 때 무료를 달래기 위해
내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지 마세요
싸구려 말들의 장미밭이라 함부로 구둣발로 짓
밟고 가서도 안 돼요
당신, 한 번쯤 내 시의 낱장을 뜯어가
한 줄의 말이라도 수정(水晶)의 마음으로 읽어
주세요
아니면 지나간 불행이 문득 당신을 노크할 때
읽으면 좋겠군요
읽다가 맛 없으면 모닥불에 태워버려도 좋아요
타다가 연기 속에 뼈만 남은 말 하나가
가슴속에 불똥으로 남는다면 더 좋겠군요
혹 불 안 땐 냉돌, 일하다 땀을 씻는 나무의자
꽃피는 날은 떠나지 마라
산의 핏줄로 살구꽃 피어나고 흙의 흰 피인 물
흘러간다
오늘 하루도 뿌리들이 흙을 끌어안는 힘을 견
디어 왔다
빈부에 젖은 하루가 놀빛 저녁에 닿으려면
천의 잎새처럼 생각을 길어 올려야 한다
오늘도 생각을 길어 순금을 빚는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서 반가운 사람 만나면
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인사하리라
그러면 그의 마음도 손수건처럼 펄럭이리라
홑옷 속에 명주의 마음 감춘 사람아
꽃 피는 날은 떠나지마라
꽃 다 져 어두운 날
나는 혼자 지상에 남아
이 세상 가장 정결한 쓸쓸함 한 가닥 빗질하
리라
들판의 꽃 어둠 속에 묻힐 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노래 한 구정 탄주하리라
풀잎 편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 생을 포개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못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집 한 채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
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 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 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월동엽서
순이, 손을 몇 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
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
장작개비 책보에 얹고 가던 등굣길
소백산맥 끝 웅크린 골짜기
너는 전근가는 아버질 따라 진주晋州ㄴ가 사천인가로
닳은 고무신을 끄을며 떠났지만
얼음이 얼다 녹던 축축한 묏부리에 앉아
마른 잔디만 집어 뜯던 나는 지금
허언虛言을 괴로워하는 삐걱이는 강의실 계단을 오르내
린다
스물이 지나 서른이 되어서 너의 그 검정치마도
세상따라 모양이 달라졌겠지만
진주ㄴ가 사천인가의 언덕 아래 조그만 마을에서
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
새로 핀 꽃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겨울 날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
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
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옛날의 금잔디
4월이 오면 살구꽃이 피는 마을로 가야지
죽은 가장지풀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고
초가 추녀 끝에 물소리가 방울 울리는 마을로 가야지
풀밭에는 어릴 적 잃어버린 구슬이
고운 숨 할딱이며 누워있겠지
이랑에는 철만난 완두콩이 부지런히 제 몸에
푸른 물을 들이고
잠자던 뿌리들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물 아래 내려가
물들의 가장 깊은 속살을 빨아먹겠지
눈썹에 앵도꽃을 단 처녀애들은
작년에 넣어둔 분홍신을 꺼내 신고 들판을 달리고
마을 사람들은 햇빛보다 먼저 일어나
간격이 고른 녹색 대문을 집마다 달겠지
동구길엔 비가 와도 짖지 않는 복숭아꽃이 피고
구르는 돌멩이도 부서져 제비풀의 거름이 되겠지
4월이 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옛날의 금잔디
거기 가서 휘파람 몇 가닥 남겨두고 와야지
거기 가서 댕기에 눈물 닦던 누님의 기침 소릴 듣고 와
야지
우수의 이불의 덮고
오늘도 우리 아는 이웃들은 다 무사합니다
자주 손 끝에 덧나던 희망
오래 만져서 닳고닳은 고통들은 잠들었습니다
누더기의 남쪽산에 버짐같은 꽃들은 지고
안부없는 흰새들 내를 건너 날아갔습니다
만나지 못한 사람의 이름만 아직도 열병처럼 이마를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흙 속에 묻힌 옥잠화 씨앗은 제 혼자 따뜻하고
우리가 가장 쓸쓸할 때 부를 이름 하나는
아직 가슴 속에 남겨두었습니다
그대 먼길 가거던 돌아오지 마셔요
그대 못질한 문패와 뜨락의 신발들 다 잘 있습니다
뒷날 부를 노래 한 소절 베개맡에 묻어두고
우수의 이불을 덮고 오늘 밤은 혼자 잠듭니다
나무같은 사람
나무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놓고도
제 모습 땅 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놀같은 방 한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날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 잎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사그치 다듬어 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 하고 펼치면 저녁놀만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오늘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편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로 편지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 듣고 싶다
우리는 꿈 꾸는 자
찢어진 신문지 한 장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내 생애의 반쪽이 뒤척이는 것을 보았네
우리는 모두 꿈 꾸는 자
꿈 꾸면서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오늘 저녁은 서쪽 창틀에 녹이 한 겹 더 슬고
아직 재가 되지 않은 희망들은
서까래 밑에서 여린 움을 키울 것이네
붉은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자동차들은 멎고
사람들은 하나씩 태어나 죽네
우리는 늘 가슴 밑바닥에 불은 담은 사람들
꺼지지 않은 불이 어디 있을까마는
불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네
발 뒤꿈치에 못이 박혀도
달려가는 것만이 우리의 숨이고 목숨이네
우리는 꿈 꾸는 자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맨드라미와 함께
줄이고 깍으며 살아온 아낙의 생애에 대해서
너는 알고 있다
쇠스랑과 두엄더미에 떨어지는 먼지와 달빛에 대해서도
너는 알고 있다
담을 넘어 달아나는 저녁 그림자
연탄 아궁이에 끓는 된장찌개의 열의에 대해서도
너는 알고 있다
쟁반들이 부엌에서 부딪는 소리
별빛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소리
대문이 닫기고 백열등 켜지면
키 작은 맨드라미 너는 혼자 쓸쓸하다
구슬치기 줄넘기하는 아이들 돌아가
저녁은 이제 커다란 공동空洞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 줄기도
너의 작은 꿈을 비춰주지는 못한다
저녁새들 바람 센 가지에 나래를 접고
들 가운데로 흐르는 물 소리 차츰 높아질 때
땅 위엔 휴지 조각만 날리고
너는 빈 대궁이 위에 잘디잔 씨앗 몇 개를
어둠으로 보듬는다
순금의 나날
내 몸은 가벼워 하늘 뜨는 한 점 새의 깃털에 불과해도
오늘 한 때 내 몸을 때리고 간 바람은
어느 산맥에 묻혀 금이 될 것이다
강을 건너며 떠올렸던 이름
강 지나면 잊어버려도
내 걸어온 발자국의 온기 비둘기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날 기다린다
깨어질수록 반짝이는 유리처럼
내 정신 깨어져 파편으로 이 어둔 삶 밝힐 수는 없을까
푸른 들판 바라보면
아직 안 잊힌 풀꽃 이름 많고
등불 켜진 마을 바라보면
아직 불러 볼 이름 넉넉하다
햇빛 밝은 날 기다려
내 키워온 꿈 한 자락
한 사람 이름 앞에 소포로 싸서 보낸다
돌에 새겨진 이름처럼
내 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 한 마디
너는 살이 되지 말고 추운 사람 가슴 데우는
외투가 되어라
저문 날 흰 새의 날개가 어두워질 때
어느 날 내 지친 발이
한 그루 사과나무 아래 쉬고 있을 때
저녁 안부
금호강 가에 저녁놀이 떨어집니다
일하던 사람들은 일손을 풀고
문패없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엉잎도 돌나물도 찾아볼 수 없는 밤이
울고싶은 사람만 마음놓고 울 수 있는 밤이
처마를 누르며 찾아듭니다
거친 들판에는 아무도 씨 뿌리지 않고
풀잎의 얼굴을 한 사람들만
미농지같은 잠을 청합니다
피나물과 바지락을 사들고 오는 아낙들의 얼굴이
더욱 멀러 눈시울을 적십니다
내일 아침 날빛 맞을 때까지
살아있는 이들이여
부디 편안하기 바랍니다
서풍에 기대어 1
별리別離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간 이파리 하나쯤 떼어 가는 아픔이야
별리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있으랴
마음보다 치장이 아름다운 서풍이여
너의 안식의 기도 앞에서 몇 사람은 저녁 수저를 들고
몇 사람은 길 위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기 쉬운 약속을 한다
저녁으로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언약들이 반짝인다
우리는 이제 이른 저녁을 먹고
들 가운데 서서 오늘보다 아름다울 내일을 말할 차례다
펄럭이는 내일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만남보다 진한 이별을 말할 차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문 밖에서 바람은 흰 피륙을 짜고 있다
서쪽으로 가면 왠일인지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들판 끝을 헤매다
서풍의 옷자락에 싸여 돌아온다
선사先史로 가고싶은 장엄한 몸짓의 서풍이여
너의 치마 끝에 내리는 놀의 물감으로
오늘 우리는 주홍빛 이별을 기록해야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기록하리라
어둠 뒤에서 마지막 한 겹 속옷마저 벗고
알몸으로 초록 위를 부는 서풍이여
이맘때쯤 바람과 능금나무의 화간和姦에도
우리는 박수치리
그리고 세상의 푸름들이 시들기 전에
우리는 필생의 편지를
한 사람의 이름 앞으로 보내야 하리
따뜻한 책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민들레 꽃씨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다
조심 많은 봄이 어머니처럼 빗어준 단발머리를 하고
푸른 강물을 건너는 들판의 막내둥이 꽃이여
너의 생일은 순금의 오전
너의 본적은 빗빛 많은 초록 풀밭이다
달려가도 잡을 수 없던 어린 날의 희망
열다섯 처음 써본 연서 같은 꽃이여
너의 영혼 앞에서 누가 짐짓 슬픔을 말할 수 있느냐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
지향도 목표도 없이 떠나는 너는
가장 큰 자유를 지닌 풀밭 위의 나그네
보오얀 몸빛, 버선 신은 한국 여인의 모시 적삼 같은
꽃이여
너는 이 지상의 가장 깨끗한 영혼
공중을 날아가도 몸이 음표인
땅 위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다시 풀잎
사람들에겐 어제 하루도 인생이었다
풀잎들아, 너희의 하루도 생이었느냐
너희들 순결 앞에서는
순결이라 부르는 것조차 불결이다
노래가 되려고 결심한 냇물이 아침을 씻는다
너희가 기울이는 외로움만 한 희망
이슬을 풀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다
저 자디잔 화필의 수채화가 끝나면
계절은 완성된다
온통 초록의 질문으로 돋는 움들
햇빛의 어느 마음이 푸름이 되느냐
마침내 흙의 귀가 된 풀잎들
빨강 파랑으로 말 걸어오는 햇빛이
온종일 풀잎들과 속삭이다
동풍이 딛고 간 풀잎들아
어떻게 물어야 너희의 생을
초록으로 대답하겠느냐
따뜻한 밥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이 어찌 어둠뿐이랴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들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들
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너는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예까지 왔느냐
나무들은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것이 내 믿음이요 신앙이다
나는 내 믿음이 틀렸더라도 끝내 수정하지 않으리라
쌀 안치는 손의 거록함을 알기 전에는
이런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리라
생을 업고 일을 업고 가기 위해선
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종교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편지 읽는 사람
문득 피고 보니 제 몸이 꽃이라고
나무들이 분홍 입술로 말하고
새들은 서러운 노래를 즐거운 악보로 바꾸어 부르며
푸른 어깨의 산 속으로 날아간다
강물이 싣고 온 소식들은 모두 가쁘게 출렁이고
올해는 어떻게 피어야 더 아룸다울가
궁리하며 돋는 들판의 움들
바람이 비질해 놓은 화안한 길 위를
깨끗한 광목 필의 햇빛이 걸어간다
집들은 제 키만큼 소망 하나씩 달고
햇살 쪽으로 치마를 기울이고
꿈에 목마른 사람들은 색실 같은 마음을 엮어
오늘의 소인 찍어 내일로 부친다
껴안기엔 너무 크고 화안한 하루를
일생의 노트 속에 차곡차곡 접어두는 이 설레임
꽃의 하루가 넘치는 아름다움이듯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놓는 사람의 생애를
내 몇 줄 언어로 그대에게 전하노니
마음은 때로 백조가 되어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햇살에게
오늘은 반짝인다는 말보다 더 밝은 말로
아침 인사를 건네고 싶다
짐 다 내려놓고 내가 햇살이 되는 날
나는 햇살만큼 밝은 말 하날
초록의 목에 걸어주고 싶다
유월 푸른 숲 속으로 희고 깨끗한 새 한 마리 날아갈 때
한 사람의 푸른 마음속으로
사람들은 백조가 되어 날아간다
이 세상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이름
사람의 이름보다 향기로운 것은 없다
꽃의 일생이 소낙비와 햇빛의 생애일 때
흙이 실핏줄 터뜨려 붉은 꽃 피우듯
사람은 사람의 이름으로 마음을 꽃피운다
꽃의 언어로 불러주면 금세 음악이 되는 이름들
그런 사람의 영혼이 익어 향기로운 열매가 된다
부르면 부를수록 사람의 이름은
갓 따온 과일처럼 신선하다
메밀꽃 필 무렵
누가 다 된 밥솥을 쏱아놓았나
아직은 퍼 담아도 될 흰 쌀알들
여름이 박하 향기를 데리고 산그늘로 들어가면
들판은 빌로드의 바람으로 제 맨살을 씻는다
잎들이 갓 찍어낸 지폐 소리를 내면
한 트럭의 달빛이 메밀꽃 위로 쏟아진다
저마다 말하고 싶은 입들이
여름 내내 쏟아놓는 이야기책들
마구간의 암소가 갓 낳은 새깨를 핥아주는 걸 본
만월이 산등성이에 흰 궁둥이를 대고
눌러앉아 있는 보름밤
어디론가 뛰어가고 싶은 씨앗들이
하루만 더 - 하고 참고 있는 대궁이 끝
그 위로 쏟아지는 몇 섬의 이야기들
달이 엎질러 놓은 초록 위의 싸리기들
저녁 먹고 놀러 나온 풋가시내들
수직의 나무
나무들이 서있는 수직의 문장 사이로
잘 조련된 바람이 지나간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생목(生木)들의 화첩
항상 높은 데 있는 구름의 제국은 쉽게 무너진다
단순한 생각을 뭉치며 물 흘러가고
검은 바위를 열어젖히고 들풀이 돋는다
짐승의 발과 내 공상은 늘 고전적이다
그러나 나무는 현재에 살고 있다
햇빛의 죽비 소리에 바위는 잠 깬다
들풀의 온기로 바위는 피가 돈다
모든 의문의 문을 밀고 사람들이 문밖으로 걸어 나오고
확신을 가진 계절은 제 가슴에 꽃을 피워 들고
들판을 건너간다
단순한 기쁨에도 즐거워지는 나무
그래서 나무는 잠마저 수직이다
첫댓글 '서풍에 기대어1'를 신청합니다.
주옥같은 시편들 속에서 봄을 느낍니다ᆞ
잘 읽고 갑니다ᆞ
마음은
때로 백조가 되어 신청합니다. 늦었네요?
원고정리하신다고 수고많으셨습니다
따뜻한 책 신청합니다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