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심(春心)
三月韶光沒處收삼월소광몰처수 平仄平平仄仄平
一時散在柳梢頭일시산재유초두 仄平仄仄仄仄平
可憐不見春風面가련불견춘풍면 仄平仄仄平平仄
却看殘紅逐水流각간잔홍축수류 仄仄平平仄仄平
대혜종고(大慧宗杲)
춘삼월 아름다운
봄 경치 거두어 둘 곳 없어
버드나무 가지 위에
눈부시게 흩어져 있네,
가련하다, 애석하게도
봄바람의 얼굴 볼 수가 없고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붉은 꽃잎만 보는구나.
이 게송은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禪師)의 춘심(春心)이란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게송이다. 압운(押韻)은 수(收), 두(頭), 류(流)다. 근체시(近體詩) 평측운통(平仄韻統)에는 맞지않다. 대혜선사(大慧禪師)는 북송(北宋) 때 화두참선(話頭參禪)을 처음 제창(提唱)한 고승(高僧) 선지식(善知識)이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이 있나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없다. 75세로 입적(入寂)할 때 유훈(遺訓)의 말씀만 전한다. 삶도 이러하고, 죽는 것도, 이러한데 게송이 있든 없든 그 무슨 논쟁(뜨거움)인가?<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이다. 대혜선사 열반송(涅槃頌)인 셈이다. 불교(佛敎) 전통강원(傳統講院)에서는 사집과정(四集科程) 중에 대혜선사가 그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에게 화두참선(話頭參禪)을 편지(便紙)로 지도(指導)하면서 쓴 글이 서장(書狀)이다. 우리나라 전국 선원(禪院)에서 참구(參究)하는 것도, 대혜선사(大慧禪師) 어록집(語錄集)인 서장(書狀)이 근간(根幹)이다. 화두(話頭)로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는 수행법(修行法)인 간화선(看話禪)을 창시(創始)한 거장(巨匠) 대선사(大禪師)이다. 이 게송은 자료에 의하면 선종잡도해(禪宗雜毒海) 속에 들어있는 선시(禪詩)로 문하 제자(門下弟子)에게 보였다는 시도(示徒)라는 제목(題目) 게송(偈頌)이다. 춘삼월(春三月) 봄의 풍광(風光)을 읊고 있다. 따뜻한 봄 햇볕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버드나무 가지 잎에 봄은 거두어 두었다고 했다. 정(情)이 경(景)에 이입(移入)한 시(詩)다. 시(詩)는 작자(作者)의 정경(情景)이 하나가 되어야 명시(名詩)라고 한단다. 정(情)과 경(景)은 둘이나 실제에서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시론(詩論)이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시(詩)는 정(情)과 경(景)을 절묘(絶妙)하게 결합(結合)해서 가장자리가 없어야 명시(名詩)라고 한다. 경중정(景中情) 정중경(情中景) 묘합무은(妙合無垠)이다. 시(詩)에 있어서 명시(名詩)는 그래서 천의무봉(天衣無縫)을 강조(强調)한다. 천녀(天女)의 옷 마냥, 꿰맨 자취 흔적이 없어야 하듯이 시어(詩語)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정경(情景)의 선후(先後)는 정수생경(情隨生景), 촉경생정(觸景生情)이다. 정(情)을 따라 경(景)이 나고, 경(景)을 촉(觸)해서 정(情)이 나는 것이 시(詩)다. 춘삼월 봄을 읊은 시인데 봄 풍광은 결구(結句)에서 잠시 폈다가 떨어져 물결 따라 춘광(春光)이 흘러가는 꽃만 보인다고 무상(無常)함을 말하고 있다. 혹여 봄 춘광에 집착하는 제자가 있을까? 노파심절(老婆心切) 게송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 서장(書狀)을 보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촌음(寸陰)을 아껴 수행(修行)하라는 말씀이다.
대혜선사 서장에 보면 지호자야(之乎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지호자야(之乎者也)는 쓸데없는 일이다, 지호자야(之乎者也)는 대혜어록(大慧語錄) 서장(書狀)에서 왕내한(汪內翰) 언장(彦章)에게 답(答)한 글에 나오는 말씀이다. 대혜선사(大慧禪師)는 북송(北宋) 말기 남송(南宋)초기에 살았던 임제종(臨濟宗) 계통(系統)의 대선사(大禪師)이다. 화두참선(話頭參禪)을 제창한 스님이기도 하다. 참선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냥 묵묵(黙黙)히 마음을 관조(觀照)하는 참선을 묵조선(黙照禪)이라 한다.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과 수행체계(修行體系)에 대한 치열(熾熱)한 논쟁(論爭)을 벌인다. 굉지선사(宏智禪師)가 주창(主唱)한 묵조선(默照禪)은 묵언(默言)을 중시하며 좌선을 통해 나와 세계를 관조하는 고요한 수행이다. 그런데 대혜선사(大慧禪師)는 묵조선(黙照禪)을 검은 산의 귀신 굴(黑山鬼窟)로 빠지게 하는 수행이며, 고목이나 불 꺼진 재(枯木死灰)처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조용히 좌선만 해서는 무기(無記) 즉 수행할 때 생기는 멍한 상태에 빠져 결코 견성(見性)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텅텅 비워서 묵묵히 마음을, 비추어 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보면 혼침(昏沈)이 온다. 혼 침은 잠(睡)을 말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또 망상(妄想)이 일어난다. 우리 의식세계(意識世界)를 안으로 관조(觀照)하다 보면 잠 아니면 망상(妄想)뿐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안으로 마음을 관조해 보면 알게 된다. 망상과 잠을 쫓는 방법이 화두(話頭) 참선(參禪)이다. 화두는 의단(疑團)을 말한다. 의단은 의심(疑心)을 말한다. 모든 것이 다 의심이 나지 않습니까? 첫째 내가 나를 모르니까? 그것도 의심(疑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화두(話頭)이다. 요새 말로 하면 문제제기(問題提起)다. 인생은 무엇이고? 우주는 무엇인가? 철학적(哲學的)으로 본질적(本質的)이고 인생(人生)의 근원적(根源的) 질문(質問)을 말한다.
참선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문제제기(問題提起)를 하다 보면 잠이나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 화두 참선법(參禪法)의 장점(長點)이다. 대혜선사가 화두 참선을 창안해서 남송 때 사대부들에게 서신으로 지도한 내용이 서장(書狀)이다. 서장(書狀)은 편지라는 뜻이다. 지호자야(之乎者也)는 왕 내한 언장에게 답하는 글에 나온다. 왕 내한이라는 사람이 대혜선사의 지도로 참선을 한다. 문을 닫고 면벽을 (杜門壁觀)을 한다고 편지로 대해 스님께 말한 것이다. 그러자 대혜선사가 면벽참선(面壁參禪)은 마음을 쉬는 좋은 약이다. 만약 다시 묵은 종이를 뚫는다면 무의식(無意識) 속에 생사(生死)의 뿌리와 싹이 자나 나서 도(道)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狗)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니, 없다(無)고 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라고 한다. 문을 닫고 참선을 한다고 하면 다른 생각 말고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참구(參究)하라고 말씀이다.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話頭)는 화두참선(話頭參禪)의 대표적 화두(代表的話頭다. 어떤 스님이 하루는 조주스님에게 찾아와서 묻기를 개(狗)도 불성(佛性)이 있느냐? 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무(無)라 했다. 부처님은 일체 만물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조주스님은 없다(無)라 했느냐? 이것이다. 이것이 조주무자(趙州無字) 유래이다. 왜? 무(無)라 했는고? 이것이 화두(話頭)가 된 것이다. 대혜 선사께서 왕내한 언장에게 조주 무자(無字)를 화두로 챙기라고 한 것이다. 왕 내한 언장의 나이 70세가 될 무렵이고, 관직이 대양제(大兩制)까지 올라 사회적 덕망이 높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은 다 무상한 것이니, 도 닦은 일에 견준다면 쓸데가 없는 일이라는(之乎者也) 것이다. 지호자야는 네 자가 다 어조사(語調辭)이다. 글자는 글자인데 말과 뜻이 없는 허사(虛辭)라는 말이다. 아무 의미와 뜻 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평생에 살아온 일이, 허사(虛事)라는 말이다. 살아온 삶이 헛된 일이라는 뜻이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서, 수확(收穫)을 하면 곡식이 알갱이가 꽉 차야 한다. 그런데 알갱이가 하나 없는 쭉 쨍이 농사를 지었다는 뜻이다. 풍년이 아니라 흉년 농사가 지호자야라는 말이다. 인생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다 둘 것이냐? 이것이다. 나이 70이 되도록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을 못 봤으니, 그동안 살아온 삶이 쭉쟁이 농사인 지호자야라는 뜻이다. 대혜선사의 구구절절(句句節節)의 말씀을 다 소개할 수가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각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인생의 선결(先決)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화두참선을 하라는 뜻이다. 자기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마음자리를 지켜보라는 말이다. 의식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참 자아를 찾아보라는 말이다. 찾는 방법이 화두참선(話頭 參禪)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화두로는 조주무자(趙州無字)를 들고 참선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참선을 하다 보면 여러 경계가 나타나지만 그 경계에 속지 말고 오직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고? 하고 의단(疑團)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의단(疑團)은 한 생각으로 뭉친 것(一念)을 말한다. 다른 딴, 생각은 없고, 오직 무자(無字) 일념(一念)이 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일념(一念)이 된 것을 화두삼매(話頭三昧)라고 한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렇게 화두 한 생각뿐이다. 이렇게 화두삼매가 계속 이어져야 참선공부(參禪工夫)가 좀 되어간다고 한 것이다. 참선 공부는 마음을 하나로 모우는데 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야 우리 내면의 마음자리를 통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밑바탕에 있는 자아(自我)의 실체(實體)를 꿰뚫어 보아야 본질적 문제가 답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말씀하셨다. 잠깐 일어나는 것은, 병이다(瞥起是病).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약이다(不續是藥).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不怕念起), 알아차림이 더딤을 두려워하라(唯恐覺遲). 부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佛者覺也). 항상 깨달아 있는 까닭에 (爲其常覺故) 대각이라고 한다(謂之大覺). 우리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참선은 깨어있기 위한 수련이다. 그 깨어 있기위한 방법이 화두참선이라는 말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오늘 주제는 대혜선사 서장에 나온 지호자야와 춘심(春心) 게송(偈頌)으로 자아(自我) 문제를 돌아보았다. 지호자야는 쭉 쟁이 삶을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