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말 작은 삶, 정말 큰 결실>의 줄거리:
채소에 속하는 겨자의 씨는 깨 낱알이 부스러진 한 티끌 같은 크기인데 반해 다 자란 겨자는 채소임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3-4m에 달하여 커다란 나무를 방불케 합니다.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내 노력과 수고가 겨자 나무 같은 결말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겨자 나무 크기의 노력과 수고를 들여서 겨자씨 같은 결말을 얻는 삶은 이제 끝내십시다.
정말 작은 삶 정말 큰 결실
(마가복음 4:30~34)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정말 작은 삶 정말 큰 결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정말 작은 삶 정말 큰 결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삶의 크기는 겨자씨처럼 작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겨자나무와 같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이와는 반대였습니다. 겨자나무처럼 큰 삶을 살고자했고 겨자씨 같이 작은 결실을 맺어왔습니다.
겨자는 1~2년생 풀로써 씨가 작기로 유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31절에서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는 온 지구에서 가장 작은 씨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씨들 중에서는 겨자씨가 제일 작았기 때문에 이러한 예를 드셨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작은 씨의 대명사는 겨자씨였던 것입니다. 통깨를 절구로 빻으면 부스러기가 되는데 겨자씨가 꼭 그렇게 생겼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정해진 형체도 없는 부스러기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다 자라고 나면 3~4미터나 되고 최대 7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가지와 잎이 얼마나 무성한지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겨자는 배추나 시금치 같은 채소입니다. 그런데 다른 채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씨를 가졌음에도 크고 나면 나무와 같이 무성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겨자의 생태로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비유의 요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 같은 겨자씨의 작음과 최대 7미터까지 무성하게 자라는 큼은 대조적입니다. 처음의 작음과 마지막의 큼이 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비유를 하늘나라가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내용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형님네 가족이 배웅을 나왔는데 아장아장 걷는 조카아이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20년을 외국에 나가 살다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형님네 가족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형님 옆에 못 보던 청년이 서있는 것을 봅니다. 키가 180cm 되는 청년을 보고 누구인지를 물으니 20년 전에 그 조카라고 합니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성장한 조카의 모습을 보며 마음에 신기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를 통해 전달하시고자 하시는 핵심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에 우리 마음에 이러한 감동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약 삶에서 이러한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나라를 경험해보지 못한 셈입니다.
앞서 우리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사시는 하나님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네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또 스스로를 숨기시고 감추시는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나타나시는 그 좋으심을 삶의 현장에서 측량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도 살펴보았습니다. 종합해보면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며 살아갈 때에 삶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가시는 하나님나라가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30절에서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본문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말씀들과 이어지는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관계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하든, 하나님의 이름에 관계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관계하든 모두 마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특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려는 욕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에 하나님도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말씀도 관계를 하고 반응을 할 수도 있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려고 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이 공백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위해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말씀에 대해 마음을 옥토로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생겼을 때에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러한 근심 걱정을 했을까?”라고 자문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올 수 있는 답은 근심 걱정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은 물론이고 혹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지만 좋아해서 갖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러한 대상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올 수 있는 대답이 또한 이렇게 세상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상 것들보다는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갖고 싶은 명품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옥토로 만들고 좋으심을 측량할 때에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마음을 옥토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바로 십자가 생활화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을 벌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본문 비유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벌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요점은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무엇으로든 마음을 채워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마음이 채워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만드셨기에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에는 작은 수고 외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대상들을 통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수고에 비하면 하나님을 얻기 위한 수고는 겨자씨와 같이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의 결과가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수고를 통해 하나님을 갖게 되면 그 결말은 겨자나무와 같이 무성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수고를 통해 얻게 되는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재벌이 되었습니다. 이 재벌이라는 결과를 배추라고 해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을 옥토로 만들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며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성한 겨자나무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배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정리해봅니다. 겨자씨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고입니다. 겨자씨가 다른 씨들에 비해 훨씬 작은 만큼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고는 다른 일들에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훨씬 작습니다. 그리고 겨자나무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결과입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무성한 나무가 되는 것처럼 세상의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결과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벌이나 대학총장 혹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면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마음 채움이라는 측면에서 배추나 시금치 정도의 크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만한 결과를 두고도 훌륭하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과 만족은 무성한 겨자나무와 같습니다.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얻으면 행복하겠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이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채우기에는 돈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돈을 벌고자 합니다. 다만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 기쁨을 얻는 길로 여길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럴 수 없었지만 자녀만큼은 서울대를 보내서 기쁨과 만족을 누려보고자 합니다. 다만 서울대 합격하기는 돈 벌기 이상으로 힘듭니다. 합격을 위해 들어가는 수고와 노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예전에 “스카이캐슬”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아이를 서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한계까지 몰아붙이지만 결국 그 아이는 자살에 이르고 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길로 여깁니다. 결혼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결혼하기까지 들어가는 수고는 물론이고 결혼한 후에 함께 살며 행복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 되면 행복하리라 여기고, 직장인들은 승진하면 행복하리라 여기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면 행복하리라 여깁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들이는 수고와 노력을 생각하면 만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만은 다릅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이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수고와 노력의 크기는 세상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겨자씨와 같이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벌기는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옥토 만들기와 하나님의 좋으심 측량은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세상 일로 인해 걱정과 근심이 생겼다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우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마음의 공백을 돈으로 채우려 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노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벌기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수고와 노력에 비교해보자면 하나님 벌기는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천하에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을 벌어서 마음을 채우는 것보다 쉽고 작은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일을 외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마음에 걱정근심이 생길 때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고 자문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한 길은 예수님이 하늘까지 내신 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또한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는 수고도 노력도 전문지식도 필요치 않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떠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불치병 환자가 마음을 채우기 위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만은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날에는 누구도 어려워서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를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로부터 이러한 길이 있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알았다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마음을 세상으로 채우는 일은 어렵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 길을 따르는 것은 천하에 쉬운 일이고 작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벌면 삶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제가 산책을 하다보면 강릉 경마클럽에 소속된 분들이 말을 타고 다니시는 모습을 봅니다. 말이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겨자는 채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을 가릴 정도로 크고 무성하게 자랍니다. 배추나 시금치 같은 채소들과 감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면 이렇게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엄청난 노력을 통해 재벌이 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기에 무척 실한 배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한편 겨자씨만한 노력을 통해 하나님을 번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배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겨자나무처럼 여겨집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 2~3절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상 솔로몬과 같은 영광을 누려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온전히 채워지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떠한 가치도 필요 없게 느껴집니다. 솔로몬은 모든 영광을 평생 누려보고 나서야 그것들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우리는 솔로몬의 단계를 뛰어넘어 세상의 가치들이 헛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헛됨을 느끼는 이유는 온전한 마음의 채워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게이츠나 마윈이나 트럼프 대통령도 알 수 없는 깨달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수고하고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가진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전에는 자랑으로 여겼던 신분과 지식이 마음 채움에 대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화 받은 바울은 빌게이츠의 재산이 있었을지라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권력을 얻었더라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이나 아름다움 또는 자녀의 형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설령 병상에 누워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환자일지라도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가장 고상한 일입니다. 차마 믿어지지 않으실지라도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모두 졸업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때에 나타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삶에서 하나님나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삶은 겨자나무 비유와 일치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자면 요셉은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총리가 되는 과정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아들이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라는 겨자나무로 변하여 돌아오게 된 셈입니다. 요셉이 한 일이라고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릴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노예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 외에는 한 일이 없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왕이 된 과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겨자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 겨자씨와 같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15살짜리 목동이 골리앗을 돌 하나로 쓰러뜨리는 일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윗은 오직 하나님 벌기만을 했습니다. 하나님 벌기만 하는 동안에 삶에서는 하나님나라가 진행되어가는 과정 중에 골리앗을 죽이고 왕이 되는 일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근동지방을 기근으로부터 구한 일이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 일에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오직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겨자씨와 같은 일을 했을 때에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할 수 있었고 삶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빌게이츠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수백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합니다. 미국정부는 5,000억 달러를 경기부양책으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일 년 예산을 넘어가는 금액입니다. 한편 저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돈이란 기껏해야 500만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란 실로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대단할 일이라도 이루겠다는 듯이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다윗의 삶에서도 드러났듯이 하나님이 한 번 움직이시면 나의 수고와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 또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겨자씨만큼의 노력과 수고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울 때에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충격을 받으실 지도 모릅니다. 부스러기 같은 겨자씨 속에 무성한 나무를 이루는 기운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마음에 하나님을 담을 때에 삶에서도 반드시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놓치고 살았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깨달음을 얻었다면 삶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노력과 수고를 쏟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매달 들어오는 연금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금으로 마음을 채우는 동안 하나님을 잃는다면 그보다 큰 손해는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적용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다면 연금이 생명줄처럼 느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드신다면 그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 나면 한 번 움직이실 때에 5,000억 달러를 움직이실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또한 움직여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예배당 조직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삶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보다 쉬운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했던 수고에 비하면 정말 겨자씨처럼 작은 수고와 노력 밖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성한 겨자나무처럼 삶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생을 정말 보람차게 살아가기 위해 이 겨자씨 비유에 담긴 복음을 삶에 적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벌기는 천하에 가장 쉬운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근심걱정이 생길 때에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으로 자문하고 걱정이 생긴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것을 갖고 싶고 아까운 마음이 들 때에도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이것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을 가지시기 위해 나서시는 십자가 생활화의 모든 하늘 가족 여러분 파이팅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를 끝없이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벌고 하나님을 가지는 겨자씨 수고를 통하여 무성한 겨자나무를 이루는 놀랍고 충격적인 삶을 날마다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