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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작가인 후쿠모토 노부유키가 니체에 심취해 있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 '역시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찾아왔습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은과 금> <최강전설 쿠로사와>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잘 소개된 이 작가의 매력은, 삶을 바라보는 놀라운 통찰력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작품이 곧잘 철학만화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 통찰력 때문이죠. 이해하기 쉬운 매우 효과적인 표현으로 삶에 대한 생생한 시각을 독자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이 작가가 지닌 대단히 탁월한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기조는 실존철학에 근거해 있는 주요한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주요한 저작들에서는 늘 이와 관련된 하나의 물음이 제공되고 있죠.
"인간으로서, 또 생명으로서 스스로 선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따라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과 관계없이, 자신들이 스스로 서는 현실을 발견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세우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독자인 우리에게 분명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실, 상기한 물음은 실존철학이 제시하고 있는 가장 주요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어적 한계 속에서, 실존철학이 진정으로 견인하고자 하는 삶의 생생함과 뜨거움은 곧잘 망각되는 경우가 많았죠. 대체적으로 하이데거나, 프랑스의 실존철학자들에 의해, 실존철학이 뭔가 삶의 실제와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삶에 대해 과잉되게 까탈스러운 이미지를 담보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후쿠모노 노부유키는, 실존철학이 실존철학일 수 있는 그 핵심적인 생명력을 보다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만화라는 매체가 내포한 접근성 높은 특성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 작가가 실존철학이 표현되어야 할 정확한 방향성을 알고 있다는 데서 그 주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실존철학의 정확한 방향성을 얘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상기한 물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간으로서, 또 생명으로서 스스로 선다는 것이 무엇인가?"
실존철학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을 전개하거나, 일상과 동떨어진 관념적 사색에 빠져야 할 것이 아니라, 또는 그 모든 것들의 결과로서 곧잘 드러나게 되는 비극적 자아도취의 정동에 빠져야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물음만을 정직하게 붙잡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 물음이야말로 실존철학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이는 더 간명한 물음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실존철학이 이처럼 우리 자신을 통해 스스로 서는 존재를 요청하고자 할 때, 실존철학은 선(禪)과 대단히 유사해집니다. 실존철학과 실존상담의 개척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죠. 실존철학 내지 실존상담과, 선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실존철학은 선이 그러한 것처럼, 생명의 문제입니다.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가장 존귀한 생명의 존재와, 무엇으로도 구속될 수 없는 가장 온전한 생명의 자유와, 무엇으로도 억압될 수 없는 가장 생생한 생명의 힘이, 바로 실존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존귀한 존재, 우리의 온전한 자유, 우리의 생생한 힘이 곧 실존철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정확하게 이 실존철학의 핵심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그의 작품 중에서 이 <무뢰전 가이>는 모범적인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이 작품은 가이라는 중학생 소년이, 삶의 권태와 무의미성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과 생명력을 자각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이는 실존의 현실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모험담입니다.
그러나 실존의 현실이 우리의 일상과 충돌된다고 간주하는 오해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담은 핵심적인 사건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힘을 목소리높여 주장하게 되면 결국 사회의 규칙과 충돌할 것이라는 오해가, 우리에게 근본적인 한계의 족쇄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 오해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일견, 사회의 규칙에 저항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은 곧 사회로부터의 추방을 야기하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죽음이니까요.
이 작품에서도 가이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가장 최저의 추방자가 된 셈이죠. 사회가 가장 준수하고자 하는 규칙을 어긴 까닭에, 가이는 언제 죽어도 마땅한 최악의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밑바닥에서 가이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마치 수도승처럼 혼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자신을 단련하던 가이는, 어느날 동급생의 음모에 빠져 동급생의 할아버지이자 재벌가의 총수인 인물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가이는 홀로 고립된 생활을 해왔던만큼, 누군가가 누명을 씌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사회는 가이가 누리고자 하는 아주 소소한 고립의 자유마저도 용인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경찰로부터 도주하던 중에 막다른 길에 몰려, 가이와, 이후 가이의 조력자가 되는 아베 경위는 서로 대치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베 경위는 가이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지는 역할을 맡게 되죠.
"힘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전까지 자신을 단련해오며 얻게 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파괴력이 힘이라고 생각했던 가이에게, 이 물음은 커다란 화두가 됩니다.
이 힘의 문제는 실존철학이, 특히 니체가, 가장 오해받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파시즘이니, 권력의 예찬이니 등과 같은, 실존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비판들이 사상사 속에 존재해왔죠. 특히 나치의 편을 들기도 했던 하이데거 덕분에 그러한 오해는 더욱 심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존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힘은, 이 작품에서도 묘사되듯이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토끼에게는 도망갈 수 있는 힘이, 늑대에게는 사냥할 수 있는 힘이 있듯이, 이 생명력은 모든 생명에게 그 개체만이 행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실존철학에서 주장하는 힘의 의미는, 바로 개개인이 이 자신만의 생명력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쌓아올릴 수 있는 그 생명력 말이죠.
실존철학에서 힘은 좋은 것입니다. 이 선언은 저마다의 힘을 가진 모든 생명에 대한 긍정입니다. 반드시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가진 생명 전부를, 실존철학에서는 긍정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철학에서는 마치 늑대나 사자와 같이 다른 개체를 지배하고자 하는 힘을 추구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비판을 가한다면, 그 비판을 가한 자가 오히려 늑대나 사자와 같은 힘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일 것입니다. 실존철학에서는 결코 늑대나 사자를 토끼나 양보다 가치적 우위로 놓고, 이를 추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누구나 동등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평등한 존재라고 보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에서 힘을 얘기하고자 할 때, 이는 결국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강한 힘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강한 존재감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누구와도 비교될 필요없이, 이미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실존철학이 주장하는 힘은 이처럼 오직 생명으로서의 자신의 정당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리고 가이 또한 아베 경위의 물음을 통해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실존적 자각의 순간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나치 치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실존상담의 한 형식을 창시하게 된 빅토르 프랑클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삶에 대해 대답을 묻지 말고, 삶이 던져온 물음에 대답하라."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라는 얘기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세상이 알아줄 것을 요청하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세상이 알게끔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존철학에서는, 우리의 존재는 스스로 확보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누가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꽃이 스스로 피어나고, 새가 스스로 날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커다란 신뢰와도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스스로 서는 인간의 당당한 자태가 놓여 있습니다.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우리가 힘을 행사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한다는 그 의미입니다. 가장 신성한 기준이든, 가장 비천한 기준이든 간에, 그 어떤 기준으로도 규정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는 그 당당함의 선언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의 얘기처럼, 우리는 현재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을 통해서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존철학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부정되지 않습니다. 실존철학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관념 속에서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대답해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이는 현재 누명으로 인해 자신이 체포되어야 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진정한 나'를 만들지 않고, 오직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까닭입니다.
이는 실존철학에서 수용(acceptance)으로 잘 알려진 개념입니다. 수용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는 그러한 임의적인 자아의 섭식이 결국 온전한 생명력의 소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죠. 실존신학자인 틸리히 또한 수용을 강조하면서, 이 수용의 의미는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온전함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출현합니다. 온전함(wholeness)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통째로'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온전함을 원한다면, 우리는 삶을 통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로는 온전함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면서, 실제의 삶으로는 취사선택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온전함이라는 표현이 대단히 뜬구름잡는 식의 얘기가 되어버린 것이죠.
우리가 온전함을 경험할 때, 우리가 생리적으로 정확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서있다는 놀라운 감각입니다. 이는 현실의 조건들을 전부 받아들인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서있는 그 주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감동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선험적 기준들에 의해 구성된 삶의 피상성을 직면하여,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권태, 정체, 소외, 무기력 등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우리는 실존의식이 출현한 순간이라고 얘기합니다.
실존의식은 삶의 온전성이 붕괴되었을 때,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출현합니다. 즉,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누리지 못할 때, 이 스스로 서있지 못한 현재의 삶을 자각시켜주고자 실존의식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가이는 결국 이 실존의식의 안내를 따라, 그동안 지내던 고아원에서 나와 폐가에서 홀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위대한 모험의 결과, 스스로 서는 현실, 즉 온전함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좀처럼 온전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이와 같이 간명하게 묘사됩니다.
'통째로'인 삶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감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삶만 있지, 그 삶을 실감하고 있는 주체가 실종되어 있는 까닭에, '통째로'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서있다는 실감은 곧 삶의 주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발견되고, 주체와 삶이 분리될 수 없는 통째로 연결된 까닭에 온전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이의 모험은 바로 이 주체, 즉 삶과 연결된 스스로의 존재감을 발견하고자 이루어졌던 일종의 실존적 실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통해 가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자유란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한, 많은 것이 제약되어 있다 하더라도, 늘 무한히 자유롭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선사(禪師)의 가르침과도 같은 울림을 듣습니다.
그리고 가이는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이 자유야말로, 생명의 기본 중의 기본이자, 존재의 대원칙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발견을 더욱 심화시켜갑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실감, 즉 삶의 생생함은 바로 이 스스로 서있다는 자유의 감각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또한 현실을 통째로 수용함으로써 경험된 온전함에서 비롯한 것이고요. 삶, 생명, 힘, 존재, 자유, 수용, 온전함과 같은 개념들은 이처럼 실존철학에서는 한묶음입니다. 이것들은 함께 동시에 성립되는 것들이지, 어느 하나만 독립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함께 구성됨으로써 발견되는 현실, 바로 그것이 실존상담에서 묘사하는 실존의 현실입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대답하기 위한 탐구의 여행을 통해, 가이는 끝내 이 현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는 곧이어 다음의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현실이 홀로 고립된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운데서도 발견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을 통해, 가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얘기한 사르트르를 뛰어넘어, 선의 과정을 묘사한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그림, 즉 입전수수(立廛垂手)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임의적인 고립을 통해 만들어진 낙원은 반드시 붕괴됩니다. 그러한 낙원은 이 세계의 상호연결성 및 무상성을 무시하고 구축된 해변가의 모래성과 같거든요. 세계는 그 신기루와 같은 낙원을 결코 그 모습 그대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다 견고한 실재와 만날 수 있게끔 반드시 우리를 그 낙원으로부터 추방시키게 되죠.
앞서 묘사된 것처럼, 가이 또한 그가 경험하고 있던 한순간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살인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그리고 가이는 사람들의 이 오해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 속에서 다시 한 번 대답하고자 합니다. 그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서요.
그 과정은 가이가 끌려간 '인간학교'라는 이름의 소년형무소 안에서의 사건들로 묘사됩니다.
가이는 모범적인 인간상으로의 갱생을 기치로 걸고 있는 인간학교의 잔혹한 고문 속에서 저항하다가, 문득 자신의 저항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늘 동일하게 이루어져 온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가이는 정말로 이기기 위해서, 정말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라고 할지라도, 저잣거리에 응답될 수 없다면 공허한 신선놀음일 뿐입니다. 혼자만의 다락방 안에서의 자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혼자만의 지복을 지향하고자 하는 많은 종교의 원리 내지 수행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실존철학은, 그리고 선은 이러한 지향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착각이 놓여 있는 까닭입니다. 그 착각은 아주 일반적인 표현으로 '나는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입니다.
근본을 따지자면,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근본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입니다. 이 명료한 사실 속에서, 나라는 생명은 타자라는 생명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평등합니다.
그도 나만큼이나 온전하고, 그도 나만큼이나 지혜로우며, 그도 나만큼이나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나는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라는 착각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평등한 현실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한, 낙원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평등하지 못한데, 어떻게 인간의 낙원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실존철학은 평등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그 자신 안으로 편입시킵니다. 평등을 반석으로 삼을 때에만, 그 위에서 우리가 정말로 누리고자 하는 현실이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유사한 얘기로, 이 세상에서 혼자 깨달음을 얻어 고고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건 깨달음이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서 깨달은 삶을 함께 나눌 때에만 우리는 그 삶을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가이는 이 사실을 조금씩 이해해가며,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기꺼이 승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이 일은, 우리의 일방적인 봉사나 헌신이 아니라, 정확하게 우리가 받게 되는 호혜와, 우리를 열어주는 감수성을 증진시킵니다.
여기에서는 타자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을 떠나 홀로 고립된 자유를 누리다가, 다시금 사람들에게 참여하기를 선택했을 때, 이 선택은 우리에게 타자의 중요성을 새롭게 경험하게 해줍니다.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개체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정말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실감될 때, 우리가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자신이 특별한 가치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믿음이 그저 허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이처럼 진정한 감사함이 발견되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이 삶을 이끌어간 결과는, 주체의 독존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사의 발견입니다.
타자가 존재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 발견은 물론 역으로도 성립됩니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통해 함께 서있을 수 있게 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갖는 이 상호적인 관계성의 실제를 발견한 자리에서, 자타의 우열과 가치를 지정하는 일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상호적인 관계성이 안내하는 것은 우리가 동등하게 함께 중요하다는 사실, 즉 오직 우리가 평등하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가이는 바로 이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함으로써, 인간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됩니다.
그 목소리는 현재 인간학교에 갇혀 인간 대접을 못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유를 찾고자 하는 나눔의 목소리입니다. 이처럼 그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구원되는 현실을 가이는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살고 싶은 현실이 어떠한 현실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 가이는 사람들 속에서 인간을 선언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 또한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가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건 그 선언에, 사람들은 하나둘 깨어나게 됩니다.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공명되어, 이제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정말로 알게 된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스스로를 알게 된 인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교육시키려는 취지의 인간학교는, 이렇게 정말로 '인간'이 드러난 결과로 인해 붕괴되었습니다.
이는 중요한 시사점을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발견되어야 할 것이지, 훈련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특정한 가치 또는 이념에 의해 훈육되고 계발되어야만 비로소 인간의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이미 우리는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격이 조건화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명이라는 사실은 무조건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위한 어떠한 조건과 자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그저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있는 사실을 그저 확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에게 없던 것이 노력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원래 그것이 있었으며, 단 한 번도 잃어버렸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 정확하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부단한 노력을 요청하는 무수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격을 요청하는 목소리들은 우리를 조건화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현실을 발견하기에 어렵게끔 만듭니다.
실존철학은 우리의 자격을 요청하는 그 모든 목소리들이 전부 거짓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당위적 담론을 해체하는 작업의 대가였죠. 틸리히는 우리의 존재가 애초 주어진 온전한 모습 그대로 드러나는 일을 가로막는 이 목소리들을 우상이라고 표현했으며, 실존철학을 기반으로 삼은 실존상담자들 역시 이 우상이 해체된 후 드러나게 되는 실재를 발견하는 일을 상담의 주요한 목표로 설정해왔습니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선사들 역시도 이 우상화된 가치들을 붕괴시키는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 속에서, 실존철학은 오직 한 가지 핵심만을 겨냥해왔습니다.
나도 생명이고, 그도 생명이며, 그렇게 우리는 이 놀라운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어떤 이상화된 조건과 자격도 필요없이, 우리가 이미 생명이며, 이미 인간인 현실을 말입니다.
이 작품은, 스스로를 알고 싶어하는 한 인간이, 그가 인간임을 발견하고, 또한 우리 모두가 자신과 동일한 인간임을 발견하는 이 과정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실존철학의 핵심을 정확하게 담아낸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 속에서 꽃피어납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꽃입니다.
우리가 인간입니다.
바로 이러한 머리말과 함께 늘, 영원히, 새롭게 시작되는 인간의 이야기가, 이 아름다운 교과서 안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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