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11. 건설대장 시절의 감회
1 1974년 5월 6일, 20여 년간 몸담아온 정든 목회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건설대장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1974년 6월 1일, 협회 건설대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16년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해온 목회직을 그만두게 되니 미련과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2 그러나 복귀섭리의 크나큰 역사를 이룩하는 데는 어느 것이나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한 분야 분야가 합하여야만 섭리의 뜻이 이룩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3 그동안 그런대로 경험과 이력이 생기어 자신을 갖고 목회생활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건설’이란 두 글자마저도 생소하다. 경험도 이력도 없어 자신은 없으나 16년간 목회를 하면서 성전 문제로 분하고 억울하고 눈물겨웠던 지난날의 많은 사연들을 생각하면 성전 건축이란 말만 들어도 감격스럽고 사명감이 생기며 막연하나마 해낼 수 있을 것이란 자신과 가능성을 느끼게 됐다.
4 그러나 막상 착수하려고 하니 재단 기술도 미싱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귀한 옷감을 주면서 양복을 만들어 놓으라는 것과 같이 생각됐다. 막연한 가운데 고심하고 있던 중 이대희 씨(통일산업 근무)를 건축기사로 지원해 주시었다.
5 그분과 의논하여 계획을 세워 성전 건축에 착수하였다. 엄덕문 씨(현재 일성종합건설 대표이사)가 독특한 멋과 평수에 비해 웅장하고 그림 같은 건물을 설계해 선생님의 허락을 받았다.
6 사택 15평, 성전 28평형의 교회를 짓다가 후에 사택 18평, 성전 32평~38평형으로 크게 신축하였다. 이렇게 통일된 건물을 전국에 일제히 신축하려 하니 대지가 설계에 맞지 않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7 건물이란 대지의 크기와 모형에 맞도록 설계하여 신축해야 하는데 본 교회 건물은 설계에 대지를 맞추어 구입하고 신축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마치 몸에다 양복을 맞추어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양복에다 몸을 맞추는 꼴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적은 경비로 적은 평수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문자 그대로 손색없는 건물임엔 틀림이 없다.
8 1974년 6월 10일, 충남교구 신탄진교회를 첫 작품으로 헌당한 뒤 전국 각지에 188동의 교회를 신축하였다. 이와 같은 188동의 교회를 신축하는 데는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다.
9 건축기술자들을 다루기가 너무 힘들었고, 훈련된 식구들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또한 교회를 신축하는 데는 전문 기술 분야가 너무 많고 작업의 순서가 연관되어 있어 한 분야만 기술이 미숙하거나 기술자를 적시에 배치 못하면 작업이 지연되고 경비의 손실이 너무 많다.
10 자재를 구입하는데 같은 물건이라도 상점에 따라 물건값이 일정치 않고 계약 당시의 물건과 실거래 시의 다른 문제점, 그리고 서울과 지방과의 가격차이의 폭이 너무 크고 서울에서 운반하는 데 있어서 차량운송 등을 고려해야 할 문제가 뒤따랐다.
11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물건 구입을 할 때 세 곳 이상의 상점을 돌며 알아보아서 공장도 및 도매상들을 상대했고, 또 물건을 구입하다 보면 유혹도 많았다.
12 그럴 때마다 자신을 돌이켜보고 장차 그분들이 식구가 되었을 때의 나의 처세 문제와 이 신축비는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으로서 마련된 것임을 생각하니 더욱 그들에게 청렴결백과 통일식구들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철저한 생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물건 파는 사람들이 장차 심판주란 생각으로 임하고 행동하였다.
13 이런 심정으로 물건을 구입하여 교회 한 동을 신축하는 데 소요되는 자재는 목재 미송 3,400才, 나왕 목재 1,000才, 시멘트 산400~500여 포대, 망형스레트 3,000校, 함석 30故, 루핑 12, 구람프 3,500개, 후로링 195평, 합판류 95매, 철물류 65종류, 모래 8톤 차량으로 12~15트럭, 페인트 각종 15말, 전등 20개, 붉은 벽돌 7,000매, 시멘트 벽돌 45,000매~50,000매 등 작은 것들이 수없이 많고, 또한 각 기술 분야의 내용이 다른 일을 맡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적시에 배치하는 등 힘겨운 일들이 많았다.
14 자금은 충분히, 그리고 전체 금액은 생각지 않고 그 지방 형편에 따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교회를 튼튼히 하고 좋은 자재를 쓰고 저렴한 가격으로 단시일 내에 완성하기 위하여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15 1975년에 재단에서 교회 한 동 신축하기 위해 어떤 한곳에서 받은 견적이 884만 원이었는데 450만 원 이하에서 일을 처리하였으니 얼마나 아끼고 절약하였는가. 하늘땅을 대하여도 떳떳이 자랑할 수 있다.
16 또한 전국을 순회하는데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대구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식사를 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작업 지시를 해야 했다. 하루 평균 천 리 길 이상을 달리는 강행군을 하다 보니 피아트 승용차 2대가 소모될 정도였고 차내에서 잠을 자며 밤새워 달릴 때 위험한 노비를 수없이 넘기었다.
17 몸은 극도로 피로했지만 동분서주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충남 장항을 순회하고 대구에서 열리는 교회장 집회에 건축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오후 6시에 출발했는데 눈 비가 내리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의 상황에서 미륵재란 곳을 지나는데 위험 표시판도 없는 급커브에서 10미터 낭떠러지로 내려구르다가 기적적으로 바퀴가 박혀 전복되지 않고 무사한 경우도 있었다.
18 그곳은 사고 다발지역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낸 곳이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사고 중에도 무사했던 것은 기적이요, 하늘의 보호하심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겪고 나니 새로운 제2의 생명으로 탄생된 기분이었다.
19 또한 강릉에서 거진으로 순회 가는데 시속 70km 달렸지만 앞에 가던 국민학교 5학년 학생 3명이 장난하며 가다가 갑작스레 달려드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탄력에 밀려가는 힘에 부딪쳐 한 학생이 3m 이상이나 밀리어 나갔다.
20 학생을 싣고 병원에 가보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의사의 말이 천만 명 중 1명도 이런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큰 책가방이 차 앞에 방패 역할을 해서 직접적인 큰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21 차의 보닛이 일그러져 있을 정도인데도 생명의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상처 한 군데 없이 약 한 봉지도 필요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귀가시켰다. 하나님께서 통일제단을 중심 삼고 구원섭리를 이루시려는 뜻이 민족적, 세계적인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시려는 1975년이었음이 틀림없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22 더욱이 한민족을 중심 삼고 이루시려는 천국 실현이란 제3차 7년 노정의 목표를 실제로 이룰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은 성전 건축이라고 본다. 1975년 이 한 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해라 하겠다.
23 제일 보람되고 의욕 있게 활동했으며 그 고달프고 피곤했던 기간은 60년대 배고프고 추웠던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1년에 전국에다 일제히 113동의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일찍이 기독교사에 아니 종교사에 없었던 일이라 본다.
24 돌이켜보건대 관리인 2명(한 분은 이대회)이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전국에 공사를 벌여놓은 현장을 순회하며, 피곤하고 배고프면 라면과 빵으로 차 내에서 때우고 다음 곳을 가야 하기에 밤새워 다닌 적도 수없이 많았다.
25 그 당시 교역장들과 부인 전도대원들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으며 운전을 맡아 수고했던 양재형 씨 김갑주 씨 등의 수고 또한 피나는 고생이었다. 나는 잠이 오면 차내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간을 다투어 계속 목적지를 향해 운전을 하여 고달프고 피곤하련만 불평 한 마디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성전 건축의 기쁨과 보람만을 안고 고생에 동참한 분들이다.
26 또한 1975년 6월 7일, 구국세계대회를 개최할 때 여의도에 웅장한 무대를 맡아 시설할 때도 300명 이상이 등단할 수 있는 웅장한 시설을 일반 업자의 견적이 1,400만 원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건설대에서 직접 맡아 하라는 협회장님의 지시를 받고서 1개월 내에 300만 원의 적은 경비로서 그 넓은 여의도 광장의 무대 장치를 완료하였다.
27 웅장하고 거대하며 훌륭한 무대라고 남들이 말할 때 흐뭇한 보람을 느끼었다. 직접 수고하지 않았다면 지방 교회 3동을 지을 수 있는 막대한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겠는가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28 그러나 막상 행사를 끝마치고 모두들 거두어진 성과를 기뻐하며 헤어져갔는데 그 넓은 광장에 텅 빈 무대 장치!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밤새워 철거작업을 해야만 했던 힘겨운 시간들이 지나간 일들이었지만 오늘날 돌이켜 보니 더더욱 보람되었음을 느껴본다.
29 1975년, 죽으려야 죽을 시간이 없었고 노력과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미련 없는 한 해, 그렇게도 무리한 활동을 했는데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전력투구했으니 건강을 보살펴 주신 하늘 앞에 다시 한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