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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 세상, 그냥 생각하지 마라>의 줄거리:
이 세상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를 알려드립니다.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의식의 눈길을 예수님 십자가를 향하게 하고 세상 문제는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딴청을 부리는 겁니다. 즉 세상이 아닌 세상 밖 하늘을 생각하고 그 하늘을 가지기 위해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평생 해결되지 않을 세상 문제는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냥 생각하지 마라
(누가복음 12:22~34)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이 세상, 그냥 생각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이 세상, 그냥 생각하지 마라’
전에도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 일화를 오늘 본문과 연관하여 다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종이만 보면 찢어서 돌돌 마는 버릇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야단을 치고 타일러도 이 버릇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선생님들도 이 습관을 고쳐주려고 애를 썼지만 고칠 수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절박한 심정으로 아동심리 전문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심리발달 단계를 조사하고 무엇이 채워지지 않은 점이 있다는 등 별의별 전문적인 지식을 다 동원하였지만 역시 고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모는 아이의 버릇고치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머니가 목사님과 만날 일정이 생겼는데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머니와 한참 대화를 하다 보니 아이의 특이한 행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주변에 있는 모든 종이를 가져다 찢어서 돌돌 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를 지켜보시던 목사님이 갑자기 “하지 마!”라고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종이 찢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 누구도 못 고쳤던 나쁜 습관이 목사님의 외침 한 번에 중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생각하기는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세상 생각하기는 나쁜 습관이기에 고쳐져야만 합니다. 내가 열심히 세상을 생각한다고 해서 세상의 문제들이 나아지거나 개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으며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 십상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생각하는 중에 평강을 잃게 되고 평강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하는 일 또한 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벽력같은 소리를 치시는 심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29절을 보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께 돈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응답은 “하지 마!”라는 외침뿐입니다. 삶에서 돈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살아왔습니다. 밤새 철야를 하며 세상 문제를 생각했고, 세상 문제들을 기도 제목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문제의 해결법은 전문지식을 동원하거나 이런저런 수단을 강구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의식의 눈길을 끊어버림으로써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생각으로 붙잡고 의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면 생각하지 않고 의식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지 마!”라는 벽력같은 말씀을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세상 문제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느냐?”라는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2~24절을 보면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체가 있음으로써 육체와 관련된 일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육체와 관련된 어떤 일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 염려는 헬라어 매림나테(μεριμνᾶτε)로써 “나누다, 분할하다”는 뜻을 가진 매리조(μερίζω)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염려는 나의 의식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심은 의식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야 하는 전제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육체와 관련된 세상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의식을 부당하게 나누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리는 조현증(調絃病)에서 조현이란 현악기의 줄을 조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조율이 엉망이 된 것과 같은 상태를 조현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현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망상과 환각입니다. 망상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환각이나 환청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즉, 조현증은 신경 쓰지 말아야 될 것들에 대해 생각과 의식을 너무 많이 할애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쉽게 말해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미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뿐만이 아닙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이 있습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직장에 나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한다는 말씀에는 이처럼 몸과 관련된 모든 일들에 대한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염려는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생각하고 의식하는 조현병과 같은 상태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몸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까마귀도 먹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생각할 때에 몸과 관련된 모든 일들 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신 것을 현실로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일들을 내가 따로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믿는 것입니다. 미친 것이고 정신이 분열된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몸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식한다는 것은 미치광이로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계획 밖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염려는 망상입니다. 실제가 아닌 것들에 마음을 분할시키는 정신분열증이고 조현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법은 예수님 시인하기를 통해 관여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시인하기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 즉 몸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 일보다 예수님을 먼저 의식하여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동일시를 통하여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들고 계시듯이 나 또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들게 됩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결코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또 25~26절을 보면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몸과 관련된 일들은 몸이 없어질 때 모두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열심히 개입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은 본래부터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일을 해결하기 위한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일은 내가 해결하지 않아도 내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책임이 아닌 일을 굳이 책임지고자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과 뜻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마음과 뜻과 힘이 사용되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과 뜻과 힘을 몸과 관련된 세상 문제에 투입하는 것은 임의로 용도를 변경한 것입니다. 마치 장작을 패는 도끼로 과일을 깎겠다고 달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좋아해서 아버지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올인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으로 세상일을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생각 감정 의지의 지정의는 결코 세상에서 몸과 관련된 일들에 투여할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를 버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면 됩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이 해야 할 일은 장사를 잘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은 사용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구하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은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모든 장소에서 내게 필요한 일들은 아버지께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것을 내 입을 통해 말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몸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마음과 뜻과 힘을 사용하는 것은 못된 습관입니다. 이러한 못된 습관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하지 마!”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러한 못된 습관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시인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몸과 관련된 모든 일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도달해서 사위일체를 이룬 후에야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님의 장갑으로써 세상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장갑으로 쓰임 받는 것이기에 내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지정의는 애당초 이 세상에 용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를 바랍니다. 나의 지정의는 오직 예수님을 시인하는 일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장사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 손님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하지 마!”라고 외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생각 하지 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장사를 하는 중에도 손님을 마주하는 중에도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로 기뻐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 하고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백을 채우고자 추구함은 무엇인가를 좋아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대상을 생각할 때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했으면 좋겠다, 무엇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원은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소원이 생길 때마다 소원의 내용을 하나님 아버지로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31절에서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아버지가 계신 천국입니다. 천국을 구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어서 아버지의 통치가 임할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좋아하고 갖고 싶은 것들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 소원을 환전하듯이 하늘 소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환전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하늘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길 때마다 하늘 소원으로 환전되어야만 합니다. 일단 소원이 작용하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세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또 27~28절을 보면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입을 옷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백합화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을 신경 써서 아름답게 입히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움이 사라짐을 아쉽게 여기시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에 따라서 피게도 하시고 시들게도 하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일부러 보시기에 안 좋게 만드시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백합화의 비유는 단지 입을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우리 육체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문제는 마치 백합화와 같습니다. 오늘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내일이면 잊히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길어봐야 일주일이면 관심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에는 하루만 있다가 내일 잊힐 일에 대해서조차도 대충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시면 내일이면 잊힐 일들이라도 보시기에 좋게 만드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문제는 내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주권자로서 믿는다면 삶의 태도에서 그 증거가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단지 교리로 배워서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고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생각하고 가족일로 염려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제를 이렇게 저렇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지 나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나의 생각을 관철하려드는 것이야말로 광적인 몸부림이고 정신분열증입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나의 생각은 멈추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도는 결코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생각을 관철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심을 믿는다면 세상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서 3장에서는 18~19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벽력같은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정신병자 같은 습관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제일 고약한 습관인 세상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에 이른 자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정의 즉 마음과 뜻과 힘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일에 쓰일 수 있습니다. 나무 찍는 도끼로 과일을 깎을 수 없듯이 지정의는 세상을 생각하는 용도로는 쓰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관여할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관여하고자 하는 것조차 능력 밖의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마주할 때 얼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으면 됩니다. 자녀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백합화를 보기 좋게 만드신 하나님의 속성대로 자녀의 문제에 대해서도 주관해 나가실 것입니다. 자녀의 상태와 능력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자녀의 문제를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하지 마!”라는 벽력같은 외침입니다.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나쁜 습관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디에서든지 우리에게 할당된 지정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마음에 충만하게 모셔 들이는 일에 전력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정의 능력은 마음이 천국에 도달하고 또한 천국에서 결정된 일들이 나의 삶에서도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염려와 근심에 대한 “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벽력같은 외침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났음을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일 악하고 치명적인 습관이 몸과 연관된 일들을 생각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지 말라고 벽력같이 외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받아들여서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생각과 의식의 눈길을 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는 아버지께서 백합화를 다루실 때처럼 보시기에 좋도록 이끌어 가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삶 전체를 아버지의 무대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