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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순례(28) - 2024. 09. 27(수) |
9월에 27차 순례를 한 후 두 달 만에 갖는 전국성지 순례이다. 10월에는 베트남 순례로 인해 쉬었기 때문이다. 이번 순례는 가까운 곳이다. 칠곡군에 있는 한티 순교성지와 신나무골 성지, 그리고 서대구의 새방골 성당이다. 이 세 곳은 서로 관련성이 있다. 세 곳 모두 1815년 전후 경상도 북부지역의 교우촌이 일망타진 되어 그곳에 살 수 없었던 교우들이 옮겨와서 형성된 성지들이다. 특히 신나무골 성지와 새방골 성당은 대구지역 사목을 위한 전초기지 성격을 가진 성지들로 대구, 경북 지역 천주교의 의 요람이라 할 만하다.
아름답던 단풍도 한물 가버린 위령성월 끝자락. 며칠 후면 두툼하던 달력도 마지막 한 장만 달랑 남게 되어 한해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참여자는 문 베드로와 고 요셉. 요셉 형제는 이번에도 차량 봉사를 한다.
08시 30분 출발. 지금까지의 성지순례 출발시간으로는 가장 늦은 시간이다. 전국 날씨 예보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눈이 내린다고 하고 우리가 가는 지역은 흐리다고 하는데 혹시 어떨지 몰라 우산을 준비했다. 10시 조금 지나서 한티 성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고지대라 그런지 돌연 눈이 뿌린다. 때 아닌 서설에 성지가 하얀색으로 변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 한티 순교성지 -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한티 교우촌의 형성 과정과 쇠퇴
‘한티’의 ‘한’이란 ‘크다〔大〕’는 뜻이고, ‘티〔峙〕’란 ‘재〔峴〕’, 또는’고개〔嶺〕’를 뜻한다. 따라서 한티〔大峴〕란 높은 재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한티 성지는 옛날 대구 읍내에서 60리(24㎞)정도 떨어진, 팔공산(1,151m)과 가산(902m) 사이에 있는 해발 600m 높은 오지의 마을이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직후로 추정된다. 당시 청송, 진보, 영양 등지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을 때 감옥에 갇히게 되자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서 대구와 하루거리인 신나무골, 한티에 와서 신자촌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또한 1827년 정미박해 때 기호지방의 교우들이 문경, 상주 지역을 거쳐 이곳에 내려왔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 두 설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교우촌 형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티는 교우촌 이전에도 고려 말 이후 전란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화전(火田)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19세기 초반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기나 옹기, 그리고 숯을 구워서 생활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된 물품은 행상을 통해 팔았다. 행상은 세상소식을 알고 신자들끼리 정보교환을 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증언에 나오는 최초의 한티의 신자는 김현상(金顯祥) 요아킴이다. 서울에 살던 그는 1837년에 박해를 피해 한티 인근 신나무골로 피신을 왔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더 깊은 두메산골인 한티에 왔었다. 그는 여기서 10여년을 살다가 박해가 잠잠해지자 1850년경 대구 인근의 새방골로 이사를 갔다.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와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를 순회 · 전교하면서 한티마을에 와서 판공성사를 집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1850년 무렵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1860년 경신박해는 이곳을 피해가지 않았다. 당시 신나무골에서 피난하고 있던 칠곡 읍내 사람인 배정모((裵正模, 일명 裵孫伊)는 가족을 끌고 이곳 한티로 피신을 왔으나 뒤쫓아 온 포졸들에게 잡혀 문초를 받게 된다. 이때 배정모는 가족을 살리려고 배교하였지만, 정작 부인 이선이(李先伊) 엘리사벳과 장남 배 스테파노(일명 배도령)는 온갖 위협에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860년 음력 2월 8일 포졸들은 인근 집에서 작두를 가져와서 모자(母子)의 목을 잘랐다. 한티의 최초의 순교는 너무도 처참하고 장렬했다. 포졸들이 돌아간 뒤에 배정모는 피눈물을 흘리며 모자의 시신을 거두어 한티의 동쪽 산등성이에 임시 매장을 했다가 후에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칠곡 읍내 아양동 선산으로 이장을 했다. 신자들은 살길 찾아 흩어졌다.
경신박해 이후 박해가 수그려들자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경에는 상주 출신인 조 까롤로 가정이 황간, 상촌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 한티로 피난을 왔다.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러 곳에서 피난 온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주일 첨례를 봄으로써 한티공소가 출범 되었다. 1862년 배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바로 한티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초기만 해도 신나무골과 대구 부근의 많은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와서 몇 년 동안 피난살이를 하였다. 대구의 서상돈 가정, 김응진 가롤로 가정(김현상의 후손), 대구 부근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 등이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옮겨왔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박해는 가혹하게 전개되어 선참후계(先斬後啓), 오가작통법 등이 시행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무진박해라 부르기도 한다.
마침내 한티에도 최후의 날이 왔다. 1868년 봄 서울 포졸들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한티 신자촌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신자들을 살육했다. 배교하는 자는 놓아주었고, 항거하며 신앙을 지킨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와 조 가롤로의 동생 조 아기 는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도망가는 자들은 쫓아가서 죽였다. 이때 40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롭던 마을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고 한티교우들은 일망타진 되었다.
당시 순교자로는 피난 중이거나 피난을 가서 타지에서 잡혀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한티에 살다가 대구 읍내로 피신 중이던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그리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던 민족주의자 서상돈의 숙부 서익순과 서태순 등이 그들이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졌고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어 시신이 있던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 더미에 묻힌 이도 있고, 밭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다. 한 무덤에 여러 명이 합장된 경우도 있다. 현재 한티 성지에는 37기의 순교자들의 묘소가 옛 교우촌 지역에 흩어져 있다
당시 한티에 다시 돌아온 신자들은 조 가롤로 회장의 아들 조영학 토마, 박만수 요셉, 군위에서 온 김재윤 플로리아노, 김윤하 안드레아, 박기인 루도비코, 한돌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 조규성 프란치스코 가정 등이었다. 그들은 다시 들어와서 교우촌을 재건했다. 순교한 공소회장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이후 그들은 순교자의 묘를 돌보고 관리했다.
이들은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초기 교우촌 지역(현 대형 십자가광장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 면서 조금 더 내려와서 새로운 교우촌(현 억새마을)을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신자들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모여 살았다.
박해 후 한티를 방문했던 사제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아킬레 바오로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그는 1877년 입국하여 1882년 말부터는 경상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 전라도 일부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 와서 성사를 주고 미사성제를 봉헌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신자 수는 38명이었고, 판공성사를 본 신자는 20명이었다. 그리하여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신자가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나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신자들이 만주와 일본 등지로 살길을 찾아 이사를 감으로써 급격히 신자 수가 적어지고 1960년 초에는 겨우 두 가정만 남았다.
한티성지 조성 과정
교우촌이 쇠퇴함과 동시에 한티는 잊혀졌다. 그러던 중 1961년 당시 칠곡 본당의 전교 회장이었던 마백락(글레멘스)이 한티 성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마백락 회장은 한티에서 출생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증언을 수집하고,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였다.
1967년 9월에는 박병원 필립보 신부, 이문희 바오로 신부(나중 대구 대교구장 주교), 경북대학교 김달호 교수의 주관으로 대구대교구의 신자들이 칠곡 안양동에 묻혀 있던 이선이 묘소와 한티 도보 순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8년 9월에 병인 순교자 시복 경축 행사로 대구대교구의 신자들이 한티를 순례한 이후 매년 9월에 순례 행사가 이어졌다.
이와 같이 연례적인 순례 행사가 열리고,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방문하는 순례객들을 맞이하던 한티는 1980년대 초반 대구대교구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1983년 5월에 동명 본당은 한티 인근에 자리 잡은 이기수 야고보 몬시뇰의 사저(동명면 기성동 소재)를 인수하고, 대구대교구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단장하여 한티 순례자의 집으로 개원하였다.
이어 1986년 11월에 대구대교구는 한티 지역 20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1차로 피정의 집을 건립하고, 연차적으로 1천 평의 피정 시설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한티 성지 조성 사업이 진척되는 가운데 순교자의 묘소 조사 및 성지 발굴 작업도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문중 족보와 순교자의 후손의 증언을 통해서 서태순이 한티에 묻혀 있음을 알아냈고, 9월에는 조 가롤로와 최 바르바라, 조 아기의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1988년 4, 5월에 효성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한티 성지 조사단을 결성하여 옹기굴과 숯가마 터를 발굴하였고, 순교자 묘소와 공소 건물지 등을 실측하였는데 이를 통해 한티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같은 해 5월 마백락과 한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김태현과 김복현 형제 등은 증언과 현장 답사를 통해 무명 순교자의 묘 19기를 확인하고 이를 대구대교구에 보고하였다. 이에 대구대교구는 한티 사적지의 보존과 무명 순교자의 묘 발굴을 위하여 ‘한티 사적지 무명 순교자 분묘 이장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 24일에 순교자 묘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분묘 이장위원회는 19기 중 6기를 발굴하고 그 가운데 3기를 성지 묘역 안으로 이장하였으며, 발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무명 순교자의 묘 5기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1991년 10월에는 지상 5층, 지하 2층 규모의 한티 피정의 집이 완공되었는데, 개관에 앞서 증언 등을 통해 무명 순교자의 묘 9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어 1997년 10월에는 대구대교구 신학생들의 영성 수련을 위한 공간인 한티 영성관이 착공되어 2000년 2월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2004년 12월에는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장소인 순례자 성당의 축복식이 거행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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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차장에 내려서 안내 게시판을 보고 동선을 정했다. 한티 성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낮은 지역과 높은 지역이다.
낮은 지역에는 주차장 부근의 성지 안내소, 휴게소, 순례자 성당, 성모광장, 후기 교우촌이며 공소가 있었던 억새마을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서 영성관을 지나면 가장 큰 건물인 피정의 집이 있다. 피정의 집 앞에는 넓은 잔디 광장이 있고 광장 아래편에 야외 제단이 있다.
높은 지역에는 대형십자가 광장이 있고 바로 옆에 한티마을 사람이라는 입석 조형물이 있고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십자가 광장 위에는 초기 교우촌 터가 있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37위의 순교자 묘들도 같이 이어진다. 순교자의 묘 19호에서는 두 갈레로 갈라진다. 여기서 더 높이 오르면 옹기굴과 숯가마 터, 그리고 순교자묘 31-37호까지가 있고, 오던 길을 계속 직진하여 내려오면 순교자묘 20-28호를 거쳐 피정의 집 아래에 있는 29-30호까지 이어진다.
먼저 낮은 지역부터 순례를 시작한다. 눈은 계속 내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순례객들도 몇 사람에 불과하다. 안내소를 떠나 조금 더 가면 한티 순례자의 집(카페, 성물방)이 나오고 바로 앞에 순례자 성당이 있다.
▲순례자 성당
순례자의 집 카페에 비해 조립식 건물 같은 성당이 너무 허술하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아담한 성전으로 바꾸어질 날을 기대해 본다. 가지런한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갈아신고 성전 안에 들어간다. 성전 뒷자리에 남녀 한 쌍이 정답게 앉아 있다.
성전 내부에는 이동식 간이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제단 후벽엔 십자고상과 감실, 그 앞에 제대가 있을 뿐 별 장식이나 시설이 없다. 이는 하얀 벽과 함께 매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제단 왼쪽 에는 고해실이 있고 그 앞에 성모상이 두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채 서 계시는데 시선이 너무 강렬하게 나를 쏘아보시는 것 같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로마서 성구가 걸려 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비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하느님께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친 분들이 순교자가 아닌가? 순교성지에 딱 어울리는 말씀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무엇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두렵게 다가오는 말씀이다.
딱히 생명을 바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톤을 봉헌하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듯 제물이란 양이나 액수가 아니라 정성이다. 그러기에 나에게 남거나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소중한 일부 봉헌하는 것이 참된 제물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쓰고 남은 것도 내놓기를 아까와 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성모광장
순례자 성당 바로 아래에 성모광장이 있다. 광장 한쪽에 억새를 배경으로 자연석 돌 제대가 놓였고 그 옆에 색이 바랜 성모상이 눈을 맞고 서 있다. 참 측은해 보인다. 하지만 순교자를 연민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데 하물며 성모님을 연민하다니 이는 불경의 극치가 아닌가? 성전 쪽 광장 축대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
▲억새마을
원래 한티 교우촌은 현재의 대형 십자가 광장 뒤쪽이다. 1868년 박해 시 포졸들이 이곳을 습격해 많은 교우들을 정당한 절차도 없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도록 집들을 불태웠다. 나중에 살아남은 자손들은 이 자리에 흩어져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이를 돌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곳을 떠나 이 아래편 억새밭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의 억새마을이며 또한 한티 공소였다.
억새란 갈대와 비슷한 산야생 풀로 이름 그대로 억세고 질겨서 지붕을 잇기에 매우 적합하다. 볏짚 지붕처럼 매년 덮지 않아도 된다. 산촌의 집이 대부분 억새지붕을 한 이유이다. 산촌에는 볏짚 자체가 없기도 하다.
1882년 말부터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타지역을 순방하면서 한티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특히 신나무골에 머문 1885년부터는 자주 방문했다. 당시 대축일이 되면 신자들은 밤길 90리를 걸어 신나무골에 가서 미사들 드렸다고 한다. 1900년 초에는 교우촌이 번창하여 신자가 8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신자들이 많이 떠나 줄었으나 가실성당의 신부가 이곳에 정기적으로 와서 성사를 주었다. 6 25 때는 격전지 다부동과 가까운 관계로 북한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억새마을 안내판 옆에는 시 한 편이 걸렸다.
하얀 억새
젊은 시절 고달픈 시집살이가
힘들어 모처럼 친정 나들이
“하룻밤 쉬어 갈께요” 라는
내 부탁에도
그 집 귀신이 되라며
등 떠밀어 쫓아내다시피 한
아버지의 무지한 사랑 방법
터미널 저편에서 숨어 우는
내 아버지의 흔들리는 어께
소리 없는 흐느낌 같다.
하얀 머리 가녀린 억새
▲한티 피정의 집, 한티 영성관
한티 피정의 집은 1991년 건립되었다. 사제 피정은 물론 전국의 순례자 피정을 위해 지었다. 그동안 많은 수의 신자, 단체들의 피정과 연수를 통해 영적인 힘을 얻어 간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연변에 형구 모양의 맷돌도 서 있고 도중에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성관도 볼 수 있다. 2000년에 지은 한티 영성관은 지하 5층, 지상 2층 규모의 건물로, 가톨릭 신학교 신입생이 1년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 교육을 받는 곳이다.
영성관 입구에서 조금 더 가면 피정의 집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순례자를 환영하는 성모님이 서 계신다. 그리고 피정의 집 앞 드넓은 잔디 광장 아래에는 야외 제대와 휴게 시설이 있고 억새밭이 연결되어 있다.
이제 높은 지역의 순교자 묘역을 갈 차례다. 눈 맞은 억새가 줄이어 있는 돌 깔린 길을 오른다. 도중 순교자 묘의 위치도가 새겨진 특이한 조형물이 나오는데 돌방을 형상화하였다. 돌방 안에는 순교자 묘의 위치도가 검은색으로 새겨져 있고 돌문에는 한티 성지의 내력과 순교자 발굴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이에 의하면 한티 교우촌의 형성을 1801년 신유박해까지 소급하였다. 곧 신유박해로 기호지방의 교우들이 경상도 문경 상주 지역에 왔고 이들이 다시 남하하여 한티 교우촌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868년 여기에서 순교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박해했던 조대비의 조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묘역 입구에는 순교자 묘역 표지석이 기둥처럼 서 있고 ‘자녀들에게 순교자의 믿음을...’이라는 어느 어머니의 기도가 새겨진 돌도 있다. 조금 더 오르면 십자가 광장과 ‘한티마을 사람’ 입석 조형물 나온다.
▲십자가 광장
십자가 광장은 옛 교우촌 터 입구에 있다. 이 광장에는 높이 14m 대형 십자가가 높이 솟아 있다. 이 십자가 뒤편이 40여명의 교우들이 참살 당했던 초기 교우촌 터다. 포졸들이 물러가면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파괴했다. 박해 후 귀환한 교우들은 가족이 순교한 자리에 차마 거주할 수 없어 이곳에 순교자 묘역을 만들고 자신들은 아래쪽 (현 억새마을)에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여 신앙을 이어갔다. 십자가 아래 야외제대가 있다.
▲‘한티 마을 사람’ 입석군
십자가 광장 바로 오른쪽에 붙어 있다. 마치 선사시대 거석군과 같은 입석들인데 2016년 사순 제4주 성금요일에 세웠으며 입석 표면에는 봉헌자 명단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한티 순교자들이 다시 살아나 우리 앞에 선 것 같다. 맨 앞쪽 기념석에는 이 입석군에 담긴 세 가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첫째, 박해 시대 초기 교우촌이 이 자리에 있었음을 뜻한다. 물론 지금은 아래쪽으로 옮겨 갔다. 옛날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웠듯이 이처럼 이 돌이 장승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
둘째, 한티 순교자를 뜻한다. 크고 작은 입석은 이 마을에 살았던 남녀노소 순교자들이라는 것이다. 입석들은 바로 옆 대형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님을 우러러보고 있다. 입석군 바닥의 둥근 돌은 칼날에 떨어진 순교자의 머리이다.
셋째 한티 순교자의 신앙과 삶을 따르려는 지금의 우리 자신을 뜻한다. 돌처럼 굳은 신앙을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십자가의 길
한티 마을 사람 입석군 바로 위에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길과 함께 순교자 묘가는 길도 함께 시작된다. 일부 14처는 순교자 묘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둥근 자연석에 예수님 수난상을 새긴 것인데 눈에 덮여 잘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순교자 묘 역시 이 역시 눈에 덮여 봉분이 식별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러나 봉분 앞에 예외 없이 십자가가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십자가의 길 표지석 옆에는 순교자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생과 사를 한 가지로 염원한 순교자의 삶과 죽음이 불사불멸의 영혼으로 살아 있나니 후대여 이 혼돈의 시대에도 다시금 영생의 삶을 생각하라
▲순교자 묘역
‘이곳은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입니다’라는 표지석을 바라보며 계속 오르면 1호부터 37호까지 붙은 묘가 나타난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길과 겹쳐 있는 묘도 있다. 더러는 함께 묻혀 번호가 묘를 나타내는 십자가가 한 곳에 모여 있기도 했다.
37명의 순교자 묘 중에서 이름이 밝혀진 것은 4기이다. 바로 조 가롤로, 최 바르바라, 조 아기 가족 묘이고, 다른 하나는 서익순 묘이다.
조 가롤로는 1868년 한티 교우촌 피습을 당할 때 공소회장이었으며 최 바르바라는 그의 아내, 조 아기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배교하지 않고 다 한 자리에서 순교했다.
서익순의 형제는 오형제로 서인순徐隣淳) 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서태순(徐泰淳)이었다. 이들의 아버지는 서치보이며 이중 서익순, 서태순은 순교하였다. 그리고 서철순의 장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던 서상돈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때 ‘금모으기’와 같은 민간 애국운동이다. 그는 대구 계산성당 창설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묘지석에 의하면 서태순은 1923년 충청도 연풍에서 부친 서태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기해박해 무렵 문경 여우목에 살다가 아버지가 선종한 후 충주 중원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잠잠해지자 대구로 이사하였다가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감영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배교하고 풀려났다. 훗날 이를 뉘우치고 다시 한실 문경 교우촌으로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다. 상주 감옥에서 곤장을 맞고 1867년 옥사하였다. 시신은 부인 김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 맏형 서인순의 도움으로 한티로 옮겨졌다.
19호 무명 순교자묘에서 바로 능선 옆으로 가면 20-19호 묘로 이어져 피정의 집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산 위로 더 올라가면 숯가마와 옹기굴이 있고 순교자묘 31-37호까지 이어진다.
옹기굴에서 숯 가마터 까지는 경사가 급한 오름길이다. 힘도 들고 해서 시간 핑계를 대고 내려왔다. 순교자묘역 전 코스를 다 돌 때는 언제려나?
한티 성지(해발 600m)는 언양 죽림굴, 청도 구룡공소(해발 650m), 찬안 성거산 성지(해발 500m) 등과 같이 전국 성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의 성지 중의 하나이다. 깊은 계곡보다 높은 산마루가 어쩌면 하느님의 나라와 가깝다는 의미일까?
그리고 창양 다락골 성지나 성거산 성지의 무명순교자의 무덤인 줄무덤과 달리 한티성지의 무명 순교자의 무덤은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무덤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티 성지는 순교자의 척박한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교우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고 풍치도 좋아 봄날 산빛이 깨칠 때나 가을 단풍이 들고 억새가 흔들릴 때 자연과 신앙이 혼연일체가 되는 성지이기도 하다.
뜻하지 않게 11월의 서설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순례는 아마도 평생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날을 기약하며 점심때인 12시 반경 다음 행선지인 신나무골 성지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