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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왕따 자처하기의 행복>의 줄거리:
아시다시피 왕따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두 사람 이상이 집단을 이루어 인격적인 무시나 또는 음해하는 말과 행위를 반복적으로 자행하는 특정인이 바로 왕따지요. 당연히 온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기피합니다. 그런데 이런 왕따 되기를 굳이 예수님은 강권하십니다. 아니 세상 왕따 안 되면 구원도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아버리십니다. 희한한 것은, 세상 왕따 자처하기를 일단 한 번 해보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 왕따 자처하기의 행복
(요한복음 17:13~16)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왕따 자처하기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왕따 자처하기의 행복’
왕따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집단 따돌림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특정인을 지정하여 반복해서 인격적으로 경멸하거나, 언어적 신체적으로 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 왕따라는 단어는 들으시는 분에 따라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왕따를 직접 경험했거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따를 경험하면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정신적인 충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자면 세상에서 왕따를 자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는 세상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이 은혜를 받으려면 세상에서 왕따가 되어야 하고 또 이 은혜를 받으면 세상에서 왕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구원의 감격이란 세상에서 왕따 됨의 감격입니다. 이 세상에서 왕따가 되는데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방법도 이 세상에서 왕따가 되었는지를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왕따 자처하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늘 외톨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왕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따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짧습니다만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초가 이 짧은 구절들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순서대로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계신 가운데 드리신 기도입니다.
13절을 보면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땅에서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시는 여정을 시작하실 것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한국에서는 추석 때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고, 서양에서는 크리스마스 때에 고향을 찾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여행을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행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에 교리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십자가로부터 부활하시고 승천까지의 모든 과정이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의미가 바로 13절에서 드러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 사건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으로 보고 계시다는 것이 참 특이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신앙의 지식에서는 십자가 사건은 단지 죄 사함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단독으로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여행의 출발점이 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하나로 묶여있는 여행 코스와도 같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사람이 충청도에 계신 부모님께 가기 위해서는 서울을 등져야만 하듯이,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등지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어서 부활은 세상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려서 육체의 죽음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서 이 세상을 빠져나온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며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다만 이때의 예수님은 이전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동일한 예수님과 밥을 먹기도 하였지만 제자들과 예수님이 계신 세계는 같은 세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아직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은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의 터널을 통과해서 세상을 빠져나온 상태에서 세상 속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완전히 동일한 분이심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인격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동일성을 보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또 13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세상과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을 잇는 길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코스는 예수님만 가야 하는 길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신 길이 영원히 남아서 세상과 하늘 사이를 잇는 도로로 성립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 강남터미널에서 부산행 표를 사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게 됩니다. 서울역에서 강릉행 기차표를 사면 고속철로를 따라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내신 것입니다. 이 길은 결코 예수님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들로’라고 지칭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곧 마음 심장을 꺼내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 마음 심장을 꺼내 드린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무남독녀 딸이 어학연수를 하러 호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딸을 보낸 부모의 마음은 온통 호주를 향하게 됩니다. 딸의 마음이 그릇이 되어서 부모의 마음을 담게 된 것입니다. 같이 호주에 가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들’이란 무남독녀 딸을 사랑해서 마음을 다 보내는 부모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마음 심장을 꺼내 드리는 자들입니다. 몸은 땅에 있어도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라서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이 내신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보내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놓으신 천국 가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여정을 따라서 마음은 천국으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이 길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또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까지 따라갈 것이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마음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13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건강문제가 조급하더라도 일단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따로 떼어서 부를 수 없고, 공생애 때에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의 이름을 따로 떼어서 부를 수는 없습니다. 공생애 전체의 의미 또한 십자가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상에 대한 등 돌리기입니다. 건강 문제가 아무리 급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따라 세상에 대해 죽어야합니다. 또 예수님이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오셔서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을 빠져나와야만 하고 승천하신 것처럼 하늘로 향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져야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는 완전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접근도 이렇게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아무리 재정문제가 급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돈 문제에 등을 돌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까지 가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승천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늘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죄 사함만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강남터미널에 가서 부산행 표를 사고도 정작 버스에 타지 않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미신이고 주문이고 주술입니다. 우리가 추석 때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가려면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목욕도 하고 새 옷을 입고 선물도 준비합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살던 더러운 마음상태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마음을 보내서 깨끗함을 받았다면 이제 순서대로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만을 부르려 한다는 것은 깨끗함을 받고 세상으로 다시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결코 깨끗하고 완성된 나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면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돈 문제 건강문제 등의 세상에 대한 걱정이 해결되기만을 바라고, 마음을 하늘로 보낼 생각이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가 바로 여기서부터 잘못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떠올리며 공생애의 예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은 미신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내신 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늘까지 닿는 길을 놓으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본문 13절을 통해서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밝히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굳이 내려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고,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히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혼자만 하늘로 가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듯이 예수님이 내신 길을 따라서 하늘로 가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싱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성공을 해야만 기쁨을 충만히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기쁨도 일단 성공한 후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예수님의 기쁨을 받을 필요 없이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 나면 교회에 충성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지금 취직만 하면 기쁘겠고, 입시에서 합격만 하면 기쁘겠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까지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당신의 기쁨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 상태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따로 기쁨거리를 두고 있다가 응답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쁨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쁨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이 기쁨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해 하나님 아버지를 갖는 것이 기쁨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요한복음 17장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21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또 22절에서도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기쁨을 얻으셨다는 것을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를 때에 이 영광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가짐을 통해서 얻는 기쁨은 세상에서 돈이나 건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면 기쁨이 생긴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하는 방법도 모른 채 돈이나 건강을 통해 기쁨을 얻기만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지는 방법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제시하신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연희동에 살 때에 서대문에 있는 미동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건너편에 우미예식장이 있었고 그 옆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만두가게가 있었는데 가끔 어머니와 가서 먹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선생님과 면담을 위해 학교에 오셨습니다. 면담을 다 마치시고 저를 보러 오셨는데 아이들이 저를 중심으로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기쁘셔서 학교를 마친 후에 그 아이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만두가게로 가서 제가 먹는 양만큼 아이들마다 다 먹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들은 저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만두를 먹게 된 것입니다.
이 만두가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과도 닮았습니다. 누구 하나 덜 주지 않고 아들에게 주는 만큼 똑같이 주셨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시려는 기쁨을 우리도 똑같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수님께 주시던 기쁨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주님을 먼저 붙잡는다면 주님께 주어지는 모든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최고의 기쁨을 얻었으니 세상 문제는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건강 문제가 급하고 돈 문제가 급할지라도 잠시 젖혀둔 채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 세상을 등지고 주님을 붙잡으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주신 기쁨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허락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신 마음이 이러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땅에 있지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어도 마음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 대해 등 돌리기가 쉽지 않기에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세상에 등 돌리는 일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날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신 길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면 그 사랑이 다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약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해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성경전체를 말씀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은 하층민들이었기에 대부분 성경에 무지했습니다.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의 복잡한 내용들을 다 알아야만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앞서 13절에서 기쁨의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채워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아버지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고 구분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에서 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이고 최고의 만족으로 믿으며 사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은 승진이고 많은 급여와 보너스일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세상에서 기쁨으로 믿어지는 대상이 돈 건강 장수 취미 여행 결혼 일류대학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만이 진짜 기쁨과 만족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기쁨을 모두 거부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으로 믿는 것과 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예수님께서 놓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명품 옷도 걸치지 못했고 신발도 메이커도 아닌 것을 신고 다니면서 기쁘다고 하니 얄밉고 아니꼽고 같잖게 봅니다. 그러니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함과 기쁨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예를 들어서 골프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골프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골프에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골프 동호회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정당에 소속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에 기쁨을 느끼는 자들이 모여듭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소속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과 만족의 근원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도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할 여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도 대하고 가족도 대하고 나라도 대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어떤 곳이든 소속되기 나름입니다. 저는 강릉에 살기 때문에 강릉시민이고 크게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기쁨과 만족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사는 자들은 세상과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분된 자들을 데려가시고자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놔두시고서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을 대사관이라는 예를 통해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에 미국 대사관이 있습니다. 이 대사관은 대한민국 땅 한복판에 있지만 대한민국 소속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 속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기쁨을 찾으면 됩니다. 기쁨의 문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끝내야만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찾기 마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기쁨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든 단체든 사물이든 그로부터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기쁨과 속함의 문제는 이처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쁨을 기대하는 대상에 종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로 살면서도 서로에게서 기쁨을 찾지 말라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모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를 다니지만 회사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승진과 급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으로 기쁨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가치로 인해 얻는 기쁨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아서 아이에게 좋은 자전거를 사줬습니다. 이때까지는 마음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사고가 나서 다치자 이제까지의 기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같은 이치에서 돈이 많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돈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행이 닥칠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 다투게 되는 이유는 기쁨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짜증과 화가 납니다. 그러나 배우자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대해 기쁨을 기대하는 것이 악입니다. 흔히 죄라고 여겨지는 악한 생각이나 행동은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것에서 나오는 열매이자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계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아예 데려가신다면 세상과 관계할 수도 없습니다. 몸이 세상에 있기에 마음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관계의 방식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기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볼 기회입니다. 세상 밖에 있으면 세상에 속하지 않아볼 기회조차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내게 주는 유익은 경제적 울타리가 되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찾지 않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관계하고 사는 것이 신앙의 묘미입니다. 가족과 다정하게 뭉쳐서 살아가지만 그들에게서 기쁨을 찾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 기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놓으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동일한 기쁨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고 그 기쁨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가족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족들에 대한 태도도 바뀔 수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의 모습 그대로를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변하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의 상태입니다. 배고픔에서 배부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픈 상태에서 붕어빵 가게 앞을 지나가면 너무나 맛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스테이크로 배가 부른 상태에서 붕어빵 가게 앞을 지나간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붕어빵이라는 대상은 변함이 없으나 배고픔과 배부름으로 인해 태도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배부른 마음으로 회사를 가면 승진과 급여가 붕어빵으로 보입니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배우자나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테이크로 배가 부르면 붕어빵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마음이 배가 부르니 배우자나 자녀에게서 기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배우자나 자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그들의 마음 또한 정말로 기뻐질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배부를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말씀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최고다!”라고 외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가는 길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내셨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끌고 가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에 예수님에게 주신 기쁨을 똑같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배부르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더는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면 세속적인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배우자에게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기쁨을 추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싶다면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를 통해 기뻐하기를 원하는 동안에는 그렇지 못한 자녀의 모습에 짜증과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정치인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 배부른 사람은 여야를 떠나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쁨을 찾지 않아야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기쁨을 찾지 않아야 회사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가치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 뛰어가겠지만 우리는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며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승진도 돈도 기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기쁨이십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승진도 돈도 붕어빵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승진과 돈이 맛있게 보인다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 세상에 대하여 왕따를 자처하는 기쁨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따는 기쁨과 만족의 왕이고 행복의 왕입니다. 여러분 모두 왕따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승천까지의 길을 마음이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왕따 되기를 자처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왕 같은 존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