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베드로 후서 3장 8-13절]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기다림!!!
오늘 말씀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대강절 말씀하고는 참 안 어울리는 본문인 것 같습니다. 왠지 대강절은 희망적인 기다림 같고, 오늘 본문은 이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성경에는 끊임없는 두 가지의 기다림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이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라면, 신약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는 행렬 속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큰 기다림이 있습니다. 봄철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속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밤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포부 속에도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에도 실패와 성공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기쁨과 행복으로 기다리는 사람과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차이겠지요?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런 기다림 중에는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갚을 길 없이 빚쟁이가 정해 놓은 그 날을 맞아야 하는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망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다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림 중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다림도 있습니다. 결혼 날을 잡아놓고 그 날을 준비하는 신랑신부의 기다림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전역할 날을 달력에 표시하며 학수고대하는 말년 병의 기다림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입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참 많은 기다림의 이야기인 듯합니다. 무엇보다 의인에게 그 기다림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노아는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노아와 같은 기다림으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 많은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노아는 ‘미친 사람”입니다. 그는 기다림 때문에 자신처럼 즐기지 않고 고난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날은 왔고 홍수로 말미암아 죄악에 빠져있던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다. 기다리며 준비했던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실 때, 처음으로 택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나이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살던 땅과 아비 친척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오랜 시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00세가 되어서야 부르심을 입고 25년이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리라는 약속의 씨앗 ‘이삭’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을 얻고 난 후에 40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큰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홍해를 건넜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더 기다리며 훈련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일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양을 치다 말고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무명의 목동으로 자신의 양을 쳤고, 그가 장군이 된 후에는 시기하는 왕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드디어 왕이 됩니다.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세요.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씀을 쓸 때의 상황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당시는 박해시대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지금 오시면 심판받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 악인들이 흥하고, 죄가 판을 치는데도 심판이 임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페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개. 그리고" 어제저녁 우리 집 개 흰둥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얼마나 운동을 싫어하는지. 그만 들어가자고 보채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운동을 합니다. 이미 길을 아는 이놈이 앞질러가 보이지 않습니다. 살짝 돌아다보니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한참을 지나 살짝 보니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왔다갔다 방황을 합니다.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결국, 이놈은 그 자리에 있고, 날이 어두워져 혹시라도 무슨 일이 날까 봐 제가 포기하고 들어갑니다.이건 개가 저를 이긴 게 아닙니다. 염려하는 마음에 제가 져준 겁니다. 갑자기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늘 기다리다 져 주시는 아버지는, 제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저를 더 염려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 염려하고 더 성숙한 사람이 늘 양보합니다. 하지만 늘 양보받는 이에게 선한 것은 아닙니다.혹시 우리는 양보 받은 것을 이겼다고 착각하며 의기양양하지 않는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축복받았다고 착각하지 않는지. 혹 당신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면 바보같이 ‘또’ 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평안하게 합니다. 그런 꿈을 꿉니다. "서로 지려고 싸우는?" 그런 날이 오기를. 싸움은 싸움인데 이상하게 행복해서 눈물 나는.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통 가운데 보내는 시간 동안 나를 버리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기다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시간이 더욱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본문 9절을 보세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참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종말을 유보하고 계신 것은,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삶을 고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나는 대강절은 단순한 기다림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기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것은 ‘황금’ ‘소금’ ‘지금’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한 어떤 사람이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게 뭔지 맞춰 봐!”
잠시 후 아내에게서 답이 왔습니다.
‘현금’ ‘지금’ ‘입금’
잠시 후 남편이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금’ ‘쪼금’ ‘입금’
우리는 모두 서두름을 좋아하지만, 기다림은 많은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 깊은 뜻이 있기도 합니다. 서두름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기다림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기다릴 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바라보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이사야 40장 31절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라는 말은 영어 성경 KJV에 보면 “Wait upon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주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hope in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림이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볼 때 희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이라면 같이 경험하는 것일 것 같은데요.
등산을 하면서 초행길을 갈 때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의 강도가 다릅니다. 단순히 오르막 내리막의 차원이 아니라 길을 모르고 갈 때는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을 알고 나면 쉽게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 8절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기다림의 시간을 우리가 못 견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으로 날 수를 계산하기 때문이죠. 온 우주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시간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집회 때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하나, 둘, 셋”을 세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 마음속에 소원을 생각하세요.
“이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행복해지겠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주적 관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의 기다림이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3~44절에 있는 말씀을 보세요.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축복입니다.
본문 10~13절입니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기다림’은 우리의 기다림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하신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쁨으로 고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 기다림과 비 신앙적 기다림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잠깐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기다림이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요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그 기다림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정말 고난의 시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일이요, 우리의 노력은 점점 우리를 낙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절대로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신앙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해지는 상황이 박해시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수도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 박해시대를 지나면서 기다림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본문 13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약속대로 이미 이루신 복음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완성된 나라입니다.
튤리안 차비진의 [Jesus All]이란 책을 보며 아주 인상적인 예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차비진의 친구 스티브 브라운의 이야기입니다. 브라운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영문학 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했답니다. 울며 낙심한 딸을 데리고 아버지는 학교에 갔습니다. 영어 학과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러 말입니다. 그때 그가 경험한 이야기를 옮겨보겠습니다.
그녀(영어학과 학과장)는 딸 옆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로빈은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태세였다. 주변에 여러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로빈이 창피할까 봐 서둘러 그 학생들을 내보냈다.
“이분들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나가 있으렴.”
학생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로빈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제가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제 딸이 이 영어 수업에서 빠지길 원해서입니다. 우리 딸에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이 애를 일반 영어 수업으로 옮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브라운 씨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학과장은 “로빈과 잠시 이야기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물론이죠.”
이제 그녀는 로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빈 학생, 어떤 심정일지 잘 알아요. 그런데 내가 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무조건 A 학점을 주면 어떨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A 학점을 주면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로빈은 훌쩍거리면서 대답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A 학점을 줄게요. 학생은 이미 A 학점이에요. 자, 함께 수업을 합시다.”
나중에 학과장은 브라운에게 로빈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낮은 성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로빈은 그 수업에서 연속 A 학점을 받았다.
기다림이 축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미 은혜를 입은 자들의 기다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A학점을 받았다는 것. 실패와 심판의 위험이 이미 제거된 상태에서 기다린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것을 기뻐하는 것 말입니다.
로빈이 A학점을 이미 받았지만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얻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이들에게 이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A. D. 64년경에는 그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았지만, 그 좁은 미로와 같은 지하 무덤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교 당하는 고통을 목격해야 했던 크리스천들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순교기에 보면 죽어가는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로마의 황제는 크리스천들의 처형을 금하게 됩니다. 오히려 용기 있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시민들이 감동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진짜 힘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순교의 영광이 아니라 배교의 치욕을 맛보도록 회유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유명한 순교자 폴리갑이 죽기 전 로마의 군인들이 그를 회유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살려 주겠노라고. 그러자 폴리갑은 “내가 평생을 하는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리오.”라며 순교를 당합니다.
그는 죽음 가운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축복임을 알 때, 초조하지만 지루함이 아닌 희망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있는 추억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 가는 게 참 대단한 일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김밥을 싸고, 달걀을 삶고, 사이다 한 병 들면 참 좋았던 시절 말입니다. 아마도 특별한 것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기에 그렇게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왜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그런데 그 날이 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우리가 지금 대강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25절에 보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하였고, 또 한사람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37절에 보니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오심을 보고 선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풀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때를 위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그 날이 기다려지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보니까 대강절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경건’인 듯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경건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의 참뜻은 ‘내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이 경건의 진의가 조금은 왜곡된 듯합니다. 이유인즉, 초기에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이 ‘경건’을 한자로 번역한 데서 온 오류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원어 ‘유세베이아’가 몹시 어려운 한자로 번역된 것이죠.
본래 ‘유세베이아’는 ‘유’라는 접두어와 ‘세베이아’라는 말이 결합한 복합단어입니다. ‘유’라는 말은 영어의 ‘well'이라는 뜻이고, ‘세베이아’는 ‘섬긴다, 봉사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경건이란 “잘 섬긴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경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입니다.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금욕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 율법적 규범이 경건으로 이해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금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럼이나 기타 같은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뛰어다니거나 장난쳐서는 안 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물건을 사거나 먹을 것을 사 먹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연애를 하면 안 된다!”
얼핏 보면 맞는 말입니다. 경건을 한자적으로 이해한다면 말이죠. 왜냐하면, 이런 일이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데는 방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이런 사전적, 유교적 의미에서 경건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수십 년을 이렇게 경건을 지키며 엄숙한 예배를 드린다고, 또 금욕과 금식으로 절제된 삶을 산다고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1장 26~27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오늘 본문 11절에서 말하는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적어도 복음은 우리가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자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을 우리가 지키려 한다면 곧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늘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면서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이것이 정말 복음이겠습니까?
잘못된 경건의 이해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중국 사람이 셋만 모여도 중국집이 생겨나고, 한국 사람 셋만 모이면 교회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정말 한국 사람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교회가 생겼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생겼다고 복음이 살아있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입니다.
선교사님이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이 길을 따라 한국의 큰 교회들이 다 있습니다.”
혹시 신주쿠라고 들어보셨나요? 그런데 그 교회가 많은 거리가 가장 타락하고 위험한 거리라는 것을 아시나요?
혹 우리가 이렇게 변명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있으니까, 그나마 그 거리가 그 정도라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가면 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많이 생겨나도 호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정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생겨나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이 보기에도 부정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질 수 있는 것인가요?
사도 바울이 한 말이 딱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경건의 모양은 없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
마땅한 경건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는 거룩한 행실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는 봉사의 기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찬양과 연극으로 기쁨을 나누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경건하게 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