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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의 유묵 이야기>
이순신의 필적 ‘명량해전 결전을 앞두고’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정유년(1597년) 9월 15일 계묘.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되 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의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말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현충사의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수군통제사 원균은 거제도 칠전량 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장졸과 함선 대부분을 잃었고 이순신이 축척해두었던 막강한 전비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달아나다 적병의 칼에 맞아 죽었다. 조정은 당황했다. 선조는 비국대신들을 불러 논의했으나 대책이 없었다.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했다. 통제사에 재기용된 이순신은 남해 등지를 살폈으나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전부였다. 왜군과 맞설 수 없는 형편없는 전비였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만으로 적을 공략하라고 했으나 불가함을 아뢰었다. “신이 아직 죽지 않았고 열두척의 배가 있으니(微臣不死 尙有十二)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뿐입니다.” 조정의 만류에도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로 전투에 임했다. 명량 해전에서 대승했다. 12척으로 133척의 적군과 맞서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통제사로 재부임한 뒤 최초의 대첩이었고 수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대해전이었다. 명량 대첩은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일시에 구한,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사건이었다. 유묵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쓴 일기이다. 이순신의 그 유명한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도망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다 적의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바야흐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 말고 독전을 계속하라.” 이순신은 이 마지막 말을 아들 회에게 남기고 54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둥둥둥 북을 울렸다. 그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독전을 계속했다. 군사들은 분전하며 퇴각하는 왜군을 모조리 섬멸시켰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친 것이다. 노량해전의 대승으로 7년간의 긴긴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한 사람의 위대한 희생이 전쟁을 일시에 종식시킨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순신을 동양의 넬슨이라고 칭송했다. 도꾸도미의 『근세일본국민사』는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역의 전후 7년 간에 걸쳐 조선국의 책사․변사․ 문사는 많았으나 전쟁에서는 참으로 이순신 한사람으로써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역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뿐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해서 최고의 영웅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 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 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죽음으로 나라를 구한 충렬의 정신, 이순신 ! 그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통솔력은 천추에 길이 남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살신성인의 혼. 그는 이 나라의 위대한 스승이며 등불이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보 76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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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