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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세상] 2007년 봄호
전망 부재의 실존적 비애
-박영근 시인의 문학과 삶을 찾아서-
최 광 임(시 인 )
1. 실존적 의미로서의 길
바지춤이 흘러내리는지 검은 혁대를 연신 끌어올리고 있었다. 후줄근한 베이지색 면바지와 낡은 흰 티셔츠였던가 남방이었던가. 말끔하게 세탁한 흔적이 보이긴 했지만 허름함이 한 눈에 띄었다. 그때는 시인의 행색을 보면서 노동자 시인답다고만 생각했었다.
당시 나는 몽골시인의 시를 낭송하기 위해 어느 행사에 참석 중이었는데 그 자리에 그도 참석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반가웠고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더 반가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시인의 고향이 부안이라지만 설마 변산이기야 하겠는가 싶었는데 글쎄 같은 곳이 아닌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 반가움과는 달리 박영근 시인은 그다지 반가울 것도 반갑지 않을 것도 없는 표정으로 ‘참 반가운 인연’이라고 한 마디 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말끔한 정신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많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행사 끝나고 더 이야기 하자던 시인은 내가 시낭송을 하고 내려왔을 때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2004년 9월 그렇게 시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시인’이며 민중가요의 대명사인 「솔아솔아 푸른솔아」의 원시자(元詩者)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노동자 시인의 자리엔 박노해가민중가요의 대명사엔 안치환이 자리한다. 그것은 그의 문학이 삶을 원체험으로 한 사유에 집중하면서도 지나치게 리얼리즘 경향만을 표방하지 않은데 있다. 즉 사유방식으로는 삶과 문학을 동일시하며 창작방법으로는 리얼리티와 모더니티를 병행해 구사했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을 거칠고 격렬한 구호와 여과되지 않은 문장으로 그려내던 박노해 시인과는 달리 삶에서 빚어지는 애환 같은 서정성에 더 천착했던 것이다. “사유가 아무리 도저하더라도 그것이 시에 있어서 서정적 울림과 설득력 있는 현실을 얻지 못한다면 앙상한 시적 관념으로 떨어질 것”(「시인의 관념과 시적 소통」, 《실천문학》 2002년 가을호)이라는 확고한 의지로 스스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 또 민중에서 개인으로 문학의 시점이 옮겨오는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좋은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80년대 활발히 노동문학을 했던 박노해 시인을 비롯한 몇몇 노동시인들의 행보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그의 문학적 행보가 소외되고 고된 행려의 길을 걷게 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로 필자는 그를 노동자시인이라는 의미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실존의 문제에 천착한 삶의 서정과 모더니티를 겸비한 순수시인 쪽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은 물론 노동자들의 간난신고한 생존방식과 이 사회의 자본의 힘은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들을 얼마나 더 궁핍하게 만드는가를 호소할 때에도 고도의 절제된 감정으로 서정성을 부각시킨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대치선 위에서 떨고 있다 / 밤새 쏟아져 내리다 / 바람에 휩쓸려 / 꽁꽁 언 채로 / 새벽의 골목 한구석에 몰려있는 / 눈더미 속에 있다 // 수당 몇 푼을 찔러넣고 / 길 위 에서본 사람은 알지 / 허공에 하얗게 얼어붙은 해가 / 가슴 속에서 어떻게 뜨거워지는지, / 골목 에서 눈물을 훔치던 길이 / 어디로 뻗어가는지 // 지금은 제 죽음의 밑바닥까지 보아버린 어두움 이 / 스스로 피를 흘리는 시간 / 한줄기 새벽 노을에 / 길이 대치선 위로 숨을 틔우고 있다
- 「길」전문, (시집 『지금도 저 별은 눈뜨는가』에서)
살아가는 과정이 곧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길 위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되풀이하며 산다. 바로 박영근 시인의 경우도 그러한 예라 하겠는데 시인의 시세계를 점유하는 여러 의식 중, 두드러진 의식의 하나가 바로 정착지가 없는 혹은 불안을 동반한 ‘길’이란 공간이다. 이때 박영근 시인의 길은 삶의 실존적 공간과 시의식의 공간이 일치하는 특성을 갖는다. 정지용 시인의 경우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벗어나 백록담이란 시의식의 공간으로 옮겨 앉아 불운한 시대의 불우한 시를 썼다. 이러한 점이 현대시의 대부로 일컬어짐과 동시에 시대적 역사인식이 부족한 시인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일제침략기와 자본주의 시대적 상황을 비교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나 시인이란 의식의 상상계를 통해 우주의 삼라만상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아니냐,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했을 때 박영근 시인이 여타 시인들과 변별되는 점이다. 80년대 민중의 소리가 컸을 때에도 뒤이어 민중보다는 개인의 의식세계로 빠져들던 90년대에도 또 소통불가능의 유폐된 자아 탐색의 시들이 난무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박영근 시인은 어느 곳에도 ‘이 곳이다’라는 행렬에 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관념의 세계로 침잠하지 않고 끝까지 실존의 문제를 담보로 한 사유로 시창작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시간은 여전히 대치선 위에서 떨고 있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시간은 또 “눈더미 속”에 있고 “제 죽음의 밑바닥까지 보아버린 어두움이 / 스스로 피를 흘리는 시간”이다. 시간은 공간에 포함되며 시간적 공간이란 바로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임과 동시에 고단한 삶에서 오는 비애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곧 “대치선 위에서 떨고”있는 불안의식으로 환기되기도 한다. 그 ‘대치선’은 그의 노동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당 몇 푼’을 받아들기 위해 노사 간에 어떤 대립도 불사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줄기 새벽 노을에 / 길이 대치선 위로 숨을 틔”운 길로 맹렬히 현실을 끌고 왔다. 그렇게 끌고 왔던 그의 길이 더 이상 가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과 소외의식은 90년대 후반으로 올수록 더욱 가중된다.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 거기 먼저 와 /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 내가 끌고 온 길들”(「길」부분, 『저 꽃이 불편하다』에서) 이 시사하고 있듯이 지금까지 동행했던 길들이 어디에도 닿지 못할 길이며 닿아야할 목적지가 이미 사라진 길, 더 이상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길이 된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보다 먼저 울음을 터트릴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그가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가며 동행했던 길, 즉 노동의 땀 위에 피어난 자본은 더 이상 그와 그가 끓고 왔던 길을 자신들의 모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 여자들과 / 경쾌한 노래 / 막 옷을 갈아입은 將盛한 마네킹들 /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 (「이사」부분, 《리토피아》2006년 봄호) 이 더 이상 그와 그의 길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고 지워버린다. 이에 시인은 “나에게 집이 있었던가”(「강화에 와서」부분,『저 꽃이 불편하다』에서)라고 자문하거나 “끝없는 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行旅」부분, 『저 꽃이 불편하다』에서)라고 되뇐다.
이렇듯 시인을 행려자로 내몬 것은 민중의 땀과 피에 힘입어 성장한 자본의 힘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비애의식은 주정적이지 않고 서정성과 모던함을 수반한 운율과 이미지로 일관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민중적 모더니티를 겸한 시 창작방법이 바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뀐 상황과 80년대의 대명사, 노동자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이고도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독자가 읽고 싶은 시를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전망 부재의 행려의 땅
“그 친구 절망이 너무 깊어서 죽었어. 스스로 목숨을 놓은 거야”
박영근 시인이 작고했다는 그날 나는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시와 상상》편집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은봉 시인이 했던 말이다.
除隊를 하고, 세월도 믿음도 무심히 멱살을 잡고 흔들던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중 략)
출신도 전북 본적지 서해중학교졸업
고향도 두고 사랑마저 등진 신세가 핸드카를 밀면서 울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부르면 고향은 조막손 아프게 찌르던 낫자욱들
잘살자 진성전자공원들아 어둡게 화장실 낙서 같은 곳에서도 얼어붙고
-「취업공고판 앞에서」부분, (『취업공고판 앞에서』에서)
악기 공장 / 닫힌 철문 앞에서 /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 은 것일까 // ( 중 략) / 행길 건너 돌아앉은 고층아파트 / 애드벌룬에 입주 예정 날짜를 띄우고 있는 재개발구역 / 국밥과 소주를 파는 그의 아내 / 막김치처럼 헤픈 그 웃음을 / 나는 무엇이라 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 (중 략) / 돌아볼 옛날도 / 훗날도 없는 텅 빈 시간
- 「희망에 대하여」부분,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에서)
명문고인 전주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문학을 하겠다고 학교를 뛰쳐나올 때만 해도 그의 희망은 태산같았을 것이다.
“문학을 하는데 학벌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리끼가 대학을 나왔느냐”
라고 큰소리 쳤지만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갈 곳 없던 ‘나’는 핸드카를 미는 신세가 되었다. 문학의 꿈을 품고 학교도 사랑도 극구 말리는 어머니도 뿌리치고 고향을 떠나온 ‘나’에게 세상은 변변찮은 일거리 하나 주지 않아 비애스럽기 짝이 없다. 이러한 비애는 통증으로 전이되는데 어릴 적 낫에 조막손을 찔렸을 때의 아픔 이상인 것이다. ‘나’의 삶이 비애스러운 것은 전자공장공원들의 삶이 비애스러운 것과 동일하다. 나는 곧 전자공장공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슬픔이 객관성을 획득하는 이유이다. 그 당시 이들은 고향을 떠나와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삶의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야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나는 갈 곳이 없었다”로부터 시작한 그의 삶과 문학은 십여 년이 훨씬 지나 출간된 네 번째 시집에서도 여전히 전망이 부재한 채로 나타난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조차 또 다른 절망에 가까운 비애를 안고 있을 뿐이다. 네 번째 시집 후기에 “나에게 민중, 혹은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이며, 가야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세상은 민중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그 시절 공원노릇을 하며 지냈던 이들은 여전히 구직자리를 찾아 떠도는 노동자 직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에 처해있다. 뿐만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이 고작 악기 공장 근로자로 ‘원직 복직’되는 것이다. 그뿐인가. 재개발 구역에서 “막김치처럼 헤픈 웃음”으로 “국밥과 소주를 파는 그의 아내”를 보면서 과연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은가에 대해 자문한다. 그 자문 속에는 그것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또 다른 처연함을 동반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전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돌아볼 옛날도 / 훗날도 없는 텅 빈 시간” 속에서 삶을 공회전 했다는 회의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문학과 민중은 내가 가야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라고 시인은 다짐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들은 여전히 민중이므로 그들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내지 희망으로 비치지만 서글프게도 “어둠과 절망을 제대로 살아”내는 일이라고 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절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떠나 그간 찾지 않던 고향을 90년대 후반부터 자주 찾았다고 한다. 지치고 외롭다고 생각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따뜻이 기댈 그 무엇이다. ‘나에게 집이 있었던가’라고 자문했듯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는 삶을 살아온 그가 위안 받을 수 있는 곳은 탯줄을 묻은 고향 말고는 달리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 1월 어느 날 모든 일과를 접고 그의 생가를 찾아 나섰다. 그간 허정균 선생으로부터 조찬준씨 댁의 전화번호를 전해 받았으므로 그를 찾아가 박영근 시인의 유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고향엘 간다는 것은 나 역시 달갑지만은 않은 일이어서 일과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출발했던 터이므로 전화번호를 빼놓고 가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살고 있는 허정균 씨에게 전화를 해댔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깟 시골 동네에서 집 하나 찾지 못하랴’ 싶은 생각으로 부안에 당도하였고 내가 태어난 집에 들러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각설하고 마포 삼거리에 이르러 길을 묻다가 우연히 그의 친구 허정균 씨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었다.
언제부턴가 고향엘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변산 마포에 데려간 이는 깨북쟁이 친구이며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회원인 허정균씨 자신이란다. 그와 함께 변산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해창, 계화도, 돈지 등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도 둘러보았단다. 그 뒤 시인은 여러 번 변산행을 감행했다. 술을 마시다 말고 불현듯 서울역으로 가 택시를 타고 변산으로 내달렸다. 그의 기행에 관한 이야기는 문단에서도 익히 아는 바이나 그때마다 마포에서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 조찬준 씨가 극진히 대했다.
허정균 씨로부터 시인의 생가를 소개 받은 곳은 평소 내가 지나쳤던 그 마포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포는 좁은 이차선 도로를 끼고 양쪽으로 집들이 나뉘어져 있는데 이십여 채나 될까말까 하는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나머지는 밭 가운데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십여 채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다. 변산에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는 채석강, 왼쪽으로는 내소사 가는 길이인데 바로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점방집이었다. 시인의 삶이 길 위에서 시작해 길 위에서 끝났듯이 공교롭게도 삼거리 점방집이었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자꾸 예삿일 같지만은 않았다.
방첩대나 지서 사람들이 밤새 술상머리를 두드리며 부르던 / 그 유행가 소리를 옛집에서 듣는다 / 선거場이 설 때마다 공화당 표몰이꾼들에게 / 말들이 막걸리와 그 질긴 만월표 고무신짝을 풀 며 / 신명을 내던 아버지 / 내 모든 생각들이 숨을 멈추고 엎드려 있던 / 대공수사대 / 벌건 갓 등 아래 / 시멘트벽에 / 발가벗겨진 내 알몸의 그림자 / 외롭게 춤출 때 듣던 / 아버지의 또다른 이름 / 빨치산 전향자라는 이름 // 할아버지 살아 계시던 옛집엔 / 지금도 정정한 참오동나무 한 그루 / 아침 저녁으로 가지를 흔들며 / 마당에 옛말을 뚝뚝 떨구고 있다 // 아들의 목숨을 사기 위해 / 한 마을을 부리던 논마지기도 당신이 묻혀서 / 들판을 지켜보고 싶던 선산마저 울려세우 더니 / 그예 돌아가셨다는 말 // 세월이 어떤 시간의 물살에 허물어져 / 그 이름이 쓸려가고 /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 거기 묻힌다 한들 /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 칼날의 마음
-「변산기행」부분,(『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에서)
점방을 보았던 탓으로 시인은 또래들에 비해 배를 곯거나 집안을 돕는 심한 허드렛일 따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의 집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양옥으로 집을 짓기는 했지만 여전히 슈퍼마켓 간판을 달고 있었다. 집 옆으로 지금도 공터가 있는데 허정균 씨에 의하면 바로 그 곳이 방첩대 자리란다.
전쟁이 끝난 후 늦게까지 빨치산이 활개를 쳤던 곳 중의 하나가 변산(옛날엔 산내라 불렀음) 일대이다. 특히 내변산(내소사 부근)을 기점으로 한 빨치산의 활동은 휴전 후 오래까지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수차례 들은 바 있다. 해안선을 끼고 있는 산들이 깊을 뿐 아니라 험준하기까지 했으며 여름철이 아니고는 세 계절 모두 오지처럼 조용한 곳이었으므로 은둔한 그들을 찾아내 소탕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간첩단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다. 특히 여름철엔 해수욕장 개장을 틈타 외부 사람들의 유입이 자연스러운 탓이기도 했으며 폐장되고 나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엿장수가 서너 계절을 더 살다 가기도 했다. 또한 미친 여자가 그 다음 해까지 머무는 일이 많았으며 우리들은 돌을 던지거나 ‘얼레리 꼴레리’ 노래를 부르며 미친 여자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기도 했다. 어머니는 잠시 그런 여자를 데려다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 보내곤 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 지형학적 조건 때문에 시인의 아버지도 잠시 빨치산에 연루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 오명을 씻기 위해 할아버지는 가진 재산을 털었으며 아버지는 선거철마다 사비를 들여 공화당 표몰이꾼을 도왔던 것이다. 가난으로 배곯이는 하지 않았지만 시인에게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는 결코 좋을 수만은 없는 셈이다. “살붙이들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 거기 묻힌다 한들 / 아버지에겐 끝내 지울 수 없었던 / 칼날의 마음”이었을 아버지였기 때문이어서 일까. 허정균 씨의 말에 의하면 시인의 아버지는 교육열이 대단하여서 일찍 자식들을 대처로 유학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 자녀를 대처로 내보낼 정도면 시인의 아버지 또한 남다른 의식을 갖고 있을 터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어려서부터 집이 아닌 곳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고독과 함께 행려의식을 갖게 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오명을 쓰고 자란 고향이었기에 평소엔 찾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고향을 지우고 산 것은 아니다. 삶의 애환을 절박하게 부르짖을 때에도 고향 풍경은 그의 시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반대로 가장 아늑한 정서를 토로할 때에도 유년의 고향 공간이 묘사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향, 사랑 그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었으나 삶의 여러 여건상 돌아가 기댈 만한 곳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아닐까. 노동자로서 전망이 부재한 자본주의 사회, 나이들 수록 아버지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고향, 그리고 떠나버린 사랑은 동시에 시인이 돌아가 안주하고 싶었던 자리였음에도 내면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움으로서의 공간이었을 뿐 결코 돌아가지지 않는 곳이었다.
이로 보아 그의 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길’과 그 길 위를 걷는 ‘행려’ 의식은 생활적인 장소로서의 공간과 시대상황 속의 개인사적 의미가 겹친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가 첨예화된 사회에서 고뇌하는 노동자, 배고픈 노동자로 살아내기에는 힘에 부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이 사회 노동자들의 대리적 죽음은 아니었을까. 그의 자전적 대표시라고 해도 무방할 「겨울비」는 그가 얼마나 피폐한 상황 속에서 삶을 견디고자 노력했는지 전율하게 한다. 한 부분을 옮겨 놓으며 부디 다음 생에서는 가난하지 않은 삶, 돈 때문에 사랑을 잃고 절망하지 않는 삶과 노동자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에 살기를 기원한다.
4
나 때로 한밤중 고속도로 갓길 같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술을 마시고 홀로 잠들기도 하였다
돌이킬 수 없이 달려온, 또 살기 위해 달려갈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
저를 찾고 있는
망가진 사내 하나를 보았다
온몸 환하게 얼어가는 겨울비 속에서
《시로 여는 세상》2007년 봄호
최광임 전북 부안 변산 출생. 2002년 《시문학》등단.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 고』현재 대전대, 건양대, 창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