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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톤으로부터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 진리의 객관성, 절대성, 상대성에 대하여
앞에서 진리와 오류의 관계 등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여기에서는 진리론의 기타 일부 문제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선진(先秦)때의 철학자 장주는 우화와 비유로써 자기의 철학사상을 천명하는데 능란하였다. 그는 제물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축축한 곳에서 자게되면 허리병에 걸리기 쉬운데 미꾸라지도 이러한가? 사람은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면 떨어질까봐 겁나 하는데 원숭이도 이러한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가 선택한 거처 중에서 어느 것이 적합한가? 절세의 미인 모장, 여희를 사람들은 곱다고 보지만 물고기가 보게 되면 겁이 나서 물밑으로 달아나며 새들이 보게 되면 하늘높이 날아나 버리며 사슴이 보게 되면 무서워서 곧 도망치는데 도대체 어느 척도를 곱고 미운 것을 재는 척도로 삼아야 하는가? 이리하여 그는 ≪제각기 다 자기의 시비 기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바로 시아버지는 ≪시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하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한다는 속담과 같아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데 대한 규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객관성, 절대성, 상대성의 관계문제와 관련된다. 확실히 진리는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장주는 이 점을 보아내었지만 그것을 너무도 과장하여 진리의 객관성마저 부정해버렸다.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철학사에는 장주처럼 진리의 상대성만 틀어쥐고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한 사람이 적지 않다. 현실생활에서도 이런 사상방법을 자주 볼 수 있다. 진리론을 연구할 때 우리는 우선 이 문제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다
진리란 그야말로 듣기 좋은 말이므로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인가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존재와 사유에서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하는데 대한 대답이 같지 않음에 의하여 지리에 대한 두가지 각이한 견해가 규정되었다. 한가지는 진리를 주관적인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관념론적 진리관이다. 관념론자들은 사유를 일차적인 것으로, 존재를 이차적인 것으로 인정하므로 필연적으로 진리의 객관적 내용을 부정하게 된다. 다른 한가지는 지리를 객관적인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유물론적 진리관이다. 유물론자들은 존재를 일차적인 것으로, 사유를 이차적인 것으로 인정하므로 진리가 인간의 의식에서의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의 정확한 반영이라는 것을 승인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자를 주관적 진리론이라고 하고 후자를 객관적 진리론이라고 한다.
주관적 이론에도 이러저러한 유파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가운데서도 제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현대자산계급의 실용주의철학이다. 그것은 실용주의철학이 주관적 진리론의 실질을 비교적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진리란 ≪유용한 것≫,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것은 진리의 객관적 내용을 완전히 말살한다. 구중국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용주의자 호적은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말을 하였다. ≪진리는 원래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이 사용하도록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큰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다 ·진리1란 듣기 좋은 이름을 단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란 인간의 일종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리와 나의 손에 쥐어져 있는 종이, 분필, 흑판, 물주전자는 같은 것이며 모두 우리의 도구인 것이다.≫ 주관적 진리론에 대한 매우 전형적인 표현으로 되는 이 한토막의 말은 인간이 이러저러한 주관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을 조금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그 어떤 좋은 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언론, 판단이기만 하면 그것이 황설이건 궤변이건 기만이건간에 그것에다 진리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달아줄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히틀러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즈가 황설도 천번을 중복하며 진리로 된다고 숨김없이 말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임표, 강청 반혁명집단도 이런 술책을 부렸다. 그자들은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상부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느니 ≪권리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게 된다≫느니 ≪노간부가 바로 민주주의파이고 민주주의파가 바로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이다≫느니 뭐니 하는 일련의 소위 이론을 꾸며내어 그것을 혁명적 진리로 믿도록 요란스럽게 떠들어대었던 것이다. 강청은 심지어 인민법정의 피고석에 끌려나와서 까지도 인민들에게 간파된지 오랜 그 황설을 뻔뻔스럽게 자꾸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국주의자, 패권주의자, 파쇼분자들이 주관적진리론을 즐겨하고 임표, 강청 따위 야심가, 음모가들이 그것을 습용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것이다.
기실 주관적 진리론자들의 그 이른바 진리에 대하여서는 무엇이라고 불러도 다 종으나 진리라고는 부를 수 없다.
진리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서의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의 정확한 반영인 것이다. 인간의 인식, 반영으로서의 진리의 그 형태는 주관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그것은 물론 인식의 주체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는 젓은 그것이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과 부합되는 인식으로서 인식의 주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인간 또는 인류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리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인식이 진리로 불리우는 것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떠받들고 구가하면서 그것에 어떤 계관을 씌워주거나 인간의 주관적 생각여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과 일치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객관적 내용을 떠나서는 진리란 것을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진리의 불패성도 바로 그 객관성에 있다. 갈릴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세인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는 1632년에 ≪우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두 설의 대화≫란 책을 출판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체계를 반대하고 지동설을 지지, 발전시켰으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그 이듬해에 로마의 종교법정에서는 그를 ≪이단사설을 미친듯이 신봉하는 혐의분자≫로 확정하고 그에 대하여 종신감금을 판결하였다. 그에 대한 판결서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지동황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결정한다. 즉 태양은 세계의 중심이며 그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그 자체도 끊임없이 회전한다는 논법은 황당한 것이다. 신앙의 견지에서 보면 지동황설은 분명히 성경에 기재되어 있는 것과 상반되기 때문에 사교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코페르니루스의 태양중심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객관적 법칙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그 어떤 권세로도 뒤엎을 수 없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것은 이미 소학생들의 상식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판결서는 그야말로 미련하고도 가소로울 것이다. 1980년 10월에 로마교황은 하는 수없이 공개적으로 갈릴레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는 300여년 전에 갈릴레이에 대하여 내린 판결은 불공정하다는 것을 승인하고 갈릴레이의 죄명을 벗겨준다고 선포하였다. 이 사실은, 진리의 객관성은 권세에 의하여 개변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호오(好惡)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웅변적으로 말해주었다. 기실 로마교황이 갈릴레이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든 안 주든간에 ≪성경≫이 천체운동의 법칙을 개변시킬 수 없는 이상 그것은 코페르니쿠스학설의 객관적 진리성도 개변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볼 수 있다시피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고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을 정확하게 반영하기만 하면 그에게는 진리가 있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누가 만일 객관적 사실을 멸시하며 심지어는 객관적 법칙을 어긴다면 그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진리가 없는 것이다. 유물론적 견지에서 본다면 누구에게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것은 그 지위의 높고 낮음과 권력의 크고 작음에 의하여 결겅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객관적 실제를 옳게 반영하였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른바 권력이 있는 자에게 도리가 있다≫는 말은 한동안 우세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결국도 없는 것이다. 권력과 진리 간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도 없는 것이다. 18세기의 러시아학자 로모노소프는 어느 날 궁정에서 귀족인 슈왈로프백작과 쟁론을 하였다. 도리가 없어 말문이 막힌 슈왈로프는 권세를 이용하여 로모노소프를 내리누르려고 하면서 ≪나는 너를 과학원에서 제명해버리겠다≫라고 무도하게 말하였다. 이때 로모노소프는 ≪양해하시오, 아무리하여도 당신은 과학을 나에게서 제명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권력이 곧 진리이다라고 지껄여대던 임표, 강생, 4인무리와 같은 야심가, 음모가들은 문화대혁명기간에 권세를 등대고 진리를 장악한 많은 사람-혁명가, 과학자, 작가, 교수, 간부, 노동자, 4.5사건의 영웅-들을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수정주의분자, 반동적 학술권위, 변절자, 특무, 반혁명분자……로 모함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박해하여 사망하게까지 하였지만 그들에게서 진리를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철저한 유물론자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존경할 만한 이런 사람들이 남겨놓은 사상, 이론, 저서, 시편들은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송되고 있으며 진리를 견지한 그들의 고상한 절개는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구가되고 있다. 역사적 교훈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권세로도 말살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자들인 만큼 어디까지나 진리를 견지하여야 한다.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는 유물론적 사상노선을 회복하였다. 이때로부터 억울하게 처리되었거나 꾸며내었거나 그릇되게 처리된 수많은 사건들이 시정되었으며 수정주의로 중상되었던 많은 이론, 방침, 정책들이 다시 회복되었으며 독초로 몰리던 많은 서적과 영화들이 다시 출판, 상연되었다. 진리 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
이것은 공산당원이 정치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의 하나로 규정되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누가 만일 감히 객관적 진리와 맞선다면 결국에는 객관적 진리의 징벌을 받게 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상대적인 것이다
진리의 객관성을 승인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론의 입각점이다. 우리에게 진리라고 불리우는 오든 인식은 일정한 범위, 일정한 정도에서 객관적 사물 및 그 법칙을 옳게 반영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것들은 모두 그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객관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아 아무런 진리성도 없는 그런 인식은 절대 진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단번에 진리를 얻을 수도 없다. 진리란 하나의 과정이다. 객관적 세계는 무한한 것이며 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영도 끝이 없는 것이다. 무한히 발전하는 인류의 인식의 총체로부터 볼 때 이 객관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것이지만 인식은 또 언제나 일정한 역사적 시대, 일정한 사람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 어떤 시대에 얻은, 그 어떤 개인이 얻은 진리적 인식은 언제나 국한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세계의 일체를 다 밝힌 것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의 일정한 과정, 일정한 부분, 일정한 층차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진리를 물론하고 그것은 다 조건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진리를 객관적인 것이며 또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사정은 바로 이러하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론의 다른 한 중요한 원리, 즉 진리의 절대성과 상대성과의 변증법적 관계문제,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와의 변증법적 관계문제와 관련된다.
객관적 진리를 승인한다면 절대적 진리를 승인하여야 하며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절대적 진리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그 어떤 객관적 진리를 막론하고 그것은 다 절대적인 것이기도 하고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진리에는 상대적인 일면이 있다. 그 어떤 시대에 인식한 진리나 그 어떤 개인이 인식한 진리나 그것은 다 상대적 진리이다. 진리에는 또 절대적인 일면이 있다. 그 어떤 상대적 진리에나 다 절대적 진리의 과립과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절대적 진리를 긴 강에 비유한다면 개개의 상대적 진리는 바로 이 긴 강의 물방울인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상대적 진리의 총화이다. 그것드은 대립되면서도 통일되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와의 변증법적 관계는, 인류의 인식과정은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점차 절대적인 것에로 박근하는 무한히 심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범주를 도입하여 그것들 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제시하였으며 따라서 인류의 인식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심각하게 설명하였으며 인식발전의 추세와 방향을 심각하게 설명하였다. 인류의 인식발전, 과학의 진보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와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원리의 정확성을 실증하였다.
위대한 과학자 뉴톤은 임종시에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 하였다.
≪나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나는 바닷가에서 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들반들한 돌이나 아름다운 조개껍질을 주어서 재미나게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여 진리에 대해는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말은 물론 과학자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중요한 철학적 도리도 설파하였다.
과학에 대한 뉴톤의 기여는 세인이 다 공인하는 바이다. 물리학면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완전한 고전역학이론체계를 창립하여 뉴톤시대를 열어놓았다. 뉴톤역학법칙은 거시물체의 저속운동의 객관적 법칙을 정확하게 반영하였다. 3대운동법칙은 지금까지도 과학기술면에서 예를 들면 기계, 자동차, 기선, 비행기 및 고층건물을 설계하는 면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은 태양을 에워싸고 공전하는 행성의 운행궤도 및 인공위성, 우주비행선의 운행궤도를 계산하는데 효과적으로 응용되고있다. 그것은 심지어 백여년 후에 지구의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는 개기일식과 개기월식의 시간까지 분초도 틀리지 않게 예보할 수 있게 한다. 뉴톤역학의 진리성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뉴톤의 역학이론을 완전무결한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신명처럼 떠받들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19세기 말엽에는 일련의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실험사실들이 뉴톤의 고전역학이론에 도전을 제기하였으며 뉴톤역학으로써는 해석할 수 없는 난제들이 나타났다. 그때 사상적으로 비교적 경화된 일부 오랜 과학자들은 뉴톤역학체계를 얼마간 수정, 보충함으로써 뉴톤역학의 절대적 권위를 수호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는 할 수 없었다. 반가운 일은 과학자들의 대오 가운데서 새로운 인재들이 나타나서 대담하게 뉴톤역학을 회의한 것이다. 일반이 다 알고 있다시피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런 새로운 인재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운 실험사실과 날은 이론과의 모순을 해결하자면 물리학의 이론기초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1905년에 그의 협의적 상대성이론이 세상에 나타났다. 이 이론은 이전에 개변시킬 수 없다고 인정하던 절대적 시공관을 타파하고 상대적 개념으로 상대론적 역학과 상대론적 전동역학을 도출하고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포함한 물질운동의 법칙을 제기함으로써 현대자연과학의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 이것은 중대한 돌파이다.
뉴톤역학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이르는 과정은 진리의 상대성을 제시하였다. 이 과정은 어떠한 과학적 진리나-뉴톤역학처럼 완전한 이론이라 하더라도-모두 그 적용범위가 있어 일체를 망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절정에 이르렀는가? 그렇지 않다! 뉴톤역학만이 많은 난제들에 봉착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뉴톤이 그 무슨 용서받지 못할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존재와 발전의 정상적 현상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은 ≪뉴톤선생이여… 당신이 발견한 길은 당신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유일한 길이었읍니다≫라고 훌륭하게 말하였다. 과학발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어느 과학, 어느 학설이 뉴톤역학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는가? 지금 사람들은 지구중심설을 제기하기만 하면 흔히 그 죄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씌운다. 기실 기원 2세기에 형성된 포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대지가 구형이라는 견해를 긍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태양, 달, 5대행성의 회전운동의 천체체계를 확립하였다. 이 체계는 상대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과학사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천문학의 발전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고 공인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지구중심설을 뒤엎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객관적 법칙을 제시하였지만 그의 태양중심 설도 국한성을 가지고 있는 다. 태양중심설은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학설에서 말한 이른바 우주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항성 천층을 계선으로 한 제한된 우주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어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중심이 없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기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한걸음 추진시켰다. 천체에 대한 브루노의 인식은 극점에 달하였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렇다면 진리의 상대성을 승인하는 것은 이 장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장주의 말, 즉 제각기 다 자기의 시비규준이 있다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칙적인 차이가 있다. 위에서 말한 사실들은 인간의 인식이 상대적진리를 통하여 절대적 진리에로 무한히 접근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른바 ≪제각기 다 자기의 시비규준이 있다≫는 이 논단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이 논단은 진리의 상대성만 말하고 진리의 객관성과 절대성은 말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진리의 상대성을 구실로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였다. 이것은 상대주의적 사상의 일종이다. 상대주의는 불가지론을 초래하며 주관적 진리론을 초래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론은 진리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승인하는 전제 하에서 진리의 상대성을 승인한다. 우리는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여 진리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사실도 바로 이러하다. 아인슈타인은 뉴톤역학을 추진시켰지만 뉴톤역학을 근본적으로 뒤엎지 않고 단지 뉴톤역학이론체계의 범위를 한정하였을 뿐이다. 뉴톤역학은 그 적용범위 내의 물질운동의 객관적 내용을 반영하였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진리성이 절대적인 것이다. 레닌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론과 상대주의와의 원칙적 구별에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의심할 바 없이 상대주의를 포함하고 있으나 상대주의에 귀착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이 진리에 접근하여 가는 한계가 역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인정하는 것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레닌선집≫, 제2권, 172쪽)
이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우리는,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객관적 내용을 반영한 것이며 말살하여서는 안되므로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모든 진리는 또 모두 일정한 범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진리의 절대성과 상대성은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절대성은 상대성 가운데 있으며 상대성 가운데 절대성이 있다. 인식은 언제나 상대적 진리로부터 절대적 진리에로 끊임없이 발전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절대주의도 반대하여야 하고 상대주의도 반대하여야 한다
진리의 절대성과 상대성과의 변증법적 관계는 그리 심오한 도리가 없지만 양자의 관계를 잘 파악하자면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철학사의 견지에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의 연관을 이러저러하게 갈라놓고 진리의 절대성만 승인하여 절대주의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 진리의 상대성만 승인하여 상대주의의 오류를 범하였다. 현실생활에서도 우리가 사람들의 사상방법을 세심히 고찰해보면 흔히 이 두가지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절대주의의 오류는 진리의 절대성을 진리의 유일한 특성으로 과장하는데서 표현된다. 19세기에 독일의 듀링은 일련의 황설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였다. 엥겔스의 명저 ≪반듀링론≫은 바로 그에 대한 비판이다. 듀링은 진리문제에서 절대주의자였다. 그는 자기의 이러저러한 이론을 최후의 종국적인 진리라고 말하였다. 듀링의 이론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데 대하여는 잠시 불문하고 그의 이러저러한 논단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최후의 종국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엥겔스는 듀링의 절대주의의 오류에 비추어 진리의 절대성과 상대성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분석하였으며 개인의 인식의 국한성을 치중하여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인식에는 개선하여야 할 요소가 예외없이 언제나 개선할 필요가 없는 요소 또는 정확한 요소보다 훨씬 더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가능성으로 보아 아직 인류역사의 거의 초기에 처하고 있어서 우리의 오류를 시정하게 된 후대의 수는 우리가 늘 극히 경멸하면서 그 인식의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전대의 수보다는 아마 휠씬 더 많을 것이다.≫(≪반듀링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125쪽)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노작 ≪반듀링론≫은 진리의 절대성과 상대성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심각하게 천명함으로써 각성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종결짓지 않고 진리의 발전을 위하여 길을 개척한데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레닌이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학설을 발전시켰고 모택동동지가 집체의 경험과 지혜를 집중하여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이 학설을 풍부히 하고 보충하고 발전시킨 사실도 이 점을 증명하여 준다. 임표따위들이 선양한 절정론과 4인무리가 말한 ≪기정방침대로 하여야 한다.≫는 것들은 모두 이런 절대주의의 물건짝들이다. 이런 것들이 중국인민에게 들씌운 재난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4인무리를 짓부신 후에 나타난 두 개 무릇이란 관점도 사상면에서 말하면 이런 절대주의의 표현이다. 오류에 대하여는 물론 시정하여야 한다. 정확한 이론에 대하여도 그것을 절대화하여 발전의 활력을 압살해서는 안된다. 오늘 취득한
우리의 성과는 바로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 이래에 우리가 두개 무룻이란 관점을 타파하고 사상을 해방하고 계속 전진한 결과이다.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의 노선, 방침, 정책은 우리 나라 현단계의 경제, 정치의 객관적 요구를 반영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모든 객관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의 노선, 방침, 정책도 실천의 발전과 함께 발전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경화된 종교교의가 아니다. 그것은 생기발랄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본성은 시대가 제기한 새로운 문제에 대답을 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
상대주의는 다른 한 극단의 오류이다. 상대주의는 진리의 상대성을 과장하면서 상대적 진리 속에 절대적 성분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에 러시아노동자당 내부의 일부 사람들은 상대주의자로 자칭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분리시켰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승인한다면 진리의 절대성을 승인해서는 안되며 승인한다면 그것은 절충주의라고 인정하였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란 노작에서 이런 상대주의의 오류를 심각히 비판하였으며 상대주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관념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가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은 상대주의와 변증법이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비슷한 점들이 있다는 그것이다. 변증법도 발전을 강조하고 상대주의도 발전을 강조하며 변증법도 경화를 반대하고 상대주의도 경화를 반대한다. 상대주의자들은 흔히 변증법의 깃발을 들고 시비를 혼동한다. 기실 진리의 상대성과 절대성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장악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하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를 대하는 태도면에서 변증론자와 상대주의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를 죽은 교조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하며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 개별적인 원리와 결론도 개변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와 동시에 변증법은 또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적 진리이며 그 기본원리와 기본원칙은 시대지한 것이 아니므로 견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인정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진리의 보물고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렇지 않으면 그것은 현시대에 용솟음쳐 나온 새로운 문제들을 옳게 해결할 수 없다. 상대주의자들의 결론은 이와 정반대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쓸모없는 것으로 되었다고 인정하며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가 객관적 진리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취소한다는 대명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명석한 두뇌를 가져야 하며 상대주의자들의 올가미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절정론이란 관점과 두개 무릇이란 관점을 반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택동동지의 옳은 이론관점과 모택동사상은 반드시 견지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된다.
사정은 바로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이론의 길을 따라 걸어나가면 우리는 더욱 더 객관적 진리로 가까이 가게 되지만(결코 그것을 다 구명해낼 수는 없으나) 다른 어떠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우리는 혼란과 오류 이외에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레닌선집≫, 제2권,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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