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碑銘
어린 시절 담임선생님이 낙서한 학생을 엄하게 꾸지람하시던 모습이 가끔 머리에 떠오른다.
지난날 낙서행위는 학생들의 생활지도 가운데서 꽤 비중 있게 다뤄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성격은 다르지만 낙서(落書)가 문학의 장르로까지 격상이 된 듯하다. 낙서문학이니 낙서작가니 하는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단행본까지 나와서 즐거운 읽을거리를 제공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낙서(落書)와 함께 낙서(樂書)라는 낱말도 곧잘 쓰는데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낙서문학(落書文學)이나 낙서작가(落書作家)의 경우도 이제는 낙서문학(樂書文學), 낙서작가(樂書作家)로 바꾸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집안의 조카 가운데 낙서작가가 한 사람 있어서 모 주간지에 자주 투고를 한다. 몇 차례인가는 나의 이름을 거론했는데. 한 번은나의 직장에다 직급까지 적어 넣었기 때문에 조카 덕분에 이 아재비가 낙서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해학과 재치에 재미를 붙여서 가끔 내가 잡지의 낙서란을 즐겨 읽지만 그렇다고 직접 낙서 한 토막 투고해 본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도 그 흔한 담벼락이나 화장실의 벽에도 작대기하나 그어 본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의 선생님의 지도가 꽤 효력이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자백을 한다면 낙서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일로서 자유당 시절에 어떤 국회의원에게 무기명으로 글을 한 장 띄운 일이라고나 할까.지금은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나 글의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호되게 질책하는 문구를 써 보냈던 일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선량 양반이 매우 오만한 발언을 했던 것 같은데 유권자로서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찜찜하게 느껴진다. 소생이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자제를 못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감정이 격해 있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흰 벽은 바보의 종이(A White wall is a fool's paper)'라는 영어의 익살스러운 표현이나 ‘벽에다 장난스럽게 쓰는 글씨’ 라는 어떤 사전의 풀이에서도 짐작이 가듯이 낙서는 대개 벽에다 갈겨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도 은밀한 화장실의 벽이 가장 만만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육신의 배설작업과 함께 정신의 배설을 위해서도 화장실은 필요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특히 대중의 화장실에는 잡다한 낙서와 함께 가끔 '좁은 방의 예술가' 를 자처하는 꼴불견인 그림 낙서들도 자주 눈에 뜨인다. 글씨가 낙서(落書)라면 그림은 낙화(落畵)라고 해야 옳을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타일로 치장한 화장실이 흔해졌지만 지난날의 학교의 화장실은 대개 판자나 백회 등으로 벽을 발라서 주말의 대청소 때는 낙서를 지우느라고 긁고 문지르며 법석을 떨던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낙서의 내용이 반드시 저속한 글이나 그림만은 아니며 때로는 익명의 투서 구실을 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은 것 같다.화장실의 낙서에도 투서(投書)라는 말이 해당이 된다면 지금 나의 뇌리에는 두 건의 투서사건이 꼬리를 문다. 냄새 나는 장소를 자주 들먹여서 빈축을 살는지도 모르지만 두 건이 다 학교의 화장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하나는 내가 고등학교 교사시절인데 어떤 학생이 화장실의 벽에다 교장을 도둑으로 몬 매우 불경스러운 사건이었다. ‘ㅇㅇㅇ교장 도둑놈’ 이라는 여덟 글자가 순 한글로 적혀 있었는데, 교장의 이름의 첫 자인 '중'을 '종'으로 잘못 적은 것이 색출의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교장이 격노해서 범인(?)의 색출을 엄명했기 때문에 교무실 안은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떤 교사의 제의로 교장의 이름이 들어간 문장을 하나 지어서 전 교생에게 받아쓰기를 시키기로 했다. 이번에는 '바보의 종이' 인 흰 벽 대신 시험용지로 쓰는 갱지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성적에 반영되는 중대한 시험을 치는 체하면서 문장을 불러 주었는데 교장의 이름은 '중' 인지 '종' 인지 분간이 안 가도록 어물어물 넘기기로 했던 것이다.
과연 한 학생이 이 꾀에 넘어갔다. 필적을 대조해 본 결과 낙서의 장본인과 동일인이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학창시절에 수업시간에 들은 ‘도둑을 잡고 보니 제 자식’이라는 익살스러운 구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번 낙서의 피의자는 도둑은 아니지만 잡고 보니 하필 교장의 친구의 자제였으며, 또한 내가 3년째나 담임을 맡고 있는 제자였던 것이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얌전한 학생이었는데 '짖지 않는 개가 더 무섭다'는 속담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그날 방과 후 텅 빈 교실의 한 구석에서 스승과 제자는 착잡한 대좌를 했다. 다정한 사제지간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냉랭한 취조관과 피의자의 관계로 전락된 느낌이었다. 신문(?)을 시작하자 본인이 순순하게 자백을 했다. 동기는 단순히 교장의 지나친 공납금독려에 대한 반발로 밝혀졌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더니 요란한 낙서 속에서 '공납금' 이라는 쥐가 한 마리 튀어나온 격이었다.
그 당시 학교마다 교직원들의 후생비는 대부분 학생들의 공납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조례나 종례시간에는 공납금 독려가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불만의 첫째 대상은 담임교사이어야 하는데 이번의 낙서 사건은 교장이 혼자서 덤터기를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사실 나는 공납금 독려를 하면서 교장을 빙자하거나 책임을 전가한 기억이 없는데 화살이 빗나가고 보니 잠시나마 나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내 이 불경천만의 낙서사건을 다루기 위하여 직원회가 열렸다. 다들 일벌백계(一罰百戒)를 주장했지만, 동기가 단순하고 공납금(公納金)이 마치 공납금(恐納金)이 되다시피 날마다 시달리던 학생들의 정상이 참작이 되어서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반성문과 낙서 지우기를 포함한 일주일간의 화장실 청소가 벌책(罰責)으로 과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행한 일은 이 사건 이후 공납금 독려는 교사의 손에서 완전히 서무과로 떠 넘겨졌다는 사실이다. 교사들에 의한 공납금 독려가 비교육적이며 비합리적이라는 교사들의 강한 주장이 반영된 때문이었다. '드러누우면 넘어지는 법이 없다'는 속언처럼 이제는 학생들과 돈타령을 안 하게 되니 서로 낯을 붉힐 일이 없어져서 마음이 홀가분했다.
한동안 전교생의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낙서의 주인공은 지금은 의젓한 신용금고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제는 날마다 채무자를 독려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세상 일이 마치 '중'과'종'을 헷갈리던 교장의 이름만치나 알쏭달쏭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러베아들 소리 듣기 십상인 이런 실속 없는 글을 쓰는 나의기분도 그렇고.
다른 또 하나의 사건은 지금은 성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일제 말기의 어떤 어린 학생에 얽힌 이야기다. 우리 조선 제22부대 학도병들이 용산 헌병대에 구금되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난 때였을까?
어느 날 얼굴이 해맑은 어린 학생이 포승에 묶인 채 우리가 들어 있는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경기도 시흥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알게 된 일이지만 이 어린 학생이 학교의 화장실 벽에 '일본 망하게 미· 영군 빨리 상륙하라'는 대담하고도 강렬한 문구를 적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나 친일족속, 민족 반역자들에게는 기겁을 할 불온낙서인 셈인데 이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닐 것이다. 조국을 빼앗은 큰 도둑을 규탄한 어린 투사의 일종의 항일격문이었다고나 할까? 실지로 그로부터 5개월 뒤에는 연합군이 이 땅에 상륙을 하였으니 어린 소년의 외침은 어김없는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어린 학생도 우리의 경우처럼 동족의 조선인 헌병의 손에 의해서 구속이 되었는지 아니면 앞서의 낙서사건처럼 받아쓰기로 필적 감정을 한 것인지 구금된 경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아는바가 없다. 우리가 구금되었던 검도장은 감시병의 대기실을 겸하고 있어서 잠시도 그들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어린 학생과 직접 귓속말조차도 나눌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다소간의 정보라도 알게 된 것은 감시병들과 어린학생이 주고받는 대담 속에서 자연스럽게 들은 것뿐이다.
군인이나 군속도 아닌 어린 학생이 헌병대에 연행된 경위에 대해서도 알 길은 없었다. 다만 4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의 어린이답지 않은 당당한 태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취조실에서는 배후를 캐는 혹독한 고문도 당했을 터인데 유치장에 돌아와서는 기가 죽는 일이 없었다. 감시병들이 자주 악의에 찬 추궁을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똑바로 고개를 쳐들고 또박또박 대답을 했었다.
지난해에는 해방 40년이 되는 해라서 매스컴에서는 각종 특집을 마련했다. 그 가운데는 뒤늦게나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규탄하는 소리도 높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친일 고관을 소재로 다룬 인기 절정의 TV 대하드라마도 종막을 고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드라마 아닌 현실에서도 각계에서 활동하는 내로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친일분자로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놀라운 일일까 아니면 한심한 일일까?
사람이 한 세상을 살고 가는 것을 한 장의 낙서에 견주는 사람도 있고 또는 막이 내리기까지의 한마당의 연기활동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댈 탓이겠지만, 그 밖에도 고해를 헤쳐 나가는 뱃사공 등등, 너무도 진부한 비유가 많은데 어쩌면 살고 가는 그대로의 모습을 '무형(無形)의 비명(碑銘)' 인양 사람마다의 가슴속에 새겨 놓고 떠나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아름답게도 또는 추악하게도.
그 어린 학생은 며칠 뒤에 헌병대에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그 뒤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그동안 신상에 어떤 이변 없었다면 지금은 50 고개를 넘어선 지긋한 나이에 접어들었을 터인데 나의 머릿속에는 언제까지나 그의 해맑은 앳된 모습이 고운 무지개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무지개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꽃답다고나할까? 어린 투사의 '아름다운 비명(碑銘)'이 나의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진 때문인지도 모른다.(韓國文學, 1986.2.)